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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41 건

소개
  1. 법주사 대웅전소조삼불좌상
    작성자/작성일
    두레박 24-04-26

    법주사대웅전소조삼불좌상
    Clay Seated Vairocana Buddha Triad

    2003년 2월 3일 보물 제1360호로 지정되었다. 불상 크기는 비로자나불 509㎝, 노사나불 492㎝, 석가모니불 471㎝이다. 점토로 만들어졌으며, 본존불인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왼쪽에 노사나불, 오른쪽에 석가모니불을 배치한 삼존불상으로 보존상태는 양호한 편이다. 1626년(인조 4)에 조성되었고, 1747년(영조 23)에 불상에 다시 금칠을 하였다.

    비로자나불상은 네모진 얼굴에 기다란 귀, 건장하면서 굴곡이 없는 몸체와 무릎 때문에 둔중해 보인다. 머리에는 중앙계주와 정상계주가 있고 수인(手印)은 지권인(智拳印)을 취하고 있다. 법의(法衣)는 양어깨를 모두 덮은 통견(通肩)으로 대의 자락이 팔목에서 대칭되게 흘러내리고 있다. 노사나불상은 형태가 본존불과 거의 비슷하며, 수인은 왼손과 오른손이 뒤바뀐 하품중생인(下品中生印)을 취하고 있다. 머리에는 큼직한 중앙계주가 있다. 석가모니불상은 비로자나불상·노사나불상과 체형, 얼굴모습 등이 거의 같고 양식은 비슷하다. 수인은 석가여래불의 전형적인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으로, 무릎 위에 올린 오른손의 손끝이 땅을 향하고 있다. 한편 노사나불상과 석가여래불상은 수인이나 불상의 성격이 서로 다른 데도 불구하고 법의 착용법이 같다. 전체적으로 장대한 체구에 비하여 얼굴은 동안(童顔)이며 옷주름을 두텁게 표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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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법주사 목조관음보살좌상
    작성자/작성일
    두레박 24-04-26

    목조관음보살좌상
    Wooden Seated Avalokitesvara Bodhisattva

    2003년 2월 3일 보물 제1361호로 지정되었다. 불상의 크기는 높이 235cm, 너비 147cm이다. 1655년(효종 6)에 조성된 이 관음보살좌상은 법주사 원통보전(보물 916)에 주존불로 봉안되어 있다. 연화좌 위에 결가부좌로 앉아 있는 이 불상은 머리에는 중앙에 화불을 모신 다음 화염보주로 호화롭게 꾸민 보관을 쓰고 있다. 배 부분에도 복갑(腹甲) 같은 둥근 꽃장식 판을 두르고 있어서 전반적으로 장식성이 두드러진다. 불단 양옆에는 남해용왕과 남순동자(南巡童子)의 조각상을 배치하였다. 더구나 조선 말기에 그린 관음탱이 후불탱으로 걸려 있어 더욱 두드러져 보인다. 네모난 얼굴에 두 눈을 아래로 내려뜨고 있어 인상이 근엄해 보인다. 수인(手印)은 오른손은 가슴선까지 올리고 왼손은 배 높이에 둔 채 엄지와 중지를 맞댄 하품중생인(下品中生印)을 취하고 있는데, 마치 실제 인물의 손을 대하듯 곡선적이고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생동감이 넘쳐난다. 두 손은 다른 보살상처럼 가냘프다기보다는 크고 굵은 손가락들의 움직임이 크다. 양쪽 어깨를 덮은 천의(天衣) 자락은 신체의 곡선을 따라 자연스럽게 흘러내려 부피감 있는 곡선미가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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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법주사 복천암수암화상탑
    작성자/작성일
    두레박 24-04-26

