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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종지(宗旨)
    작성자/작성일
    두레박 24-04-13

    종지(宗旨)란

    종단의 핵심 사상, 교의를 말한다. 조계종의 종지는 * 종헌(宗憲) 제2조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표현)하고 있다. 조계종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자각각타(自覺覺他) 각행원만(覺行圓滿)한 근본교리를 받들어 체득하고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 전법도생(傳法度生)함을 종지로 한다.

    이 종지를 한글로 풀어 보면 석가모니 부처님의 스스로도 깨치고 남도 깨닫게 하며 깨달음의 행이 원만한 근본 가르침을 받들어 체득하고, 사람의 마음을 바로 가리켜(直指人心) 성품을 보아 부처가 되어(見性成佛) 법을 전하여 중생을 건너게 한다(傳法度生)는 말이다.

    여기에서 석가모니 부처님의 근본교리란 부처님이 깨치고 설하신 중도, 팔정도, 사성제, 무아, 공을 말한다. 이 근본교리를 받들어 체득하고 마음을 바로 가리켜 자성을 보아 부처가되며, 그 진리로 중생이 부처가 되게 한다는 말이다.

    * 종헌(宗憲) :
    대한불교조계종의 종헌은 종단 운영의 근본 질서를 규정하는 최고 법규로서 국가로 말하면 헌법(憲法)과 같은 것이다. 다른 법률이나 명령으로 변경할 수 없는 종단의 최고 법규로 종헌은 전문과 24장 131조의 항목과 부칙으로 구성되어 있다.

  2. 종명(宗名)
    작성자/작성일
    두레박 24-04-13

    대한불교조계종(大韓佛敎曹溪宗) 명칭

    대한불교조계종(大韓佛敎曹溪宗)은 대한민국 불교의 여러 종단 중에서 조계종을 말하며 1700년 한국불교의 역사와 전통을 계승한 대표 종단이다.

    조계종의 ‘조계(曹溪)’ 라는 명칭은 초조 보리달마로부터 시작된 선종(禪宗)을 확립시킨 육조혜능(六祖慧能)대사의 법호에서 유래한다. 조계는 원래 중국 광동의 지역 이름이지만, 조계산 보림사를 중심으로 하는 혜능대사의 영향으로 선을 상징하는 이름이 되었다.

    우리나라에는 선종이 전해진 통일신라시대 이전과 그 이후에도 불교의 여러 종파가 있었다. 조계종 이외에도 화엄종, 천태종, 정토종, 율종 등 다양한 종단이 고려시대까지 발전하다가 억불숭유 정책의 조선 초기에 국가에 의해 선교양종(禪敎兩宗)으로 통합되기도 하였으나 곧 이 선교양종마저 해산 당했다. 이후 국가가 인정하는 종단은 없었으며, 수행의 전통을 간직한 스님들에 의해 조계종 법맥을 이어 오다가 일제 강점기인 1938년 조선불교 총본산 조계사를 창건하고 종단 재건을 논의하면서 중국과 다른 나라에는 없는, 오직 우리나라에 고유하게 전해오는 종명(宗名)인 조계종(曹溪宗)을 복원하였다(1941년).

    그리고 광복 후 승단정화운동을 거쳐 1962년 비구-대처 통합종단으로 출범할 때 현재의 대한불교조계종이 되었다. 조계종은 선(禪)을 중심으로 하되 불교의 다양한 종파의 가르침을 회통하는 통불교(通佛敎) 전통의 종단이다.

  3. 중흥조(中興祖) 태고보우국사
    작성자/작성일
    두레박 24-04-13

    중흥조(中興祖)란
    중흥조는 종단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공로가 있는 조사스님을 말한다. 조계종의 중흥조 태고보우(太古普愚, 1301~1382)국사는 고려 말의 고승으로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간화선의 선법으로 깨달음을 성취한 스님이다.
    조계종의 지금 대부분 스님들은 태고선사의 법맥을 이어받고 있다.

    중흥조(中興祖)태고보우국사의 생애와 사상

    국사는 13세에 양주 회암사에서 가지산문의 광지선사를 은사로 출가하였다. 19세에 구산의 장자 선문(禪門)이었던 가지산문 총림인 보림사에서 “만법귀일 일귀하처(萬法歸一 一歸何處)” 화두를 참구하기 시작했다.
    교학연구에도 힘써 26세에 승과(僧科)인 화엄선(華嚴選)에 합격하였다. 30세 때 대도를 성취하고자 용문산 상원사에서 12가지 큰 서원을 세우고 간절히 기도하였다. 33세에는 일대사 인연을 성취하지 못하면 목숨을 던지겠다는 각오로 성서 감로사에서 7일 동안 먹지도 않고 밤낮으로 용맹정진한 끝에 지견이 열렸다. 37세에 불각사에서 『원각경』을 읽다가 알음알이를 깨어버렸다. 38세에 전단원에서 동안거 정진을 하였는데, 자나깨나 한결같은 오매일여(寤寐一如) 경지에 이르러 무자 화두를 타파하고 마침내 확철대오 하였다.

