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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덕사지 흥덕사지 출토유물 - 흥덕사 금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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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 작성일
- 2024-07-21
흥덕사지 출토유물 - 흥덕사 금구- 작성자
- 두레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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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7-21
"갑인오월 일서원부흥덕사금구일좌(甲寅五月 日西原府興德寺禁口壹坐)라는 명문(銘文)이 있는 청동금구편은 흥덕사지의 훼손된 부분에서 수습된 것으로 불에 타서 파손되고 일그러진 일부에 지나지 않으나 흥덕사지의 명칭을 알려주는 명기(銘記)가 있어 귀중한 유물이다.
현재 상태로는 금구의 전면과 후면이 불분명하나, 한쪽 면에는 당초문(唐草紋)이 양각되어 있고 다른 한쪽 면에는 연화문(蓮花紋)이 양각되어 있다. 명문이 양각된 측면에는 중앙에 3조의 융기선을 쳐서 좌우로 나누었으며 그 선 위로는 고리가 달려 있다.
고리 밑으로부터 시작되는 양각문은 자경 2cm의 정자체로 썼으며, 현재 15字만이 남아 있으나 그 아래로 시주한 사람의 이름 등이 더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시대의 양식을 잘 따른 연화문과 당초문 등의 문양이나 <서원부>라는 지명 등으로 볼 때, 금구의 제작연대에 해당되는 <갑인년>은 고려 광종 5(954)년으로 추정되고 있다. 금구의 크기는 현재 길이 36cm, 측면너비 11cm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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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덕사지 흥덕사지 출토유물 - 계향사지 와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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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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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7-21
흥덕사지 출토유물 - 계향사지 와편- 작성자
- 두레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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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7-21
"계향지사(桂香之寺)"라는 명문이 있는 기와조각(瓦片)이다. 어골문(魚骨紋)이 새겨진 평와(平瓦)의 문양 하단에 양각선(陽刻線)으로 세로가 긴 장방형의 구획을 정하고 좌종서(左從書)의 4자 2열로 양각되어 있다.
현재 이 기와조각에는 좌우로 나란히 <계향지사>라는 명문 4구획이 나타나고 있는데 자경은 약 2.5cm이며 정서체에 가깝다. 기와의 질은 회색의 대토에 잔모래가 많이 섞여있어 정선되지 못한 편이며 뒷면에는 삼베자국이 남아있다.
서회랑지 중간부의 바닥에서 출토되었는데 이와 동일한 명문이 있는 기와가 우암산의 관음사에서도 출토된 바 있어, 이에 대한 해석은 앞으로 우암산지역을 포함한 청주시 일원의 정밀조사가 이루어져야 확실해질 것이다. 기와조각 왼쪽에는 손으로 누른 흔적이 있는데 손가락모양이 뚜렷하며 지문까지 나타나 있다.
이 기와는 통일신라시대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크기는 현재 길이 18cm, 너비 17cm, 두께 2.2cm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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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덕사지 흥덕사지 출토유물 - 대중삼년 와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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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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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7-21
흥덕사지 출토유물 - 대중삼년 와편- 작성자
- 두레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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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7-21
대중삼년(大中三年)이라는 명문이 있는 기와조각(瓦片)이다. 상·하단에 어골문이 시문(施紋)된 평와의 중간부에 장방형의 구획을 정하고 좌종서(左從書)로 명문이 양각되어 있다. '대중'은 당 선종의 연호로 대중 3년은 서기 849년에 해당되며, 신라 문성왕 11년이다.
"사지의 시대를 알려주는 귀중한 자료인데 서회랑지의 고막이 벽에 끼어있던 사실로 미루어 초창 당시에 쓰였던 기와임에 틀림없으며, 후대에 중창되면서 다른 석재들과 함께 끼어 들어간 것으로 생각된다.
대토는 회색으로 모래가 많이 섞여 있고 두께가 얇은 편이며 뒷면에 빗질한 흔적이 있다. 이 기와는 통일신라시대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크기는 현재 길이 23.5cm, 너비 18.3cm, 두께 1.5cm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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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덕사지 흥덕사지 출토유물 - 석경판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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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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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7-21
흥덕사지 출토유물 - 석경판편- 작성자
- 두레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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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7-21
석경(石經) 판편(版片)은 검은 점토암의 석판(石版)에 한 면을 고르게 다듬질하고 음각의 선으로 구획을 나누고 각 구획마다 천인상(天人象) 등을 선각(線刻)한 것이다.많은 조각으로 분리되어 유실되고 3조각만이 금당지에서 발견되었다.
구름에 올라서 있는 천인상은 바람에 나부끼는 천의(天衣)자락이 가는 선으로 새겨져 유려한 모습이나, 머리부분이 없어져 원상을 파악하기에는 힘들다. 뒷면은 편편하나 앞면에 비하면 소홀한 편이고 하단은 모나지 않도록 깎아서 V자형을 이루고 있다.