    복천암수암화상탑
    Stupa of Buddhist Monk Suam at Bokcheonam Hermitage

    조선 전기의 고승 혜각존자(慧覺尊者) 신미(信眉 ; 1405년경~1480년)의 부도로 1480년(성종 11)에 조성되었다. 신미는 성종 때 영의정에 추층된 훈(訓)의 장자로, 이름을 수성(守省)이라 했고 수암(秀庵)이라 불렸다. 그의 둘째 동생이 김수온(金守溫 ; 1410~1481)이므로 1405년 무렵 태어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는 성균관에 입학했다가 출가하였으며, 세종28년(1446년) 무렵 세종과 조우하여 여러 대군의 총애를 받았다. 당시 유생들의 거센 반대를 무릅쓰고 판선교종직(判善敎宗職)을 제수받았으며 국가적인 행사인 수륙제를 관할하였다. 문종대에 선교양종을 통솔하는 위치에 올랐으며, 세조대에는 불경간경사업을 주도하며 세조의 존경을 받고 그의 두 제자 학열(學悅)과 학조(學祖)와 더불어 삼화상으로 불렸다. 그의 부도는 제자인 학조의 부도와 함께 속리산 복천암에 봉안되어 있으며, 2004년 충청북도 유형문화재에서 보물 제1416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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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법주사 복천암학조등곡화상탑
    작성자/작성일
    두레박 24-04-26

    복천암학조등곡화상탑
    Stupa of Buddhist Monk Hakjo at Bokcheonam Hermitage

    연산군 때의 고승인 학조대사 등곡(燈谷 ; 1432~1514)의 부도로서 1514년(중종 9)에 조성되었는데, 등곡의 스승인 신미대사(信眉大師)의 부도 뒤편에 있다. 학조화상은 1464년(세조 10) 속리산 복천암에서 왕을 모시고 스승 신미와 함께 대법회를 열었고, 1467년(세조 13) 금강산 유점사를 중창하고 봉선사에 주석한 후 김천 직지사에 머물면서 1488년(성종 19) 인수대비의 명으로 해인사를 중수하고 진관사, 대자사, 낙산사를 중수하였다. 1500년(연산군 6)에는 왕비 신씨의 명으로 해인사 고려대장경 3부를 인행하여 발문을 짓는 등 조선전기에 활동한 고승이다. 1514년(중종 9) 그의 부도가 속리산 복천암과 함께 김천 직지사에 세워졌다. 2004년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3호에서 보물 제1418호로 승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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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법주사 걸어온 길
    작성자/작성일
    두레박 24-04-26

    기나긴 세월의 발자취 고스란히 간직한 오늘날 이 땅에 미륵 신앙의 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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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주사의 창건

    법주사는 의신 조사가 창건을 하고 진표 율사가 7년 동안 머물면서 중건하였다고 전해져 오나 ‘삼국유사’ 4권 관동풍악발연수석기(關東楓岳鉢淵藪石記)에 보면 진표 율사는 금산사에서 나와 속리산에 들러 길상초가 난 곳을 표해 두고 바로 금강산에 가서 발연수사(鉢淵藪寺)를 창건하고 7년 동안 머물렀다고 합니다.
    진표 율사가 그 후 금산사와 부안 부사의방에 가서 머물 때 속리산에 살던 영심(永深), 융종(融宗), 불타(佛陀) 등이 와서 진표 율사에게서 법을 전수 받았습니다.
    그 때 진표 율사가 그들에게 "속리산에 가면 내가 길상초가 난 곳에 표시해 둔 곳이 있으니 그 곳에 절을 세우고 이 교법(敎法)에 따라 인간 세상을 구제하고 후세에 유포하여라." 하였다고 합니다.
    이에 영심 스님 일행은 속리산으로 가서 길상초가 난 곳을 찾아 절을 짓고 길상사라고 칭하고 처음으로 점찰법회를 열었습니다.
    금산사를 중건한 진표 스님이 미륵불을 조성하였기 때문에 진표 스님의 법을 받은 영심 스님 등도 마찬가지로 길상초가 난 곳에 절을 세우고 미륵불을 조성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러한 내용에 근거하여 현재의 법주사는 영심 스님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고려 인조 때까지도 절 이름을 속리사라고 불렀다는 점과 '동문선'에 속리사라는 제목 시가 실려 있는 점으로 미루어 아마도 절 이름이 길상사에서 속리사로, 그리고 다시 법주사로 바뀐 것이 아닌가 생각되지만 지금까지 정확하게 규명되지는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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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주사의 중창

