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총 18 건

소개
  1. 삼화사 전적류
    작성자/작성일
    두레박 24-04-24

    천지명양수륙재의찬요(天地冥陽水陸齋儀纂要)
    이 책은 우주공간에 존재하는 모든 갈등구조를 해소하고 이들이 서로 소통하고 융합함으로써 평화와 행복을 가져와 성스러운 법계를 이루는 수륙재의식절차에 대한 것을 집성한 불교의례서이며 총 54편으로 되어있다. 예술적 기능으로 풀이하면 갈등구조를 지니는 번뇌의 세계를 가극의 형식을 빌려 감성과 영성의 세계로 이끌게 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덕주사본과 갑사본 2책을 소장하고 있으며, 2011년 6월 17일 각각 강원도 유형문화재 160호와 강원도문화재자료 153호로 지정되었다. 삼화사국행수륙대재는 매년 10월 셋째 주 삼화사에 소장하고 있는 의궤(천지명양수륙재의찬요) 의례절차에 의해 3일간 경내에서 설행하고 있다.

  2. 삼화사 삼층석탑(보물제1277호)
    작성자/작성일
    두레박 24-04-24

    고대로부터 우리나라는 '석탑의 나라' 라고 할만큼 탑이 많았다.
    이렇게 많은 불탑이 건립된 것은 곧 그 시대에 불법이 흥성했음을 뜻한다. 우리나라에 탑이 세워지기 시작한 것은 대략 6세기 후반에서 7세기초에 이르는 삼국시대 말기로 알려지고 있다. 신락 선덕여왕 때(632~646)인 7세기 전반부터 후반으로 가면서 불교가 크게 융성하였으며 이때 많은 탑들이 건립되었으며 오래된 고찰에는 반드시 불탑이 부처님과 함께 조성되어 있다.
    천년고찰 삼화사에도 석탑이 없을 수 없다.
    법당(적광전) 앞 마당 중앙에 고색이 창연한 옛 석탑이 하나 서 있는데 그 모습이 자못 범상치 않다. 규모는 3층으로 높이는 4.7m이다. 이 탑은 삼화사가 오랜 풍상을 겪으면서 소멸과 중건을 반복해 온 것과는 달리 비교적 원형 그대로 잘 보존되고 있어서 어느 절의 어떤 탑과 비교를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이 탑의 구조와 상태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아래쪽부터 보면 지대석은 남북으로 장대석을 놓고 동서로는 그 사이에 끼도록 된 4매석으로 구성하고 있다. 하대석과 중석은 돌 하나로 깎아서 5매성으로 하부기단을 만들었다. 하부기단에는 4우주와 각 면에 한 개씩 탱주를 세웠다. 갑성은 평평하고 얇은 2매석으로 되어 있고, 윗면 중앙에 4분원의 고임이 있으나 손상이 심한 편이다. 상부기단의 면석은 각면을 돌 하나로 구성하였고 우주와 탱주가 표시되어 있다. 대기단 갑석은 한 장으로 된 판석인데 윗부분에 경사가 있고 4분원은 고임이 조각으로 나타나 있다. 그 위로는 윗면의 4분원의 고임이 있고 아랫면은 안쪽을 곡선으로 깎은 별석을 끼워 탑신을 받치도록 하고 있다. 다음으로 탑신을 살펴보면 옥신과 옥개는 각각 한 개의 돌로 이루어져 있다. 초층탑신은 거의 입방체에 가깝고 4우주가 표시되어 있으나 약간의 손상이 있다. 2층과 3층의 탑신은 초층에 비해 조금씩 줄어들어 아름다운 균형을 이루고 있다. 다만 3층탑신이 크게 손상되었고 2층탑신은 두 조각으로 갈라져 안타까움을 더해 준다. 옥개석은 받침이 각 층마다 사단으로 되어 있으며 큰 면이 탑신을 받치고 있다. 이들 옥개석의 배치는 초층이 2단이고 2층과 3층은 1단이다.
    마지막으로 상륜부를 살펴보면 긴 찰주가 남아있으며 여기에는 상륜의 노반과 복발, 보륜이 꽂혀있다. 또 따로 다섯개의 철환도 남아 있는데 이는 보륜과 보륜 사이에 끼웠던 것으로 보인다. 찰주 정상에는 보주를 나타내는 주물로 만든 분리형 철주가 꽂혀있다.
