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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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1. 범어사 승가대학(강원)
    작성자/작성일
    두레박 24-04-22

    범어사 승가대학은 1966년에 첫 졸업생을 배출했다.
    물론 그 이전의 승가대학은 매우 이름난 간경의 터전이었고, 대강백도 많이 주석하고 배출했다.

    초대강주인 혼해찬윤 강백이후로 수많은 당대의 강백들이 이곳에 후학의 간경을 이끌며 스스로 學海를 드넓혔던 스님으로 꼽히고 있다.
    승가대학의 역사적 변천과정을 보면 , 경자년(1900년) 光武4년에 혼해찬윤 스님을 강백으로 지칭한 기록이 있고 청풍당, 금당, 청련암, 대성암 4곳을 강당으로 정하고, 기유년(己酉年, 1909년) 융희삼년(隆熙三年) 10월1일에서 융희4년 정월2일에 걸쳐 시중공사로 기존 금당학당에서 枕溪로 옮기고 11년 뒤 기미삼일만세운동에서 강원학인 전원이 동래만세사건의 참여로 폐강되어 몇년 뒤 개강하여 明正지방학교로 개교하여 해방 뒤 현재의 금정중학교 장소로 옮겨지고 전문강원을 분리하여 현재의 승가대학으로 자리잡은 후 1966년에 첫 졸업생이 배출되었다.
    이후 본 승가대학은 300여명의 이력종장들을 배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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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범어사 율학승가대학원(율원)
    작성자/작성일
    두레박 24-04-22

    율학승가대학원이란?
    지계청정 持戒淸淨, 모든 수행의 근본입니다.

    기본교육기관을 이수한 비구가 진학하는 전문교육기관으로써 계율 관련 표준교과목을 학습하여, 율학과 종법 등 종단이 필요로 하는 율사 및 율학전문가를 양성하기 위한 교육법상의 종단 전문교육기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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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범어사 금어선원
    작성자/작성일
    두레박 24-04-22

    범어사의 사중에서 전해 내려오는 기록에 따르면 범어사에 선원이 개설된 해는 1899년 겨울이다.
    그해 성월 스님이 금강암에 금강선사(金剛禪社)를 개원하였던 것이다.
    스님은 대한 광무 3년(1899) 11월에 금강암에서 임시 선회를 열고 선원 개설에 관한 일정을 논의한 후 12월에 선원을 개설했다.
    당시의 발기인은 성월스님이었만 회중은 성월을 포함한 수옹혜윤(睡翁惠允)·월송금홍(月松錦洪)·
    유운주연(乳雲周演)·휴진(休眞)·법능(法能)·봉성(奉性) 스님 등 7인이었다.
    안거기한을 9순(旬)으로 정하고 참선을 시작했으며 이듬해인 1900년 2월 15일에 해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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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어선원 연혁

    1980년대
    이 종신 수도원을 휴휴정사(休休精舍)라 이름지음
    남자들의 수선 정진이 이어져 근래까지 운영되다 지금은 문을 닫은 상태
    9명의 입방자 : 김지효, 손성와, 이각우, 최평중, 임도만, 오청전, 양만화, 윤철수, 이광제 스님
    종신 수도원을 개원하여 9명의 스님이 입방
    범어사 대웅전 좌측으로 빠져나가 팔상전 뒤에 있는 극락전 공간으로 사방으로 담을 치고 외인의 출입금지
    일미(一味)스님은 이 종신 수도원 개원에 대해 '뜻있는 스님들의 수행정진을 위해 미력이나마 있는 힘을 다해 오도적 삶이 꿈틀거리는 선원으로 성장시켜 혜맥을 이을 도량이 되도록 하겠습니다"라고 함
    1억원을 들여 극락선원을 중창

    1970년대
    주지 지유(知有) 스님이 취임하여 "강원과 선원이 경영 합리화와 인재육성에 박차를 가하겠다"고 주장

    1960년대
    금어선원 상량식을 거행하면서 주지스님은 "퇴락한 범어사의 모습을 일산하여 선의 근본도량으로 만들겠다"는 의견을 피력
    2개의 보통선원과 하나의 특별선원, 비구니 선원, 연구원 등 5개의 선원이 운영

