대웅전
서울시 지방유형문화재 제127호
대웅전을 글자 그대로 해석한다면 큰 영웅이 계신 곳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모든 것에 있어서 걸림이 없는 분, 대자유인, 스스로를 극복하고 능히 자유자재로 조절할 수 있는 분, 하늘과 땅, 모든 존재로부터 마땅히 존경받는 분을 모신 곳 즉, 석가모니부처님을 모신 전각이라는 뜻입니다. 조계사의 경우처럼 좌우에 아미타부처님과 약사여래부처님이 봉안되어 있는 경우에는 대웅전이라는 명칭보다 더 격이 높은 대웅보전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하지만 조계사는 창건 당시부터 석가모니부처님 한 분을 모셨기 때문에 대웅전이라고 불러져, 2006년 삼존불(석가모니부처님을 중심으로 좌측에는 아미타부처님, 우측에는 약사여래부처님)을 모신 이후에도 이전에 부르던 명칭을 그대로 따르고 있습니다.
대웅전 편액(현판)
조계사 대웅전 편액은 전남 구례 화엄사에 있는 대웅전 편액을 탁본하여 조각한 것을 대웅전 낙성 당시에 단 것입니다. 글씨는 조선 시대 선조대왕의 여덟 번째 아들인 의창군 이광(1589~1645)의 것입니다.
대웅전 삼존불
석가모니부처님을 가운데 모신 이유는 불교의 근본 가르침이기도 한 깨달음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대웅전의 부처님은 오른 손을 풀어 오른쪽 무릎 위에 얹고 손가락을 끝을 가볍게 땅에 댄 형태를 하고 있고, 왼손은 손바닥을 위로해서 배꼽 앞에 놓은 형태입니다. 이는 각각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과 선정인(禪定印)(조계사 대웅전의 석가모니부처님의 수인은 항마촉지인입니다)을 표현한 것입니다. 이런 수인은 주로 석가모니부처님을 표현할 때만 나타나는 형식으로써 일체 모든 삿된 것을 굴복시키고 선정에 들어간다는 뜻의 표현으로 부처님의 지혜와 공덕을 표현한 것입니다. 서있는 곳에서 중앙에 계신 석가모니부처님을 바라볼 때 석가모니부처님의 우측에는 약사여래부처님이 모셔져 있습니다. 약사여래부처님은 지금 당장 고통을 받는 병자나 가난한 사람에게 자비를 베푸는 부처님입니다. 일반적으로 손에 약합이나 약병을 들고 있는 것을 보고 구별합니다. 또한 좌측에는 아미타부처님이 모셔져 있습니다. 아미타부처님은 조상의 극락왕생 및 내세에 누릴 자신의 행복을 관장하고 계신 부처님입니다. 손 모양을 보면 양손 모두 엄지손가락과 세 번째 손가락을 맞대고 있는데, 이는 극락정토에 왕생하는 아미타부처님의 구품(九品) 가운데 하나로 하루 밤낮 동안만이라도 계율을 지킨 범부는 죽을 때에 부처나 보살의 마중을 받고 왕생하여 반겁(半劫) 뒤에 아라한과를 얻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조계사 삼존불은 각각 17자반(약 5m 20cm) 크기로 2006년 11월 14일 봉불식(부처님을 새로 모시는 의식)을 가졌습니다. 세분 부처님은 현재 단층 규모의 법당에 모셔진 부처님으로서는 국내 최대 크기입니다. 그리고 대웅전에는 불상을 안치하는 수미단을 중심으로 대웅전을 바라보고 오른쪽 벽면에 신중(神衆: 부처님 도량을 옹호하는 호법선신)을 모시는 신중단 그리고 왼쪽에는 영가(靈駕: 돌아가신 분)를 모시는 영단을 두고 있습니다.
목조석가모니부처님 (국가보물지정)
현재 대웅전 삼존불을 바라보고 서 있는 곳에서 우측에 위치하고 있는 목조석가모니부처님은 창건 당시「조계사 대웅전 총본산 건설위원회」에서 논의하여 전라남도 월출산 도갑사의 부처님을 이운하여 모신 것입니다. 창건 당시 모셨던 목조 불상 조성 시기는 조선 초기(1460년대 전후)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특히 조선 초기 불상이나 보살상 중에는 목조로 된 것이 현재까지 남아 있는 경우가 아주 드물기 때문에 신앙적으로 뿐만 아니라 학술적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이 목조 불상은 조계사 창건 당시부터 대웅전의 주불로 모셔졌으나 대웅전 크기에 비해 불상이 지나치게 작다는 사부대중의 뜻에 따라 새로 삼존불을 모시게 되었습니다. 목조 불상은 향후 따로 영산전을 신축하여 그곳에 주불로 모실 수 있도록 계획하고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