이 석경판은 고려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크기는 현재 길이 18.5cm, 너비 16.5cm, 두께 1.6cm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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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덕사지 흥덕사지 출토유물 - 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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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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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7-21
흥덕사지 출토유물 - 치미- 작성자
- 두레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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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7-21
치미는 금당지 북편에서 거의 일괄 출토되었는데 금당이 소실되면서 떨어진 자리에 지금까지 별 이동이 없이 묻혀 있었던 듯하다.
전체의 높이는 1.5m 이상일 것으로 추정되어 이 사찰건물의 웅장한 모습을 잘 나타내주는 것이다. 짙은 회색의 정선된 대토이며, 단면의 붉은 색조로 보아 상당히 고온에서 구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한쪽 면이 많이 파손되기는 했으나 추정하여 복원할 수 있는 상태이다.
용마루 끝의 적새와 접하는 부분은 거의 잔존하고 있으나 깃 부분의 파손이 심하다. 등 부분은 언강부가 구비된 미구기와와 같은 형태를 갖추고 있다. 깃과 등의 많은 부분을 복원한 결과 상부와 하부를 따로 만들어 결합시켰음을 알 수 있었다. 배 부분에는 2조의 덧붙임 융지선을 두어 측면과 등을 구분하고 있으며 등과 측면에 모두 파상문(波狀紋)을 음각하였다.
반원형의 깃 부분은 층단형을 이루고 있으며 각 단마다 어골문이 새겨져 있다. 이 치미는 고려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크기는 현재 높이 약 150cm, 측면너비 약 100cm, 폭 58cm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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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덕사지 흥덕사지 출토유물 - 귀면와당 조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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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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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7-21
흥덕사지 출토유물 - 귀면와당 조각- 작성자
- 두레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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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7-21
귀면와당(鬼面瓦當)은 금당지 북서편 기단부(基壇部)에서 출토된 것으로 전체적으로 회색을 띠고 있으며 마멸된 부분에는 약간씩 검은색이 보인다. 대토는 흥덕사지에서 출토된 와당 가운데 가장 정선된 것으로 모래가 거의 섞이지 않았다.
현재 주연부(周緣部)는 모두 없어졌으나 다른 귀면와편(鬼面瓦片)에서 살펴보면 높은 주연부에 굵은 연주문(連珠紋)이 조출되었다. 귀면의 눈썹과 동그란 눈은 툭 튀어 나왔고 이마에는 머리털이 2-3가닥 양옆으로 흘러내려져 있으며, 앞면의 절반을 차지한 입에는 이빨과 혀가 비교적 작게 표현되어 있다.
턱밑에 나타난 수염은 곡선적(曲線的)이며 양 볼에서는 당초문과 비슷한 형상을 하였다. 이 기와는 고려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크기는 현재 직경 13cm, 두께 2.8cm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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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덕사지 흥덕사지 출토유물 - 기타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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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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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7-21
흥덕사지 출토유물 - 기타유물- 작성자
- 두레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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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7-21
기타의 유물로는 연화문과 귀목문(鬼目紋) 등이 있는 숫막새편과 당초문과 귀목문 등이 있는 암막새편을 비롯하여 통일신라 또는 고려시대의 토기와 청자편(靑瓷片) 등이 다수 수습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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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덕사지 흥덕사지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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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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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7-21
흥덕사지 설명- 작성자
- 두레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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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7-21
금당지
발굴 당시 금당지의 동쪽 끝과 남쪽 끝은 파괴되어 그 원형을 알 수 없었으나, 북면과 서면이 잘 남아있어 이를 토대로 건물의 형태를 복원할 수 있었다. 금당지는 정면 5칸, 측면 3칸의 건물지로 측면의 중앙킨은 다른 칸보다 넓은 편이다.
기단(基壇)은 원토층이 석비래층 위에 약 117 30 15cm, 37 29 11cm 크기의 화강석을 다듬어 지대석을 놓고 그 위에 65 67 17cm의 면석(面石)을 놓았음이 확인되었으며, 그 위에 갑석(甲石)을 올려놓은 가구식기단(架構式基壇)으로 추정된다.
주초석(柱礎石)은 굴곡이 심한 부식암반층(腐蝕巖盤層)을 정지(整地)하고 낮은 부분은 진흙다짐을 한 후 주먹 크기의 자갈돌로 적심(積心)을 하고 그 위에 자리잡고 있다. 또한 금당지 건물의 가장 큰 특징은 외곽의 주초(柱礎)는 2단으로 양각된 원형주초를 사용하였고 내부는 모두 방형주초를 사용하였다는 점이다.
