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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1. 용문사 전각 산신각
    작성자/작성일
    두레박 24-05-01

    산신을 모시는 전각이다. 사찰에 따라서는 산령각(山靈閣)이라고도 부른다. 또 삼성각(三聖閣)을 두어 칠성신·독성(獨星)과 함께 모시는 경우도 흔하다. 본래 산신은 도교에서 유래한 신으로, 불교가 전래되기 전에 많이 믿던 토착신이다. 특히 산지가 70%나 되는 한국에서는 삼국시대부터 조선 말에 이르기까지 산신신앙이 널리 유행하였다. 이 산신이 불교에 수용되면서 호법신중(護法神衆)의 하나로 자리잡았다.

    불교가 대중화되기 시작한 것은 삼국시대부터이므로 산신도 비교적 일찍 불교에 수용되었을 것을 여겨지나, 산신각이 세워진 것은 조선중기 이후부터이다. 대개 전각의 뒤쪽에 세우며, 크기는 정면1칸, 측면 1칸이 보통이다. 산신각 내에는 산신을 그린 탱화를 모시는데 대개 흰수염, 대머리, 긴 눈썹이 휘날리는 모습으로 표현된다. 손에는 하얀 깃털부채나 파초선·불로초 등을 들고 있고 주로 봉래산·영주산·방장산 등의 삼신산을 배경으로 한다.

    한라산이나 속리산·계룡산·지리산 등지의 사찰에는 드물게 여자 산신을 모시는 경우도 있다. 여자 산신은 트레머리에 댕기를 두르고 치마저고리를 입고 있다. 호랑이에 걸터앉거나 기대고 있는 모습이며, 손에는 대개 불로초를 들고 있다. 이밖에 복건(福巾)이나 유건(儒巾)·정자관(程子冠)을 쓰고 지팡이를 든 유교적 산신도 있고, 삭발한 스님이 《묘법연화경》과 같은 불경을 들고 있는 불교식 산신도 흔하다. 이 경우 의상은 가사와 비슷하나 적녹색이 주류를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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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용문사 전각 일주문
    작성자/작성일
    두레박 24-05-01

    사찰의 첫 문인 일주문은 기둥 2개에 지붕을 올린 구조로 사찰의 경계를 표시한다. 일주문은 성(聖)과 속(俗)을 구분 짓는 종교적 의미 뿐만 아니라 사(邪)됨을 막는 벽사의 기능도 가지고 있다. 일반적으로 일주문에는 사명(寺名)과 사찰이 소재한 산명(山名)이 적힌 편액 혹은 ‘자하문(紫霞門)’,‘ 조계문(曹溪門)’과 같은 편액이 걸리기도 하는데, 용문사 일주문에는 현재‘小白山龍門寺’란 편액만이 걸려 있다.

    「속용문사적기續?門事蹟記」에는 1608년에 시작된 용문사 창의 막바지 불사로 1689년에 건립될 예정이라고 적고 있다. 이후의 중 창기록은 전하지 않지만 공포의 조각수법이나 장식은 17세기보다는 18세기 후반의 건축적 형식이 강하게 드러난다. 대장전의 공포와 유사 한 것으로 미루어 대장전 중창과 궤를 같이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일주문 추녀마루에는 얼마 전까지도‘昭和十三年’명 암막새가 놓여있어 1938년에 보수가 되었음을 알수 있다.

