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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선본사 갓바위 부처님과 약사신앙
    작성자/작성일
    두레박 24-05-31

    신자(臣子)가 정성을 쌓으매 구하는 것은 꼭 이루어질 것이며, 부처와 천신께서 약을 주시니 병이 낫지 않음이 없으리다. 이에 붉은 정성을 다하여 가만히 도우심을 바라나이다. 엎드려 생각하옵건대, 태상왕께서 해가 바뀔 때부터 병에 시달리셨다가, 저번에 하늘의 도우심을 받아 잠시 차도가 있었습니다. 건강해질 희망이 있다 하여 놀라운 기쁨이 평시보다 배가 더하였었는데, 나았다 더했다 서로 뒤치니, 두려워서 어쩔 줄을 모르겠나이다. 중생들의 생각은 대개 질병만을 걱정하나이다. 장년(壯年)의 때라도 오히려 위태롭고, 하루를 넘어도 벌써 괴로운데, 하물며 70세의 노쇠기에 다 석 달이 넘는 오랜 병이겠습니까. 좋은 의술이 없음을 탄식하고, 부처님의 함께 의탁하려 합니다. 듣자오니 석가모니께서 경을 설하실 때에 특별히 약사여래의 발원이 깊은 것을 말씀하시되, "맹세코 병고에 신음하는 이를 구제하려고 손바닥에 바리를 들고 다닌다." 하였으니, 부처께서 어찌 헛말을 하시겠씁니까. 내가 이에 징험(懲驗)합니다. 이에 스님들을 모아 법회의 자리를 베풉니다. 천명의 합장 정진으로 백억 신(身) 부처님의 돌보심을 얻고자 합니다. 엎드려 원하옵건대, 부처님께서 태상왕이 여러 해 동안 귀의한 간절함을 어여삐 여기시고, 소인이 한 마음으로 기도하는 정성을 생각하시와 큰 자비를 내리어 본래의 서원을 어지기 않으시와, 우리 태상왕으로 하여금 몸이 경쾌하고 기운이 순하여서 모든 병의 뿌리를 갑자기 녹여 없애며, 음식이 맛있고 잠이 편안하여 길이 만년의 수명을 누리게 해 주시옵소서.