북면의 중앙에 계단석이 남아있으며 계단 양측에 작은 맷돌을 세웠던 홈이 마련되어 있고 작은 맷돌의 잔편이 금당지 서쪽에서 1개 출토되어 모양이 잘 갖추어진 계단으로 추정되는데 남면에도 있었음이 확실시되나 발굴 전에 이미 파괴되었던 듯하다.
금당지의 기단석 밖으로 석렬을 쌓아 기단 형식의 건물구를 만들었는데, 이는 후에 보수한 건물이라기보다는 건물을 초창할 때의 기단유적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금당의 서북편에는 불에 탄 흔적이 남아있고 토층으로 볼 때에도 불을 먹은 층임이 역력히 나타나고 있어 금당은 화재로 인하여 소실되었음이 확실한 것이다.
강당지
금당지에서 북쪽으로 14.5m 떨어져 있는 곳에 화강석으로 잘 치석(治石)된 기단석렬(基壇石列)이 5.6m 정도 나타나고 있는데 이 곳이 바로 강당지의 남쪽면에 해당된다.
강당지는 현재 남쪽 기단석렬과 적심석(積心石) 일부만 남아있어 강당건물의 규모와 구조는 알 수 없고 금당지와 남북으로 일직선상에 건축된 초창 당시의 유적임이 확실하다.
고려시대에 중창될 때 강당지는 다시 건축되지 않았으며 서편으로는 상당부분의 다른 건물지가 중복되어 나타나고 있어 현재의 강당지유구는 신라시대의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기단석은 석비례층 위에 바로 올려놓았는데 지반이 낮거나 기단석의 두께가 얇은 부분은 쐐기돌을 박아 수평을 유지시켰다. 기단석렬 위에 60x33x10cm의 면석 1개가 남아있어 강당지 역시 금당지와 마찬가지로 지대석, 면석, 갑석을 사용한 가구식기단으로 생토층(生土層) 위에 바로 지대석을 놓은 양식과 함께 신라시대의 통상적인 양식이다.
적심은 현재 앞 열에 3기와 중간 열에 1기가 남아있다. 북쪽의 뒤 열은 지표면이 후대의 경작 등으로 낮아져서 유실되었다. 강당의 건물구조는 대략 정면 3칸에 측면 2칸이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서회랑지
금당지에서 서쪽으로 1.4m 지점에 서회랑지의 동면기단축대가 나타나있어 서회랑지는 금당지와 매우 인접해 있는 편이다.
남북의 길이는 45m, 동서폭대(東西幅臺)는 5m인데 회랑지는 직선형으로 길게 이어져 정면 13칸, 측면은 1칸을 이루고 있다. 이 서회랑지는 초석과 기단 및 고막이 등의 상태로 보아 3구역으로 나눌 수 있는데, 금당지 앞뜰의 서편인 회랑의 남쪽부분(Ⅰ구역)과 금당 서편과 인접한 중간부분(Ⅱ구역)과 그 북부지역(Ⅲ구역)에 약간의 차이가 보인다.
즉, Ⅰ구역의 4칸은 특별한 시설이 없으나 Ⅱ구역의 6칸은 금당과 통하는 문지(門址)와 같은 시설이 보이고 있고 Ⅲ구역의 3칸은 기단 폭이 넓어져 있다. 또한, 고막이의 형태로 보아 회랑지는 각 구역마다 특별한 시설이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토층으로 볼 때 역시 2-3회의 중수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건물지
강당지 서편에 있는 작은 건물지는 정면과 측면이 모두 2칸씩이며, 바닥에는 전(塼)을 깔았다. 강당지의 서편에 있으면서 강당지와 3중으로 겹쳐져 있는 것으로 보아 후대의 건물임이 분명하며, 이 일대에서 출토된 와당의 문양도 금당지나 회랑지의 유물들과 확연히 구별되어 흥덕사지의 마지막 건물지였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형태의 건물지가 강당지 동편에도 있었는지의 여부는 알 수 없는데, 그것은 택지조성사업에 의한 훼손으로 말미암아 건물지의 성격을 규명해내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다른 건물지와 달리 바닥에 전(塼)을 깔고 있어서 특별한 용도의 작은 건물지임이 분명한 곳이다.
따라서, 「직지」와 「자비도량참법집해」의 간행에 사용된 금속활자와 인출도구 등의 인쇄관련 공방이었거나 기타의 경판(經版)을 보관했던 경판각(經版閣)이 아니었을까 추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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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덕사지 흥덕사지 발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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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 작성일
- 2024-07-21
흥덕사지 발굴- 작성자
- 두레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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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7-21
1985년 “서원부 흥덕사(書原府 興悳寺)”라고 새겨진 쇠북(금구)과 “황통 10년 흥덕사(皇統十年 興悳寺)”라고 새겨진 큰 그릇 뚜껑(불발) 을 땅속에서 찾아내어 이곳이 <백운화상초록직지심체요절>권하 말미에 씌어있는 청주목의 흥덕사 절터임이 확인되었다. 청주 흥덕사지는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 발상지로 1986년 5월 7일 사적 제 315호로 지정되었고 청주시에서는 1987년부터 5개년에 걸쳐 절터를 복원 정비하고 청주고인쇄박물관을 세웠다.
