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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1. 동화사 승가대학
    작성자/작성일
    두레박 24-04-20

    승가대학(강원)은 종단에서 종법으로 정한 기본교육기관으로서, 행자생활을 통해 기초교육을 이수한 사미, 사미니에게 비구, 비구니로서 필요한 자질을 갖추게 하고 인천의 사표로서 지혜와 원력을 함양하게 하기 위하여 부처님과 역대 조사님들의 설하신 가르침인 경전을 배우며 기본 의무교육을 실시하는 상설기관을 말한다. 예전에는 강원(講院)으로 불렸으나, 1996년에 교육법이 개정되면서 승가대학으로 그 명칭이 통일되었다.

    승가대학의 교육목표는 다음과 같다.
    조계종지의 체득
    원시경전, 대승경전을 망라한 체계적 경전교육
    교학의 이해, 수행전법을 함께 하는 교육
    율장의 학습 및 수련
    불교사상사와 조계종 종사에 대한 올바른 이해
    제종의 종지 학습
    선 및 염불의 실수
    역사와 사회의 제문제점을 불교적 시각과 방법으로 조명하고 해결하는 교육
    수행자로서 필요한 일반교양과정의 이수

    팔공총림 동화사 승가대학의 특징

    일반대학과 연계
    21세기의 불제자로서 폭넓은 교양을 습득하기 위해 본 강원교육 외에, 일반대학과 연계해 강의를 청강하고 이수학점을 얻어 졸업도 하는 교육의 다양화가 시도되고 있다. 사회복지학과에 진학하여 사회복지학 자격증을 획득한다든지, 기타 영어회화 등 외국어나 컴퓨터 전산학, 기타 현시대가 요구하는 과목을 대학과 연계해, 학인 스님들의 폭넓은 교양을 습득할 수 있도록 최대한 지원하고 있다. 현재 성운대학교 사회복지과(2년제)와 연계해 강원에서 생활하면서 대학교도 다니며 졸업장을 취득할 수 있다.

    해외 성지순례
    2학년과 4학년 두 차례 해외 성지순례를 다녀오고 있다. 인도, 대만, 동남아 등 불교성지를 순례함으로써 신심을 증장시키고, 다양한 문화를 접해보고 폭넓은 안목을 기를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다. 비용은 자부담 없이 전액 지원된다.

    장학금 및 노트북 지급
    성운대학교에 다닐 경우 사중에서 학비를 지원한다. 기타 여러 가지 장학혜택을 마련하고 있어, 학인들이 공부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최대한 지원하고 있다. 또한 치문반(1학년)에 신입생으로 입학시 개인에게 각각 노트북을 지급한다.

    체육활동 및 교양활동
    건강한 육체에 건전한 정신이 깃드는 법. 일주일에 하루는 인근 축구장에서 축구를 하며 체력을 단련한다. 강원 체력단련장에 다양한 운동기구가 갖추어져 있어 평소에도 운동을 할 수 있으며, 탁구대와 배드민턴 코트도 갖추고 있다.
    노전스님에게 염불을 전문적으로 배울 수 있으며, 요가, 붓글씨 등 다양한 교양과정을 마련하여 전인교육이 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다.

    전학년 교육 커리큘럼의 다양한 변화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강원교육과 더불어, 쌍방향 소통수업 및 전학년이 자유롭게 학년에 상관없이 신청 과목을 청강할 수 있는 수업방식을 병행하여 자유롭게 토론하는 방식으로, 스님들의 사고의 유연성과 창의성을 살리는 수업방식으로 진행되고 있다.

    우수 강사진
    전국에서 우수한 강사진을 확보하여 학인들의 수업 만족도가 높다.

    기타 복지혜택
    동화사는 대구시에 인접해 있어 병원에 다니기가 편리하다. 몸이 불편하면 언제든지 가까운 병원에 다녀올 수 있으며, 병원 내방시 차량을 지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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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동화사 금당선원
    작성자/작성일
    두레박 24-04-20

    “이 난야(蘭若)는 스님들의 수행공간 입니다.
    참선수행을 위하여 출입을 금지합니다.


