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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1. 도선사 역대 주지스님 진불장혜성대종사
    작성자/작성일
    두레박 24-04-15

    1937년 경상북도 상주에서 출생하셨으며 19살 되던 해 팔공산 파계사 성전암에서 성철스님을 모신 인연으로, 다음해 청담스님을 은사로 사미계를 받으셨다.
    법명은 혜성(慧惺), 법호는 진불장(振佛獎)이다.
    이후 도선사 삼각선원에서 수행 정진을 시작, 도선사 주지를 역임하면서 당시 암자였던 도선사를 여법한 사찰로 변모시켰다.
    1976년에는 한 보살이 운영하던 보육원을 인수받아 혜명보육원을 설립하고 이후 양로원, 사회복지관 등을 통해 지역복지사업을 꾸준히 펼쳐 왔다.
    1980년 신군부에 의해 고문을 당하고 도선사 주지직을 강제로 박탈당하면서도 불교의 자주권을 지키기 위해 애쓴 스님은 1982년 학교법인 형석학원을 설립하여 청담중·고등학교를 설립하는 등 교육 사업을 펼쳤다. 또한 1995년 청담종합사회복지관을 개관, 교육문화·지역사회조직·지역사회보호·가족복지사업을 실시하며 저소득층 및 기초생활보호 수급권자의 자립능력 배양과 지역사회문제에도 적극 개입하는 등 지역주민의 삶과 질을 향상시키고 건전한 지역사회를 유지하는데 이바지하며 지역민의 사랑을 아낌없이 받는 등 우리나라의 몇 안 되는 존경받는 인물로 꼽히기도 했다.
    이후 중앙승가대학교 학장을 역임하시며 김포학사 이전과 오늘날 4년제 정규대학으로 발전하는데 초석을 다진 부분은 빼놓을 수 없다. 불교의 사회복지, 교육 분야 전반에 걸쳐 선구자적 업적을 남긴 스님은 2018년 7월 25일 도선사 염화실에서 법랍 62년, 세수 82세로 원적에 드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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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선사 역대 주지스님 송타혜명
    작성자/작성일
    두레박 24-04-15

    1927년 경북 문경 가은읍에서 태어난 스님은 1947년 봉암사에서 청담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셨다.
    법명은 혜명(慧明), 법호는 송타(松陀)다.
    스님은 1948년 자운스님을 계사로 사미계, 1955년 부산 범어사에서 동산스님을 계사로 비구계를 각각 수지했다.
    이후 스님은 제방선원에서 10안거를 성만하고 1966년 서울 도선사 실달학원 대교과를 수료했다. 경남 고성 문수암과 옥천사, 도선사 주지 등을 역임하고 서울 도선사포교당 혜명정사에 주석하다 미타정사로 자리를 옮겨 수행 정진해왔다. 청담기념관 관장을 맡아 은사 청담 스님의 가르침을 후학들에게 전하는 데 앞장섰다.
    생전에 혜명 스님은 “불교는 마음을 깨닫고 일체의 속박에서 해탈해 자유자재하고 불생불멸하는 본래불의 청정심을 깨닫는 것”이라며 염불선을 강조했다. 은사 청담 스님이 내린 ‘본래면목 불조(佛祖)의 혜명(慧明)’이란 법명에 부끄럼 없이 수행하겠다는 원력으로 일생을 살았던 스님은70세까지도 매년 섣달그믐이면 1000배 정진을 하시다 2009년 2월24일 서울 미타정사에서 법랍 62년, 세수 82세로 입적하셨다.
    “세상살이에 발심과 원력이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한 스님의 가르침은 희망을 잃고 경제적 고통에 빠진 현대인들이 귀담아야 할 경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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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선사 역대 주지스님 청담순호대종사
    작성자/작성일
    두레박 24-04-15

