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총 14 건

소개
  1. 증심사 사천왕문과 사천왕상
    작성자/작성일
    두레박 24-06-06

    증심사를 수호하는 사천왕문과 사천왕상

    증심사 도량 내에서 가장 마지막으로 복원한 건축물인 증심사 사천왕문과 사천왕상은 본래 1609년에 중창한 정문 누각인 취백루 1층에 모시고 있었으나 6.25때 화재로 소실되고 말았다. 2000년대 초반 증심사 주지를 역임하셨던 일철스님과 진화스님이 이를 안타깝게 여겨 2003년 사천왕문 복원불사의 원력을 세우고 2006년부터 사천왕상 복장봉안을 위한 사경 100일 기도를 봉행했다.

    그 후, 증심사 집단시설지구이전공사로 공사재개가 늦어졌던 사천왕문 복원 불사는 지장스님이 주지로 부임한 2009년부터 다시 재개 되어 그해 8월 6일 상량식을 봉행했다.

    2011년 사천왕상 채색 및 단청불사 시작해 2012년 2월 23일에는 사천왕상 복장 유물 안치 재현 의식을 치렀다. 사천왕상 불복장은 불복장 전통의식을 전수받은 용화사 주지 도원 수진 스님이 집전했다. 이튿날 증심사 주지를 역임하셨던 영조스님, 지장스님, 당시 주지인 연광스님, 동구청장 등 500여 명의 대중들이 참석한 가운데 사천왕상 복장 봉안 및 점안식을 봉행했다.

    증심사에 사천왕문을 복원하기 전에는 광주지역에 전통적 사천왕문이 있는 사찰이 없었다. 민족사의 우여곡절과 함께 사라져버린 사천왕문을 복원하고 다시금 온전한 사천왕상을 모셨다는데 의미가 있을 것이다.

    사천왕문 및 사천왕상 복원 추친 경과

    2003년 복원 사업 계획
    2005년 7월말 사천왕문 착공
    2005년 11월 사천왕문 조성을 위한 각종 목재 구입 및 목재 다듬기, 사천왕상 조각 작업 진행
    2005년 11월 4일 ~ 2006년 2월 12일 사천왕문 복원불사 원만성취 100일 화엄신중기도
    2006년 11월 25일 ~ 2007년 3월 4일 사천왕상 복장봉안 위한 1차 100일 사경기도
    2007년 3월 4일 ~ 6월 12일 사천왕상 복장봉안 위한 2차 100일 사경기도
    2007년 6월 13일 ~ 9월 20일 사천왕상 복장봉안 위한 3차 100일 사경기도
    2009년 3월 14일 ~ 6월 23일 사천왕상 봉안불사 4차 100일 사경기도
    2009년 8월 6일 午時 사천왕문 복원불사 상량식
    2012년 2월 23일 사천왕상 복장 유물 안치 재연 의식
    2012년 2월 24일 사천왕상 복장 봉안 및 점안식


    9ff1d3b15201a5263ca08b7451432abb_1717659376_58.jpg
     

  2. 증심사 7층석탑
    작성자/작성일
    두레박 24-06-06

    9ff1d3b15201a5263ca08b7451432abb_1717659176_07.jpg
    5층석탑과 나란히 있는 7층석탑


    9ff1d3b15201a5263ca08b7451432abb_1717659194_72.jpg
    7층석탑


    일체의 복덕, 지혜와 모든 행복의 근원이 담긴 7층석탑

    오백전 옆 5층 석탑과 나란히 위치한 7층 석탑은 통일신라시대 석탑에 비해 체감비율이 작아 전체적으로 매우 가늘고 긴 느낌이 들며 안정감이 없어 보인다. 가장 큰 특징은 탑신 부분에 화문과 산스크리트어가 양각되어 있다. 그래서 범자(梵字) 7층 석탑이라고도 부른다. 각 층의 4면에 동일하게 새긴 글씨를 위에서부터 아래로 읽으면 ‘옴마니반메훔’. 보통의 석탑과는 많이 다른 형태다.


