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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대한불교조계종 학림사 학림사 오등시민선원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6-15
    학림사 오등시민선원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6-15

    오늘날 물질문명의 혼란속에서 인생의 고뇌와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화두참선 뿐입니다. 오등시민선원은 한암 대원 큰스님의 지도와 경책 아래, 모든 불자들이 공부할 수 있는 열린 공간입니다. 일일참선, 3일참선, 한달참선, 하안거 및 동안거 수행, 1년 365일 누구든지 언제나 참여할 수 있는 참선수행도량입니다. 참나, 진여불성의 자리에 찾는 바른길을 제시해드리겠습니다.

    참선 수행프로그램

    * 토요일
    오후 7시 40분 ~ 9시 : 학산 대원 큰스님 강의(역대법보기)
    오후 10시 ~ 새벽 3시 : 참선철야정진
    * 일요일
    오전 7시 30분 : 소참법문

    학림사 오등시민선원의 미래적 사명

    학림사 오등선원의 조실이신 학산대원 스님께서는 1999년도 5월경에 미국 시애틀에 있는 선센터의 선법문(禪法問)의 법회(法會)에 초청 받아 법문을 하시고 돌아오시면서 많은 것을 생각하시었다. 그것은 바로 미국의 뉴에이지 열풍에 의한 교포들과 미국인들의 정신문화에 대한 지대한 관심으로 불교가 선풍적으로 미국전역에 퍼지고 아울러 참자아(眞我)의 근원(根源)에의 회귀(回歸) 사상인 선수행(禪修行)의 열풍이 부는 것을 목격하시고 1600년의 불교역사를 간직한 작금의 우리 나라의 현대 국민들의 대다수의 의식이 타락되어 5000년 역사의 한국의 도덕이 매몰되고 본래 깨끗한 부처님 마음을 등지고 물질주의와 쾌락주의의 일변도로 나아가는 것을 보고 통탄하시어 시급히 인간의 본성(本性)을 회복하고 타락된 의식을 정화하고 이 땅에 도덕과 자비가 넘치는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먼저 참자아를 발견하는 선수행을 통해서만이 이룩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시민선원을 건립하게 되었다.

    선진 유럽이나 미국에서는 오늘날 타락된 의식을 회복하는데에는 선수행을 통해서만이 이룩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곳곳에 선(禪)센타를 건립하고 선수행이 대중화가 되어가고 있다, 참자아의 회복만이 인생최고의 행복과 자신, 가정, 사회, 국가, 전 인류가 대안정을 이룩할 수 있다고 판단하여 선수행을 하고 있는데 이 열풍이 오히려 외국에서 이처럼 뜨거워지고 있는데 비해 1600년의 불교역사를 자랑하고 있는 우리 나라의 현재 국민들은 선수행을 통해 의식을 깨우쳐 의식을 더욱더 확장하여 높은 의식세계로 나아가는 것을 도외시하고 현실 물질주의에만 치중해 나아가니 더욱더 외국에 비해 의식이 뒤떨어져서 급기야는 국가적으로는 경제대란인 IMF를 당하고 교육적으로는 후진교육의 획일 교육에 벗어나지 못해 입시 일변도의 획일 교육으로 말미암아 정부 교육정책이 무너져 사교육이 난무하여 학부모들의 경제고에 한 몫을 더하고 중산층이상들은 자녀 교육문제로 이민이나 조기유학을 보내지 못해 안달하고 육성교육의 모체인 학교에서는 학생들에게 인성교육을 하지 못해 선생과 학부모들도 어찌할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러 우리 나라의 미래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우리의 의식향상은 물질문명과 과학, 의학 등의 학문만으로는 인간 본연의 본성을 회복을 할 수는 없다, 인간 본연의 참자아를 회복하는 유일한 방법은 오로지 정신훈련을 즉 선수행을 통해서 의식을 개혁하여야만 자신의 본성을 회복할 수밖에 없다고 스님께서 판단하시고, 우리 나라 국민들의 의식향상을 도모하시고자 시민선원 건립하였고 선수행의 지도에 앞장설 것을 다짐하시었다.

    현재 시민선원에서는 항시 대중들이 상주하며 선수행을 하는 대중이 평일에 약 25여명이고 토요일 특별철야정진에 참여하여 선수행을 하는 시민이 약 25여명 등, 주말에는 모두 해서 50여명 정도가 수행정진 하고 있다. 앞으로 시민선원의 정식 개원식을 앞두고 이렇게 많은 시민들이 참여하는 것을 보면 정식 개원식 이후에는 더욱더 많은 시민들이 참여할 것으로 사료된다. 시민선원에는 모든 종교를 초월해서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남녀노소 누구나 시민선원의 규칙에 따라 참여 수행정진할 수 있다. 앞으로 스님들의 선원을 다시 신축하면 현재 수님들이 사용하고 있는 선원에도 일반 시민들에게 더 많이 개방할 예정이고 앞으로 더 많은 시민이 참여하여 선수행을 통하여 〔나는 누구인가?〕를 깨달아 타락된 우리의 의식을 개조하고 맑고 깨끗한 참자아를 되찾아 자신의 진면목(眞面目)을 현실에 들어내어 씀으로서 영원한 행복과 대 안식처에 자비가 흘러 넘치는 세계를 실현해 나아가는 것이 학림사 오등선원의 이 땅의 이 민족에 대한 진정한 목적의 사명이라 할 수 있다.