흥덕사지 발굴의 시작
대한민국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운천동 양병산 기슭에 위치하고 있는 흥덕사는 일찍이 1377(고려 우왕 3)년에 현존하는 세계 최고(最古)의 금속활자본이며 세계기록유산인 「직지」를 비롯하여 「자비도량참법집해」 등을 금속활자로 간행해낸 우리나라 금속활자 인쇄술의 중흥처이다.
청주시 운천동 일대는 일찍이 신라말기부터 불교문화를 꽃피웠을 것으로 추정되는 많은 유물들이 발견되고 옛 사지(寺址)도 있었으나 문헌에 나타나지 않아 지표조사조차 제대로 실시되지 못했다.
그러다가 1984년 12월부터 한국토지공사가 운천지구 택지개발사업을 시작하면서 청주대학교 박물관이 운천동사지 발굴조사를 진행, 운천동사지 서남쪽으로 그리 멀지 않은 연당리 가강골 마을 515-1번지의 민묘 주변에 화강암으로 잘 다듬은 원형과 방형의 초석 3기와 고려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치미편(치치 尾片) 및 연화문(蓮花紋) 또는 당초문(唐草紋)이 새겨진 와편(瓦片)을 수습하는 등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새로운 옛 절터를 찾아냈다.
이후 1985년 10월에 사지의 동쪽에서 <갑인오월일서원부흥덕사금구일좌(甲寅五月日西原府興德寺禁口臺座)>라는 명문이 있는 청동금구(靑銅禁口)와 청동불기(靑銅佛器) 등이 출토되어 이 사지가 바로 고려 우왕 3(1377)년에 현존하는 세계 최고(最古)의 금속활자본이며 세계기록유산인 「직지」와 그 시기를 전후하여 「자비도량참법집해」를 인쇄한 흥덕사지(興德寺址)임이 밝혀지게 되었다.
이에따라 문화공보부는 흥덕사지 일원에 대한 개발중지 및 보존지시를 내리고 1986년 문화재위원회의 결의를 걸쳐 흥덕사지 10,711평을 사적(史蹟) 제315호로 지정공고 했다.
흥덕사의 배치는 남향의 단탑(單塔) 가람으로서 중심축 선상에 중문·탑·금당·강당이 있고, 이들 좌우로 동·서회랑이 돌려진 삼국시대 이래의 전통양식을 따랐으며, 각 건물들은 후대에 중수를 거듭하면서 약간씩의 변화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었다.
그 뒤, 1987년부터 1991년까지 정면 5칸, 측면 3칸 겹처마 팔각지붕의 금당과 3층 석탑을 복원하고 회랑지와 강당지는 주춧돌이 노출되도록 잔디를 심어 정비를 하였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 직지발굴의 동기
흥덕사지(興德寺址)는 청주시 운천동(雲泉洞) 양병산(養兵山) 동남쪽 기슭에 위치하고 있다.
청주시 운천동 일대는 일찍이 신라말기부터 불교문화를 꽃피웠을 것으로 추정되는 많은 유물들이 발견되고 옛 사지(寺址)도 있었으나, 문헌에 나타나지 않아 지표조사조차 제대로 실시된 적이 없었다.
그러다가 1984년 12월부터 한국토지공사(韓國土地公社)가 <운천지구택지개발사업(雲泉地區宅地開發事業)>을 시작하게 되자 충청북도에서는 개발사업에 앞서 불교유물의 출토 등으로 알려져 있던 운천동사지에 관한 발굴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그 해 11월부터 청주대학교박물관에 의뢰하여 <운천동사지발굴조사>를 진행하였다.
당시 발굴조사단의 조사원으로서 현장의 실무를 맡았던 박상일(朴相佾) 연구원이 주변의 유적지에 관한 관심을 갖고 틈틈이 조사를 하던 중, 운천동사지 서남쪽으로 그리 멀지 않은 연당리(蓮塘里) 가강골 마을 515-1번지의 민묘 주변에 화강암으로 잘 다듬은 원형과 방형의 초석 3기와 고려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치미편 및 연화문(蓮花紋) 또는 당초문(唐草紋)이 새겨진 와편(瓦片)을 수습하는 등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새로운 옛 절터를 찾아냈다.
그 후 그는 여러 차례의 현지조사와 평판측량을 실시하여 간단한 조사보고서를 작성하여 충청북도에 제출함과 아울러 이 지역이 <운천지구택지개발사업> 구역에 포함되어 있었으므로 적절한 보존조치와 발굴조사의 필요성을 제기하였다.