    "설법전 아래 돌계단을 내려와 동화사 계곡 위의 해탈교를 건너 위쪽으로 조금 올라가면 오른편에 이런 표지판이 길을 막는다. 난야(蘭若)란 인도어 ‘아란야(Aranya)’를 한자로 음역한 말로 적정처(寂靜處), 즉 ‘고요한 곳’이라는 뜻이다. 바로 동화사 금당선원(金堂禪院)으로 들어가는 입구다. 금당선원은 동화사 경내에서 가장 고즈넉한 수행처다. 선원 외에 수마제전과 극락전, 천 년이 넘은 3층석탑과 석등이 마당에 자리해 있다.

    금당선원은 한국불교의 대선지식이신 진제 법원 종정예하의 지도 아래 전국에서 운집한 발심한 납자(衲子)들이 자신의 본래면목을 깨닫기 위해 화두와 씨름하며 용맹정진하는 한국 제일의 수행공간이다.

    참선공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눈밝은 선지식의 가르침과 지도이다. 금당선원에서 정진하는 납자들은 공부하다가 의심나는 것이 있으면 즉시 선지식을 찾아뵙고 점검을 받을 수 있기에 사견(邪見)에 떨어져 시간을 허송하는 일이 없다. 하안거, 동안거 결제 법문뿐만 아니라 매월 음력 보름에 종정예하의 고준한 선(禪) 법문을 들으며 신심을 다지고 정진에 매진할 수 있다.

    금당선원에서는 석 달간의 하안거, 동안거 외에도 봄ㆍ가을 산철에 두 달씩 정진하고 있다. 결제 기간 중에는 아침 발우공양과 사시 법공양을 행하며, 중간 죽비는 치지 않는다.

    수많은 선사들을 배출한 선 수행의 중심지

    한국불교의 힘은 청정 수행의 풍토이고, 청정 수행의 핵심은 선방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중에서도 동화사 금당선원은 한국불교의 선맥을 이은 역대 선사들을 배출해 낸 선 수행의 중심지다.

    1900년 경허 스님이 금당선원을 개원한 이후 동광, 남옹, 고암, 인곡, 석우, 승찬, 효봉, 구산, 향곡, 서옹 스님 등 수많은 고승들이 이곳을 거쳐 갔다.

    1925년에는 동광(東光) 스님이 금당선원에서 안거했다. 이때 남옹(南翁), 고암(古庵), 인곡(仁谷) 스님 등이 함께 정진했다고 한다. 1927년에는 조실 허운송(許雲松) 스님이 여기서 후학을 지도했다.

    성철(性徹, 1912~1993) 스님이 29세 되던 1940년 겨울 동안거 때 조주 선사의 ‘무(無)’자 화두를 타파해 오도송을 읊었던 곳도 바로 금당선원이다.

    1942년에는 남옹 스님이 입승을 맡고 9~14명의 납자들이 금당선원에서 안거하였다. 1943년에는 15명, 이듬해에는 학봉(學峯) 스님과 17명이 안거하였다. 정화운동 시절 조계종 3대 종정을 지낸 석우 스님 역시 1956년부터 1958년 2월까지 금당선원을 이끌었다. 1957년부터 1960년까지는 송광사 조계총림의 방장을 지낸 승찬(僧讚) 스님이 선원의 입승을 맡았다.

    이처럼 금당선원은 일세를 풍미한 많은 선지식들이 거쳐 간 곳이다. 효봉 스님은 1958~1959년 이곳 선원에서 수행하고, 다시 1963년부터 1966년 5월까지 선원의 조실방인 미소실(微笑室)에서 후학을 길렀다. 당시 구산(九山, 1909~1983) 스님도 주지를 맡아 선원에서 정진하였다. 1970년에는 서옹(西翁, 1912~2003) 스님이 조실을 맡았고, 1976년에는 큰방을 증축하여 대중의 선방으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 이후 1977년까지는 향곡 스님이 조실로서 수행을 지도하였다. 1980년 동화사는 종단의 수좌도량으로 지정되었다. 수좌의 대표로서 범룡 스님이 주지 및 선원의 선덕 소임을 맡고, 관응(觀應, 1910~2004) 스님이 조실을 맡았다.