  2. 백련불교문화재단 성철스님 생애 (1912~1993) 9dd2c1a895d992c0bad78f51b5d30380_1718389376_51.png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6-15
    성철스님 생애 (1912~1993)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6-15

    1912 (1세,壬子) 음력 2월 19일(양력 4월 6일)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묵곡리에서 아버지 율은(栗隱) 이상언(李尙 彦, 1881~1959), 어머니 강상봉(姜相鳳, 1893~1957)의 4남 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나다. 속명은 이 영주(李英柱). 어머니가 스님을 임신하고서는 문밖 출입을 삼가고 모난 음식을 먹지 않고 모난 데 앉지 않는 등 온갖 정성으로 태교하였다고 전한다.

    1920 (9세, 庚申) 4월 단성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다. 입학하기 전에 서당을 다닌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26 (15세, 丙寅) 3월 단성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다. 진주중학교 입학시험에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하였으나 신체검사에서 탈락하다. 원래 몸이 약했던 스님이 이 무렵부터 요양차 대원사에 드나들다.

    1931 (20세, 辛未) 대원사에 드나들며 불교에 빠질 것을 염려한 집안에서 결혼을 서두르다. 11월 이덕명(1909~1982)과 혼인신고.

    1932 (21세, 壬申) 12월 2일 간례휘찬(簡禮彙纂)에 이영주서적기를 남기다. 행복론,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역사철학, 장자남화경, 소학, 대학, 하이네 시집, 기독교의 신구약성서, 자본론, 유물론 등 동서고금의 철학에 관한 책 약 70여 권의 제목이 적혀 있다.
    20세를 전후한 시기에 본격적으로 불교에 관심을 가지고 불교 관련 서적을 탐독하다. 영가현각(永嘉玄覺, 665~713) 스님의 증도가를 읽고 밤중에 횃불을 만난 것 같았다고 회고하였다. 잡지 불교를 통해 화두 공부를 익히고 대원사 요양 중에 서장(책)을 보다.

    1935 (24세, 乙亥) 이 무렵 대원사 탑전에서 화두참구하며 42일 만에 동정일여의 경지에 이르렀다. 대원사가 해인사에 연락하여 환경스님(1887∼1983)의 제자 최범술(효당스님, 1904∼ 1979)이 대원사를 방문하다. 최범술의 권유로 스님이 해인사에 가다.

    1936 (25세, 丙子) 1924년에 선원으로 확장된 해인사 퇴설당에서 참선 정진하다. 반대 여론이 있었으나 주지 이고경(李古鏡, 1882~1943) 스님의 호의로 정진을 계속하다. 해인사에서 강의하던 강사 김법린 (1899∼1964)이 교학 연구를 권하다. 3월 3일 범어사 조실 하동산(河東山, 1890~1965) 스님을 은사로 해인사에서 사미계를 받고 출가하다.

    출가시
    彌天大業紅爐雪이요 跨海雄基赫日露라
    誰人甘死片時夢가 超然獨步萬古眞이로다
    하늘에 넘치는 큰 일들은 붉은 화롯불에 한 점의 눈송이요
    바다를 덮는 큰 기틀이라도 밝은 햇볕에 한 방울 이슬일세
    그 누가 잠깐의 꿈속 세상에 꿈을 꾸며 살다가 죽어 가랴
    만고의 진리를 향해 초연히 나 홀로 걸어가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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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가무렵


    동산스님을 따라 범어사로 옮겨 범어사 금어선원에서 하안거를 나다. 동산스님은 해인사 조실로 옮기고 스님은 범어사 원효암에서 동안거를 나다(조실 용성스님). 동안거 기간인 11월 18일(음 10월 16일) 용성 (1864~1940)스님이 동산스님에게 계맥을 전수하는 자리에 스님도 함께 하다.

    1937 (26세, 丁丑) 3월 15일 범어사 금강계단에서 비구계를 받다. 범어사 원효암에서 하안거를 나고 용성스님을 시봉하다. 용성스님은 그 무렵 어떤 스님을 보아도 스님이라 하지 않고 “선생”이라고 불렀는데 손자인 성철스님 에게 만은 “성철수좌, 성철스님”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서울 대각사로 옮겨 가실 때에 꼭 스님을 데려 가겠다고 했지만 스님은 부산역까지만 배웅하고 도망쳤다는 일화가 있다. 통도사 백련암으로 옮겨 동안거 를 나다. 조실은 향곡스님의 은사인 운봉(雲峰, 1889~1946)스님.