1985년 1월 충청북도에서 한국토지공사 충북지사에 이 사지의 보존을 위해 사지 일대의 공사중지를 요청하였으나, 한국토지공사 충북지사는 공사를 계속하여 이 사지의 중심에 해당하는 금당지(金堂址)의 유구(遺構)가 있는 곳까지 흙을 반출하여 택지를 조성함으로써, 사지의 원상을 크게 훼손시켜 유구가 파손되었을 뿐 아니라 유물들이 유실되고 말았다.
한편, 충청북도 문화재위원회에서는 1985년 3월 이 사지에 대한 긴급발굴을 결의하였고, 그 해 6월에 청주대학교박물관이 이 일명사지(逸名寺址)의 이름을 옛 지명을 따서 '연당리사지'라 명명하고 충청북도에 발굴조사계획서를 제출하였다. 충청북도에서는 7월 문화재관리국으로부터 발굴허가를 받아 7월부터 10월까지 청주대학교박물관에서 훼손되지 않고 잔존한 서반부의 지역을 대상으로 전면 발굴조사를 하도록 하였다.
발굴조사가 진행되고 있는 동안 사지에서 반출된 흙으로 조성된 택지에서는 청동소종(靑銅小鐘), 청동금강저(靑銅金剛杵), 청동금구(靑銅禁口) 등을 비롯한 불기(佛器) 25점을 수습하게 되었다. 발굴조사는 사지의 유구를 조사하여 사찰의 원상을 밝히는 것은 물론 출토유물을 통하여 잃어버린 사찰의 이름과 역사를 찾는데 목적이 있었으므로 유물조사에 심혈을 기울였다.
사지의 발굴 결과 이곳에 있었던 사찰은 대략 9세기에 창건되어 14세기말 또는 15세기 초까지 존속하였으며, 화재로 인하여 소실된 후 완전히 폐사(廢寺)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사지의 동반부가 이미 파괴된 상태에서 발굴조사가 실시되었기 때문에 발굴결과 확인된 유구는 동남쪽 일부가 손상된 금당지, 그리고 원상이 비교적 잘 남아있는 서회랑지(西回廊址)와 회랑지 끝에 붙은 박전건물지(薄塼建物址) 등 주로 전체 사역권(寺域圈)의 서북반부 지역이었다. 그러나 사지의 성격상 좌우 대칭으로 건물배치를 하였을 것으로 추정되었다.
그러다가 발굴조사를 거의 끝내고 주변을 정리하던 1985년 10월에 택지공사로 훼손된 사지의 동쪽에서 <갑인오월일서원부흥덕사금구일좌(甲寅五月日西原府興德寺禁口臺座)>라는 명문이 있는 청동금구(靑銅禁口)와 청동불기(靑銅佛器) 등이 출토되어, 이 사지가 바로 고려 우왕 3(1377)년에 현존하는 세계 최고(最古)의 금속활자본이며 세계기록유산인 「직지」와 그 시기를 전후하여 「자비도량참법집해」를 인쇄한 흥덕사지(興德寺址)임이 밝혀지게 되었다.
흥덕사지를 확인한 발굴조사단은 곧바로 1985년 10월 10일 관계당국에 흥덕사지 확인에 따른 사지의 보존조치를 요청하는 공문을 발송하자 문화공보부에서는 흥덕사지 일원에 대한 개발중지 및 보존지시를 내리고 문화재위원을 파견하여 사지와 유물을 조사하였다.
그 결과 10월 30일에는 흥덕사지 주변 4,598평이 사적지로 가지정되는 보호조치가 취해지고, 1986년 4월에 문화재위원회의 결의를 걸쳐 5월 7일에 흥덕사지 10,711평이 사적(史蹟) 제315호로 지정공고 되었다.
흥덕사지가 사적지로 지정되는 동안 일부에서는 <흥덕사>라는 명문이 있는 금구편 하나로 흥덕사지로 단정할 수 있느냐는 문제를 제기하기도 하였고, 한편에서는 주자소의 유구나 금속활자의 실물이 발견되기를 기대하였다.
이러한 여론에 따라 충청북도는 흥덕사지의 주변지역에 대한 정밀조사를 청주대학교 박물관에 의뢰하여 1986년 5월 2일부터 18일간 사지에서 반출해간 흙으로 조성한 택지지역을 금속탐지기까지 동원하여 정밀조사를 하였다. 금속탐지기를 이용한 정밀조사를 통하여 주자소나 금속활자를 찾는데는 실패하였으나 몇 가지 성과를 얻었는데, 그것은 청동소종(靑銅小鐘)과 '흥덕사'라는 명문이 있는 금구편 등 청동유물이 다량 수습되었던 부근에서 청동보당용두(靑銅寶幢龍頭) 2점을 비롯한 불발(佛鉢) 등 여러 점의 청동유물을 발굴해낸 것이었다.