    깨친 후 고향인 양평으로 돌아가 부모님께 효성을 다했다. 41세에는 북한산 중흥사 주지로 추대되어 후학을 지도했다. 이 무렵 일본과 원나라 스님들이 찾아와 교류하였으며, 외국스님들에게 원나라 남쪽에는 명안종사(明眼宗師) 들이 계시니 찾아가서 전법인가를 받으라는 권유를 들었다. 이에 46세에 원나라 원경(북경)으로 가니 황제가 명성을 듣고 황실로 초빙하여 황태자를 위한 법문을 청했다. 이때 볼모로 와 있던 왕자 기(祺, 후에 공민 왕)를 만났다. 기왕자는 원나라 황실에서 융성한 예우를 받던 태고국사에게 존경의 예를 표하며 후일 자기가 왕이되면 스승으로 모시겠다고 말하였다. 태고국사는 무심한 마음으로 남쪽으로 가서 절강성 하무산 천호암의 석 옥(石屋, 1272~1352)선사를 만났다.

    태고국사는 석옥선사를 만나 문답한 기록은 이렇게 전한다. 방장실에 나아가 깨달은 바를 말하고 [태고암가]를 올렸다. 석옥화상은 매우 장하게 여기고 우선 시험하여 물었다.
    “그대는 이미 그런 경지를 지났지만 다시 조사의 관문이 있는데 알겠소?”
    “어떤 관문이 있습니까?”
    “그대가 깨달은 바를 보니 공부가 바르고 지견(知見)이 분명하오. 그러나 그것을 모두 놓아버리시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것이 이장(理障)이 되어 바른 지견을 방해할 것이오.”
    “놓아버린 지 오래입니다.”
    “그렇다면 쉬시오.”
    석옥화상은 미소를 지으며 ‘불법이 동방으로 가는구나!’ 하고 자신의 가사를 주어 믿음을 표하며 말하였다.
    “이것은 노승이 평생 지니던 것이오. 오늘 그대에게 주니 그대는 이것으로 길잡이를 삼으시오.”

    이와 같이 태고국사는 48세에 처음으로 간화선을 깨치고 중국 임제종 조사로부터 확철대오를 인가 받았다. 국사는 귀국 길에 선원의 규범집 『백장청규』와 스님들의 교과서인 『치문緇門』을 구해서 돌아와 고려에 전파하였다. 고려로 돌아와 양평 소설산으로 들어가 몸소 농사를 짓고 유유자적한 시절을 보냈다. 52세가 되자 원나라에 볼모로 있던 왕자 기가 돌아와 공민왕이 되어 서울로 초청하였고 여러 차례 거절하다가 간곡한 간청에 설법을 하였다.

    1356년에 국사는 공민왕의 거듭된 청으로 왕사(王師)가 되었다. 공민왕은 태고국사를 왕사로 모시고 조정에 명하여 광명사에 원융부(圓融府)를 설치하고 불교계를 주관케 하였다. 태고왕사는 원융부를 통하여 구산선문 (九山禪門)의 통합을 추진하였다. 공민왕은 스님을 다시 국사(國師)에 추대하고 고향인 양평을 군으로 승격시키고 지리산 영원사에 모셨으나 국사는 가지 않았다. 그 뒤 1378년 우왕이 즉위하여 다시 국사로 모시고 봉암사 에 주석케 하였다. 1381년 태고국사는 봉암사를 떠나 고향 소설산(지금의 양평 용문산)으로 돌아가 가벼운 병을 보이시더니 어느 날 새벽에 목욕한 뒤 옷을 갈아입고 단정히 앉아 게송을 짓고는 입적하였다.
    세수 82세, 법납 69세였다.

    태고국사는 간화선맥을 전파한 우리나라 최초의 선사이다. 이후 국사의 법맥은 뒤에 서산 – 사명 대사로 이어지고 근세에는 경허 - 용성 선사로 이어져 지금의 조계종이 형성된 것이다.

  4. 중천조(重闡祖) 보조지눌국사
    작성자/작성일
    두레박 24-04-13

    중천조(重闡祖)란
    중천조란 종단의 종지를 분명하게 밝힌 조사스님을 말한다.