    1938 (27세, 戊寅) 범어사 내원암(1900년 개설)에서 하안거(조실 하동산)를 나고 통도사 백련암에서 동안거를 나다. 이 무렵 까지도 어머니가 철마다 옷가지와 음식 등을 마련하여 찾아왔으나 계속 물리치다.

    1939 (28세, 己卯) 금강산 마하연에서 동안거를 나다. 마하연선원은 1926년 재정 사정으로 문을 닫았다가 1932년 59칸짜리 당우를 짓고 다시 개원하였다. 1933년에는 입방규칙을 제정하여 자격을 갖춘 납자만 결제 대중으로 받기 로 하였다. 1939년 3월 23일에는 선리참구원에서 전국수좌대회를 개최하여 금강산 마하연선원을 초학(初 學) 수좌 지도를 위한 모범선원으로 지정하기도 하였다. 워낙 규모가 커서 안거를 나는 대중들도 서로를 잘 몰랐다고 한다. 마하연에서 평생의 지기인 자운스님을 만나다. 글을 모르는 대중 스님들의 부탁으로 편 지를 대독하고 대필해주기도 하였다. 어머니가 찾아왔으나 만나지 않다가 대중공사를 통해 금강산 유람을 시켜드리기도 했다.

    1940
    (29세, 庚辰) 금강산 마하연에서 하안거를 나다. 동화사 금당선원에서 오도송(悟道頌) 읊다.

    오도송
    黃河西流崑崙頂하니 日月無光大地沈이라
    遽然一笑回首立하니 靑山依舊白雲中이로다
    황하수 곤륜산 정상으로 거꾸로 흐르니
    해와 달은 빛을 잃고 땅은 꺼지는도다
    문득 한번 웃고 머리를 돌려 서니
    청산은 예대로 흰 구름 속에 섰네.
    깨달음을 얻은 이후 장좌불와를 시작하다. 은해사 운부암에서 동안거를 나면서 단식 정진하다.

    1941 (30세, 辛巳) 깨달음을 점검받기 위해 전국의 곳곳을 찾아 정진하다. 전남 송광사 삼일암에서 하안거(조실 회주 이효봉) 를 나고 충남 수덕사 정혜사에서 동안거(주실 송만공)를 나다. 정혜사에서 청담스님을 만나다. 음력 정월에 조를 짜서 대웅전에서 일주일동안 철야정진하는 모습에 감동을 받고 이후 칠일칠야 정진의 모델로 삼다. 이 해는 아버지 이상언의 회갑이었다. 장남 없이 절을 받을 수 없다 하여 절도 받지 않고 가족사진 촬영 도 하지 않았다.

    1942 (31세, 壬午) 충남 서산군 간월암에서 하안거와 동안거를 나다 (주실 송만공)

    1943 (32세, 癸未) 충북 법주사 복천암에서 하안거를 나다. 1942년 가을 청담스님이 먼저 복천암에 가고 스님이 합류하다. 복천암에서 도우스님을 만나 이후 도우스님이 대승사, 봉암사, 천제굴까지 함께 하다. 청담, 도우스님 등과 생식을 시작하다. 청담스님이 독립운동 혐의로 체포되어 상주경찰서에 연행되었다가 이질에 걸려 피병사로 옮겨지고 상주포교당으로 주거 제한을 받다. 스님은 대승사로 가려고 했으나 식량 사정의 여의치 않아 종 수스님과 장수스님이 있는 경북 선산 도리사 태조선원에서 동안거(조실 정운봉)를 나다.

    1944 (33세, 甲申) 도리사 태조선원이 폐쇄되어 도리사에서 머물다. 청담스님이 거주 제한이 풀려 대승사로 옮기고 스님을 초청하여 경북 문경 대승사 쌍련선원에서 청담, 우봉, 도우스님과 동안거를 나다.

    1945 (34세, 乙酉) 대승사에 쌍련선원에 머물며 청담스님과 총림의 구상과 바른 수행 풍토에 대해 논의하다. 대승사 암자인 묘적암에서 동안거를 나다.

    1946 (35세, 丙戌) 송광사에 방부를 들이려다가 생식을 이유로 거절당하다. 송광사에서 일타스님을 만나다. 도우스님과 성전암 으로 옮겨 하안거와 동안거를 나다. 이 무렵 청담스님이 봉암사 주지의 요청으로 봉암사로 옮기다. 청담스 님이 홍경, 종수스님 등과 봉암사에서 새로운 불교를 모색하다가 해인사에 가야총림이 개설된다는 소식에 스님과 청담스님이 해인사측의 최범술, 환경스님(당시 주지)을 만났으나 재정 문제가 걸려 타협이 결렬되 다. 가야총림은 방장에 효봉스님을 추대하고, 우봉스님은 총림에 합류하다.

