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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1. 도봉본연 (道峰本然, 1873~1949)
    작성자/작성일
    두레박 24-04-14

    석왕사 경성포교당 포교사(1918년)로 활동하다 선학원 설립에 가담한 도봉 스님에 대한 행장 기록은 정확히 남아 있지 않다.
    일부 문헌의 간헐적인 기록에 따르면, 스님은 석왕사 선실 좌주(1915년), 선학원 선우공제회 평의원(1922년), 조선불교유신회 사찰령 철폐 건백서 대표(1922년), 선학원 선우공제회 수도부 이사(1923년), 선학원 선우공제회 서무부 이사(1924년) 등을 역임했고, 1949년 선학원에서 세수 77세로 입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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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73 출생
    1915 석왕사 선실 좌주
    1918 석왕사 경성포교당 포교사
    1921 남전, 석두스님 등과 선학원 설립
    1922 선학원 선우공제회 평의원
    1922 조선불교유신회 사찰령 철폐 건백서 대표
    1923 선학원 선우공제회 수도부 이사
    1924 선학원 선우공제회 서무부 이사
    1949 세수 77세로 선학원에서 입적

  2. 남전한규(南泉翰奎, 1868~1936)
    작성자/작성일
    두레박 24-04-14

    스님은 1885년 해인사 백련암에서 신해 스님을 은사로 득도, 사미계 수지했다.
    이어 해인사 주지 소임(1904년)을 맡고, 1908년 해인사에서 제산 스님으로부터 구족계와 보살계를 수지했다.
    이후 범어사 동래포교소 포교사(1911년), 범어사 임제종 중앙포교소 포교사(1912년), 석왕사 경성포교당 포교사(1917년), 범어사 경성포교당 포교사(1918년)로 활동했다.
    1921년에는 도봉·석두 스님과 선학원을 설립한 후 선학원 선우공제회 평의원(1922년), 직지사 조실(1924년), 재단법인 조선불교중앙선리참구원 초대 이사(1934년)를 역임하며 승풍진작에 힘쓰다 1936년 선학원에서 세수 68세 법랍 51년으로 입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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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68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출생
    1885 해인사 백련암에서 신해스님을 은사로 득도, 사미계 수지
    1904 해인사 주지
    1908 해인사에서 제산스님으로부터 구족계와 보살계 수지
    1911 범어사 동래포교소 포교사
    1912 범어사 임제종 중앙포교소 포교사
    1917 석왕사 경성포교당 포교사
    1918 범어사 경성포교당 포교사
    1921 도봉, 석두스님 등과 선학원 설립
    1922 선학원 선우공제회 평의원
    1924 직지사 조실
    1934 재단법인 조선불교중앙선리참구원 초대이사
    1936 세수 68세 법랍 51세로 선학원에서 입적

  3. 만해 한용운 卍海龍雲 (1879~1944)
    작성자/작성일
    두레박 24-04-14

    1879년 7월 20일(음) 충남 홍성군 홍성읍 오관리 출생. 부친 한응준 선생과 모친 창성 방씨의 둘째 아들로 속명은 유천(裕天), 자(字)는 정옥(貞玉)이다.
    19세기말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해있던 조선의 현실에 눈을 뜨고 출가자의 길을 걷기로 결심했다. 24세 되던 해에 설악산 백담사 주지 연곡(蓮谷)스님을 은사로 사문이 됐다. 이때 계명(戒名)은 봉완(奉玩). 이후 건봉사 만화(萬化)스님 법을 이어 법호를 용운(龍雲), 아호(雅號)를 만해(卍海, 萬海)라고 했다.
    1910년 한일강제병합으로 위기에 빠진 조선불교를 구하기 위해 영호(暎湖)·진응(震應)·금봉(錦鋒)스님 등과 함께 임제종 운동을 전개했다. 그 뒤 만주를 돌아본 후 다시 백담사에 머물게 된 스님은 <조선불교유신론>을 집필하며 ‘신불교운동’을 제창했다. 이후 경성에서 <유심>을 창간했고, 3·1운동에 민족대표로 참여했다.
    이로 인해 스님은 일제에 의해 체포되었다가 1921년에 출옥하였다. 출옥 직전, 임제종 종풍의 계승과 아울러 출옥 후 만해스님의 주석처를 마련하고자 수좌스님들은 최창훈 외 다수 신도에게 기부를 받아 안국동 40번지에 선학원을 마련, 이 후 스님이 머문 선학원은 항일운동과 불조정맥을 전승하는 민족불교의 주된 터전이 되었다. 이듬해 1922년 선학원 ‘선우공제회’ 창립에 스님은 동참하였다.
    1926년 6월 7일, 안국동 40번지를 포위한 종로경찰서 형사들에 의해 지금의 선학원 정문 앞에서 6·10 만세 운동의 주동자로 강제 검거되었다. 1926년은 또한 만해스님이 근대 한국시를 대표하는 독보적인 시집 <님의 침묵>을 펴낸 해이기도 하다. 이듬해 1927년에는 신간회를 발기하고 조선불교청년회를 조선불교 총동맹으로 개편하였다. 1931년 선학원에서 발행한 <선원>의 주요 책임자를 역임하며 대중교화에 매진하였다. 1933년에 심우장에 기거, 해방을 앞둔 1944년 6월 29일에 법납 40세(세수 66세)로 서울 성북구 심우장에서 입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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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79 충남 홍성 출생
    1905 백담사에서 연곡스님을 은사로, 영제스님에게 수계
    1908 학인스님으로부터 '기신론','능엄경' 등을 수학
    1909 유점사에서 월화스님에게 '화엄경'수학
    1910 「승려취처문제건의서」를 당국에 제출, 「조선불교유신론」 백담사에서 탈고.
    1911 박한영 등과 한일불교동맹 체결반대 궐기대회 개최, 조선 임제종 종무원 서무부장과 관장에 취임,『불교대전』편찬.
    1913 불교종무원을 창설, 통도사 불교강사로도 활약, 조선불교회 회장에 취임.
    1915 조선 선종 포교당에 포교사로 취임.
    1919 3.1운동을 주동, 일경에 체포되어 옥중에서 유명한 「조선독립이유서」제출.
    1921 출옥 및 완공된 선학원에서 주석
    1922 선학원에서 <선우공제회> 발기 및 <법보회> 발기.
    1923 조선불교청년회를 창설, 총재 취임.
    1925 오세암에서 선서 『십현담주해』와 시집 『님의 침묵』을 탈고, 이듬해 간행.
    1926 6·10 운동 주모자로 거사 3일전 안국동 40번지(선학원)에서 일본경찰에 의해 긴급 검거.
    1927 독립운동단체인 신간회를 발기, 조선불교청년회를 조선불교 총동맹으로 개편
    1931 선학원 불교잡지 <선원>의 주요책임을 맡아 주요 집필자로 활동하며 대중교화에 매진.
    1933 『유마힐소설경』번역을 시작하였고, 성북동에 심우장(尋牛莊)에서 기거
    1944 6월29일 (음력 5월 9일) 심우장에서 입적

  4. 요사채
    작성자/작성일
    두레박 24-0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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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향원당
    작성자/작성일
    두레박 24-04-14

    서울특별시 종로구 윤보선길 18

    서울특별시 종로구 안국동 82

    18 Yunboseon-gil, Jongno-gu, Seo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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