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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덕사지 興德寺址요약정보 및 구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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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전화 043-201-4266
홈페이지 https://www.cheongju.go.kr/jikjiworld/index.do
  주소 충북 청주시 흥덕구 직지대로 713
   충북 청주시 흥덕구 운천동 866 청주고인쇄박물관
   713 Jikji-daero, Heungdeok-gu, Cheongju-si, Chungcheongbuk-do

  • 상품 정보

    상세설명

    흥덕사는 어느 때, 누구에 의해서 창건되었는지 알 수 없다. 뿐만 아니라 흥덕사의 자취나 역사를 짐작할 수 있는 기록도 전혀 없다. 흥덕사지의 발굴을 통해서 흥덕사의 대략적인 규모는 파악되었으나, 흥덕사가 화재로 없어지게 된 이유 등은 전혀 알 길이 없다. 옛 흥덕사지였던 청주시 운천동 866번지 일대는 현재 사적지 제315호로 지정되어 있고 40,990㎡의 부지에 80㎡(24평)의 금당이 복원되어 있으며, 청주고인쇄박물관이 관리를 담당하고 있다.


    1985년 발굴조사 결과 금당터와 강당터, 그리고 탑터와 이들을 둘러싼 회랑터 일부가 발견되었고, ‘흥덕사’라고 새겨진 청동금구 조각이 나와 절의 이름이 흥덕사였음을 알게 되었다. ‘대중 3년명(大中 3年銘)’이라 새겨진 기와와 기타 유물들로 보아 늦어도 9세기에 지어져 고려 후기까지 그 명맥을 유지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치미, 기와조각, 그릇들과 청동제품이 많이 출토되었고, 현존하고 있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인『직지심체요절』을 인쇄한 곳으로 그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현재의 모습은 발굴 결과에 의해 금당과 삼층석탑을 복원한 것이며, 인근에 청주고인쇄박물관이 건립되어 인쇄와 관련된 문화의 변천과 발전 과정을 살펴볼 수 있다.


    「직지」가 흥덕사에서 간행되어 유네스코(UNESCO) 세계기록유산(Memory of the World)에 등재됨으로써 현존하는 세계 최고(最古)의 금속활자본으로 인정된 세계기록유산인 만큼, 흥덕사는 「직지」의 요람으로써 세계 금속활자인쇄사에 영원히 남게될 것이다. 「직지」의 위상이 곧 흥덕사의 위상이며, 흥덕사의 위상이 곧 「직지」의 위상에 직결되는 것이다. 우리들이 한국의 고인쇄출판문화에 대한 식견을 높이고 세계 문화예술에 대한 안목을 계발해 나갈 때, 세계기록유산 「직지」와 흥덕사의 위대한 금속활자인쇄술은 세계의 도처에서 살아 숨쉬게 될 것이다.


    문화재명 : 청주 흥덕사지 (淸州 興德寺址)

    지정구분 : 사적 제315호

    지정일 : 1986. 5. 7.

    시대 : 고려시대

    면적 : 34,337㎡

    소재지 : 충북 청주시 흥덕구 직지대로 713 (운천동)

    관리기관 : 청주시

    흥덕사지는 연중무휴 상시 개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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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개·새소식

    소개글

    총 9 건

    흥덕사지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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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흥덕사지 출토유물 - 흥덕사 금구
      작성자/작성일
      두레박 24-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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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갑인오월 일서원부흥덕사금구일좌(甲寅五月 日西原府興德寺禁口壹坐)라는 명문(銘文)이 있는 청동금구편은 흥덕사지의 훼손된 부분에서 수습된 것으로 불에 타서 파손되고 일그러진 일부에 지나지 않으나 흥덕사지의 명칭을 알려주는 명기(銘記)가 있어 귀중한 유물이다.


      현재 상태로는 금구의 전면과 후면이 불분명하나, 한쪽 면에는 당초문(唐草紋)이 양각되어 있고 다른 한쪽 면에는 연화문(蓮花紋)이 양각되어 있다. 명문이 양각된 측면에는 중앙에 3조의 융기선을 쳐서 좌우로 나누었으며 그 선 위로는 고리가 달려 있다.


      고리 밑으로부터 시작되는 양각문은 자경 2cm의 정자체로 썼으며, 현재 15字만이 남아 있으나 그 아래로 시주한 사람의 이름 등이 더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시대의 양식을 잘 따른 연화문과 당초문 등의 문양이나 <서원부>라는 지명 등으로 볼 때, 금구의 제작연대에 해당되는 <갑인년>은 고려 광종 5(954)년으로 추정되고 있다. 금구의 크기는 현재 길이 36cm, 측면너비 11cm이다.