    -「동문선(東文選)」제113권.
    <정릉행태상왕구병약사정근소(貞陵行太上王救病藥師精勤梳)>


    조선초기의 대학자 변계랑(卞季良,1369~1430)이 쓴 <정릉에서 태상왕의 병을 구하고자 약사 정근을 거행하는 글>의 내용이다. 숭유억불을 국가의 기본 시책으로 내세운 조선 왕조에서 약사불에게 국왕의 치병과 장수를 기원하는 애틋한 글이다. 유학으로 무장하고 불교를 등한시했던 당시 사람들에게도 약사불은 치병을 위한 귀의의 대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약사불은 동방의 정유리세계(淨流璃世界)에 머물며 중생의 질병고를 치료하는 대의왕불(大醫王佛)이다. 이 부처님은 12가지 커다란 원을 세워 중생들의 온갖 고통을 소멸시킬 것을 맹세하였는데, 특히 중생의 질병에 가장 큰 주안점을 두었다.12가지 대원 가운데는 일체 중생으로 하여금 대승(大乘)의 가르침에 편안히 머물게 하거나 폭군의 악정에서 벗어나 사회적 부조리나 강도(强盜) 등의 해악을 면하게 하고, 기아(飢餓)에서 벗어나게 한다는 등의 다양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여러 발원과 역할은 대승불교의 불보살들에게서 보편적으로 찾아 볼 수 있다. 그러나 여섯 번째의 '일체의 신체장애자로 하여금 그 장애가 완전히 회복되도록 하는 서원'과 일곱 번째의 '온갖 질병을 다 없애고 몸과 마음이 안락하여 위없는 깨달음을 이루도록 하는 서원'이 약사불을 대표하고, 또 이기능이 생로병사에 시달리는 중생들에게 가장 매력적으로 받아들여졌다. 이러한 약사신앙이 우리나라에서는 일찍부터 유행하고 있었다. 앞에서 살펴본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전하는 밀본법사(密本法師)의 영험담과 함께 다음과 같은 김양도에 관한 일화는 신라 시대의 약사신앙을 잘 보여준다. 승상(丞相) 김양도(金良圖)가 어릴 때였는데, 어느날 갑자기 입이 붙어버리고 몸이 뻣뻣해지더니 말도 못하고 몸도 움직이지도 못하게 되었다. 집안 식구들은 귀한 아들이 석상처럼 굳어진 데 놀라서 야단법석이었다. 그런데 김양도가 가만히 보니 큰 귀신 하나가 작은 부하 귀신들을 거느리고 집안으로 들어와서는음식이란 음식은 다 맛을 보는 게 아닌가. 또 푸닥거리를 하러 온 무당이 굿을 할라치면 귀신들이 우르르 몰려 들어 욕을 해대는 통에 무당들도 쫓기듯 가버리는 것이었다. 김양도가 이런 사실을 알리고 싶어도 입이 붙어 말을 할 수가 없으니 답답할 뿐이었다. 김양도의 아버지는 무당굿을 해도 소용이 없자 이번에는 법륜사의 스님을 초청해서 불경을 읽어 달라고 부탁을 했다. 스님이 경을 읽기 시작하자마자 곧 큰 귀신이 나타나 부하 귀신들에게 쇠방망이로 스님의 머리를 내리치게 하였다. 쇠방망이를 맞은 스님은 피를 토하여 죽고 말았다. 김양도의 아버지는 집에 큰 귀신이 붙은 것을 알고 비로소 밀본법사에게 부탁하기로 했다. 사람을 보내 청했더니 곧 오겠다는 전갈이 왔다. 밀본이 오기로했다는 말을 들은 귀신들은 아연질색했다. 부하 귀신들은 겁에 질려 수군거렸다. "밀본법사가 오면 우리가 불리할텐데 지금이라도 빨리 피하는게 좋지 않을까?" 그러자 큰 귀신이 눈을 부라리며 윽박질렀다. "밀본이라는 자가 도대체 뭔데 너희들은 그렇게 안절부절 못하느냐? 제 아무리 신통력이 있다해도 내 앞에서는 어림없다." 귀신들이 옥신각신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사방에서 갑옷을 입고 한 손에는 긴 창을 꼬나잡은 대역신(大力神) 여럿이 나타나더니 귀신들을 붙잡아 꽁꽁 묶어 버렸다. 그 뒤를 이어 수많은 천신들이 나와서 공손히 두 손을 모으고 물러서서 기다리는데 마침내 밀본법사가 도착했다. 김양도는 그 자리에서 병이 나아 붙었던 입이 열리고 굳었던 몸이 풀렸다. 김양도가 그 동안 자기가 본 일을 낱낱이 얘기하자 모두들 놀라며 새삼스럽게 밀본을 우러러 보게 되었다. 이 일을 계기로 김양도는 독실한 불교 신자가 되어 흥륜사에 미륵상과 좌우보살상을 만들고 금색 벽화를 그려넣는 등 일생 동안 부처님 받들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위와 같은 신비한 영험담은 신라시대의 밀교를 살피는데 있어 중요한 기사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 자체로 약사신앙의 위신력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기도 하다. 인간의 삶에서 생로병사는 가장 근원적인 고통의 하나이다. 그것은 또한 석가모니가 세속의 쾌락과 부귀영화를 마다하고 출가한 근본 이유이기도 하다. 생로병사 가운데서도 특히 질병은 사람의 생활을 피폐하게 만들고 고통이 뒤따라 늘 질병의 예방과 치료는 가장 큰 근심거리가 되곤 한다. 그렇기때문에 일찍이 원시 사회로부터 질병을 퇴치하는 주술(呪術)신앙이 번성하였고, 이를 담당하는 주술사는 보통의 사람들과는 다른 특별한 권능을 지닌 존재로 인식되었다. 고대 국가가 성립하면서 국가를 대표하는 인물들 가운데는 이 주술사 출신들도 적지 않았다. 그만큼 지령의 치료는 시대를 막론하고 중시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불교가 우리 나라에 수용되면서 재래의 주술 신앙은 이제 불교 속으로 동화되었고, 약사신앙은 치병을 기원하는 사람들에게서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위에서 본 밀본법사와 김양도에 관한 이야기는 약사신앙의 효용성이 널리 신라 사회에 자리잡았음을 말한다. 또한 신앙의 번성과 함께 약사불의 조성이 뒤따라 오늘날까지 상당수 남아 있는데, 그 가운데 동화사(桐華寺)입구 마애약사여래좌상을 비롯하여 경주의 백률사(柏栗寺) 금동약사불입상, 남상 용장계곡 석조약사불좌상, 삼릉계곡 석조약사불좌상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 불상의 모습은 대개 왼손에 약그릇[藥盒]을 받쳐들고 오른손은 가지런히 펴 땅을 가리키거나 두려움 없는자세[施無畏印]를 취한다. 약사신앙이 번성하던 삼국 및 통일신라 때의 약사불상은 약그릇을 간략하게 나타낸 둥근 구슬 모양의 보주(寶珠)를 들기도 하였다. 한편 사방불(四方佛)이라 하여 사각형의 바위 각 면에 불상을 새겨 방위불(方位佛)을 상징하는 형식도 유행하였는데, 동방에 약사불을 조성하여 약사신앙이 널리 대중화되기도하였다. 굴불사지(窟佛寺地) 사면불과 경주 남산 칠불암(七佛庵) 사면불의 약사불은 그 대표적 예이다.