    1902년 경상남도 진주에서 출생하셨으며 본명 찬호(讚浩), 법명 순호(淳浩), 법호가 청담(靑潭)이다.
    진주지역의 3·1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여 옥고를 치르고 1926년 경남 고성 옥천사(玉泉寺)로 출가하여 박한영 대강백으로부터 경·율·론 삼장을 사사받았다.
    1933년 덕숭산 수덕사 정혜선원 만공(滿空)회상에서 용맹정진. 1948년 성철 스님과 함께 봉암사 결사를 주도하여 교단정화와 조계종의 성립에 이르는 현대 한국불교의 정신적 토대가 되었다. 1954년 불교정화운동을 주도하여 사부대중 347명과 정화불사 성취를 위한 단식 묵언 기도를 하고 이후 대한불교조계종 성립에 중요한 역할을 하셨으며 1956년 조계종 종회의장과 1960년 「대한불교(불교신문)」를 창간하고 편집인 겸 발행인으로 초대사장에 취임하셨다.
    1967년 역경사업, 도제양성, 포교, 군승제, 신도조직화, 석탄일 공휴일 제정과 불교회관 건립 및 승가대학 설립을 주도하셨으며 오늘날 삼각산 도선사를 대찰로 만든 중흥조이다. 1966년 조계종 통합종단 2대 종정, 1970년에 조계종 총무원장을 역임하셨다. 1971년 11월 15일 세수 70세, 법랍 46세로 열반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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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선사 청담대종사
    작성자/작성일
    두레박 24-04-15

    출생과 불연
    청담스님은 구한말이었던 1902년 경남 진주에서 태어났다. 1922년 진주제일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진주공립농업학교에 입학했다. 어릴 때부터 독서와 사색을 즐겼고 3·1운동 시위에 가담했던 정의로운 소년이었다. 금강산 마하연에서 수행하던 박포명스님과 조우하면서 불교와의 인연을 맺었다.
    “왜 불이 뜨겁고 얼음이 찬 줄 아느냐? 마음이 뜨겁다고 생각하고 차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지”라는 스님의 마음법문에 눈이 번쩍 뜨였다. “너무도 놀라웠던 ‘마음’이란 말”에 힘입어 청담스님은 그 마음을 찾는 일에 인생을 걸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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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가와 수행

    스님의 첫 출가는 일본에서 이뤄졌다. 지피지기의 심정으로 일본 유학길에 오른 스님은 1924년 효고현(兵庫縣) 쇼운지(松雲寺)에서 행자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일본의 스님들이 부부생활을 하는 것을 보고 질색한 뒤 고국으로 돌아왔다. 경남 고성 옥천사에서 석전 박한영스님을 은사로 계를 받았다. 27세에 당시 불교학 최고 강원이었던 서울 개운사 불교전수상원에 입학해 대교과를 수료했다. 이후 마음의 본체를 깨닫기 위해 교(敎)를 버린 스님은 그야말로 뼈를 깎는 두타행으로 일관했다.
    최고의 선승으로 각광받던 만공스님 문하에서 공부했다. 기어이 만공스님으로부터 인가를 받은 청담스님은 다음과 같은 오도송을 남겼다.

    “예부터 모든 불조는 어리석기 그지없으니(上來佛祖鈍痴漢), 어찌 현학(衒學)의 이치를 제대로 깨우쳤겠는가(安得了知衒邊事)? 만약 나에게 능한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若人間我何所能), 길가의 오래된 탑이 서쪽으로 기울어졌다 하리(路傍古塔傾西方).” 사량분별(思量分別)의 한계를 뚫고 반야지(般若智)를 성취한 대장부의 기개가 느껴진다.

    설악산 봉정암에서 정진했을 때의 일이다. 쉬는 시간을 따로 두지 않았다. 스님을 남겨놓고 도반들이 모두 떠나고 마는 불상사가 일어났다. 선정(禪定)에서 빠져 나온 스님은 도반들이 모두 백담사로 떠난 것을 알았다. 그러나 폭설(暴雪)로 인해 움직일 수 없었다. 청담스님은 “오히려 공부에 집중할 수 있게 되어 잘 됐다”면서 전혀 놀란 기색이 없었다.