    2. 흥덕사지 출토유물 - 계향사지 와편
      작성자/작성일
      두레박 24-07-21

      "계향지사(桂香之寺)"라는 명문이 있는 기와조각(瓦片)이다. 어골문(魚骨紋)이 새겨진 평와(平瓦)의 문양 하단에 양각선(陽刻線)으로 세로가 긴 장방형의 구획을 정하고 좌종서(左從書)의 4자 2열로 양각되어 있다.


      현재 이 기와조각에는 좌우로 나란히 <계향지사>라는 명문 4구획이 나타나고 있는데 자경은 약 2.5cm이며 정서체에 가깝다. 기와의 질은 회색의 대토에 잔모래가 많이 섞여있어 정선되지 못한 편이며 뒷면에는 삼베자국이 남아있다.


      서회랑지 중간부의 바닥에서 출토되었는데 이와 동일한 명문이 있는 기와가 우암산의 관음사에서도 출토된 바 있어, 이에 대한 해석은 앞으로 우암산지역을 포함한 청주시 일원의 정밀조사가 이루어져야 확실해질 것이다. 기와조각 왼쪽에는 손으로 누른 흔적이 있는데 손가락모양이 뚜렷하며 지문까지 나타나 있다.


      이 기와는 통일신라시대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크기는 현재 길이 18cm, 너비 17cm, 두께 2.2cm이다.

    3. 흥덕사지 출토유물 - 대중삼년 와편
      작성자/작성일
      두레박 24-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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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중삼년(大中三年)이라는 명문이 있는 기와조각(瓦片)이다. 상·하단에 어골문이 시문(施紋)된 평와의 중간부에 장방형의 구획을 정하고 좌종서(左從書)로 명문이 양각되어 있다. '대중'은 당 선종의 연호로 대중 3년은 서기 849년에 해당되며, 신라 문성왕 11년이다.


      "사지의 시대를 알려주는 귀중한 자료인데 서회랑지의 고막이 벽에 끼어있던 사실로 미루어 초창 당시에 쓰였던 기와임에 틀림없으며, 후대에 중창되면서 다른 석재들과 함께 끼어 들어간 것으로 생각된다.


      대토는 회색으로 모래가 많이 섞여 있고 두께가 얇은 편이며 뒷면에 빗질한 흔적이 있다. 이 기와는 통일신라시대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크기는 현재 길이 23.5cm, 너비 18.3cm, 두께 1.5cm이다.

    4. 흥덕사지 출토유물 - 석경판편
      작성자/작성일
      두레박 24-07-21

      석경(石經) 판편(版片)은 검은 점토암의 석판(石版)에 한 면을 고르게 다듬질하고 음각의 선으로 구획을 나누고 각 구획마다 천인상(天人象) 등을 선각(線刻)한 것이다.많은 조각으로 분리되어 유실되고 3조각만이 금당지에서 발견되었다.


      구름에 올라서 있는 천인상은 바람에 나부끼는 천의(天衣)자락이 가는 선으로 새겨져 유려한 모습이나, 머리부분이 없어져 원상을 파악하기에는 힘들다. 뒷면은 편편하나 앞면에 비하면 소홀한 편이고 하단은 모나지 않도록 깎아서 V자형을 이루고 있다.


      이 석경판은 고려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크기는 현재 길이 18.5cm, 너비 16.5cm, 두께 1.6cm이다.

    5. 흥덕사지 출토유물 - 치미
      작성자/작성일
      두레박 24-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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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치미는 금당지 북편에서 거의 일괄 출토되었는데 금당이 소실되면서 떨어진 자리에 지금까지 별 이동이 없이 묻혀 있었던 듯하다.


      전체의 높이는 1.5m 이상일 것으로 추정되어 이 사찰건물의 웅장한 모습을 잘 나타내주는 것이다. 짙은 회색의 정선된 대토이며, 단면의 붉은 색조로 보아 상당히 고온에서 구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한쪽 면이 많이 파손되기는 했으나 추정하여 복원할 수 있는 상태이다.


      용마루 끝의 적새와 접하는 부분은 거의 잔존하고 있으나 깃 부분의 파손이 심하다. 등 부분은 언강부가 구비된 미구기와와 같은 형태를 갖추고 있다. 깃과 등의 많은 부분을 복원한 결과 상부와 하부를 따로 만들어 결합시켰음을 알 수 있었다. 배 부분에는 2조의 덧붙임 융지선을 두어 측면과 등을 구분하고 있으며 등과 측면에 모두 파상문(波狀紋)을 음각하였다.


      반원형의 깃 부분은 층단형을 이루고 있으며 각 단마다 어골문이 새겨져 있다. 이 치미는 고려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크기는 현재 높이 약 150cm, 측면너비 약 100cm, 폭 58cm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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