    수많은 제국(帝國)이 부침을 거듭했어도 청빈과 가난의 공동체인 승가(僧伽)는 여전히 싱싱하게 살아있다. 그것은 일상에 매몰되지 않고 치열하게 수행하는 스님들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불교의 중심을 이루는 영남불교의 성지로 산문을 연 팔공산 동화사 금당선원은 오늘도 ‘자신의 본 마음의 성품’을 보기 위해 수행자들이 치열하게 정진하고 있다.

    금당선원의 역사

    금당선원 자리는 통일신라 때 금당암이 있던 곳으로 832년 심지(心地) 왕사가 동화사를 중창했을 당시의 영역도 바로 이곳일 가능성이 높다. 당시 동화사는 현재의 수마제전 부근에서 작은 암자로 출발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신라 때 금산사 진표 율사로부터 법주사 영심 대사로 전해진 불골간자를 심지 왕사가 받아 팔공산에 와서 던졌고, 그 불골간자가 떨어진 자리에 동화사를 지었다고 한다. 바로 지금의 금당선원 자리다.

    동화사에 선원이 생긴 것은 400여 년 전으로 추정되지만, 금당선원이라는 정식 이름으로 개원한 것은 1900년 경허 스님에 의해서다. 경허 스님은 한국불교의 근현대를 개창한 대선사로 당시 극락전, 수마제전, 청풍당 등의 전각으로 구성된 금당암(극락전)에서 납자들을 지도하며 한국의 선풍을 크게 일으켰다.

    역대 선지식의 중요한 수행처였던 금당선원은 한동안 문을 닫았다가 1994년 현 방장스님이신 진제(眞際) 대선사께서 금모(金毛) 스님 등 수좌들과 힘을 모아 다시 개원하였다. 당시 주지였던 무공(無空) 스님이 적극 후원하여 30명 안팎의 스님들이 모여들었다. 1996~1997년에는 진허(眞虛) 스님이, 1998년에는 지해(智海) 스님이 선원장을 맡았다. 1999년부터 2014년까지는 영진스님, 지환스님, 효광스님이 선원장을 맡았으며 그 이후로 지용(智勇)스님이 선원장을 맡고 있다. 그리고 현 종정예하이신 진제 대선사께서 1994년부터 지금까지 조실로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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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동화사 석우 보화
    작성자/작성일
    두레박 24-04-20

    역대 고승
    석우 보화


    선사의 속성은 설(薛)씨이고, 본관은 순창(淳昌)이며, 법명은 보화(普化), 법호는 석우(石友)이다. 을해년(乙亥年, 1875년) 5월 11일에 경남 의령에서 탄생하였고, 본적은 김해(金海)이며, 신라의 홍유 설총(弘儒 薛聰) 선생의 45세손이다. 선사는 소시(少時)에 지혜가 출중하여 사람들로부터 신동이라 불렸다. 시서(詩書) 및 노장(老莊), 제자백가(諸子百家), 지리(地理)는 물론 의학에까지 능통하였다.

    30세에 이르러 가사(家事)를 돌보지 않고 운유(雲遊)하기 7, 8년에 우연히 범어사에 이르러 보조어록을 열람하게 되었는데,

    삼계열뇌유여화택(三界熱惱猶如火宅)
    기인엄류감수장고(其忍淹留甘受長苦)
    욕면윤회막약구불(欲免輪回莫若求佛)
    약욕구불불즉심시(若欲求佛佛卽是心)

    이란 대목에 이르러 홀연 깨친바 있어 불각낙루(不覺落淚)하고 “대도(大道)는 실로 이 문중에 있구나!” 하며 “심전(心田)에 티끌 개고, 성천(性天)에 구름 여니, 춘산(春山)에는 화소조가(花笑鳥歌)하고, 추야(秋夜)에 월백풍청(月白風淸)이로다. 아마도 무위도락(無爲道樂)은 이 밖에 다시 없어라.” 라는 시조 한 수를 읊고 감연 출가의 뜻을 굳혔다.