    1950년대
    하안거 때는 수선 대중이 100여명씩이나 운집해 선원에서는 식량이 모자라 동래군청에서 배급받아온 국수와 옥수수죽으로 겨우 끼니를 연명해 가면서 정진
    원래는 종무소에서 선원에 20명 분의 식량만 공급하기로 했는데 당시 조실 동산 스님이 그렇게 평등 자비한 무차회상을 베풀었던 것
    6.25 동란이 발발하자 많은 납자들이 범어사로 들어와 금어선원은 결제, 해제 없이 납자들로 가득 참

    1940년대
    범어사에는 금어선원을 비롯하여 내원암 선원, 원효암 선원에서는 납자들의 정진 열기로 가득

    1930년대
    성철 스님이 금어선원에서 하안거, 원효암 선원에서 동안거를 지냄
    범어사 금어선원에서는 기석호(寄石虎)스님이, 내원암 선원에서는 권일봉 스님이 조실로 앉았으며 각각 15명, 21명의 납자가 정진
    범어사 선원 동안거 대중수는 78명으로 전국선원 중에서 가장 많은 납자들이 수선 안거
    당시 범어사 내에서는 범어사 선원, 내원암 선원이 운영되었으며 조실은 권일봉(權一鳳) 스님

    1920년대
    안거결제를 하면서 동산(東山) 스님을 조실로 모심
    동산 스님을 조실로 모시는 데에 힘을 기울인 사람은 성월 스님
    성월스님은 독립운동과 사회계몽운동에 전력하기 위하여 주지직을 다른 스님에게 위임
    성월 스님의 역량은 범어사의 대소사를 결정하는 데에 영향을 끼침

    1910년대
    선찰대본산으로 확정되어 많은 참선인과 도인을 배출
    실로 20세기 초에 9개의 선원이 범어사에서 운영
    범어사가 한국불교 선종 수사찰로 인정
    '범어사내원선원청규(梵漁寺內院淸規)' 제정
    금어선사(金魚禪社)가 범어사 내 개설(발기인 : 성월 스님)
    선학은 우리 종문의 혈맥이며 골수이며 성명(性命)
    선을 통해서 달관하며 선을 통해서 견성하고 선을 통해서 성불에 이를 수 있다
    원응당에 있던 선원을 금당으로 이전
    범어사 각 전각과 암자에서 선원이 계속 운영

    1900년대
    범어사 안심료(安心療), 원응당(圓應堂), 승당(僧堂) 등에 선원 개설
    대성암에 대성선(大聖禪社)가 개설 (참선대중 16인)
    회현석전(晦玄錫佺) 스님이 중심 된 23인의 선객이 모여 원효암에 원효선사(元曉禪社) 개설
    계명암에 청설된 선원을 장소가 협소한 관계로 성월 스님을 원주로 삼고 내원암으로 이전(회중19인)
    한국 근대 선풍을 드날린 경허 스님이 계명암에 와서 <범어사 계명암창설선사기(梵漁寺 鷄鳴庵創設禪社記>를 씀
    9항목의 <범어사계명암수선사청규>제정
    계명암에서 총섭(摠攝) 스님을 비롯하여 17인이 모여 계명선사(鷄鳴禪社) 개설
    내원선사(內院禪社)가 선문을 열음
    안양선사의 발기인은 의룡보우(義龍普宇) 스님
    대중은 의룡, 천원각환, 원중, 덕수 스님
    내원선사의 발기인은 혼해찬윤 스님
    범어사에 금강선사 개설을 시작으로 안양암에 안양선사가 개설

  4. 범어사 금정총림(金井叢林)
    작성자/작성일
    두레박 24-04-22

    많은 승려와 속인들이 함께 배우기 위해 우거진 숲과 같이 모이는 선찰대본산 금정총림 범어사 입니다.