    식량도 떨어진 상황에서 보름이 지났다. 당시 홍천군수와 경찰서장의 꿈에 설악산 산신이 나타났다. “지금 봉정암에 도인이 공부하고 있으니, 빨리 가서 공양을 하라.” 꿈이 일치하는 것이 신기해 두 사람은 봉정암으로 부랴부랴 올라갔다. 피골이 상접한 청담스님을 봤다.

    청담스님은 암울했던 시절 민족불교운동에도 앞장섰던 행동하는 수행자였다. 개운사 강원에 재학하면서 1928년 조선불교학인대회를 주도했고 항일불교의 선봉으로 부상했다. 이후 비구승이 한국불교의 독립성을 수호하기 위해 설립한 선학원의 이사를 맡으면서 젊은 수행자들의 기수가 됐다. 불교정화를 총체적으로 기획한 것도 이 무렵부터다.

    정화를 향한 원력은 해방 후 1947년 봉암사 결사로 이어졌다. 봉암사 결사는 함께 철저히 계율을 지키고 참선정진하며 부처님 당시의 승가를 재현한 수행공동체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수행방식뿐만 아니라 승가의 의식주 전반에 개혁을 단행하면서 오늘날 종단 제도의 모태를 만들었다. 청담스님은 성철 향곡 자운스님 등 당대의 선지식과 결사에 매진하며 한국불교의 희망을 싹 틔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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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교정화운동

    불교정화운동을 빼고 청담스님의 행장을 말할 수 없다. 당신은 정화의 시작이요 끝이었다.

    한일병탄 이후 한국불교는 일제가 저지른 사찰령과 대처승 제도로 쑥대밭이 됐다. 자주성을 잃었고 청정성이 무너졌다. 불교정화운동은 청담스님을 비롯한 진보 진영 스님들을 중심으로 이미 일제강점기에 싹을 틔웠다. 그러나 교단을 장악한 대처승의 장벽에 막혀 돌파구를 좀처럼 찾지 못하던 중 “대처승은 사찰에서 나가라”는 이승만 대통령의 유시는 기폭제가 됐다.

    1954년 9월 전국비구승대회를 마친 뒤 비구승들은 임시종회를 열어 자체적으로 종회의원을 뽑고 간부진을 꾸렸다. 청담스님은 도총섭과 총무원장을 연이어 맡으며 정화운동을 총지휘했다.
    그해 11월 대처승과의 실랑이 끝에 조계사로 들어가 ‘태고사’ 간판을 내리고 선(禪) 수행 종단임을 표방하는 ‘조계사’ 간판을 내걸었다. 이어 청담스님은 조계사 법당에서 교단정화 대강연회를 개최해

    정화의 필연성과 당위성을 주제로 열변을 토했다. 1962년 4월 통합종단이 출범하기까지 소송전과 물리적 충돌의 방식으로 전개된 정화운동은 역경과 시련의 연속이었다. 위기에 몰릴 때마다 중심을 지키고 비구승의 전의를 일깨워준 것은 청담스님이었다.

    “청담스님의 정화활동은 실로 전방위적이었다. 간부 스님들을 대동하고 거의 매일같이 내무부 치안국(당시 명동입구)에 들렀다가 문교부(당시 중앙청, 현 광화문 자리)로, 때로는 경무대와 언론기관을 방문했다. 만나는 사람마다 교단정화 불사의 필요성을 설명하며 그들을 설득했다(전 조계종 총무원장 월주스님).”