    중천조(重闡祖) 보조지눌국사의 생애와 사상


    조계종의 중천조(重闡祖) 보조지눌(普照知訥, 1158-1210) 국사의 속성은 정(鄭)씨이며 황해도 서흥(瑞興)에서 태어났다. 목우자(牧牛子)는 국사의 자호(自號)이며 입적한 후 고려 희종은 불일보조(佛日普照)라는 시호를 내렸다. 보조국사는 어려서 입산하여 25세에 승선(僧選)에 합격하였다. 그 당시에는 승과제도가 있어 승과에 합격하면 출세의 길을 얻을수도 있는 시대였으나 보조국사는 그것을 홀연히 버리고 개경을 떠나 깨달음의 정진에 몰두하였다. 전남 창평 청원사에서 『육조단경』을 읽다가 홀연히 마음이 밝아졌고 1185년에는 보문사에서 대장경을 통독하였다. 팔공산 거조사에서 정혜(定慧)를 닦다가 1198년 지리산 상무주암으로 들어가 정진 하였다.

    1200년 되는 43세에 송광산 길상사(지금의 송광사)로 옮겨 정혜결사를 추진하여 11년 동안 수행자들을 지도하고 법을 행하여 승·속이 함께하는 총림(叢林)을 이루었다. 보조국사는 이통현(李通玄)의 『화엄론』에서 선교가 둘이 아님을 확신하고 “세존이 입으로 설하신 것이 교(敎)요, 조사(祖師)가 마음에 전한 것이 선(禪)”이란 결론에 이르렀다.

    보조국사 지눌은 사람들에게 항상 『금강경』을 지니고 암송하게 하였으며 법을 세우고 그 뜻을 말할 때는『육조단경』을 전거(典據)하였고, 또 이통현의 『화엄경』과 『대혜어록』을 참고하였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보조국사의 사상들은 12세기 고려의 정치적, 사회적 문제를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는 부분이다. 우선 정치적으로 타락한 불교를 바로 잡아 정법(正法)을 구현하고 불교적으로는 선교(禪敎)간의 갈등을 해소하는 일이 그 당시 고려불교의 과제였기 때문이다. 스님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평생을 일관하셨으며 스님의 사상도 그러한 고뇌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203년에 국왕(희종)이 송광산 길상사를 조계산 수선사로 이름을 고치고 편액을 내려 격려하였다. 보조국사는 1210년 53세에 법당에서 설법을 하고 법상에서 그대로 입적하였다. 전법제자 진각국사가 정혜결사 2대 법주가 되어 법을 이었으며, 이후 14분의 국사가 배출되었다.

  5. 종조(宗祖) 도의국사
    작성자/작성일
    두레박 24-04-13

    종조(宗祖)란
    종단을 처음으로 일으킨 스님을 말하는데, 대한불교조계종의 종조는 도의(道義)국사(國師)이다. 도의국사는 통일신라 시대에 입당(入唐)하여 인가를 받고 조사가 되어 신라로 돌아와 이 땅에 최초로 선(禪)을 전한 스님이다. 부처님의 깨달음인 선(禪)을 인도에서 중국으로 처음 전한 분이 초조 달마대사 라면 이 달마대사의 선(禪)을 우리나라에 처음 전한 분이 바로 도의국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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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조(宗祖) 도의국사의 생애와 사상

    도의국사는 760년경 지금의 서울에 해당하는 북한군(北漢郡)에서 태어났다. 속성은 왕 씨다. 국사는 부모의 태몽 후 반달이 지나 태기가 있었고 39개월 만에야 태어났다. 출가하여 법명을 명적(明寂)이라 하였다.

    도의국사는 784(선덕왕 5)년에 사신을 따라 당나라로 건너갔다. 오대산에 들어가 문수보살을 예참하자, 허공에서 성스러운 종소리가 나고 산을 울리는 메아리에 신기한 새[神鳥]가 날아다니는 것을 보고 문수보살의 감응을 받았다. 오대산은 중국 화엄의 성지로서 문수보살이 상주한다는 곳이다. 일찍이 자장율사도 이 오대산으로 들어가 문수보살로부터 수기를 받은 불교 성지이다. 도의국사가 오대산에 들어갔던 것은 화엄종으로 출가하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도의국사는 당나라에서 37년 동안 수행 하면서 육조 혜능(慧能 638~713)대사의 조사선(祖師禪)을 접하게 된다. 당시 당나라에는 화엄교학과 함께 새 로운 조사선이 확산되고 있었다. 혜능대사는 경전과 문자에 의지하지 않고 자기 마음을 바로 보아 단박에 깨치는 돈오선(頓悟禪)을 전파하여 크게 주목 받고 있었다.