    그 즉시 세진(世塵)을 등지고 금강산(金剛山) 장안사(長安寺)에 이르러 연담응신(蓮潭凝信) 선사를 은사로 낙발(落髮)하니 시년(時年) 38세였다. 법을 겸수(兼受)하고, 후에 유점사(楡岾寺) 동선의정(東宣義淨) 율사로부터 구족계(具足戒)를 받고 사방 선지식을 널리 참방(參訪)하며 선을 닦은 지 10여 년에 영원암(靈源庵)으로 들었다. 여기서 30여 성상(星霜)을 움직이지 아니하고 참구(參究)하여 깊은 경지에 계합(契合)하였다고 한다.
    그때에 시작(詩作)도 많았으니,

    산삽위리수용비(山揷爲籬水用扉)
    행인도차세정희(行人到此世情稀)
    고암라객환다사(孤庵懶客還多事)
    정소한운보폐의(淨掃閒雲補弊衣)

    란 시도 그때의 것이다.

    그 후 중일(中日)사변이 일어나자 그 법제(法弟) 상월(霜月) 율사에게 금강(金剛)엔 이미 연(緣)이 다 되었으니 점차 남행하자 하고는 하동 칠불사(七佛寺)로 옮겨 안주(安住)하다가, 을유(乙酉) 춘(春)에 사주(四洲) 다솔사(多率寺)에 이거(移居) 중 조국광복을 맞았다. 다음에 남해도로 건너가 해관암(海觀庵)을 창건하니 그 곳에서 6.25를 무사히 지내고 해인사로 이주하였다. 정화불사(淨化佛事) 후 대중의 여망에 의해 초대종정에 추대되고 병신(丙申) 3월에 동화사로 이석(移錫)하였다. 세연(世緣)이 다하자 임종(臨終)에 다다름에 시봉(侍奉)이 유게(遺偈)를 청하니 선사는 소리를 높여 “망상을 말라” 한마디 말씀뿐이었다. 물러서지 않는 시봉의 간청에 선사가 부득이 응(應)하여 “그러면 네가 나를 붙들어 일으켜라. 너를 위하여 게를 지으리라” 하며 붓을 들어

    낭괄건곤방외척(囊括乾坤方外擲)
    장도일월수중장(杖挑日月袖中藏)
    일성종락부운산(一聲鐘落浮雲散)
    만타청산정석양(萬朶靑山正夕陽)

    이라 쓰고 안연(安然)히 화(化)하니, 세수는 84세이고 법랍이 45년이니, 때는 정유(丁酉) 납월(臘月) 이십칠일이었다. 열반소식이 전해지자 평소 선사를 경모(敬慕)하던 수백의 납자와 수천의 신도가 운집하였고 관계기관장들이 참석하여 애모(哀慕) 속에 엄숙히 다비가 거행되었다.

    선사의 제자로는 부처님의 심인법을 이은 79대 법손이자 조계종 제13대 종정인 진제(眞際) 선사가 있다. 은사와 상좌가 모두 종정을 역임한 경우는 한국불교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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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동화사 사명대사 유정
    작성자/작성일
    두레박 24-04-20