    1947 (36세, 丁亥) 총림 건은 청담스님에게 일임하고 도우스님과 통도사 내원암으로 옮기다. 청담스님이 하안거에 가야총림에 합류하다. 김병룡 거사에게 불서를 기증받기로 약속하고 해제하면 봉암사로 옮기기로 하다. 가을에 봉암사 결사를 시작하다. 기본적으로는 성철, 청담, 자운, 우봉스님 네 분의 구상으로 진행된 봉암사결사는 공주규 약을 체결하고 "부처님 법대로 살자"를 목표로 하였다. 청담스님의 추천으로 봉암사를 정하고 처음에는 성 철, 자운, 보문, 우봉스님의 네 분이 시작하였다. 청담스님은 가야총림 때문에 뒤늦게 합류하다. 향곡(香谷), 월산(月山), 종수(宗秀), 도우(道雨), 보경(寶境), 법전(法傳), 성수(性壽), 혜암(慧菴)스님 등 20여 명으로 구 성되어 신장 등을 없애고 장삼과 가사, 발우 등을 정비하였으며 신도에게 3배와 보살계를 처음으로 시행하 였다. 중국 총림의 일과에 맞게 생활하고 대불정능엄신주를 독송하도록 하였으며 대부분의 사찰에서 하고 있는 예불문을 완성하였다. 교단 정화는 물론 주요 인물들이 조계종의 요직을 맡으며 종단의 기틀을 마련 하였다.

    1948 (37세, 戊子) 봉암사에서 하안거와 동안거를 나다. 김병룡거사에게 불서를 기증받고 봉암사 극락전에 모시다.

    1949 (38세, 己丑) 봉암사에서 하안거를 나다. 빨치산이 출현하여 정진이 어려우므로 경남 월내리의 묘관음사로 옮기다. 김병 룡거사의 불서도 묘관음사로 옮겼으며 이후 계속 거처를 옮길 때마다 불서를 옮기다.

    1950 (39세, 庚寅) 청담, 법전스님 등이 봉암사를 나오면서 봉암사결사가 무산되다. 경남 고성군 문수암에서 청담, 법전 등과 하안거와 동안거를 나다.

    1951 (40세, 辛卯) 경남 통영의 안정사 은봉암에서 하안거를 나다. 모이는 사람이 늘자 안정사 주지에게 양해를 구하고 안정 사와 은봉암 사이에 초가삼간의 토굴을 지어 천제굴이라고 이름하다. 주로 시봉은 법전스님이 맡다. 천제굴에서 비로소 신도들에게 3천배와 아비라기도를 하게 하다.

    1952 (41세, 壬辰) 천제굴에서 하안거를 나다. 천제굴에 머무시는 동안 청담, 자운, 운허, 향곡, 서옹스님 등이 다녀가다. 천제굴이 협소해 비구니 스님들이 성철스님이 수행할 수 있도록 성주사를 내주어 경남 마산의 성주사에서 동안거를 나다.

    1953 (42세, 癸巳) 천제굴에서 하안거와 동안거를 나다.

    1954 (43세, 甲午) 천제굴에서 하안거와 동안거를 나다. 비구 종단의 정화(淨化)가 시작되다.

    1955 (44세, 乙未) 파계사 한송스님의 초청으로 파계사 성전암으로 옮기시려다가 건물 보수를 위해 법전스님이 먼저 수리를 하고 스님은 임시로 경남 남해의 용문사 백련암에 머물다. 9월 비구측이 19개 사찰의 관리권을 접수하면서 해인사 지로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자운스님이 취임(1955년 9월 ~1957년 7월)하다. 가을에 파계사 성전암에 철조 망을 두르고 1964년까지 10년간 두문불출하며 외부의 출입도 막다. 이것을 흔히 “10년 동구불출”이라고 하다. 동구불출 동안 거의 모든 시간을 책을 읽으며 보내다. 일본의 남전대장경은 물론 영문 잡지와 다양한 분야의 신종 서적을 섭렵하다.

    1957 (46세, 丁酉) 파계사 성전암에서 동구불출하다. 다시 해인사의 주지로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청담스님이 취임(1957년8월~1960년 5월)하다

    1964 (53세, 甲辰) 동구불출을 마치고 부산 다대포에서 잠시 머무르다가 서울의 도선사에 머물다. 도선사는 1961년에 청담스님이 주지로 취임. 오랜 시간 꿈꾸어 오던 승가대학을 실현하기 위해 실달학원 (悉達學園)을 열고 실달학원시행요강을 마련하다. 청담스님과 서원문을 쓰다. 이 무렵 청담스님과 함께 각각의 시자 천제스님과 혜성스님을 데리고 북한산, 남한산성, 회암사지 등을 순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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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암사지


    1965 (54세, 乙巳) 4월 30일 동산스님이 입적. 1967년에 세운 동산스님 사리탑 비문을 짓다. 경북 문경의 김용사(金龍寺)에서 조실 로 머물다. 9월 1일, 대학생불교연합회 회원들의 13일간의 구도행각 중에 김용사 방문하자 3000배를 시키고 9월 2일부 터 이틀에 걸쳐 “불교의 근본사상인 이변(離邊)중도로부터 시작하여 불교에서 본 우주의 실상, 우리가 이 실상과 하나가 될 수 있는 가능성, 그 방법론 등”을 현대학문의 방증을 들어 설법하다.