    총림이란?
    총림(叢林)은 빈댜바나(산스크리트어: Vindhyavana)의 의역으로 음역하여 빈다바나(貧陀婆那)라고도 하며, 많은 승려와 속인들이 화합하여 함께 배우기 위해 모인 것이 마치 나무가 우거진 숲과 같다고 하여 총림이라 한다.
    현재는 승려들의 참선수행 전문도량인 선원(禪院)과 경전 교육기관인 강원(講院)-승가대학, 계율 전문교육기관인 율원(律院)을 모두 갖춘 사찰을 지칭하는 말이며, 총림의 최고지도자를 방장(方丈)이라 부른다.

    6대총림
    통도사, 해인사, 송광사, 수덕사, 동화사, 범어사를 6대 총림이라고 하며, 범어사는 2012년 동화사와 함께 총림으로 승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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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범어사 동산큰스님
    작성자/작성일
    두레박 24-04-22

    재가시절 - 在家時節
    동산큰스님서기 1890년 2월25일
    스님께서는 충청북도 단양군 단양읍 상방리 244번지에서 탄생하셨다. 父는 河聖昌 이시고 母는 鄭敬雲이다. 本貫은 晋州며, 본명는 東奎였다. 스님께서 뒷날 이 땅의 외색불교를 척결하는 불교정화운동에 혼신의 힘을 쏟을 곳을 예정한 듯 이 해는 일본의 日蓮宗이 1877년 부산, 1880년 원산, 1884년 인천에 別院을 세워 항구도시를 다 장악한 후 드디어 1890년 경성에까지 별원을 세워 이 땅의 중앙을 일본불교가 점거한 해에 태어났다.

    서기 1896년 7세
    스님은 단양읍에 있는 당시의 지방 교육기관인 鄕塾(書堂)에 들어가서 한학을 배웠는데 하루하루 배운 것을 매양 背誦 하는지라 사람들이 신동이 출세하였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한학공부를 7세에 시작하여 四書三經과 기타의 史書들을 7년 동안에 걸쳐 모두 履修하였다.

    서기 1904년 15세
    鄕里의 단양읍에도 개화의 물결로 인하여 당시로서는 새로운 교육기관인 益明普通學校가 들어왔다. 그래서 스님은 신학문을 배우기 위해서 익명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런데 그 당시에는 신학문을 공부하려면 국가에서 제정한 단발령에 의하여 머리를 깎고 학교에 다녀야 했다. 대대로 儒敎의 전통에 의하여 머리를 길러 상투를 올렸던 것을 하루아침에 자른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특히 보수적인 성향이 많은 충청도의 양반고장에서는 더욱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스님은 시대의 변화 추세를 감지하고 신학문은 꼭 배워야 한다는 결심 아래 완고하신 부모님을 설득하여 머리를 깎고 학교에 들어갔던 것이다. 그 때 익명보통학교에서는 스님의 담임선생님은 한글학자로 큰 업적을 남기신 周詩經 선생이었다. 신구학문에 두루 밝으신 큰 스승 밑에서 스님의 공부는 日就月將으로 성숙해 갔다. 옛부터 우리의 선조들은 한문을 眞書라고 하고 우리글인 한글을 諺文, 즉 상말, 속된 글이라 하여 賤視하여 왔는데 그 때 주시경 선생께서는 "한문은 중국의 글이고 한글은 순수한 우리의 글이기 때문에 결코 卑下하거나 천대해서는 안 된다"고 하고 세종대왕이 창제하여 그 이름을 訓民正音이라고 하던 것을 역사상 최초로 '한글'이라고 불러 우리의 민족혼을 되살려야 한다고 늘 주창하였던 것이다.

    서기 1908년 19세
    주시경 선생과 같은 훌륭한 先覺者 밑에서 신학문의 기틀을 마련하고 익명보통학교를 졸업한다. 졸업 이후 역시 주시경 선생의 권유로 경성의 유학길에 올라 中東中學校에 입학하였다. 스님의 경성 유학생활에는 친고모부이며 민족대표 33인의 한 분이신 葦滄 吳世昌 선생의 도움이 컸다고 평소에 말씀하신 바 있다.