    이 밖에도 약사불의 조성은 작은 불상으로도 많이 이루어졌는데 이는 선남선녀가 약사여래상을 조석으로 모시면서 꽃을 올리고 향을 사르면 장수하게 됨은 물론 부귀를 얻는다는 「약사경」에서 유래한다.


    고려시대에도 약사신앙은 널리 유행하였다. 특히 잦은 국가적 위기를 맞으면서 이를 불력으로 극복하기 위해 다양한 기원도량이 개설되었는데 약사도량 역시 국난 극복의 민심을 모으는 데 기여하였다. 이는 약사불의 명호를 외우면 국가의 재난이 소멸된다는 약사불의 본원에 근거를 둔 것이다. 한 나라에 질병이 유행하거나 외적의 침입등 재난이 있을 때에는 국왕이 솔선하여 약사도량을 베풀면 국토가 평안해진다고 한다. 첫머리에서 말했듯 이러한 흐름은 조선시대에도 이어져 상당수의 약사 탱화가 조성되었고, 불교가 민간화되면서 하나의 민중 신앙으로서 자리매김해 나갔다. 오늘날 큰 사찰의 대부분에는 약사전이 위치하고 그렇지 않은 경우라도 반드시 약사불을 봉안하여 지성을 다한다. 세월이 흘러도 변함없이 약사신앙의 대중적 호응은 높아만 가고 있다.


    팔공산 갓바위 부처님은 이러한 역사적 연원을 지닌 약사신앙의 성지(聖地)라고 할만하다. 대개 우리 나라의 불교 신앙에서 가장 널리 번성한 것은 관음신앙이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관음신앙의 성지는 전국 곳곳에 걸쳐 있다. 그러나 약사신앙의 성지라고 이름을 붙일 만한 곳은 흔치않고 또 이 때문에 이 곳 갓바위 부처님이 더욱 소중한 의미를 지녔는지도 모르겠다. 전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850M에 달하는 이곳 관봉의 약사불을 친견하러 온다. 제각기 무병장수를 기원하고, 또 약사신앙의 본질과는 거리가 먼 개인적 소망을 빌기도 한다. 엄밀한 신앙의 입장에서야 아미타불에게 극락왕생을 발원하고, 관음보살에게 자비심을 구하고, 또 약사불에게는 치병을 기원해야 하겠지만 무명을 떨치지 못한 중생들에게는 그저 모든부처님이 모든 서원(誓願)의 대상이 된다. 그래서인지 모든 부처와 보살님들은 중생들의 바람을 내 담당이 아니라고해서 내치는 일은 없다. 갓바위 부처님도 마찬가지다. 정성껏 기원하는 사람들 모두에게 꼭 한 가지 소원만은 이루어 주신다는 이야기가 그래서 생겼다.


    신라 때 조성된 이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곳에 올라 소원을 빌고 뜻을 얻어갔는지 헤아릴 수야 없다. 또 아쉽게도 약사불에 관련된 영험담이 활자로 전하지 않아 여기에 소개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갓바위 부처님이 그저 그 곳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많은 이들에게 위안과 안식을 주는 것은 사실이다. 동방의 유리광세계(溜璃光世界)에서 세상을 환히 밝혀주는 약사불이 이곳 팔공산 자락에서 부드러운 미소로 중생의 온갖 고난을 어루만지는 듯 하다. 그래서 오늘도 선본사의 갓바위 부처님을 찾는 많은 중생들은 약사불의 위신력에 감화를 얻고 기쁜 마음을 안고 돌아간다.

  2. 약사신앙의 참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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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24-05-31

    약사신앙은 약사여래의 본원(本願)에 의거하여 전개된 대표적인 불보살신앙 가운데 하나이다.


    동방의 정유리세계(淨溜璃世界)를 교화하는 부처님인 약사여래는 보살도를 닦을 때 열두가지의 크고 거룩한 원을 세워서 모든 중생들로 하여금 구하는 바를 다 이루게 하여 부처님이 되신 분이다.