    1966 (55세, 丙午) 1월 8일(토, 음 12월 17일)부터 2월 20일(일, 음 2월 1일)까지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 구도부를 상대로 50일 안거 정진을 지도하다. 참가자는 광덕스님을 지도법사로, 박성배를 지도교수로 한 봉은사 입사생인 전창열, 김금태, 이진두, 김기중, 황귀철, 김선근, 이철교. 스님의 강론 내용은 ① 불교의 생명은 覺에 있다. ② 불교 근본원리로서의 중도사상 ③ 돈오점수설 비판 ④ 현대 과학과 불교의 합리성. 4월 스님의 발원으로 1965년 8월에 공사를 시작한 선방 상선원을 준공하다. 8월 3일부터 8월 24일까지 한 국대학생불교연합회 구도부(봉은사 입사생 중심) 구도법회를 지도하다. 참선정진을 중심으로 하고 20일 간 반야심경으로 시작하여 육조단경, 금강경, 신심명, 증도가 등의 경론과 중도법문을 하다. 이것을 ‘운달산법회’라고 하며 최초의 대중설법으로 기록된다. 가을 무렵 자운스님의 권유로 해인사 백련암으로 옮겨 동안거를 나다. 구도법회 참가자 일부가 스님을 따라 백련암으로 옮기고 출가하다. 11월 6일 월정사 대웅전 상량식에 참가하다.

    1967 (56세, 丁未) 7월 25일 제16회 임시중앙종회에서 해인사에 방장 체제의 해인총림 설치가 결의되면서 해인총림 방장에 추대되다. 방장 동안은 안거 때마다 보름과 말일에 상당법어를 하다. 동안거 기간 중에 백일법문(百日法門) 을 하다. 10월 보름과 말일 상당법어 진행 후에 음력 11월 3일(월, 12월 4일)부터 시작하여 상당법어를 하는 날과 성 도재일 용맹정진 등 특별한 날을 제외하고 매일 진행하다. 대략 이듬해 음력 1월 20일(일, 2월 18일)까지 진행되어 백일법문이라고 한다. 12월 15일 조계종 제17회 중앙종회에 조계종 종합수도원인 해인총림의 계 획안과 승가대학 설치계획안을 건의하다.

    1969 (58세, 己酉) 10월 희찬스님이 월정사 대웅전을 중건하다. 이 무렵 청담스님 등과 춘천 성심여자대학을 방문하여, 다른 종교 의 교육기관을 시찰하고 승가대학에 대한 방향을 모색하다.

    1976 (65세, 丙辰) 한국불교의 법맥이 출간되다. 비구ㆍ대처 분규 끝에 1962년 3월 22일에 제정된 대한불교 조계종 종헌 제1조 "본 종은 신라 도의(道義)국사가 창수(創樹)한 가지산문(迦智山門)에서 기원하여 고려 보조국사의 중천을 거쳐 태고 보우국사의 제종포섭(諸宗包攝)으로서 조계종이라 공칭(公稱)하여 이후 그 종맥이 면면부절(綿綿不絶)한 것이 다."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며, "도의국사는 가지산문이고 보조국사는 사굴산문이니 법맥이 상전(相傳)한 것이 아닌데 어떻게 다른 법맥을 같은 법맥으로 할 수 있느냐?" 임제종의 종풍을 이어받은 조계종의 종조는 보조국 사가 아니라 태고보우국사라는 주장을 펼치다.

    1981 (70세, 辛酉) 1월 20일 조계종 6대 종정으로 취임하였으나 취임법회에는 나가지 않으시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라는 법어가 화제로 등장하다.
    수락법어]
    원각(圓覺)이 보조(普照)하니 적(寂)과 멸(滅)이 둘이 아니라 보이는 만물은 관음(觀音)이요 들리는 소리는 묘음(妙音)이라 보고 듣는 이 밖에 진리가 따로 없으니 아아, 시회대중(時會大衆)은 알겠는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초파일에 최초의 한글법어 “생명의 참모습”을 발표하다. 12월 스님의 사상을 대표하는 선문정로가 출간 되다. 총 19장으로 구성되어, 각 경론의 구절을 초록하고 이에 대한 성철스님의 평석을 붙여 돈오돈수를 설파하다.

    1982 (71세, 壬戌) 1월 첫 한글 신년법어 “만법이 불법”을 발표하다. 11월 또 하나의 대표작인 본지풍광이 출간되다. 해인사 방장 으로 취임하신 1967년 동안거 결제 법어부터 1982년 하안거 결제 법어까지 상당법문을 모은 법어집으로, 본칙 91칙과 낙수법어(落穗法語) 9칙으로 구성되었다.

    1986 (75세, 丙寅) 4월 7일 종단이 안정되었으므로 종정을 사퇴한다는 사퇴서를 원로회의에 제출하다. 6월 돈오입도요문론 강설과 신심명ㆍ증도가 강설이 출간되다.