    이 석탑은 기단부와 상륜부가 특히 손상이 심할 뿐이고 나머지는 대체로 원형을 알아보는데 지장이 없다. 또 초층탑신 밑에 별석의 받침을 끼워 시대적인 특색을 나타내고 있는데, 이는 신라석탑 이후에 나타나는 전형적인 모습이다. 따라서 삼화사 삼층석탑의 건립시기는 늦게 잡아도 신라 말로 추정된다. 1967년 이 탑을 실측 조사한 신라오악학술조사단은 보고서를 통해 '삼화사 삼층석탑은 동해안 지방에서는 보기 드문 수작' 이라고 평가하면서 그 예술적 문화재적 가치를 인정했다. 이를 바탕으로 이 탑은 1990년 5월 강원도 문화재자료 113호로 지정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등급은 1997년 6월 이 탑을 이전하는 과정에서 사리함과 소탑이 발견됨으로써 학게로부터 비상한 관심을 모으며 보다 높은 위상으로 재평가 되었다.
    불교미술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각기 절대연대를 가지고 있는 유물 유적의 발견이다. 모든 연대추정은 이 유물에 의해서 결정되는데 삼화사 석탑은 그 증거들을 보여줌으로써 스스로 신라시대에 조성된 불탑임을 입증한 것이다. 이 탑을 현재의 자리로 이건한 것은 삼화사를 옛 모습에 가깝도록 복원하려는 자광 원행 화상의 원력에 의해서이다. 스님은 우선 관계전부가로부터 천년석탑의 자리 선정에 대한 자문을 구하였고 당시 자문에 응했던 전문가들은 이 탑이 공양탑이 아니라 불탑으로 조성된 것이란 점을 들어 가람의 중심이 되는 곳으로 옮길 것을 제안했다. 현재 삼화사의 가람배치상 중심이 되는 곳은 큰 법당 아래 마당이다. 그리하여 당국의 승인을 얻어 이건에 착수한 것인 1997년 4월초였다.
    4월 25일부터 석탑의 해체작업에 들어갔는데 여기에서 뜻밖의 소장품들이 쏟아져나왔다. 당초 관계자들은 이 탑을 이전한 지가 18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으므로 소장유품이 없을 것으로 생각했으나 상층기단부 중심부에서 목제함과 납석제 소형탑 25기, 청동제 불대좌편 2개, 철편 6개가 쏟아져 나왔다. 이중 소형 납석제탑은 원형이 거의 없고 파손된 것이 많았으나 그것들은 모두 통일신라시대 석탑에서 나오는 것들이었다. 이것들은 이 탑이 1979년 이건될 때 발견된 것을 그대로 부장한 것이었다.
    삼화사는 이중 철편은 철불의 파편으로 보고 철불 복원 때 제자리를 찾기로 하고 나머지는 다시 안치했다. 이와 함께 스리랑카에서 모셔온 사리 1과와 불자들의 공양물들을 사리함에 넣어 초층탑신 사리공내에 봉인했다. 이 이건불사가 완료된 것은 1997년 5월 4일이었으며 봉탑낙성법요를 거행한 것은 그 해 부처님 오신 날이었다. 현재 국가 지정문화재 보물 제 1277호 (1998.6.7)로 지정되었다.
    여기에서 특별히 주목되는 점은 이 탑에서 통일신라시대 석탑에서 나오는 부장물들이 나왔다는 사실이다. 이것들은 이 석탑의 조성연대를 통일신라시대로 잡는 결정적인 자료가 되었다. 이와 함께 다시 검토된 양식적 특성도 주목된다. 이 탑은 기단부, 탑신부, 상륜부 등 석탑을 이루고 있는 세 가지 구성요소가 그대로 남아 있을 뿐만 아니라, 기단부의 구성과 특히 탑신부의 굄대를 별석으로 만들어 끼운 점, 그리고 각 탑신석과 옥개석의 조성양식과 수법 등이 매우 균정하고 단아하다. 이는 신라석탑의 특징 가운데 하나라는 것이 학자들의 견해이다. 따라서 전문가들은 이 탑의 조성 연대가 늦어도 9세기 중엽이라고 최종적인 단정을 했다. 삼화사 석탑의 조성연대가 이같이 상향조정된 것은 이 절의 철불 제작연대가 명문의 발견으로 상향 조정된 것과 함께 삼화사의 역사적 가치를 높이는 또 하나의 자료라는 점에서도 의미 있는 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6415aa7b60fad8a68d4531d0b604f49f_1713933213_52.jpg
     

