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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1. 월정사 팔각구층석탑
    작성자/작성일
    두레박 24-04-24

    월정사의 본당인 적광전의 앞뜰 중앙에서 조금 비껴난 자리에 팔각구층석탑이 서 있다.

    팔각구층석탑은 연꽃무늬로 치장한 이층 기단과 균등하고 우아한 조형미를 갖춘 탑신 그리고 완벽한 형태의 금동장식으로 장엄한 상륜부 등이 아름답게 조화를 이룬 뛰어난 석탑이다.
    신라의 자장율사가 세웠다고 하나, 그 무렵의 탑들은 평면 정방형에 삼층 또는 오층의 탑으로 이루어진 것에 견주어, 이 탑은 평면이 팔각형이며 탑의 층수도 구층에 이르는 늘씬한 자태를 이루어 고려시대의 석탑양식을 따른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 탑은 전체를 화강암으로 조성하고 상륜부에 일부 금동장식을 더하였는데 여러 차례의 화재로 손상을 입은 부분이 더러 있으나 오늘날까지도 본래의 형태를 그대로 간직해 오고 있다. 기단은 아래층 각 면에 안상을 새기고 연꽃 장식을 베풀었다.
    그 위로는 굄돌을 놓아 위층 기단을 정성스레 받들어 기단 전체가 마치 부처님의 연꽃 대좌처럼 장식되었다.
    그 위에 탑신을 받았으니 탑신은 곧 부처님이다. 탑신 안에 부처님의 사리가 모셔져 있으니 불사리는 부처님의 진신이나 다를 바 없고 그러한 진신의 부처님이 연꽃 대좌 모양의 기단 위에 계신 것은 당연하다. 그리하여 기단 위에는 부처님을 앉히기 위한 방석과 같은 석재를 별도로 끼웠으며 탑 앞의 석조보살 좌상도 부처님과 같은 탑 앞에서 공양하는 자세를 하고 있다.
    탑신은 각 층마다 줄어듦이 적고 층수는 구층을 헤아려 탑이 하늘을 향해 솟아오르는 느낌을 더해주고 있다. 팔각은 불교의 실천수행에 기본이 되는 팔정도八正道를 상징한다. 층마다 몸돌과 지붕돌은 각각 하나의 석재로 이루어지고 일층의 사면에는 네모난 감실이 하나씩 있는데, 남면의 감실이 가장 크며 문틀을 단 흔적도 있다.

    몸돌은 모서리마다 귀기둥이 새겨지고 끝은 밑면이 수평이고 위는 곡면으로 처리하여 추녀 끝이 살짝 위로 솟아 가뜬해 보이며 추녀 끝마다 풍탁이 달려 탑은 언제나 바람의 향기를 음미한다.
    흐트러짐이 없는 정연한 상륜은 보탑의 격조를 한층 더하여 주며, 여기에 금동장식을 더하여 탑 위에 보관을 얹은 듯 장엄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그리하여 보탑의 절정부는 세련된 조형미를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여러 번의 화재로 인하여 1970년 해체보수를 통하여 1층 2층 6층 9층을 새 돌로 갈았으며 그 당시에 1층과 5층에서 총 12점의 사리구가 발견되었다. 은제의 불상 1구와 4점의 청동 거울, 금동 향합과 향주머니, 진신사리경 등의 총 12점의 유물들은 2003년 6월 보물로 일괄 지정되었다. 또한 2000년 8월 월정사석조보살좌상 보수공사 시에 지하 1m 아래에서 탑의 기단부로 보이는 또 하나의 유구가 발견이 되어 학계의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 팔각구층석탑은 높이 15.2m로 우리나라의 팔각석탑으로는 가장 크다. 그뿐만 아니라 그 아름다움에서도 단연 으뜸이며 고려시대의 가장 대표적인 석탑으로 주목받고 있다.

    고려시대 초기인 10세기경의 작품이며 국보 제4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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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월정사 석조보살좌상
    작성자/작성일
    두레박 24-04-24

    부처님의 진신 사리를 모신 팔각구층석탑 앞에는 탑을 향하여 오른쪽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으고 공양을 드리는 모습을 한 석조보살좌상이 있다.