    1987 (76세, 丁卯) 6월 「자기를 바로봅시다」 가 출간되다. 종정 취임 이후 출간 당시인 1987년 무렵까지 대중적인 글들 위주의 법어 모음으로, 제1장 ‘축복의 말씀’은 종정 취임 후에 발표하신 신년법어와 초파일법어와 종정법어를 모은 것이고, 제2장 ‘가야산의 메아리’는 해인 사 큰법당에서 불교 진리를 쉽게 설명하신 법어 중 해인지에 연재하였던 것을 재정리하여 모은 것이며, 제3장 ‘대담’은 종정으로 취임하신 후 일간지 및 월간지에 인터뷰로 실린 것이고, 제4장 ‘본지풍광평석’은 본지풍 광 가운데 다섯 개의 법문(제27칙, 제28칙, 제30칙, 제40칙, 제44칙)을 골라 평석을 붙인 것이며, 제5장 ‘해탈의 길’은 처음 출가한 승려들이 신심을 가지고 열심히 수행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지어두신 글들을 정리하여 옮 긴 것이다. 7월 백련불교문화재단을 설립하다. 11월 도서출판 장경각을 설립하여 선림고경총서 발간을 시작하게 하다.

    1988 (77세, 戊辰) 2월 「돈황본 육조단경」 이 출간되다.

    1991 (80세, 辛未) 1월 종정의 임기가 만료되었으나 종단의 분열로 종정을 추대하지 못하다. 분열 와중에 종정 추대가 문중 문제로 불거지자 1월 23일 종정직을 할 생각이 없다는 통고문을 보내다. 7월 5일에 또 한 번 통고문을 보내다. 7월 8일 해인사에서 전국승려대표자대회를 열고 원로회의에서 종정을 추대하고, 개혁위원회를 구성하다. 세간법에 의한 송사는 종단법으로 엄단 등을 결의하고, 8월 22일 조계종 원로회의에서 제7대 종정으로 다 시 스님을 추대하다.

    1992 (81세, 壬申) 4월 「백일법문」 상․하가 출간되다.

    1993 (82세, 癸酉) 9월 21일 선림고경총서 완간 기념회를 열다. 10월 7일 백련불교문화재단 주최로 해인사에서 '선종사에 있어서의 돈오돈수사상의 위상과 의미'라는 주제로 국제학술회의를 개최하다.

    열반송
    生平欺誑男女群하야 彌天罪業過須彌라
    活陷阿鼻恨萬端인데 一輪吐紅掛碧山이로다
    일생동안 남녀의 무리를 속여서
    하늘 넘치는 죄업은 수미산을 지나친다
    산 채로 무간지옥에 떨어져서 그 한이 만 갈래나 되는데
    둥근 한 수레바퀴 붉음을 내뿜으며 푸른 산에 걸렸도다.

    이후 전국 각지와 해외 동포 사이에서 추모 물결이 일다. 11월 10일 영결식 및 다비식을 봉행하여 11월 12 일 100여과에 이르는 사리를 수습하다. 1998년 11월 해인사 운양대에 사리탑을 봉안하다. 2001년 3월 경남 산청군 단성면 묵곡리 생가터에 기념관을 건립하고 겁외사를 창건하다.

  3. 대한불교조계종 심원사 심원사 연중 특별기도 및 행사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6-15
    심원사 연중 특별기도 및 행사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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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정초산림기도
    법회일  : 시음력 1월 6일 ~ 음력 1월 15일 매일 오전 10시
    법회장소 : 심원사 대웅전
    기도 의미 : 산림기도는 한 해 동안 부처님 가르침에 따라 바르게 살겠다는 다짐의 자리이며, 생활하며 알게 모르게 지은 소소한 죄업을 참회하는 법석입니다.
    문의 : 종무소 054-931-6886

    2. 입춘기도
    법회일  : 시양력 2월 4일 오전 10시
    법회장소 : 심원사 대웅전
    기도 의미 : 입춘은 24절기의 첫째로 시작하는 절기로, 땅속의 양기가 만물을 생동시키고 새롭게 시작하는 날입니다. 입춘기도의 의미는 삼재를 극복하고, 복을 지어 베풀고 보시하여, 액운을 물리치고 복을 바라는데 있습니다.
    * 삼재풀이가 있을 경우 별도의 기도비가 있습니다.
    문의 : 종무소 054-931-6886

    3.백중(우란분절) 49일 기도
    법회일  : 시입재 음력 5.26일 오전 10시
    회향 음력 7.15일 오전 10시
    법회장소 : 심원사 대웅전
    기도 의미 : 절에서는 지옥문이 열리는 날이라 하여 불보살님께 공양 올려 축원하며 선망부모 조상들은 극락세계로 태어나시며 유주무주의 모든 영가와 사산과 유산 된 영가를 빠짐없이 청하여 영단에 올려 모시고 밥과 과일과 차를 올려 목마름과 갈증과 배고픔과 추위를 달래고 부처님이 들려주시는 해탈법문을 들으시고 이고득락 하시라 기도하고 정진하는 날입니다.
    문의 : 종무소 054-931-6886