    가장 큰 고비는 1960년 11월 대법원이 비구승의 정통성을 부정한 판결이었다. 청담스님은 패소를 예견하고 비밀리에 순교단을 꾸렸다. 이른바 ‘6비구’는 판결일 다음날 대법원 청사에서 할복을 감행했다. 위법망구(爲法忘軀)의 결행은 여론을 비구승 쪽으로 돌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군사정권이 들어서자 청담스님은 “불교정화는 단순히 비구와 대처 간의 싸움이 아니라 국민사상 개조운동”이라며 군부를 설득했다. 마침내 대처승은 원칙적으로 스님이 아니라는 종헌 개정과 비구승의 주도권을 인정한 통합종단의 출범을 성취할 수 있었다.
    제22대 총무원장을 지낸 서운스님은 “승려대회와 6비구 할복사건까지 일련의 과정은 모두 청담스님이 기획하고 지휘했다”며 “스님의 의지와 기백이 아니었다면 절체절명의 위기를 결코 극복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술회한 바 있다.

    불교신문의 창간 역시 정화이념의 실현을 위한 방편이었다. 1960년 1월1일 청담스님에 의해 정화이념 홍보를 위한 기관지로 탄생한 불교신문은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언론으로 성장했다. 총무원장이었던 청담스님은 창간사에서 “종단의 발전상 필요한 과제를 비롯하여 평론, 교리, 문예 그리고 종보, 교계소식 등 다방면의 원고를 취급할 계획”이라며 “우리들의 기관지인 만큼 각자가 자기 것이라는 관념 하에” 아끼고 육성할 것을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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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반에 드시다

    통합종단의 초대 후반기 중앙종회의장을 맡은 청담스님은 신생종단의 기반을 다지는 데 주력했다.

    불교 근대화의 발판이란 전제 아래 △역경 △도제양성 △포교 등 3대 지표를 세웠다. 부처님 말씀을 널리 알리고(역경), 많은 사람들이 부처님 말씀을 따르게 하며(포교), 전법의 과정을 효율적으로 진행할 수 있는 양질의 스님을 키워내자(도제양성)는 게 밑그림이었다. 한국불교 중흥을 위한 장기적 계획의 실행은 스님이 종정에 취임하면서 더욱 힘을 얻었다.

    초대 종정이었던 효봉스님에 이어 1966년 11월 제2대 종정에 청담스님이 추대됐다. 스님은 “임기 5년을 500만 신도의 정화운동에 바치겠다”며 “진아(眞我)만이 과도기적 난관을 극복할 수 있는 모체”라고 소감을 전했다. 특히 청담스님을 회주로 1967년 5월25일 서울 시민회관(현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전국불교도 대표자대회에서 청담스님은 미래의 청사진을 발표했다. 3대 사업을 포함해 의식의 현대화와 군승제의 촉구, 신도조직 강화, 부처님 오신날 공휴일 제정 및 불교회관 건립 등 6개 항의 결의문을 채택했다. 이와 함께 포교의 현대화 활성화를 위해 각 사찰에서 매주 1회 정기법회를 개최할 것과 불교방송국 설립 및 승가대학 신설을 목표로 세웠다. 대회에서 제안된 모든 사업은 우여곡절을 겪기는 했으나 종단이 결국엔 달성한 과제들이다. 무엇보다 종단 백년대계의 근본에는 청담스님의 지혜와 원력이 깃들어 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물론 종단의 성장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청담스님이 야심 차게 내놓은 종단발전방안은 선구적이고 진취적이었으나 계파 간의 분열로 추진에 어려움을 겪었다. 더구나 승풍실추 사건이 터지면서 정화의 가치가 퇴색하는 지경이었다. 이에 청담스님은 ‘탈종’이라는 극약의 처방으로 종도들의 해이해진 정신을 다잡았다. 중진 스님들의 거듭된 만류로 종단에 돌아온 청담스님은 생의 마지막까지 불꽃을 태웠다. 매일같이 군법당 준공식, 대학 강연, 신도법회 등 포교현장을 누비며 불교의 진면목을 가르쳤던 청담스님은 1971년 11월15일 원적에 들었다. 2만 여명의 사부대중이 운집한 다비식은 국장(國葬)에 버금가는 규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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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선사 창건주 도선국사
    작성자/작성일
    두레박 24-04-15

    우리나라 풍수도참사상의 비조이자 신라 말 선종산문 옥룡산문의 개조였던 선각국사 도선은 서울의 진산인 삼각산을 보고 1천년 후 말세에 불법이 다시 일어날 것이라고 천명했다고 한다.