    서기 1910년 21세
    이 해 8월 29일은 우리 민족의 씻을 수 없는 치욕의 날인 韓日合邦條約이 공포되던 날이다. 이곳 저곳에서 김석진, 황현 같은 뜻있는 義士들이 자결하는 사태가 벌어지고, 국민 전체가 나라 잃은 비탄에 빠져서 어찌 할 바를 몰랐다. 이런 상황에서 스님은 생각하기를 나라를 다시 찾고 국가와 민족을 일으켜 세우는 길은 개개인이 나아가서 학문을 닦고 실력을 키우는 길밖에 없다고 여겼다. 이 판단은 곧 주시경 선생의 뜻과 일치하게되어 진학의 길로 나가게 되었다. 경성의 중동중학교를 졸업하고 보다 전문적인 학문의 연마를 위하여 경성 總督府 의학전문학교에 진학하여 의학을 전공하기 시작하였다. 그 많은 학문의 분야 중에서 의학에 관심이 있었던 것은 사람들의 병마의 고통을 건져주기 위한 선천적인 따뜻한 자비심의 발로였다. 경성에서 의학을 공부하는 동안 스님은 姑叔인 葦滄 선생의 권유로 龍城 禪師를 자주 친견하게 된다. 스승이신 용성 큰스님과의 인연은 이렇게 葦滄 선생의 안내로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葦滄 선생과 龍城 스님은 甲子生(1864년) 同甲이며 龍城 스님이 대각교당에 괴석한 이래 자주 만나서 국사를 걱정하며 同志의 정을 두터이 해온 사이였다. 스님께서 처음 용성 큰스님을 뵈었을 적에 의학을 공부한다는 청년에게 큰스님은 이렇게 물었다. "인간의 身病은 의술로 어느 정도 치료한다지만 마음의 병은 무엇으로 다스리겠소?" 이 말씀에 충격과 감동을 받은 스님은 불교에 대하여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더욱 용성 큰스님의 高邁하신 인격에 마음이 이끌리게 된다. 불교는 마음의 병을 다스리는 종교라는 말도 들었고, 마음은 만법의 근원이며 우주의 근본이라는 말씀도 들었다. 그로부터 스님은 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기까지 불교에 대한 연구를 끊임없이 이어나갔다. 학교를 마친 뒤에는 마음의 병을 다스리는 佛敎의 길로 나아가리라는 決心을 굳히게 된다.

    서기 1911년 22세
    스님은 학교에서 의학을 공부하는 한편 1907년 11월 29일에 島山 안창호 선생 등이 조직한 京城府 興士團內 國語硏究會에서 우리의 국어와 民族思想에 대한 공부도 병행하였다. 공부와 아울러 그 당시 흥사단에 출입하는 숱한 志士와 義士들을 많이 만나면서 민족의 자주독립과 일제에 抗拒하는 光復運動精神을 크게 함양하게 되었다. 이 해에 앞으로 스승이 되실 용성 큰스님께서는 서울 봉익동 1번지에 大覺寺를 창건하였다. 역시 민족운동의 하나로서, 만약의 경우 일제가 민족불교를 抹殺하고 자기네들의 불교를 이 땅에 심고자 劃策할 때를 대비하신 것이다. 이 해의 6월 3일에 일본의 법률로 전문 7개 조로 된 사찰령이 반포되어 모든 사찰과 승려들은 구조적으로 식민통치의 예속을 받게 되었다. 한 가지 예로서 본래는 山中公議에 의하여 住持가 선출되었으나 전통과 자율성을 무시하고 施行規則 제2조에서 "本山의 주지는 조선총독에게, 31본산 이외의 사찰주지는 지방장관에게 신청하여 認可를 얻어야 한다"고 규정하였다. 용성 스님의 大覺寺 건립은 위와 같은 일제의 식민통치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우리의 固有한 傳統佛敎를 지켜보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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