    입에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고 부처님을 바라보고 있는 이 보살상을 일명 약왕보살藥王菩薩이라고도 한다.
    강원도 일대에서만 볼 수 있는 특이한 형태로 조성된 이 보살상은 턱이 약간 길고 눈두덩이 두껍고 뺨은 도톰하며 입가에 살짝 미소를 띠고 있어 복스럽게 느껴진다. 머리 위에 높다란 원통형 관을 쓰고 있는데 관 옆에 작은 구멍이 얕게 파져 있는 것으로 보아 관에 장식이 달려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보발寶髮은 양 어깨의 앞과 뒤로 단정하게 드리워져 있고, 두 귀는 보발 등으로 살짝 감추어져 있다. 목에는 삼도三道를 새기고 앞가슴은 영락으로 장엄한 채 두 손은 가슴 앞에 모아 무엇을 잡고 있는 듯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이 보살은 탑을 향하여 한가운데가 아닌 오른쪽으로 조금 치우쳐 앉아 있고, 상체가 하체에 견주어 큰데 이것은 우리 눈의 착시현상을 감안한 것이다. 그리고 오른쪽 무릎을 꿇은 것은 고대 인도의 관습에 따라 자신을 낮추고 스승에게 최상의 존경을 표시하기 위한 것이다. 이 보살상이 약왕보살임은 법화경에 잘 나와 있다. 법화경 약왕보살본사품에는 과거 일월정명덕日月淨明德 부처님이 이 세상에 계실 때 희견보살喜見菩薩이 부처님으로부터 법화경 설법을 듣고 현일체색신삼매炫一切色身三昧를 얻었다. 환희심에 가득한 보살은 여러 가지 공양을 올렸고, 마침내 천이백 년 동안 향을 먹고 몸에 바른 후 자신의 몸을 태우며 공양하였다. 그리고 다시 몸을 받아 일월정명덕국日月淨明德國의 왕자로 태어났을 때 일월정명덕여래는 그가 장차 부처님이 될 것이라는 수기授記를 주었다. 희견보살은 부처님의 사리를 수습하여 팔만사천의 사리탑을 세우고 탑마다 보배로 만든 깃발과 풍경을 매달아서 장엄하게 꾸몄다. 그러고도 모자라 탑 앞에서 자신을 두 팔을 태우며 칠만 이천 세 동안 사리탑을 공양하였으니 이 분이 바로 약왕보살이다.

    좌상의 전체 높이는 1.8미터이며 국보 제48-2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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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조보살좌상 복제

  3. 월정사 목조문수동자좌상
    작성자/작성일
    두레박 24-04-24

    상원사 목조문수동자좌상은 나무로 조성된 불상이며, 보관이 없는 머리는 양쪽으로 묶어 올리고 앞머리는 자연스럽게 내려 이마를 가렸으며 얼굴은 양 볼을 도톰하게 하여 천진해 보인다.

    이목구비는 온화하고 적당히 가는 목에는 삼도(三道)가 보인다.
    가슴에는 영락이 달린 목걸이를 걸치고 오른편 가슴 쪽으로 치우쳐 드러난 통견의 천의를 걸치고 가슴 밑으로 띠를 매었는데 옷주름이 명확하다. 손모양은 오른손을 들어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왼손을 내려서 엄지와 약지를 맞댈 듯한 아미타구품인(阿彌陀九品印)을 하고 있으며, 왼쪽 다리는 안으로 접고 오른쪽 다리는 밖으로 둔 반가부좌를 하고 있다.

    이 불상은, 조각 수법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1984년 7월 문수동자상에서 조성발원문 등 23점의 복장(腹藏) 유물이 발견됨으로써 이 불상이 조선 세조 12년(1466)에 조성된 것임을 확인하게 되었다.
    고려시대 불상에서 조선 전기 불상으로 전개되는 불상조성 양식을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자료다. 또 발원문과 함께 나온 조선시대 초기의 의상과 다수의 불경은 조선 복식사 및 불교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이 문수동자상은 조선 세조 대왕이 직접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조성했다고 전해진다.

    크기는 98㎝이며, 국보 221호.