    도선국사(道詵國師, 827~898)는 풍수지리와 도참술의 비조로, 고려왕조를 개창한 태조왕건에게 정신적 이념을 제공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스님이 참다운 고승이라기 보다는 술승 또는 권승으로, 심지어 신화적인 인물인 신승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스님이 저술하였다는 『도선비기』·『송악명당기』등의 풍수도 참류나 『편년통록』·『용비어천가』·『고려사』·『조선왕조실록』등 관찬서에도 풍수도참사상이나 태조왕건과 관련한 것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도선이 불교에 입문하였을 때는 신라 귀족 중심의 불교인 교종(敎宗)이 쇠퇴하고 일반 대중을 상대로 각 개인이 스스로 사색하여 진리를 깨닫는 다는 선종(禪宗)이 보급되고 있는 시기였다. 선종은 대부분 당나라에 유학한 승려들에 의해서 유입되었는데 그들은 선종을 일반 대중에게 전파하기 위한 수단으로 풍수지리를 이용하였다. 그런데 그들이 당나라에서 배운 풍수지리는 일행의 지리법(地理法)이었다. 도선의 스승인 혜철도 당나라에 유학을 다녀왔는데 아마 도선이 스승과 다른 선승(禪僧)들에게 중국의 풍수이론을 간접적으로 배우게 된 것으로 추측된다. 당시 풍수지리를 배운 많은 선승들과 그 이전에도 한반도 전역에는 한국의 자생 풍수가 있었을 텐데 왜 도선을 우리 나라 풍수의 원조(元祖)로 보는 것일까? 도선은 한반도 전역을 답사하면서 경험을 통하여 국토에 대한 각종 비기(秘記)와 답산가(踏山歌)를 남겼을 뿐만 아니라 한반도 산천의 형세를 유기적으로 파악했다. 즉 단순히 풍수지리 이론의 적용이 아닌 국토 공간에 결함이 있는 곳을 보완해주기 위해 인공 산을 만들고 제방을 쌓고 비보사탑을 세워 기울어져 가는 국운을 회복하려고 노력하면서 독특한 한국의 풍수사상을 정립했기 때문일 것이다.

    도선은 37세가 되던 경문왕 4년(서기 864년) 지금의 전라남도 광양군인 희양현(曦陽縣)에 있는 백계산(白鷄山) 옥룡사(玉龍寺)에 35년간 머물면서 전국에서 구름처럼 모여드는 학도들을 가르치다 효공왕 2년(898년) 72세로 입적하였다. 그의 풍수지리 사상은 고려와 조선시대를 통하여 우리 민족의 가치관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신라 효공왕은 죽은 도선에게 요공국사(了空國師)라는 시호를, 고려 현종은 대선사(大禪師), 고려숙종은 왕사(王師)를 추증했고, 고려 인종은 선각국사(先覺國師)라는 시호를 내렸으며 의종은 비를 세웠다. 도선에 관한 설화가 옥룡사 비문 등에 실려 있으며 도선의 저서로는 『도선비기(道詵秘記)』, 『도선답산가(道詵踏山歌)』, 『송악명당기(松岳明堂記)』, 『삼각산명당기(三角山明堂記)』등이 전한다고는 하나 진짜로 도선의 것인지 아니면 후대에 누군가 도선의 이름을 도용하여 작성한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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