    9ff1d3b15201a5263ca08b7451432abb_1717659223_04.jpg
    옴마니

    9ff1d3b15201a5263ca08b7451432abb_1717659237_64.jpg
    반메훔


    옴마니반메훔은 ‘육자대명주’, ‘육자대명왕진언’이라고도 부르는 관세음보살의 보호(寶號)다. 이 보호는 아미타불이 관세음보살을 보고 칭찬한 말로, 일체의 복덕 지혜와 모든 행복의 근원이라 하여 소중히 여겼다. 범자 진언 장엄은 진언을 염송하면 일시에 많은 공덕을 쌓을 수 있고 모든 어려움을 면할 수 있다고 믿는 기복신앙으로 인해 주로 조선시대에 성행했다. 7층 석탑의 조성 시기는 조선 중기 이후로 추정되며 증심사에 있는 석탑 중에서는 가장 후대의 작품이다.


    9ff1d3b15201a5263ca08b7451432abb_1717659262_04.jpg
    7층 서탑의 꽃문양


    9ff1d3b15201a5263ca08b7451432abb_1717659274_31.jpg
    1999년 석조보살입상과 7층석탑

  3. 증심사 5층 석탑 속 사라진 보물
    작성자/작성일
    두레박 24-06-06

    9ff1d3b15201a5263ca08b7451432abb_1717658781_56.jpg
    1910년 유리건판 속 5층 석탑


    9ff1d3b15201a5263ca08b7451432abb_1717658798_6.jpg
    일제강점기 관보


    증심사 경내에는 시대를 달리하는 석탑 3기가 모셔져 있다. 그 중 5층 석탑은 7층 석탑과 함께 오백전 옆에 있다. 고려후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5층 석탑은 탑으로서 가치보다 이곳에서 나온 보물들의 이야기로 유명하다.

    1933년 일제강점기 시절, 해체 수리를 하던 중에 탑 안에서 5층 철탑, 작은 철불 2구, 수정1개, 염주로 추정되는 청옥 23개, 금동불 2구가 나왔다. 이에 일제강점기 문화재보호법 「조선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에 의거해 1936년 보물 제211호 금동석가여래입상, 보물 212호 금동보살입상으로 지정되었다.


    9ff1d3b15201a5263ca08b7451432abb_1717658824_02.jpg
    199년 5층 석탑 위치

    9ff1d3b15201a5263ca08b7451432abb_1717658840_94.jpg
    현재 5층 석탑 위치


    해방 후 1955년 보물로 지정되었던 문화재들이 일괄로 국보 승격할 당시 두 불상도 국보 제211호, 제212호로 지정되었으나 6.25 전쟁 중 경찰서 금고에 보관했던 불상이 분실 되고만다. 1957년 문화재위원회 조사 이후에는 국보 해제가 되어 행방을 알 수 없는 사연을 가지게 된 것이다. 아쉽게도 분실된 유물들의 사연은 1963년 2월 5일자 경향 신문 기사를 살펴보면 알 수 있다. (아래의 글은 기사의 전문을 요약·수정 글)


    9ff1d3b15201a5263ca08b7451432abb_1717658870_02.jpg
    9ff1d3b15201a5263ca08b7451432abb_1717658870_55.jpg
    1963년 2월 5일 경향신문기사


    국보급 두 불상의 마지막 모습을 본 것은 1950년 5월이었다고 한다. 당시 광주 조선대에서 한국 고미술에 대한 특별강좌가 있었다. 국립박물관의 김재원 관장과 최순우 선생이 특별강좌를 마치고 광주 근방의 문화재를 살피고자 광산군 효지면에 있는 증심사로 갔을 때였다.

    증심사에 있어야 할 두 국보불상이 없었다. 공비 출몰로 사찰이 불안하다고 해서 경찰서장이 가져갔다는 주지스님의 말씀이었다. 다시 경찰서로 갔을 때 서장은 금고에서 소중히 보관하던 불상을 일행 앞에 내보여주었다.