    공포대는 두 개의 간포(間包)와 두 개의 귀포로 이루어져 있으며, 출목은 앞뒤 모두 2출목이다. 공포는 하나의 수서와 두개의 앙서, 그리고 권비형(拳鼻形) 운공(雲?)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지붕 형태는 우진각 지붕으로 중국의 패루(牌樓)와 닮았다.(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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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용문사 전각 회전문
    작성자/작성일
    두레박 24-05-01

    사방을 지키고 불법을 수호하는 4명의 천왕상이 있으며 좌우 2구씩 목책안에 안치되어 있다. 보광명전으로 들어가는 왼쪽 앞쪽에 서방 광목천왕(廣目天王)이, 뒤쪽에 북방 다문천왕(多聞天王)이, 오른쪽 앞쪽에 남방 증장천왕(增長天王)이, 뒤쪽에 동방 지국천왕 (持國天王)이 배치되어 있다. 사천왕상은 흙을 사용하여 의자에 걸터앉은 자세로 천왕이 든 지물은 다문천왕이 당(幢) 을, 광목천왕은 용(龍)과 보주(寶珠)를, 지국천왕이 비파를, 증장천왕이 검을 들고있으며 얼굴은 불법을 수호하기 위하여 험상궂은 표정을 하면서도 눈썹과 수염 등에서 부드럽고 해학적인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사천왕 발아래에는 악귀들이 천왕의 다리를 받쳐 들고 있다. 1688년에 사천왕상이 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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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용문사 중수용문사기비
    작성자/작성일
    두레박 24-05-01

    중수용문사기비에는 용문사의 창건과 고려 초기 왕실의 후원, 12세기에 조응(祖膺) 선사와 자엄(資嚴)선사가 일으킨 불사(佛事)와 조응선사의 행장 등이 상세히 기록 되어있다. 중수용문사기비는 1185년에 명종의 명을 받아 이지명(李知命)이 비문을 짓고 보제사普濟寺 주지인 성인 연의(性印淵懿)가 글씨를 썼으며, 다정사(茶井寺) 주지 충묵(沖默)과 용문사(龍門寺)주지 사수(思秀)가 입비를 담당하였다. 글자새 김은 해석이 하였다. 이지명은 같은 해 서봉사 현오국사비(瑞峯寺玄悟國師碑) (보물 제9호)의 비문을 짓기도 하였는데, 비의 형태도 중수용문사기비와 유사하다.

    중수용문사기비는 이수는 없고 비신만 있는 형태로, 귀부는 남아 있지 않아 새로 제작 하였다. 비신의 형태는 양쪽 모서리에 각을 준 규수형(圭首形)이다. 비 앞면에는 1185년에 작성된 중수기가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1188년에 추가로 새긴 사법제자와 집사제자가 기록되어 있다. 현재 비신은 중간 부분이 절단된 것을 시멘트로 부착한 상태로 파손 당시 1~ 3자가 결손되었다. 비신 가장자리는 당초문을 둘러 마감하고, 해서체로 쓴 '重修龍門寺記'의 제액좌우에는 보상연화당초문으 로 화려함을 더하였다 중수기의 내용은 25행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해행서의 글씨는 왕희지체이다.

    중수용문사기


    조산대부 좌산기상시 보문각학사 한림학사 지제고 사자금어대( 朝散大夫左散騎常侍寶文閣學士翰林學士知制誥賜紫金魚袋인 신臣 이지명李知命이 왕명을 받들어 서술하다. 해동의 산천은 빼어나게 수려한 곳이 많은데 특히 용문산은 더욱 물상이 뛰어나다. 봉우리들이 구비구비 이어지고 굽이치면서 높아졌다 낮아진다. 삼백여리의 골짜기가 깊으며 샘물이 달고 땅이 기름지니 진실로 고인高人과 달사達士들이 머물 수 있는 별천지이다. 옛날 신라의 두운선사杜雲禪師와 범일국사梵日國師가 배를 타고 당나라에서 들어가 법을 전해 받고 돌아왔다. 이어 이 땅을 점쳐 가시와 덤불을 베어 평평하게 하고 처음에 초암을 짓고 오랫동안 정근하였다.