특히 그 가운데 청동불발의 구연부(口緣部) 외측면에는 <황통십년경오사월일흥덕사의지중대사령인왕생정토지원불발일합구급운구입중이근이량인(皇統十年庚年四月 日興德寺依 止重大師領仁往生淨土之愿佛鉢一盒具鈒雲口入 重二斤二兩印>라는 40자의 명문이 음각되어 있어서 흥덕사지를 재확인하는데 결정적인 자료가 되었다.
<황통십년경오(皇統十年庚年)>는 고려 의종 4(1150)년에 해당되어 이 일대에서 함께 출토된 유물들의 연대추정은 물론 흥덕사의 연혁을 밝힐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기도 하다. 흥덕사지를 처음 확인시켜 주었던 <흥덕사>라는 명문이 있는 금구편의 나머지 몸통부분이 1986년 6월에 발견되어 국고에 귀속됨으로써 8개월만에 제 짝을 찾았는데, 그 몸통부분의 측면에 연속된 명문의 전문은 <갑인년월일서원부흥덕사금구일좌개조입중삼십이근인(甲寅年月 日 西原付興德寺禁口臺坐改造入重三拾貳斤印)>이었다.
흥덕사의 배치는 남향의 단탑(單塔) 가람으로서 중심축 선상에 중문·탑·금당·강당이 있고, 이들 좌우로 동·서회랑이 돌려진 삼국시대 이래의 전통양식을 따랐으며, 각 건물들은 후대에 중수를 거듭하면서 약간씩의 변화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었다.
그 뒤, 1987년부터 1991년까지 정면 5칸, 측면 3칸 겹처마 팔각지붕의 금당과 3층 석탑을 복원하고 회랑지와 강당지는 주춧돌이 노출되도록 잔디를 심어 정비를 하였다. 현재 흥덕사지의 남쪽에는 청주고인쇄박물관을 건립하여 우리나라 고인쇄출판문화의 발달사를 익히는 과학교육의 장과 21C정보문화산업의 중심메카로 활용하고 있다.
발굴의 결과
흥덕사지는 서쪽의 양병산(養兵山)이 남으로 달려내려 오다가 사지의 북쪽과 남쪽의 상·하봉이 동으로 꺾여 있고 청주 시내와 무심천(無心川)이 내려다보이는 동향의 지세이다.
또 공사 전에 보이던 사지 동쪽 끝의 경사지가 석축(石築)으로 쌓였던 사실 등으로 미루어 볼 때 동향의 사찰지로 추정되기도 했으나 발굴 결과 지형과는 무관하게 남향이라 할 수 있는 27 방향의 가람구조를 확인하게 되었다.
남쪽의 문지와 탑지는 파괴되어 확인할 수 없고 현존하는 금당지와 강당지, 서회랑지의 관계로 보아 초창 당시에는 남북의 일직선상에 중문, 탑, 금당, 강당이 있고 동서남북에 회랑으로 외곽을 형성한 전통적인 평지일탑병렬형(平地一塔竝列形)이었음이 확실하며, 고려시대에 중수하면서 강당지가 약간 변형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강당지 서편에 있는 박전건물지(薄塼建物址)는 후대의 건물지로 보이는데 강당지 동편에 똑같은 건물이 있었는지는 이미 파괴되어 알 수 없고 건물 용도는 경판각(經版閣)으로 추정되나 더 연구해야할 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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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불교조계종 학림사 학림사 오등선원
- 작성자
- 두레박
- 작성일
- 2024-06-15
학림사 오등선원- 작성자
- 두레박
- 작성일
- 2024-06-15
오직 부처님의 혜명을 밝히고자 오로지 정진에만 매진하되 일체 다른 시비를 거론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용맹참선도량입니다. 7일만 화두가 성성해도 깨칠 수 있다는 묘법 아래, 매 정규 안거(동안거, 하안거)는 물론 춘계안거, 추계안거 마지막 보름 안에 일주일 “특별용맹정진”하고 있으며, 특히 동안거 3개월 동안은 18시간 용맹정진을 하고 있고 이런 좋은 수행 풍토를 전국 선방스님들에게 골고루 혜택을 주며, 특히 재가자들이 신명나게 정진할 수 있도록 년 4회 (춘계,추계) 사부대중이 동참하는 일주일 “특별용맹정진”을 시행하고 있습니다. 이는 오등선원 스님들이 용맹정진 한다고 상을 내서 선전하고자 함이 절대 아니고, 이런 신선한 수행 풍토가 뜻있는 사부대중에 널리 알려져 수희동참해서 오로지 불조의 혜명을 잇고자 함입니다. 위에서 표현된 “특별용맹정진”이란 안 눕고, 안 기대며, 안 자기 21시간 전 시간 대좌경책을 칭함.