  3. 삼화사 철조노사나좌불(보물제1292호)
    작성자/작성일
    두레박 24-04-24

    이 불상은 신라 말부터 고려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이는 삼화사 개창 초기 이후에 조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삼화사 철불은 약사불로 전해져 왔으며 오랜 수난의 역사와 함께 많이 훼손되었으나 문화재로서의 가치가 매우 뛰어나다는 것이 여러 사람들의 공통된 견해였다.
    이 철불이 최초로 학게에 보고된 것은 신라오악학술조사단 태백산지구조사반이 1967년 12월 제 7차 최종조사를 할 때였다.
    조사반원 중 진홍섭은 <삼화사의 탑상>이란 보고서에서 당시 이 철불의 모습을 이렇게 적었다.
    철불은 하반신이 완전히 상실되었고 두 손도 없으나 상체, 특히 인면의 조각은 매우 우수하다. 현재 높이는 1.2m이고, 머리높이는 40cm, 어깨 폭 68cm, 두깨는 0.5~1cm이다. 머리는 나발과 육계가 뚜렷하나 윤곽이 분명하지 않다. 상호는 원만상인데 중앙에 우뚝한 코가 있고 콧날에서 연속된 두 눈썹이 반원을 그렸으며 이마에는 작은 백호공이 있다. 두 눈은 반쯤 뜨고 있으며 눈꼬리가 옆으로 길게 연장되어 있다. 두 귀는 긴 편인데 귓밥이 모두 없어졌다. 입술은 두껍고 특히 윗입술이 부어오르듯 두드러져있다. 이는 고려시대 철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특색 있는 형식이다. 목에는 삼도가 뚜렷하고 법의는 통견인데 융기된 것 같이 보인다.
    의문은 어깨에서 팔로 내려오면서 약간 변화를 보였고 팔에 걸쳐서 늘어진 옷자락은 비교적 사실적이다. 앞가슴은 노출되어 가슴 밑에 결대가 크게 표시되었고 끝이 좌우로 길게 늘어졌다. 왼손은 완전히 파손되어 형태를 알 수 없고 오른손은 수평으로 들었음이 분명하나 손목 위치에서 부러져 없어졌다.
    이 불상에는 목과 결대 위에 횡선이 있고 가슴 앞에 종선이 있다. 이를 보면 여러 개의 틀에 의해 주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불상이 좌상인지 입상인지의 문제는 분명히 밝힐 수 없으나, 현존 최하단부 우측이 앞으로 꺽이면서 연자오대 있는 점과, 불상의 일반적인 자세로 보아 좌상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존명에 관하여는 그것을 밝힐 아무런 근거도 없다. 끝으로 이 철불의 조성연대는 그 양식적 특징 특히 안면 처리에서 고려불상의 특징이 여실히 나타나고 있다.
    삼화사 철불의 모습을 가장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는 이 보고서의 내용에 따르면 1967년 당시만 하더라도 훼손상태가 매우 심했던 것 같다. 그 원인은 앞에서 말한 대로 조선 중기 이후로 여러 차례 화재와 인위적 훼손에 의한 것이었다. 또 한때는 골동품 수집상에게 팔려갈 뻔 한 일도 있었다. (삼화사 철불의 영험설화 참조) 뿐만 아니라 훼불의 상태도 매우 심각한 수준이어서 그대로 법당에 안치하고 불자들의 귀의를 받게 하기가 힘들었다. 때문에 이 불상은 재발견된 이후 한동안 단칸불전에 별도로 보관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수난에도 불구하고 이 불상은 끈질긴 생명력으로 살아나 마침내 1990년 5월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 제112호로 지정되면서 문화재적 가치를 인정받아 보호를 받기에 이른다. 