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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1. 화계사 삼성각(三聖閣)
    작성자/작성일
    두레박 24-0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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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교의 여러 신(神) 중에는 우리나라에서만 믿어오는 신들도 꽤 된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산신과 칠성이다.

    산신(山神)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토속신으로 나이 든 도사의 모습으로 묘사되며 호랑이와 동자를 거느린다.

    칠성(七星)은 기우(祈雨), 인간의 무병장수와 부귀영화를 관장한다. 칠성은 본래 도교에서 신앙하던 것으로, 우리나라에 들어와 민간신앙으로 자리를 잡았다. 본래 북두칠성을 말하지만, 불교와 융합되면서 치성광여래불(熾盛光如來佛)로 격이 상승되었다. 치성광여래불의 좌우에는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이 협시한다.

    독성(獨聖)은 남인도 천태산에서 홀로 깨달아 성인이 된 나반존자를 가리킨다. 희고 긴 눈썹을 가진 도인으로 오른손에는 석장을, 왼손에는 염주 또는 불로초를 들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이 세 신은 본래 별도의 건물에 각각 모시나 오늘날에 와서는 세 신을 함께 모시고 건물 이름도‘삼성각’이라고 부른다.

    화계사 삼성각은 경내 좌측 언덕에 세워져 있다. 본래 있던 산신각을 1885년에 금산(錦山)스님이 중수했던 것을 1975년에 진암(眞菴)스님이 낡은 건물을 고쳐 지은 것이 바로 현재의 삼성각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기와는 동기와를 얹었다. 내부에는 1973년에 조성한 칠성 탱화와 독성탱화, 산신탱화가 봉안되어 있고 외부 벽화에는 심우도(尋牛圖)가 그려져 있다.

    산신상은 2011년 당시 한말선(大法性) 신도회장의 원력과 시주로 주지 수암(秀岩) 스님이 조성 봉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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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화계사 불상(佛像)
    작성자/작성일
    두레박 24-04-15

    불교에 대해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 절을 찾게 되면 먼저 당황스러운 것이 불상의 종류도 다양하고 그 수도 많다는 사실이다. 불교는 부처님을 믿고 가르침을 따르는 종교이기에 부처님의 모습은 하나일 거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제 절에 가보면 여러 모습의 불상을 볼 수 있고 이름도 제각기 다르다. 이것은 왜일까?

    부처란 진리 그 자체이므로 사실 형체로 표현하기는 어렵다. 단지 우리가 불교의 교조(敎祖)로 알고 있는 석가모니 부처님이 인간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그 형체를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 불상의 유래는 바로 이 석가모니불로부터 시작된다. 불상은 석가모니불 시절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부처님께서 열반에 든 후에는 더는 뵐 수 없는 안타까움에 부처님을 대신할 탑을 조성하여 경배의 대상으로 삼았다. 탑만을 경배한 기간은 꽤 길어 석가모니 부처님 열반 후 500여 년까지 계속되었으며, 1세기쯤에 이르러서야 불상이 처음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불상은 처음 헬레니즘 문화의 영향을 받아 나타나기 시작했다. 특히 간다라 지방에서 발견되는 초기 불상들을 보면 얼굴이 서구적이라 어느 정도 수긍이 되는 이야기이다. 이후 인도 중부에서 불상이 제작되면서부터는 인도 고유의 전통을 살렸고, 굽타 시대에 이르러서는 이상적인 모습의 불상이 많이 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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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상은 불교를 전파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중국에 불교가 전해진 것은 1세기경이고, 3~4세기경에는 불상이 함께 유입되어 종교로서 예경(禮敬)의 대상이되었다. 우리나라에는 372년, 고구려에 들어온 전진의 승려 순도가 불경과 불상을 함께 들여왔다.