    약사여래의 본원 공덕과 그 이익을 설한 가르침을 담고 있는 「약사여래경」을 달마급다가 번역하여 유통시킨 이래 현장 삼장과 의정 삼장 등의 번역본이 이루어졌고, 이 후 동북 아시아 불교권의 중요한 소의경전(所依經典)이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삼국이 통일된 후 8세기 무렵부터는 국가적인 외호와 민간 신앙이 함께 어우러지는 신라 사회의 보편적인 신앙으로 확산되었다. 그 결과 당시 크고작은 여러 사찰에서 약사불을 모시는 약사 도량이 개설되고, 왕이나 장군의 무덤에 12지신상을 새긴 지석(支石)을 세우는 등 토속 신앙과 결부시키려는 노력도 나타났다.


    그 대표적인 예가 경주 분황사 약사전과 김유신(金庾信)묘의 지석 등이다. 이러한 국가적이고 민간의 보편적인 신앙이었던 약사신앙은 현대에도 계속되고 있음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이 곧 선본사의 갓바위 부처님을 찾는 현대 한국 불자들의 한 신앙형태인 것이다.

  3. 한국의 약사신앙
    작성자/작성일
    두레박 24-05-31

    한국에 불교가 전래되어 국가적으로 공인된 최초의 기록은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의 일이다. 이어서 백제 침류왕 원년(384)과 신라 법흥왕 14년(527)에 잇달아 불교가 공인되어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이 모두 국가적으로 불교를 인정하게 되었다. 이후 삼국의 불교는 급속도로 발전하여 신라의 불교가 들어온 지 채 100년이 넘기전에 이미 우리 나라 불교의 학문적 수준이 중국을 넘어서게 될 정도였으며, 7세기 중엽을 지나면서부터는 우리나라의 스님들이 중국불교에 적지않은 영향을 주기도 하였다. 불교학의 발달과 마찬가지로 삼국 시대 불교 신앙의 모습도 변해갔다.


    초기에는 국가 중심적인 구복신앙이 주류를 이루게 되고, 중기 이후에는 국가적 상황과 이름난 스님들의 교화 영향에 따라 현실구복과 내세왕생, 국태민안을 주로 하는 관음.정통.미륵신앙이 주류를 이루었다. 이 가운데 관음 신앙은 당시의 일부 스님들의 신행 기록이 뚜렷이 남아 전해지고 있다. 의상대사의 낙산사(落山寺) 창건 설화는 관음신앙의 대표적인 예가 될 것이다. 그리고 미타정토신앙은 삼국 시대 중기의 대표적인 신앙으로 미륵신앙과 함께 유행하여 민간에도 널리 퍼졌음을 알 수 있다. 미타신앙에 대해서는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나타나 있는 몇가지 기록들이 그 전거(典據)가 된다. 대표적인 것은 원효대사의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인 장엄스님이 원효대사에게 수행법을 배워 정토에 왕생하였다는 것과 원효스님이 머리를 기르고 마을을 다니면서 사람들에게 '나무아미타불'을 부르게 하였다는 것으로 유명하다.


    또한 신라의 미륵신앙은 통일국가를 이루려는 신라 국민 모두의 바람을 미륵 부처님의 가피로 이루려는 것이었다. 곧 자장율사가 경주 황룡사에 금동으로 장육존상을 조성하여 모시고 한편으로는 구층탑을 세워서 통일국가의 민족적 염원을 미륵부처님의 가피로 이루려 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신라 국민들과 왕실의 노력으로 통일을 이룬 신라의 불교 신앙은 그 형태에 있어서 새로운 변화가 일어났다. 그것이 다름아닌 약사 신앙인 것이다.