오등선원의 역사적 고찰
학림사 충남 공주시 반포면 학봉리 계룡산 자락에 위치한 사찰이다. 예전에는 제석사(帝釋寺)라는 고찰이 있었는데 임진왜란이 당시 소실된 것으로 학봉리 마을에 구전(口傳)으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학림사는 1986년 8월 조계종 전 종정이셨던 고암(古庵) 대종사님을 증명으로, 법제자이신 학산 대원스님에 의하여 재창건(再創建)하였다. 지금 학림사가 있는 골짜기의 옛 명칭이 제석골인데 ‘제석(帝釋)이라 함은 불교의 제석천왕을 말하는데 불교의 우주관에 의하면 이 우주에는 육도의 세계가 있는데 천상, 인간, 아수라,지옥, 아귀, 축생계 이다 수미산(須彌山)과 천상세계의 33천이 있는데 그 중의 도리천(忉利天)에 제석천왕이 거하며 우주를 관장하는데 불교를 위해 호법하는 성중의 왕이기도 하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설산에서 성도한 후에 바로 열반에 들려 했으나 바로 이 제석천왕이 열반에 들지 마시고 인연 있는 중생을 자비로써 교화 인도해 줄 것을 간청하여 부처님께서 비로써 중생을 위해 설법하시기 시작하여 49년간 중생교화를 마치시고 열반하셨으니 오늘날 우리에게 불교가 전래 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제석천왕의 은덕이라 할 수 있겠다.
이렇듯 여기 골짜기의 옛 명칭이 제석골 이었다는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이곳에서 불교적 색체를 엿 볼 수 있으며 지금의 학림사터에 ‘제석사(帝釋寺)’라는 절이 있었다고 전래된다. 그 전래 내용을 살펴보면 삼국시대에 백제왕이었던 의자왕이 제석봉, 즉 지금의 임금봉에서 국태민안을 위하여 기도를 하고 내려와 이 자리에 사찰을 창건하고 그 사찰 명칭을 제석천왕이 백제를 호국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의자왕이 제석봉의 이름을 따서 제석사라 이름 하였다. 그래서 지금에는 제석봉을 임금봉이라고 부르고 있다. 위와 같은 설도 또 신라의 자장율사께서 이곳 계룡산에서 수도하실 때 마침 이곳을 지나다 참으로 영묘한 터라는 생각에 잠겨 이곳에 사찰을 창건한다면 앞으로 능히 신라가 삼국을 통일 할 수 있다는 영감에 사찰을 창건하고 제석봉이 바로 이곳 위에 위치하여 제석봉의 이름을 따서 제석사라 이름하고 얼 동안 주석 하셨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구전이고 지금 명확히 창시기를 엿볼 수 있는 사서나 체계적인 문헌기록의 자료를 찾을 수 없는 안타까움이 있다. 다만 학봉리 마을의 노인들에 의하면 조선시대까지는 절이 있었으나 임진왜란 때 혹은 그 밖의 사유로 절이 소실되었다고 전해질 뿐 이다. 그러나 86년에도 학산대원스님께서 사찰을 재창건 할 때 평토 작업을 하는 와중에 많은 기와 등이 발견되기도 한 점을 미루어 예전의 제석사 터라고 생각하고 불사의 서원을 굳건히 하게 되었다.
계룡산 학림사 뒤편의 주봉(主峯)은 계룡산(鷄龍山) 천왕봉의 정맥이 석릉(石稜)을 타고 내려와 힘차게 좌우굴곡(左右屈曲)하고 상하기복(上下起伏)하면서 내려와 현재 지금의 헬기장이 있는 곳에서 한 번 크게 솟아서 힘을 맺은 다음에 다시 그 맥(脈)을 타고 학림사로 뻗어 내려오고 있다. 또한 그 주봉에서 좌청룡(左靑龍)로는 장군봉과 임금봉,수리봉이 힘차게 솟아 있고 우백호(右白虎)로는 그 맥이 내려오면서 세 갈래가 되어 학림사를 옹호하고 있어 많은 인정(人情)을 모으게 하고 있다.
또한 앞으로 남주작(南朱雀)은 학이 머리를 길게 빼어 이곳을 향하여 날아오고 있는 형상을 가고 있으며, 물이 나가는 외수구(外水口)는 금강으로 이어져 학림사 도량을 크게 감싸고 돌아나가고 있다. 그 수구(水口)의 사(沙)는 전형적으로 거북의 모양을 띄고 있어서 여기 도량이 자연이 정해진 천혜(天惠)의 수행 도량임을 알 수 있다. 여기 도량은 장군이 칼을 차고 있는 ‘장군안검(將軍按劍)’ 이면서 선인(仙人)이 학을 타고 있는 ‘선인기학(仙人騎鶴)’ 형국을 이루고 있다. 동남간으로 연화봉(蓮華峰)이 솟았으며 남쪽으로 문필봉(文筆峰)이 솟아 있다.