    신라 진흥왕 14년(553)에 법주사라 이름 붙여진 이후 법주사는 성덕왕 19년(720)에 중건되었으며 고려에 와서는 태조 1년(918)에 왕사(王師)인 증통 국사(證通國師)가 중건하였습니다. 그리고 문종 때에는 여섯째 왕자인 도생 승통(導生僧統)이 중창에 힘을 기울였다고 합니다.
    임진왜란 때에는 충청도 지방의 승병 본거지였던 법주사와 산내 암자가 모두 소실되는 상황을 맞게 되었으나 인조 4년(1626)에 벽암 각성(碧岩覺性)선사가 나와 중창에 힘을 기울였습니다.
    벽암 선사는 보은에서 태어나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군과 함께 해전에서 적을 크게 무찌른 인물이며 그 후 1624년부터 3년 동안 지금의 남한산성을 쌓았다고 합니다.
    현존하는 '법주사 사적'이 최초로 쓰인 것은 1630년인데, 여기에 임진왜란 이전 조선 초기에 있었던 건물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건물 60여 동, 석조물 10여 점, 암자 70여 개소가 기록되어 웅장한 규모였음을 증명해 줍니다. 그 가운데 예불용 전각 등 중요 건물만 발췌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대웅대광명전 (2층 28칸). 산호보광명전 (2층 35칸), 팔상오층전 (36칸), 비로전 (17칸), 약사전, 극락전 (6칸), 원통전 (6칸), 지장전, 연경전, 영산전, 도솔전, 응진전, 대양문 (7칸), 천왕문, 조계문, 해탈문, 동행랑, 서행랑
    임진왜란 이후 벽암 선사의 일대 중창에도 불구하고 복구된 건물의 수는 20여 동에 불과했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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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시대의 법주사

    고려시대에 들어서 법주사에는 뛰어난 고승대덕들이 주석하면서 여러 차례 중창이 거듭되었습니다.
    먼저 문종(1046~1083)의 다섯 째 왕자였던 도생 승통(導生僧統)이 절의 주지를 지냈다.
    문종의 넷째, 다섯째 아들이었던 대각국사 의천과 혜덕왕사 소현은 도생 스님의 형이다. 고려시대에 불교는 국교라고 할 만큼 국광과 백성들의 절대적 믿음의 대상이었습니다.
    왕실에서는 왕자가 출가할 경우 이를 대단한 영광으로 받아 들였고, 특히 문종은 세 아들을 출가시킬 만큼 신심이 돈독하였습니다.
    도생 스님의 행장은 자세히 전하지 않으나 투철한 법상종 승려였던 해덕 왕사를 은사로 출가하였던 사실은 스님이 곧 법상종 승려임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나아가 스님이 법주사의 주지를 지냈다는 것은 절이 신라 이래의 법상종 전통을 계속해서 이어 나갔다는 사실로도 이해 할 수 있습니다.
    고려시대 절의 역사를 알 수 있는 자료는 인종 때(1122~1146) 김부식(金富軾)이 편찬한 [속리사점찰법회소(俗離寺占찰法會疏)], 1342년(충혜왕3)의 [고려국속리산법주사 자정국존비명(高麗國俗離山法住寺慈淨國尊碑銘)], 그리고 도생승통비(導生僧統碑) 등입니다.
    이를 통해 먼저 인종 때까지는 법주사를 산 이름과 같은 속리사로 불렀고, 유학자 김부식이 왕명으로 점찰법회의 소문을 지을 만큼 사격이 높았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원종 때(1259∼1274)는 자정 미수(慈淨彌授, 1240∼1327) 대사가 절에 주석하였습니다.
    스님은 고려 중기의 유명한 법상종 승려였습니다. 일찍이 13세에 출가한 이래 법주사를 비롯해서 장의사(莊義寺)국령사(國寧寺)대민천사(大旻天寺)동화사 등지에서 수행하였습니다.
    법주사에 있을 때는 왕명으로 각종의 경전과 장소(章疏)를 92권이나 찬술하였습니다.
    1281년(충렬왕 7) 왕이 절에 행차하여 산호전(珊瑚殿)에 참배하였고, 뒤이어 충숙왕도 절을 다녀갔습니다. 1363년(공민왕 12)에는 왕이 절에 들렀다가 양산 통도사(通度寺)에 사신을 보내 부처님의 사리 1과를 법주사에 봉안하도록 하였습니다.
    이 사리탑은 지금 능인전 뒤쪽에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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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의 법주사