    우리 태조께서 정의의 깃발을 들어 세 나라를 통합할 뜻을 가지고 불쌍히 여겨 군사를 일으켰다. 산 아래에 이르러 스님의 이름을 듣고 골짜기에 들어와 찾아뵈었다. 수레를 암자 앞에 세워두고 머리 숙여 예를 표하며 비밀스런 약속을 하였다. 천하를 평정하고 조서를 내려 재물을 모아 기와를 구워 모두 30칸間의 건물을 지어주고 아울러 주현州縣의 조세를 거두어 매년 150석石을 주어 공양하는 비용으로 삼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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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용문사 사적
    작성자/작성일
    두레박 24-05-01

    용문사에는 3책의 사적기가 전한다. 사적기의 표지에는 각각 '龍門寺事蹟 有用件', ' 龍門遺蹟 不用', '龍門寺事蹟 不用件'이라 표제가 적혀 있다. 수록된 내용은 부분적으로 일치하기도 하고, 각 사적기마다 특징적인 다른 내용이 수록되어 있어 용문사 역사를 가늠하는데 보완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용문사사적-유용건』에는「여지승람輿地勝覽」,「시영詩詠」3편,「속용문사적기(續龍門事蹟記)」,「중수용문사기重修龍門寺記」,「용문제영龍門題詠」5편 등이 수록되어있다.「중수용문사기」는 1185년(명종 15)에 이지명, 李知命이 왕명을 받들어 지은 중수기를 옮겨 적은 것이며

    「 속용문사적기」 는 17세기에 일어났던 중창불사가 서술되어 있다.「 속용문사적기」에는 1668년에 주지 희욱(希旭)의 요청으로 박세대(朴世大)가 1608년부터 1688년 사이에 조성되었던 용문사의 전각과 불상, 참여 스님과 장인들을 상세히 정리하고 다음 해인 1689년에 마칠 불사까지 적고 있어 사료적 가치가 크다. 이 시기에 중수, 시창된 전각으로는 현재 대장전, 명부전, 일주문 등이 있으며, 불상으로는 대장전의 목조아미타여래삼존좌상과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 명부전의 지장삼존상과 시왕상 및 권속, 사천왕상 등이 전하고 있다.
    『용문유적-불용』은 앞부분에『용문사사적-유용건』과 동일한 내용의「속용문사적기」가 실려 있으나 전문(全文)이 아니고 중간부터 시작하고 있다. 이어「용문제영」에는 서거정徐居正(1420~1488), 조우인 (1561~1625), 정윤목(1571~1629) 외에도, 시간차를 두고 지은 대은 호영, 대운 동고(大雲東皐), 이광직(李光直)등 12인이 지은 시들이 실려 있다. 대운 동고는 1846년 용문사 비전 중건상량문>을 지었으며, 맨 마지막의 시를 지은 이광직은『용문사사적-불용건』을 정리하였다. 시 중간에는 조선시대 소헌왕후(昭憲王后)의 태실 봉안과 태실비 건립 ¹, 세조의 교지 하사, 인빈궁(仁嬪宮)원당 건립,정조의 맏아들인 문효세자文孝世子(1782~1786)의 태실 봉안 등과 같은 왕실 관련 일들을 간략하게 정리해 놓았다.「 용문제영」에 수록된 시를 통해『용문유적-불용』이 수차례 추기되었음을 알 수 있다.
    『용문사사적-불용건』에는 이광직李光直이 지은「용문사기龍門寺記」만이 기록되어 있다. 「용문사기」에는 초창부터 조선후기까지의 용문사 역사가 연대기 순으로 정리되어 있다. 초창부터 고려의 역사는「여지승람」과 「중수용문사기」를 인용한 것이며, 조선시대의 소헌왕후 태실 봉안 ², 세조의 교지 하사, 인빈궁 원당 건립, 문효세자의 태실 봉안 등의 기록은 용문사에 전하는『용문사사적-유용건』과『용문유적-불용』을 검토하여 정리한 것이다.(胤)

    용문사 사적에는 소헌왕후 태실로 기록되어 있으나 실제 이 태실은 페비윤씨의 태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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