    4.중양절 합동차례
    법회일  : 시음력 9월 9일 오전 10시
    법회장소 : 심원사 대웅전
    기도 의미 : 중양은 양이 두 번 겹쳤다는 것으로, 9는 양의 숫자 중 완성된 양으로 양의 기운이 가장 왕성한날입니다.
    음력 9월 9일은 왕성한 양의 기운이 두 번 겹치기 때문에 중양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 날 절에서는 이름을 알지 못하는 영가나 무연고 영가를 위해 합동차례를 올립니다.
    문의 : 종무소 054-931-6886

    5. 산신대재
    법회일  : 시매년 10월 3째주 토요일 오후 2시
    법회장소 : 심원사 마당
    기도 의미 : 가야산의 산신인 정견모주에 대해
    문의 : 종무소 054-931-6886

    6. 수능기도
    법회일  : 시매년 수능 100일 전부터 매일 10시
    법회장소 : 심원사 대웅전
    기도 의미 : 수능을 보는 학생을 위하여 매일 기도하여 학업에 장애를 없애고 자신이 원하는 바를 얻게하기 위한 기도입니다.
    문의 : 종무소 054-931-6886

    7. 동지기도
    법회일  : 시양력 12월 22일(절기에 따라 날짜 변동 있음) 오전 10시
    법회장소 : 심원사 대웅전
    기도 의미 : 동지는 한 해의 무사안녕을 감사하며 불보살님께 불공 드리고 새 것을 맞으에 있어 잡귀와 재앙을 쫒고 복을 구하는 원화소복의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문의 : 종무소 054-931-6886

    8. 기도
    백일 기도
    일년 기도문의 : 종무소 054-931-6886
    초 공양기도
    인등·연등기도

  4. 대한불교조계종 심원사 심원사 매월 정기 법회 및 기도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6-15
    심원사 매월 정기 법회 및 기도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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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불시간
    새벽예불 05:00 도량석, 타종, 예불문, 행선축원, 반야심경
    사시예불 10:00 천수경, 사시불공, 석가모니정근, 상단축원, 중단권공, 반야심경
    저녁예불 18:00 타종, 예불문, 반야심경

    정기법회 및 재일
    1. 초하루 법회
    법회일시 매월 초하루 10시
    법회장소 심원사 대웅전
    문의 종무소 054-931-6886
    2. 보름 법회
    법회일시 매월 보름 10시
    법회장소 심원사 대웅전
    문의 종무소 054-934-6886
    3. 관음재일
    법회일시 매월 음력 24일
    법회장소 심원사 대웅전
    문의 종무소 054-931-6886
    4.산신기도
    법회일시 매월 음력 9일
    법회장소 심원사 산신각
    문의 종무소 054-931-6886

  5. 대한불교조계종 심원사 심원사 대웅전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6-15
    심원사 대웅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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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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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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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가모니 부처님을 주불로 봉안한 건물로서 가람의 중심건물이다. 대웅은 석가모니 부처님을 가리키는 별칭이다.

    부처님은 2천6백여 년 전에 중인도의 카필라성에서 태어났으며, 역사적으로 실재했던 분이다. 출가해서 6년의 힘든 수행 끝에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었다. 모든 번뇌를 단숨에 끊어버리고 위대한 승리자가 된 것이다. 그래서 큰 영웅, 즉 대웅(大雄)이라 하였으며, 그를 모신 전각을 대웅전(大雄殿)이라 부르게 되었다.

    대웅전에는 석가모니부처님의 좌우에 약사부처님과 아미타부처님, 또는 아미타부처님과 미륵부처님을 봉안하기도 한다. 이런 경우에는 대부분 ‘대웅보전(大雄寶殿)’이라 부른다.

  6. 대한불교조계종 심원사 심원사 석가모니 부처님(중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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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작성일
    2024-06-15
    심원사 석가모니 부처님(중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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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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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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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가모니부처님의 좌우 협시보살(協侍菩薩)은 반야(般若)의 지혜를 상징하는 문수보살(文殊菩薩)과 중생을 위해 서원을 세우고 수행하는 행원(行願)을 상징하는 보현보살(普賢菩薩)이 대표적이다. 심원사는 선법과 교법을 상징하는 가섭존자(오른쪽)와 아난존자(왼쯕)을 봉안하였다. 수인은 전형적이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다.

    대개 좌우에 반야의 지혜를 상징하는 문수보살과 행원의 원대함을 상징하는 보현보살을 조성하거나 관세음보살과 지장보살(또는 대세지보살)을 봉안하는데, 심원사는 선법과 교법을 상징하는 가섭존자(오른쪽)와 아난존자(왼쪽)을 봉안하였다.