    세조는 즉위 기간 내내 단종을 죽인 죄책감에 시달린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특히 만년에는 단종의 어머니이며 형수인 현덕왕후의 혼백에 시달려 아들 의경세자가 죽자 그녀의 무덤을 파헤치는 등 패륜을 범하기도 하였다. 또한 현덕왕후가 자신에게 침을 뱉는 꿈을 꾸고 나서부터 피부병에 걸렸다. 전신에 종기가 돋고 고름이 나는 등 잘 낫지도 않고 견디기가 무척 힘든 병이었다.
    세조는 명의와 명약으로도 효험을 보지 못하자 오대산으로 발길을 돌려 부처님께 참회기도를 올려 낫기를 발원하였다. 세조가 상원사에서 기도하던 어느 날, 오대천의 맑은 물이 너무 좋아 혼자 몸을 담가 목욕하고 있었다. 그때 지나가던 한 동승(童僧)에게 등을 밀어 줄 것을 부탁하였다. 동승이 등을 밀자 몸이 날아갈 듯이 가벼워졌다.

    목욕을 마친 세조는 동승에게 "그대는 어디 가든지 임금의 옥체를 씻었다고 말하지 말라."고 하니 동승은 미소를 지으며 "대왕은 어디 가든지 문수보살을 친견했다고 하지 마십시오." 하고는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세조가 놀라 주위를 살피니 동승은 간 곳 없고 어느새 자기 몸의 종기가 씻은 듯이 나은 것을 알았다. 이렇듯 문수보살의 가피로 불치병을 치료한 세조는 크게 감격하여 화공을 불러 그때 만난 동자의 모습을 그리고, 목각상을 조각하게 하니 이 목각상이 바로 상원사의 문수동자상이다.
    지금은 문수동자의 화상은 없어졌으나 목각상은 상원사 법당에 모셔져 있다. 세조가 당시 친견한 문수보살의 모습을 그리려고 많은 화공을 불렸으나 잘 그리지 못했다. 그러던 중, 하루는 누더기를 걸친 노스님이 와서 자신이 그려 보겠다고 했다. 세조가 이러저러한 모습을 설명해 주자 노스님은 자신이 알아 그리겠다고 설명도 듣지 않았다.

    이윽고 그려온 문수동자승의 모습이 너무나도 똑같아 세조는 놀라고 기쁜 마음에 "스님은 어디서 오셨습니까?"하자 노스님은 "나는 영산회상에서 왔습니다." 하고는 곧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결국, 세조는 문수보살을 두 번이나 친견한 것이다.
    상원사 목조 문수동자상에서 발견된 23점의 복장유물은 불상에도 사리를 보장하고 복장을 만들어 넣는 매우 드문 예를 보여주고 있다. 유물로는 의숙공주발원문, 문수상등중수발원문, 백지묵서진언집(白紙墨書眞言集) 두루마리 대방광불 화엄경, 오대진언, 묘법연화경, 대방강원 각수다라요의경 , 육경합부, 명주적삼, 생명주적삼, 금동제 사리함, 사리, 수정구슬, 백색수정 사리병, 세조의 어의御衣를 싼 노랑색 명주 보자기 등이 있으며 전시는 월정사 성보박물관에서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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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월정사 상원사동종
    작성자/작성일
    두레박 24-04-24

    현존하는 한국 종 가운데 가장 오래되고 아름다우며 청아한 소리 또한 이루 비길 데 없는 이 종은 신라 성덕왕 24년(725)에 조성되었다.

    조선 태종 때 불교가 박해를 받을 때 안동으로 옮겨졌다가 조선 예종 원년(1469)에 상원사에 다시 옮겨진 것으로, 한국 종 고유의 특색을 모두 갖추고 있는 대표적 범종이다. 음통(音筒)이 있는 용뉴(龍뉴) 아래 종신은 약간 길쭉하게 배를 불리다 끝에서 안으로 살짝 오므라든 형태가 이상적인 비례감과 안정감 있는 조형미를 이루었고, 풍부한 양감과 함께 세부적인 묘사 수법이 사실적이다.