    이렇게 초기에는 석가모니불을 형상화한 조각상밖에는 없었다. 그러면 과연오늘날에는 왜 이렇게 불상이 많아지고, 다른 신상(神像)들도 절에 많이 모시게 되었을까? 이것은 불교의 독특한 포용력 때문으로 여겨진다. 곧 불교가 세계 여러 곳으로 전파되면서 지역에서 믿어오던 문화들을 불교 내부로 끌어들인 것이다. 진리 그 자체를 뜻하는 비로자나불이 불상으로 형상화되었고, 대중들의 믿음에 맞춰 약사불과 아미타불이 불상으로 만들어졌으며, 아직 출현하지않은 미륵불도 불상으로 제작되었다. 또한, 부처님과 더불어 보살님들도 조각되어 경배의 대상으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모든 진리는 우리 안의 불성(佛性)에 귀결된다. 어떤 경배의 대상을 믿든 자기 자신을 바로 보고 수행 정진하는 것이 중요하다. 부처는 불상이라는 현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불법을 실천하는 과정속에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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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화계사 천불오백성전(千佛五百聖殿)
    작성자/작성일
    두레박 24-0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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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웅전의 왼편에 자리 잡은 천불오백성전(千佛五百聖殿)은 오백 나한을 모신 전각이다. 건물 자체가 높은 단 위에 설치된 데다가 내부에 많은 나한상(像)을 봉안하고 있어 건물 높이가 상당하다.

    봉안된 조각상은 찬하(餐霞) 최기남 거사가 조성한 것으로, 최기남은 1915년 관직에서 물러나 금강산에 들어가 조국의 광복을 기원하며 십팔나한상과 천불상, 오백나한상 등을 조각하였다. 조성한 조각상들을 강남 봉은사와 여주 신륵사에 봉안했다가, 1964년 최기남의 아들 무방(無方)거사의 시주로 천불오백성전을 건립하고 이곳에 모시게 되었다.

    나한(羅漢)은 최고의 깨달음을 얻은 성자를 가리키는 말이다.

    최고의 깨달음을 얻었으므로 부처님이나 보살 못지않게 공양을 받을 만한 위치에 있다. 그래서 이러한 나한을 모신 건물에는 흔히‘오백나한전’, ‘나한전’또는‘응진전’이라는 이름이 붙는데, 이곳만은 특이하게‘천불’이 덧붙여져 있다. 그래서 법당에 불상이 천 개 모셔져 있을 것 같지만 사실 오백나한과 석가모니불, 관음보살, 지장보살이 모셔져 있다. 건물 이름에 ‘천불’이 붙어 있는 것은 천불전과 나한전을 겸한다는 의미이다.

    오백 나한은 경전에 많이 등장한다. 석가모니가 중인도 교살라국 사위성에서 오백나한을 위해 설법을 했다고 하고, 매달 15일 마다 오백나한들을 위한 계를 설하였다고도 한다. 또 석가모니가 열반에 드신 후 중인도 마가다국 칠엽굴에서 오백 나한이 모여 불전을 편찬하였고, 석가모니 사후 600년이 지난 뒤 인도 서북부의 가습미라에서 열린 제 4결집에 모인 비구의 수가 500이라 오백 나한이라 불렀다고 한다. 이처럼 나한은 석가모니 생존시에 따르던 500명의 제자를 뜻하기도 하고, 열반하신 뒤에 여러 가지 중요한 일에 모여들었던 500명의 나한이나 비구를 뜻하기도 한다.

    나한은 우리나라와 중국, 일본에서 특별한 신앙의 대상으로 자리 잡아 오늘에 이르는데,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조성된 오백 나한의 모습이 제각각 다르며 우리 인간들의 모습과 닮아있고 해학적인 모습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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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불오백성전 주련
    통화현관안저심 通化玄關眼底尋 깊고 오묘한 가르침 깊이 들어가니
    색즉공혜공시색 色卽空兮空是色 색이 곧 공이요 공이 곧 색이네
    차시와석즉황금 此時瓦石卽黃金 이때에 기와장이 황금이 되는 때이니
    도심맥맥의심심 道心脈脈意沈沈 보리 구하는 마음 계속 깊이 이어가네.

  4. 화계사 지장보살(地藏菩薩)과 명부시왕(冥府十王)
    작성자/작성일
    두레박 24-0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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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장보살상은 전체적으로 강건한 기상이 엿보인다. 얼굴은 둥그렇지만, 눈매가 길고 콧마루가 우뚝하며, 굳게 다문 입은 용맹스러움이 배어 있다. 설법인(說法印)을 짓고 있는 손매도 탐스럽고 탄력이 있으며 어깨선도 부드러우면서 풍부하다. 무릎은 전후좌우의 길이와 폭이 알맞은 비례를 갖추면서 넉넉한 두께를 유지하여 안정감을 준다. 불의(佛衣)는 상당히 두껍게 표현하여 매우 사실적이다.