특히 1997년 4월에 이 절의 주지 자광 원행 화상의 원력으로 복원불사가 추진되어 파불이 아닌 예경의 대상으로 다시 태어나게 된 것은 무엇보다도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불상의 복원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몇 가지 새로운 사실이 발견된 것이다. 이 자료는 다름아닌 불상 배면에 돋을새김으로 남아있는 명문이었다. 이 명문은 1행에 17자씩 세로 10행에 걸쳐 남아 있었는데, 이중 판독이 가능한 것은 모두 140자에 불과했지만 이로 인해 이 불상의 비밀 몇 가지가 밝혀졌다. 제작 연대에 관해 지금까지 이 불상은 제작수법이 측면에서 고려시대 철불로 인정되어 왔다. 그리고 존상의 명칭은 창건설화의 기록에서 보듯이 약사불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새로 발견된 명문을 세밀히 분석해 본 결과 이 사실이 모두 뒤집혔다. 즉, 불상의 제작연대는 명문이 이두문법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빠르게는 7세기, 늦게 잡아도 하한선은 9세기 말로 추정된 것이다. 또 제작수법도 다시 정밀하게 관찰한 결과 신라하대 철불들에서 나타나는 몇 가지 공통적 특징들이 확인되었다. 나발 위에 솟으 ㄴ육계라든가 원만한 상호, 뚜렷한 삼도와 통견법의 등은 보림사 철불이나 도피안사철불과 흡사했다. 명문이 나타난 것도 신라 철불로서의 증거가 되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제작 당시 이 불상의 존명이 밝혀진 것이었다.
    삼화사 철불은 오래도록 약사불로 알려져 왔다. 이는 창건설화에서 유래된 것이었다. 하지만 새로 발견된 명문에는 이 불상의 존명이 약사불이 아니라 '노사나불' 이라는 사실이 분명하게 명기되어 있었다. 삼화사 철불의 본명 확인은 여러가지로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우선 신라말고려초기 불교계의 사상적 동향을 알아내는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 앞에서 예시한 문화재급 철불의 자료에서 보듯이 이 시기의 철불상 존명은 대개 비로자나불이 주류를 이르고 있다. 이는 나말여초의 불교사상계가 구산선문이 형성됐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화엄교학적 분위기가 강하게 남아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들이다.
    삼화사의 경우처럼 신라에 이미 선종인 사굴산문에 편입된 사찰에서 노사나불이 발견되고 있는 것은 그 이전에 화엄교학이 상당한 영향을 끼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문제와 관련해 삼화사 철불의 명문은 앞으로 귀중한 연구의 자료로 이용될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더하여 파불상태에 있던 불상을 복원해 귀의의 대상으로 생명력을 불어넣은 것은 종교적으로도 매우 바람직한 일로 평가된다. 새로 복원된 불상의 좌대는 철원도피안사 철불의 좌대를 그 모형으로 제작해 1997년 10월 28일 준공한 적광전에 안치시켰다. 법당의 편액은 당연히 대웅정이 아닌 적광전으로 걸었다.


    6415aa7b60fad8a68d4531d0b604f49f_1713933147_66.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