    역대 고승
    사명 유정


    사명대사 유정(惟政, 1544~1610)은 조선 중기의 고승으로 풍천 임씨(林氏)이고 속명은 응규(應奎), 자는 이환(離幻), 호는 사명당(四溟堂) 또는 송운(松雲), 별호는 종봉(鍾峯)이며 경삼남도 밀양출신으로 수성(守成)의 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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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58년(명종 13)에 어머니가 죽고, 1559년에 아버지가 죽자 김천 직지사로 출가하여 신묵(信默)의 제자가 되었다. 그 뒤 직지사의 주지를 지냈으며, 1575년(선조 8) 선종의 중망(衆望)에 의하여 선종수사찰(禪宗首寺刹)인 봉은사(奉恩寺)의 주지로 천거되었으나 사양하고, 묘향산 보현사(普賢寺)의 서산대사 휴정(休靜)을 찾아가서 선리(禪理)를 참구하였다. 1578년부터 팔공산, 금강산, 청량산, 태백산 등을 다니면서 선을 닦았으며, 1586년 옥천산 상동암(上東庵)에서 오도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정의 근왕문(勤王文)과 스승 휴정의 격문을 받고 의ㆍ승병을 모아 순안으로 가서 휴정과 합류하였다. 그곳에서 의승도대장(義僧都大將)이 되어 의ㆍ승병 2,000명을 이끌고 평양성과 중화(中和) 사이의 길을 차단하여 평양성 탈환의 전초 역할을 담당하였다.

    1593년 1월 명나라 구원군이 주축이 되었던 평양성 탈환의 혈전에 참가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웠고, 그해 3월 서울 근교의 삼각산 노원평(蘆原坪) 및 우관동 전투에서도 크게 전공을 세웠다.

    선조는 그의 전공을 포장하여 선교양종판사(禪敎兩宗判事)를 제수하였다. 그 뒤 네 차례에 걸쳐 전직에 들어가서 가토(加藤淸正)와 회담을 갖고, 특히 2차의 적진 담판을 마치고 돌아와 선조에게 그 전말과 적정을 알리는 〈토적보민사소(討賊保民事疏)〉를 올렸는데, 이 상소문은 문장이 웅려하고 그 논조가 정연하여 보민토적(保民討賊)의 이론을 전개함은 물론, 그 실천방도를 제시하였다.

    사명대사가 팔공산 일대에서 활약한 때는 1595년부터다. 스님은 동화사를 중심으로 의병활동을 전개했다. 그의 인장(印章)인 ‘영남도총섭인(嶺南都總攝印)’과 승군을 지휘할 때 불었던 소라나팔, 비사리 구시(나무로 만든 밥통) 등이 현재 동화사 성보박물관에 남아있다. 또 동화사 봉서루에 있는 ‘嶺南緇營牙門(영남치영아문)’ 편액은 동화사가 조선시대 영남승병의 지휘소였음을 방증한다. 현재 영남치영아문 원판은 성보박물관 내에 전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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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한 전국에 있는 20여 개의 사명대사 진영(眞影) 가운데 동화사에는 가장 오래된 사명대사 진영(보물 제1505호)이 남아있다. 이 진영은 1796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치켜 뜬 눈과 큰 코, 큰 귀 등 뚜렷한 이목구비에 긴 수염을 한 유정이 흰 장삼에 붉은 가사를 걸친 채 의자에 앉아 가부좌를 하고 있는 모습에 위엄이 넘친다.

    그는 국방에 있어서도 깊은 관심을 표현하여 산성(山城) 수축에 착안하였으며, 항상 산성 개축에 힘을 다하였다.

    그가 수축한 산성은 팔공산성(八公山城), 금오산성(金烏山城), 용기산성(龍起山城), 악견산성(岳堅山城), 이숭산성(李崇山城), 부산성(釜山城) 및 남한산성 등이다. 그리고 군기제조에도 힘을 기울여 해인사 부근의 야로(冶爐)에서 활촉 등의 무기를 만들었고, 투항한 왜군 조총병을 비변사에 인도하여 화약 제조법과 조총 사용법을 가르치도록 하였다.