  7. 대한불교조계종 심원사 심원사 가섭존자(좌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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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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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15
    심원사 가섭존자(좌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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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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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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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하가섭(摩訶迦葉, ㅡMahakasyapa) - 두타제일(頭陀第一)이라 불리는 부처님 제자로, 인도 왕사성에서 바라문의 아들로 태어나 일찍이 결혼하였으나, 세속적 욕망의 무상함을 깨달아 부부가 함께 출가 수행자가 되었다.

    부처님께 귀의한지 8일만에 바른 지혜의 경지 즉 아라한(阿羅漢)의 과위를 증득한 그는 항상 의식주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심신을 수련하는 두타행을 행하였으며, 불교교단의 으뜸가는 제자로 존경받고 부처님께서 입멸하신 후 불교교단을 운영하게 되었다. 부처님 입멸 후 500명의 제자들을 모아 부처님께서 설하신 경(經)·율(律)을 결집하였으며, 선가(禪家)에서는 부처님 법을 전한 제1조 조사로서 받들고 있다.

  8. 대한불교조계종 심원사 심원사 아난존자(우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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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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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15
    심원사 아난존자(우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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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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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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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난존자(Ananda)는 부처님의 10대 제자 중에 한사람이다. 25년 동안 부처님 곁을 지키며 하루도 빠짐없이 시봉하였다.
    한 번도 싫은 내색을 보이지 않고 정성을 다했으며, 부처님의 설법이라면 하나도 빠짐없이 다 듣고 기억하였지마, 부처님이 생전에 계시는 동안에는 도를 깨치지 못하였다. 그런 까닭에 부처님께서 열반에 든 뒤 가섭존자의 주재로 칠엽굴에서 제1회 결집(結集)을 할 때 거기 참석할 자격이 없었다. 문자가 없었던 당시에 부처님의 말씀을 정확하게 기억하여 후세에 전할 방법과 교단의 운영 문제 등을 상의하기 위한 첫 번째 회의였다. 거기에는 도를 깨친 500명의 아라한(阿羅漢)만이 참석하는 곳이기 때문에 도에 이르지 못한 아난다는 참석할 수 없었다. 이에 크게 분발한 아난다는 홀로 절벽 끝에 가서, 발꿈치를 들고 발끝으로 7일간이나 꼼짝 않고 서서 용맹정진한 결과 드디어 도를 깨달아서 아라한이 되었다. 그리하여 장로들만 모이는 제1회 결집에 참석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9. 대한불교조계종 심원사 심원사 길흉축월횡간고려목판(吉凶逐月橫看木板)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6-15
    심원사 길흉축월횡간고려목판(吉凶逐月橫看木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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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작성일
    2024-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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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재명] 吉凶逐月橫看 木板
    [저자] 浮石寺 願堂主 重太師 知□ 撰
    [발행사항] 貞祐七年 六月, 고려 고종6년 1219년
    [형태사항] 가로 약 50cm, 세로 약 29.5cm, 양면
    [지정사황] 보물 제 1647호
    [수량] 1板
    [관리자] 심원사

    고려시대 택일을 위해 여러 유서에서 유관한 내용을 엮어 놓은 목판이다.
    사안별로 길일과 흉일을 월별로 나누어 횡간식으로 기록한 것으로 양면으로 판각되어 있다. 전면에는 각종 농사에 대한 것을 전체 20조목으로 나누어 작물과 파종에 적합한 길흉일을 수록하고 있으며 후면에는 일상생활에서의 각종 흉일 등을 월별로 수록하고 있다. 목판 1장에 불과하나 다행히 간행기록이 남아있어 고려 중기에 경상도의 대사찰에서 신도들을 상대로 행하던 포교방식과 범위를 짐작할 수 있다. 곧 신도들에게는 전통작이 불사뿐 아니라 일을 행함에 앞서 미리 길일을 택하도록 도와주며, 혹 택일을 실수하였더라도 화를 면할 수 있도록 사찰에서 공덕을 닦도록 하였다.

  10. 대한불교조계종 심원사 심원사 삼층석탑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6-15
    심원사 삼층석탑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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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재명] 심원사 삼층석탑
    [지역] 성주
    [조성연대] 통일신라
    [형태사항] 폭 3.2m 높이 4.6m
    [지정사황] 경북지방문화재자료 116호
    [수량] 1개
    [관리자] 심원사

    이중기단 위에 쌓아올린 삼층석탑(三層石塔)으로 하층 ․ 상층기단에 탱주(撐柱) 2주가 조식되어 있고 기단 받침은 호각형 2단이다. 상층기단은 장대석(長臺石)과 판석(板石)으로 구성되어 있고, 면석에는 우주(隅柱)와) 탱주(撐柱)를 두 개씩 모각했다. 삼층석탑의 탑신(塔身) 옥개받침은 4단이며 각 층이 단석이고 탑신 괴임 받침은 각형1단으로 모각했다.
    상륜부는 남아 있지 않으며 탑의 양식으로 보아 9세기 전기 석탑으로 보인다. 사리장치(舍利裝置)는 기단 아래 지하에 마련되어 있는데 정교하게 치석(治石)된 판석으로 짜여진 입방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