    조선시대 들어서도 절의 법등은 계속 이어졌습니다.
    흔히 조선시대가 숭유억불의 시대라 하지만 유교는 치국(治國)의 원리와 개인적 수양의 방편일 따름이고, 사람들의 불교신앙은 사실 상 그대로 이어졌습니다.
    왕실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조선 초 세조 때(1455∼1468)는 신미(信眉) 대사가 머물며 절을 크게 중창하였습니다.
    세조의 스승으로서 큰 존경을 받았던 신미 스님은 이보다 앞선 1449년(세종 31) 12월에 속리산 내의 복천사(福泉寺)를 중창하기도 하였습니다.
    이 사실을 기록한 [복천사중수보권문]이 전합니다.
    조선 중기 절은 60여 동의 전각과 70여 개의 암자를 거느린 대찰이었습니다.
    그러나 1592년(선조 25)의 임진왜란으로 대부분 전각이 불에 타 없어지는 비운을 겪었습니다.
    부분적으로 중수를 계속했으나 정유재란을 맞아 또다시 절이 전부 불타버렸습니다. 전쟁 뒤에는 1605년(선조 38)부터 1626년(인조 4)에 걸쳐 사명(四溟) 대사 유정(惟政) 스님이 팔상전을 중건했습니다.
    1624년 다시 중수가 시작되어 이듬해 불사를 마치고 [법주사사적기]를 편찬하였습니다.
    그 뒤 벽암 각성(碧巖覺性, 1575∼1660) 스님이 황폐화된 절을 중창하였습니다.
    벽암 스님은 임진왜란 때 승병을 일으켜 나라를 구하였던 서산(西山) 대사에 버금가는 분입니다.
    병자호란을 맞아 구국의 일념으로 의승장이 되어 혁혁한 공을 세웠던 것입니다. 1851년(철종 2) 3월 영의정 권돈인(權敦仁)이 힘을 기울여 국가적 규모의 중수가 이루어졌습니다.
    872년(고종 9)에는 지금의 청동대불 자리에 있었던 2층의 용화보전이 헐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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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날의 법주사

    1939년 미륵불상 조성이 시작되었습니다.
    주지 장석상(張石箱) 스님이 발원하고 전라북도 태인에 살던 김수곤(金水坤) 거사가 시주하여 80척의 미륵상 조성이 시작되었으나 조각을 맡았던 김복진(金復鎭)이 요절하면서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이후 박정희 대통령의 희사로 1963년 3월에 재착수하여 1964년에 완공하였습니다.
    현대에 들어와서는 1967년 금오 태전(金烏太田, 1896∼1968) 스님이 기울고 퇴락한 전각을 중수하였습니다.
    당시 금오 스님은 일흔이 넘은 나이였지만 정열적으로 가람을 일궈나가면서 법주사의 선풍을 진작시켰습니다.
    1974년 정부의 지원으로 가람의 전각 대부분을 보수하고 복원하였습니다.
    1975년 현대불교의 산증인이었던 금오 스님의 부도와 비를 세웠습니다.
    1976년 주지 탄성(呑星) 스님이 대웅보전을 보수하고, 범종각을 새로 지었습니다.
    1990년 주지 월탄(月誕) 스님의 원력으로 청동미륵상을 대대적으로 중수하였으며, 그 좌대의 지하에 성보전시관인 용화전을 마련하였습니다.
    1997년 선원과 후원 불사가 완료되어 현대적 시설을 잘 갖춘 환경에서 정진하는 대중을 외호하고 있으며, 2002년 청동미륵대불을 과거 진표율사계서 금동미륵대불을 모셨다는 기록에 의거 개금불사를 함으로써 본래의 모습을 복원하게 됩니다.
    2005년 현재 4년간의 해체, 복원 불사를 통해 대웅보전이 예전의 위용을 되찾으며 속리산을 찾는 이들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법주사는 신라시대에 처음 법등을 밝혀 기나긴 세월의 발자취를 절 안팎의 수많은 유물과 유적을 고스란히 지니고 잇고있는 오늘날 이 땅에 미륵 신앙의 요람이라고 일컬어 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