    그러나 6·25 전쟁의 혼란이 가신 뒤 여러 전문가들이 다시 확인하려 했을 때는 이미 두 불상의 행방은 알 길이 없었다. 서장은 바뀌고 불상은 간 곳이 없었던 것이다. 당시의 서장이 전하기를 금동불상들은 금고 속에 둔 채 6·25 전쟁 중 이동했다는 것이다.

  4. 증심사 오백전과 오백나한님
    작성자/작성일
    두레박 24-06-06

    9ff1d3b15201a5263ca08b7451432abb_1717658422_36.jpg
    오백나한전 내부


    세종대왕 재위 시절(1443년), 광주의 생명젖줄인 경양방죽을 축조한 광주목사 김방은 관세음보살 현몽을 좇아 오백전을 불사했다. 6.25전쟁 당시 다른 전각은 불에 탔으나 증심사 오백전만은 불에 타지 않았던 영험한 곳이다. 증심사 오백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좁은 공간에 500명의 나한을 모시다 보니 공간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 불단을 ‘ㄷ자’ 형으로 배치했다.

    대웅전 같은 화려한 닫집도 없다. 그저 비어 있는 공간을 찾아 안치하다 보니 대들보에 자리를 차지하고 들어앉은 나한도 있다. 그들의 표정만큼이나 재미있는 풍경이다. 증심사 오백나한은 모두 흙으로 빚은 것들이다. 전남지방에서 조선 초기에 오백전이 지어진 절은 증심사가 유일한 것이어서 더욱 귀중하다.

    증심사는 매년마다 오백나한대재를 펼치며 입재부터 회향까지 21일간 기도를 드린다. 올해 오백나한대재 입재식은 10월 28일에 봉행한다. 11월 17일 회향 때는 자향회 육법공양, 영산회 스님들의 집전 하에 천수경, 다라니, 바라, 오백나한 기도문 독송, 합창단 축가 등 다채로운 의식이 열린다.


    9ff1d3b15201a5263ca08b7451432abb_1717658461_42.jpg
    대들보 위에 놓인 나한님들


    9ff1d3b15201a5263ca08b7451432abb_1717658480_09.jpg
    오백나한대재


    9ff1d3b15201a5263ca08b7451432abb_1717658494_93.jpg
    16성중


    9ff1d3b15201a5263ca08b7451432abb_1717658508_28.jpg
    오백나한


  5. 증심사 신중탱화
    작성자/작성일
    두레박 24-06-06

    9ff1d3b15201a5263ca08b7451432abb_1717658147_63.jpg
     

    신중도(神衆圖)는 말 그대로 여러 신의 모습을 담은 그림이다. 다시 말하자면, 부처의 정법(正法)을 수호하는 신들을 그린 불화(佛畵)다. 증심사 신중탱화는 영조스님이 주지로 계실 적에 조성했다. 불기 2534년(1990) 9월 7일 봉안의식을 치렀으며, 증명법사는 전 송광사 방장 범일 보성스님, 병법(의식 진행)은 도연 법흥스님이 했다.

    경전에 의하면 신중탱화 가운데에 모셔진 예적금강은 석가모니불의 화신이라고 한다. 그의 주문에는 큰 힘이 있다고 믿어져 불교의식에서 자주 독송되었다. 더러운 것을 없애므로 예적부정이라 하고, 온 몸에서 지혜의 불길을 내뿜기에 화두(火頭)라고도 한다. 형상은 눈을 동그랗게 뜬 엄한 상을 하고 있으며, 3면(面), 3목(目), 8비(譬)로서 독사를 몸에 감거나 잡고 법륜을 굴리면서 온 몸에 불길이 치솟는 형상으로 나타난다.


    9ff1d3b15201a5263ca08b7451432abb_1717658158_09.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