    1604년 2월 오대산에서 스승 휴정의 부음을 듣고 묘향산으로 가던 중 선조의 부름을 받고 조정으로 가서 일본과의 강화를 위한 사신으로 임명받았다. 1604년 8월 일본으로 가서 8개월 동안 노력하여 성공적인 외교성과를 거두었고, 전란 때 잡혀간 3,000여 명의 동포를 데리고 1605년 4월에 귀국하였다. 그해 6월 국왕에게 복명하고 10월에 묘향산에 들어가 비로소 휴정의 영전에 절하였다.

    그 뒤 병을 얻어 해인사에서 요양하다가 1610년(광해군 2) 8월 26일 대중에게 설법을 마치고 가부좌를 한 채 입적하니, 세납 67세, 법랍 51세였다. 시호는 자통홍제존자(慈通弘濟尊者)이며, 광해군 10년(1618) 대사의 출생지인 재약사(오늘의 표충사)에 사당이 세워지고 ‘표충(表忠)’이란 편액이 하사 되었다.

    저서로는 문집인 《사명당대사집》 7권과 《분충서난록》 등이 있다.

  5. 동화사 인악 의첨
    작성자/작성일
    두레박 24-04-20

    역대 고승
    인악 의첨


    인악 의첨(仁嶽義沾, 1746~1796) 스님은 조선 후기 불교 교학의 대강백(大講伯)이다. 의첨 스님의 속성은 이씨(李氏), 본관은 성산(星山), 이름은 의선(義宣)ㆍ의소(義沼), 자는 자의(子宜), 법호는 인악(仁嶽)이다.

    고려 사공(司空) 성산부원군(星山府院君) 능일(能一)의 23세손이며 아버지는 휘징(徽澄)이고 어머니는 달성(達成) 서씨(徐氏)이다. 1746년(영조 22)에 달성 인흥촌(현 달성군 화원면 본리동, 고려 때 유명한 인흥사(仁興寺)가 있던 곳)에서 태어났다.

    8살에 향학에 들어가 소학을 세 번 읽고 다 외워버리니 신동이라는 소문이 인근 고을까지 났다. 15세에 시경, 서경, 역경을 다 읽고, 글을 잘 지어 천재라 했다. 18세에 용연사(龍淵寺)의 가선 헌공(嘉善軒公) 문하로 출가하여, 벽봉(碧峰) 스님에게서 구족계를 받고 교학을 배웠다.

    그 후 서악(西岳), 홍유(泓宥), 농암(聾巖) 등 여러 선지식에게 수학하였다. 1768년(영조 44) 벽봉 스님에게 돌아와 법을 이어받고 강당을 열어 설법하였다. 뒤에 영원암(靈源庵)으로 가서 화엄(華嚴)의 대종사(大宗師)인 운파 상언(雲坡尙彦) 스님에게서 화엄경과 선문(禪門)을 배웠다. 비슬산, 팔공산, 계룡산, 불영산 등의 산을 유력하며 경전을 강의했으며 동화사에 오랫동안 머물면서 후학양성에 전념했다.

    1790년(정조 14)에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원당(願堂)으로 수원 용주사를 창건할 때, 의첨 스님은 증사(證師)가 되어 〈불복장원문경찬소(佛服藏願文慶讚疏)〉와 〈용주사제신장문(龍珠寺祭神將文)〉을 지으니 정조가 그 글을 보고 크게 칭찬하였다.
    당시 사람들은 교학의 양대 산맥으로 호남에는 연담 유일(蓮潭有一), 영남에는 인악 의첨을 꼽았다.

    1796년(정조 20)에 비슬산 명적암(明寂庵)에서 입적하니 세수 51세, 법랍 34세였다. 제자들이 다비식을 행하고 동화사와 용연사에 영당(影堂)을 세웠다. 12년이 지난 1808년에 제자들이 스님의 일대기를 기록한 비석을 동화사에 세워 지금까지 전한다.

    저서로는 《인악집(仁嶽集)》, 《화엄사기(華嚴私記)》, 《금강사기(金剛私記)》, 《기신론사기(起信論私記)》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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