    도의국사 역시 점차 조사선(祖師禪)에 관심을 갖고 심취하여 혜능대사가 주석한 광동 조계(曹溪)를 참례하기로 한다. 도중에 스님은 혜능대사가 『단경(壇經)』을 설한 광부(廣府) 보단사(寶檀寺, 지금의 대감사)를 참배 하고 그곳에서 구족계를 수지하였다. 그리고 혜능대사의 진신상이 모셔진 보림사(寶林寺)로 가서 조사당에 참배하려 하자 들어가고 나올 때에 문빗장이 저절로 열리고 닫혔다고 한다.

    도의국사는 선종(禪宗)의 발원지 조계산 보림사를 참배한 뒤 본격적으로 길을 나선다. 먼저 강서지방에서 선법을 드날렸던 마조(馬祖, 709~788)선사가 주석했던 홍주(洪州) 개원사(開元寺)로 가서 서당지장(西堂智藏, 735~814)선사의 문하로 들어갔다. 이곳에서 도의스님은 서당선사와 문답하여 오랜 의단(疑團, 의심덩어리)을 마침내 해결하고 깨달아 마음의 체증을 풀었다. 서당선사가 “마치 돌 속에서 미옥(美玉)을 고른 듯 하고 조개껍질 속에서 진주를 주워낸 듯하다”고 기뻐하면서 “진실로 법을 전한다면 이런 사람에게 전하지 않고 그 누구에게 전하랴.” 라고 말하며 깨달음을 인가하고, 법호를 ‘도의(道義)’ 라 지어 주었다.

    하지만 도의국사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백장청규’로 유명한 백장(百丈, 749~814)선사를 찾아가 문답하니 백장선사도 깨달음을 인가하면서 도의스님의 법과 인격에 탄복하여 말하길 “강서(江西, 마조선사를 뜻함)의 선맥이 모두 동국(東國, 신라)으로 가는구나!” 라고 말했다.

    821(헌덕왕 13)년에 도의국사는 드디어 신라로 돌아 왔다. 도의국사가 조사가 되어 돌아와 설악산에 들어갔다는 소식은 점차 신라에 알려졌다. 법의 향기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천하에 퍼졌다. 최치원이 비문에 기록한 바에 의하면 “도를 구하는 이들이 개미떼처럼 몰려들어 배우고 기러기 떼처럼 무리가 되어 떠났다”고 한다. 도의국사가 처음 귀국하여 선을 전하려 할 때는 배척 받아 서울로 가지 않고 변방 설악산에 은둔하였지만 멀지 않아 발심 구도자들이 설악산으로 몰려들어 골짜기가 가득할 정도로 큰 흐름이 형성되었던 것이다.

    우리나라에 최초로 선법을 전한 도의국사는 많은 구도자들에게 설법하였지만 오직 염거선사에게 법을 전하고 열반에 들었다.

    해동 초조 도의국사의 선법을 이은 2조 염거(廉居, ?∼844)스님은 진전사를 떠나 설악산의 억성사(億聖寺, 지금의 선림원지)에 주석하며 조사선(祖師禪)을 전하였다.

    염거스님은 다시 도의국사의 선법을 보조체징(普照體澄, 804~880)스님에게 전하였다. 보조체징스님은 염거스님에게 깨달음을 인가 받은 뒤 837년에 당나라로 건너가 여러 산중의 조사를 만나 문답한 뒤에 “나의 조사가 전한 법 이외에 더 이상 구할 것이 없구나!”하고는 3년 만에 신라로 돌아와 전남 장흥의 가지산(迦智山) 보림사(寶林寺)에서 개당하였다. 이것이 구산선문 중 가지산문(迦智山門)으로 조계종의 시원이 된다. 가지산문은 보조체징스님이 개산(開山)하였지만 이 산문은 도의국사가 우리나라에 최초로 전해온 육조 혜능대사의 남종 돈오선(頓悟禪)의 본산으로 확립되었다. 특히 국왕이 사찰 이름을 보림사(寶林寺)라 지었는데 이것은 중국의 육조 혜능대사가 주석하여 선종의 본산이 된 것과 같이 가지산 보림사도 신라 조사선의 종가로 삼고자 한 뜻이었다.

    이와 같이 해동 초조 도의국사의 전법 이래 우리나라에는 구산(九山)에 선문(禪門)이 우뚝 섰고 고려와 조선을 거쳐 지금의 대한불교조계종에 이르기까지 오랜 시간동안 우리민족의 역사, 정신, 문화의 근간이 되어왔으며 앞으로도 그 문화는 계승, 발전해 나갈 것이다.

    도의국사는 해동 초조로서 달마대사가 동쪽으로 전한 선법을 우리나라 스님으로는 처음으로 전하여 오늘날까지 이어지게 하여 지금의 대한불교조계종의 종조로 모시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