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총 41 건

소개
  1. 법주사 석연지
    작성자/작성일
    두레박 24-04-26

    석연지
    Stone Lotus Fountaion

    국보 제64호로 지정되어 있는 석연지는 신라 성덕왕 19년(720년)경에 조성된 것으로서, 8각의 지대석 위에 3단의 괴임을 만들고 다시 복련을 두른 굄돌을 올렸으며, 그 위에 구름을 나타낸 동자석을 끼워 연지를 받치고 있습니다.
    원래 이 석연지는 법주사의 본당이었던 용화보전이 있었을 때 그 장엄품을 설치했던 것으로 극락정토의 연지를 상징하며 화강석으로 조각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구품 연화장으로 환희원만 영원무궁 상품상생 광도중생 무량수의 감로천입니다. *높이 1.95m, 둘레 6.65m


    2b675349af97927733a1724fe0eecc40_1714119814_97.jpg
     

  2. 법주사 순조대왕채실
    작성자/작성일
    두레박 24-04-26

    복천암(福泉庵) 맞은 편의 속칭 태봉산(胎峰山) 산봉우리에 있는 조선 제23대왕 순조(純祖)의 태를 묻은 태실.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1호.
    조선시대에는 사람의 태가 그 사람의 길흉을 좌우하므로 함부로 하여서는 안된다는 태장경(胎藏經)의 영향을 받아 길지(吉地)를 찾아 태를 안장하던 풍습이 있었으며 궁중에서 태어난 아기의 출생의례로써 태실을 조성하고, 후에 왕위에 오르면 그 위용을 더하기 위하여 다시 석물(石物)로 가봉(加封)하였다.

    태실은 중앙에 사각의 하대석을 놓고 그 위에 구형(球形)의 중동석(中童石)을 놓은 다음 보주가 조각된 팔각의 옥개석을 얹어 석실을 만들고 주위에 바닥돌과 호석난간을 설치한 팔각원당형이다.

  3. 법주사세존사리탑
    작성자/작성일
    두레박 24-04-26

    높이 3.5m.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6호. 1362년(공민왕 11) 공민왕이 홍건적을 격파하고 법주사에 행차하여 통도사에 봉안되어 있던 석가모니의 사리 한 개를 이곳에 옮겨 봉안하였다고 한다.
    형식은 팔각원당형(八角圓堂形)으로서 기단부 위에 탑신(塔身)을 얹고 그 위에 옥개석(屋蓋石)을 얹었으며, 정상부에 상륜(相輪)을 장식하였다. 기단부는 상대(上臺)·중대(中臺)·하대(下臺)로 구성되었는데, 평면방형의 지대석(地臺石) 위에 평면 8각의 기단이 놓여 있다.


    2b675349af97927733a1724fe0eecc40_1714119736_69.jpg
     


  4. 법주사 사천왕문
    작성자/작성일
    두레박 24-04-26

    1977년 12월 6일 충북유형문화재 제46호로 지정되었다. 법주사의 금강문과 법주사 팔상전(국보 55) 사이에 있는 불사의 산문으로 정면 5칸, 측면 2칸의 다포식 맞배지붕 건물로, 중앙 1칸은 통로이고 양쪽 2칸에는 높이 5.7m, 둘레 1.8m의 천왕상을 2구씩 4구를 만들어 세웠다. 국내 최대의 걸작품으로 평가되는 사천왕상으로 법주사에서 소유·관리하고 있다.
    동방지국천왕(東方持國天王)은 수미산(須彌山) 동쪽 승신주(勝神洲)를 지키며 손에 비파를 들고 있으며, 서방광목천왕(西方廣目天王)은 수미산 서쪽 우화주(牛貨洲)를 지키며 손에 용과 여의보주를 들고 있다. 남방증장천왕(南方增長天王)은 수미산 남쪽 담부주(膽部洲)를 지키며 손에 칼을 잡고 있으며, 북방다문천왕(北方多聞天王)은 수미산 북쪽 구노주를 지키며 손에 보탑을 들고 있다.

  5. 법주사 석조
    작성자/작성일
    두레박 24-04-26
    1980년 11월 13일 충북유형문화재 제70호로 지정되었다. 법주사에 있는 돌로 만든 물을 저장하는 용기로 법주사에서 소유·관리하고 있다. 720년(성덕왕 19)에 조성되어 법주사가 번창하여 3천여 명의 승려가 모여살 때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며, 높이 130㎝, 길이 446㎝, 너비 240㎝, 두께 21㎝의 대형 화강암 석조로 쌀 80가마를 채울 수 있는 부피를 지니고 있다.
    바닥에서 맨 위에 이르기까지 4벽이 수직을 이루고 있으며 안팎에는 아무런 문양이나 장식이 없어 단조로운 모습이나 윗면의 가장자리를 경사지게 깎아내어 모각이 없게 하였다.
    벽체의 두께도 다르게 하여 긴 쪽은 23㎝, 짧은 쪽은 34㎝로 하여 수리적인 비례와 균형을 잃지 않도록 배려하였다. 남쪽 벽 바닥에는 지름 11㎝의 구멍이 있어서 실제 용구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모서리 일부에 약간의 파손을 제외하고는 거의 원형으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