    종신(鐘身)에 있는 상대, 하대, 4유곽(乳廓)의 문양은 당초문을 바탕으로 2 ~ 4인의 작은 주악비천상(奏樂飛天像)이 있는 반원권문(半圓卷紋)이 새겨졌고, 종복(鐘復)에 비천상과 교대로 있는 당좌(撞座)는 8판연화문(八瓣蓮花紋)으로 표현되었다.
    특히 비천상은 경쾌하기 이를 데 없는 모습으로 구름 위에서 천의(天衣) 자락을 휘날리는 모습이나 또 공후(공후)와 생(笙)을 연주하는 손의 표현이 매우 섬세하여 생동감이 넘친다. 볼록한 두 뺨, 유연한 신체에 걸친 천의 등은 8세기 전반의 이상적인 사실풍의 불교 조각을 잘 나타내고 있다.

    정상에는 약동하는 용이 있고 그 옆에는 연꽃이 조각된 음통이 붙어 있다. 용뉴 좌우에는 70자에 달하는 명문이 해서체로 음각되었는데 첫머리에 '개원 십삼 년을 축 3월 8일 종성기지(開元 十三年 乙丑 三月 八日 鍾成記之)'라고 되어 있어, 신라 성덕왕 24년(725)에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상원사 종에 보이는 음통, 종 끝부분이 안으로 오므라든 종신형(鐘身形), 상대와 하대 및 4유곽 등의 주조적인 특징은 한국 종의 대표적인 유형이 되어 이후의 모든 종이 계승되었다.

    국보 제36호

    이 종의 소재 사명(寺名)은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으나 조선 초기에는 경북 안동 본부(本府) 문류(門樓)에 걸려 있었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이 종은 안동 근처의 어느 사찰에 봉안되어 있다가 태종이 불교를 박해할 때 안동 문루로 옮겨졌다고 한다. 세조 때 상원사에 봉안할 종을 팔도에서 찾고 있던 중 안동에 있던 이 종이 선정되었다. 기록에 따르면 세조가 승하한 직후인 예종 원년(1469)에 상원사에 도달했다고 한다.
    종을 안동에서부터 상원사로 옮겨오던 중에 3,379근(斤)이나 되는 큰 종이 장차 죽령(竹嶺)을 넘으려 하는데 노상에서 움직이지 않으므로 사람들이 종 꼭지를 하나 떼어서 안동으로 보내니 비로소 움직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전설을 입증하듯 네 곳의 유곽 안에 1곽(廓)의 종유가 하나 없다. 이러한 고사는 대종 운반의 어려움을 나타내고 있지만 민속신앙의 한 형태를 보여주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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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월정사 상원사 중창권선문
    작성자/작성일
    두레박 24-04-24

    중창권선문은 혜각존자 신미信眉스님이 학열學悅, 학조學祖스님과 함께 상원사를 중수하려 하자 조선 세조가 이 이야기를 듣고 쌀, 무명, 베, 채색 등을 보내면서 그 취지를 함께 적은 글이다.

    권선문은 두 책으로 되어 있는데 한 책은 상원사 중창권선문이며, 한 책은 세조가 상원사 중창 취지를 적은 어첩御牒이다. 어첩에는 세조와 왕세자의 수결과 인기가 있고, 효령대군을 비롯하여 여러 종실과 신하들의 이름과 수결이 있다.
    다른 한 책인 권선문은 한문으로 쓴 다음에 바로 옆에 한글로 번역했으며 자성왕비윤씨慈聖王妃尹氏라고 쓰고 인기를 찍고 왕세자, 세자빈, 한 씨 이하 궁인들의 인기를 찍고 뒤에 신미 등의 수결이 있다.
    훈민정음 제정 이후 제작된 판각이나 활자본 책자는 많이 접할 수 있지만 직접 붓으로 쓴 것으로는 이 한글 권선문이 가장 오래된 것으로 조선 초기의 한글 서체를 살피는 데 매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또 왕가에서 직접 사찰에 보낸 귀중한 문서일 뿐 아니라 세조와 신미 등 고승들과의 관계를 밝혀주는 귀중한 자료이기도 하다.
    겉표지는 붉은색 바탕에 당초문이 들어 있는 비단으로 되어 있다. 크기는 세로 45.5센티미터, 가로 29.5센티미터로 접혀 있는데 펼친 총 너비는 810.5평방 센티미터이다.
    국보 제292호이며 월정사 성보박물관(보장각寶藏閣)에 소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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