여기에 좌청룡 쪽으로 그 계곡은 사철 물이 끊이지 않고, 수질 정밀검사에서 보면 1급수에 해당되며, 이곳은 내청룡(內靑龍)이 도량 전체를 감아 돌고 나가는 전형적인 명당(明堂)에 위치하고 있다. 사찰을 재 창건하신 학산대원 선사는 오랜 세월을 참선수행으로 일관해오다가 86년 우연히 어느 노옹이 이곳에 예전에 절이 있었는데 참으로 좋은 곳이라는 말을 듣고, 직접 탐방하여 스님들이 수행정진 하기에 적격임을 판단하고 다시 절을 창건하기로 결심을 한 것이다.
그러나 오랜 동안 수행으로만 일관하였기 때문에 스님께서는 재정적으로나 그 밖으로 여러 가지로 사정이 여의치 않아 어려운 처지에 놓여 아쉬움을 남기고 발걸음을 계룡산 갑사로 가서 하룻밤 묵어가기로 생각하시고 갑사에 도착하셨는데 그날 저녁에 좌선 정진하는 도중 비몽사몽간에 예사롭지 않은 노스님 한 분이 주장자를 짚고 나타나 따라오라고 하시어 기이하게 생각하고 노스님을 따라 나섰는데 한참을 따라와서 노스님이 멈추어서 와보니 바로 그날 왔다가 아쉬움을 남기고 간 바로 그 자리였던 것이었다.
노스님께서 주장자를 짚고 사방을 돌아보시고 하시는 말씀이 이 자리에 도량을 세워 수행정진 하면 많은 도승(道僧)이 배출된다고 하시면서 학산대원 스님의 마음을 간파하시고 말씀하시길 “스님이 뜻이 있으시면 반드시 소원을 이루게 될 것이니 걱정하지 마시오.” 하셨다. 그래서 학산대원 스님이 그 노스님께 묻기를 “스님께서는 누구시옵니까.” 하니 노스님께서 “이름을 알아 무엇하겠는가.” 하시면서 “나는 지장이라 하네.” 하시고는 홀연히 눈앞에서 사라지셨다.
스님이 정신을 차리고 보니 꿈같은 것이었으나 생시와 다름이 없이 생생하고 불보살의 현시(現示)로 예사롭지 않게 생각하여 다시 이곳 옛 제석사 터(지금의 학림사)로 돌아와 보시고서 사찰재창건의 마음을 굳히고 수행 당시 제방선원에 대중공양을 위해 왔던 인연 있는 불자들을 만나서 그간의 전후 사정을 말하고 창건의 의지를 보이니 흔쾌히 받아들여져 땅을 매입할 수 있었다. 그 후에 윤고암 대종사(大宗師)를 모시고 다시 이곳을 탐방하셨는데, 이곳을 보신 고암스님께서 탄복하며 이 터는 선수행의 도량으로는 손색이 없다고 극찬을 하시면서 이 계룡산 일대에 선수행(禪修行) 도량이 없으니 이곳에 사찰과 선원(禪院)을 다시 창건하라는 말씀을 하셨다. 또한, 지금은 열반하신 불국사와 법주사의 조실(祖室)을 역임 하셨던 월산 선사(禪師)께서도 당시에 이곳을 탐방하시고는 사찰을 재창건할 것과 아울러 선원을 개원(開院)할 것을 부촉 하시었다.
그래서 1차적으로 학산대원 스님께서는 작은 토굴을 창건하고 은법사이신 고암상언 대종사(大宗師)를 모시고 부처님 점안식을 봉행하고 주석하셨다. 먼저, 대원스님이 작은 토굴을 창건하고 고암 스님을 모시고 부처님 점안식을 봉행하고 주석하셨다. 그 다음에 정식으로 1986년도에 사찰을 재창건하고 옛 제석사의 명칭을 개칭하여 ‘학림사(鶴林寺)’라고 이름하고 점차 가람을 정비하여, 1995년에 학림사 내 선원을 건립하여 선원 이름을 ‘오등선원(五燈禪院)’이라 하여 사부대중 천여 명이 운집한 가운데 학림사 오등선원의 개원식을 거행하고 학산대원 선사를 조실로 추대하였다. 또한 최근에 일반 시민들의 정신문화를 선도할 시민선원도 건립하여 일반 불자들도 정진 할 수 있게 하였다.
현재 오등선원은 인근 대전, 충남은 물론 전국의 사부대중이 모여서 학산대원 조실 큰스님의 가르침과 경책 아래 결제와 산철을 가리지 않고 용맹정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