    좌우에 시립해 있는 도명존자상과 무독귀왕상은 물론 시왕, 판관, 동자, 사자, 수문장상도 모두 지장보살과 같은 양식 기법으로 제작되었다. 판관의 사모나 시왕의 의관 또한 이 시대의 의제(衣制)를 가늠할 수 있을 만큼 사실적이다. 이렇듯 지장보살상과 시왕상은 당시를 대표할 수 있는 미술사적 의미를 지니고 있을 뿐 아니라 복장 유물까지 온전하게 나와 불교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5. 화계사 명부전(冥府殿)
    작성자/작성일
    두레박 24-04-15

    명부전은 저승(명부)의 세계를 상징적으로 꾸며놓은 전각이다. 죽은 사람들을 고통에서 구원해 주고자 대원력을 세운 지장보살(地藏菩薩)을 모신 곳이며, 또한 저승의 심판관인 열 명의 왕을 모신 곳이라고 하여 지장전(地藏殿) 혹은 시왕전(十王殿)이라고도 한다.
    한가운데에 지장보살이 판사처럼 앉아 있고 주변에는 시왕들이 검사처럼 날카로운 눈매로 아래를 굽어보고 있다. 지정보살 좌우로 지장보살을 돕는 도명존자와 무독귀왕, 시왕을 돕는 동자, 판관과 녹사, 신장 등이 실내 앞면을 가득 메운다.

    한편에 생전에 저지른 죄를 비춰볼 수 있는 업경대가 설치되어 있다. 업경대로 죽은 사람의 죄를 비춰보고 시왕들이 문초를 하며, 이때 지장보살이 망자의 변호사가 되어 망자의 선행을 찾아내 변론을 해 주는데, 그 결과에 따라 극락이든 지옥이든 삼계(三界) 가운데 어디론가 망자를 보내게 된다.

    망자는 죽은 지 49일째가 되는 날에 심판의 결과(업의 선악)에 따라 다음 세상으로 가게 되는 까닭에 후손들은 이날 특별히 정성을 다해 불공을 올린다. 죽은 이가 마음의 미련을 버리고 다음 세상으로 편안히 갈 수 있도록 기원하는 의식을 49재라 한다. 자신의 조상이 좋은 곳으로 가기를 바라며 49재를 지내는 것을 보면서 우리 민족이 효(孝)를 가장 중요한 인간의 도리로 여기고 있음을 새삼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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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면 3칸 측면 2칸, 맞배지붕의 명부전은 나라에서 가장 훌륭한 지장보살과 시왕을 모셔오라는 왕명을 받아 황해도 백천(白川)의 강서사(江西寺)에 있던 지장보살과 시왕상을 이곳 화계사로 모셔 봉안하고(1877년), 익년(1878년) 초암 스님이 조대비(趙大妃)의 시주를 받아 중수한 것이다.

    명부전2001년 기와를 바꿔 얹고 외벽 채색은 물론 내부의 지장보살상, 각종 시왕상, 동자상 등 말끔하게 단장하였다. 하지만 흥선대원군의 친필 현판과 주련, 지장보살의 후불탱화는 1875년에, 시왕 각부 탱화는 1878년에 조성된 그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명부전의 지장보살상은 개금불사를 위한 복장 수습 과정에서 여러 가지 불경(佛經), 다라니(陀羅尼)와 더불어 1649년(인조27)에 강서사에서 제작했다는 발원문이 나와 조성 시기가 밝혀졌으며, 목조지장보살 삼존상 및 시왕 상 일괄은 2014년 보물 제1822호로 지정되었다.

    명부전 주련
    지장대성위신력 地藏大聖威神力 지장보살님의 위대하고 신통한 힘은
    항하사겁설난진 恒河沙劫說難盡 억겁을 두고 설명해도 다하기 어렵나니
    견문첨례일념간 見聞瞻禮一念間 보고 듣고 예배하는 잠깐 사이에
    이익인천무량사 利益人天無量事 사람과 하늘에 이익 되는 일 헤아릴 수 없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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