    8세기 이후에 나타나는 약사불의 조성은 당시 신라사회 민중들의 보편적인 신앙형태일 뿐만 아니라 국가 왕실의 중요한 신앙형태이기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신라의 약사 신앙은 선덕여왕 때 밀본(密本)이라는 스님이 「약사경」을 읽고 왕의 병을 고쳤다는 이야기를 통일 신라때 경주에 위치한 대표적인 사찰중의 하나인 분황사에 거대한 크기의 약사여래입상을 모신 것, 그리고 통일신라의 수도인 경주를 둘러싸고 있는 남산의 곳곳에서 발견되는 사방불과 약사여래입상, 또한 신라 왕실이나 장군의 무덤 주변에 새긴 12지신상의 지석(支石)등이 약사 신앙과 관계된 유적이다. 통일 신라의 약사 신앙은 앞에서 살펴본 「약사경」에 나타난 각종 형태의 신앙을 골고루 수용하였다. 약사유리광여래가 보살도를 행할 때 세운 12대원에 근거한 현실구복.제병.멸재의 신앙과 통일을 이룬 국가에서 더 이상 국난이 없을 것을 기원하는 호국신앙.정토신앙 등이 고루 포섭된 약사신앙이 통일신라의 형편에 꼭 들어맞았을 것이기때문이다.
    그래서 위에서 열거한 신라 특유의 약사신앙 형태들이 남아 전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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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선본사 위치와 환경
    작성자/작성일
    두레박 24-0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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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본사(禪本寺)는 경상북도 경산시 와촌면 대한리 팔공산(八公山)의 관봉(冠峯) 아래에 위치한 대한불교조계종 직영사찰이다. 이곳은 절 이름보다는 '팔공산 갓바위 부처님' 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래서 절의 동쪽에 있는 갓바위 부처님에는 가파른 산세에도 불구하고 늘 참배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잔병치레가 유달리 많은 손주아이 손을 붙잡고 주름진 이마에 맺힌 땀방울도 아랑곳 하지 않으며 할머니는 이 곳 갓바위 약사불께 치성을 드리러 오른다. 먼 길 떠난 자식의 무사를 비는 어머니들, 세속에 찌들어 잠시라도 지친 심신을 달래고 마음의 평온을 되찾으려는 선남 선녀들, 모두가 웅대한 갓바위 부처님의 위용에 마음을 의탁하고 살그머니 머금은 미소에 저절로 기쁨을 안고 돌아간다. 정성껏 기원하면 꼭 한가지 소원은 이루어 주신다니 이 얼마나 기쁜 일인가.


    선본사는 바로 이 갓바위 부처님에서 내려다 보이는 팔공산의 아늑한 산자락에 자리하고 있다. 우리 나라 곳곳의 산천이 예로부터 불교 성지 아닌 곳이 드물지만 특히 팔공산은 한국 불교 역사의 초창기에 있어서 매우 커다란 위치를 차지한다.


    팔공산은 대구광역시와 경북 군위군.경산군.영천군.칠곡군에 걸친 높이 1,193m 의 명산이다. 빼어난 산세와 풍광으로 일찍부터 경북의 영산(靈山)으로 알려져 왔고, 지금은 도립공원으로서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또한 이 산은 신라 시대부터 공산(公山), 또는 부악(父岳)이라 불리며 5악(岳)중의 하나인 중악(中岳)으로 경배의 대상이 되어 왔다. 신라 불교가 국가적으로 공인된 것은 527년(법흥왕 14)의 일이지만 이보다 앞서 불교는 이미 민간에 유포되어 있었다. 즉 일선군(一善郡)에 사는 모례(毛禮, 또는 毛綠)라는 사람이 공인 이전부터 불교를 신앙하고 있었고, 고구려에서 온 묵호자(墨胡子)와 아도(阿道)화상도 이곳에 머물며 포교 활동을 펼쳤다고 한다.


    이 신라 불교의 초전(初傳)이 이루어졌던 일선군이 바로 오늘날 팔공산 아래에 있는 경북 선산군이다. 아도가 머물렀던 모례의 집은 후일에 도리사(桃李寺)가 되어 지금도 신라불교의 초기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이처럼 한국 불교사에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팔공산에는 이후 많은 승려가 주석(住錫)하고 사찰이 자리잡으면서 명실공히 신라불교의 생생한 역사가 전개되었다. 동화사(桐華寺).은해사(銀海寺).송림사(松林寺) 등의 사찰과 제2석굴암이라 불리는 군위삼존석굴(軍威三尊石窟), 그리고 관봉의 갓바위 부처님 등이 이를 잘 말해 준다.

  5. 선본사 창건과 연혁
    작성자/작성일
    두레박 24-0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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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본사는 한국불교 약사신앙의 대표적인 성지이지만, 아쉽게도 그 창건이나 연혁에 관한 내용은 거의 전하지 않고 있다. 이러한 점은 우리나라대부분 사찰들이 안고 있는 문제이기도 하지만 선본사의 경우는 특히 심한 상태이다. 따라서 현재로서는 선본사의 창건과 연혁을 정확하게 서술하는 것 자체 가 대단히 어려운 일임을 전제해 두며, 여기서는 현대 이후에 작성된 몇몇 자료를 근거로 하여 대강의 내용을 정리해 보고자 한다.


    현재 선본사 사중에서 신뢰하고 있는 창건설은 신라 소지왕(炤知王) 13년인 491년에 극달화상 (極澾和尙)이라는 분이 이 곳을 창건하였다는 내용이다. 정확한 문헌적 근거는 찾기 어렵지만 최근까지 이같은 극화상의 창건설이 유력하게 전승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같은 창건설이 어떻게 해서 전승되기 시작했고, 또 근거가 될만한 자료는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전혀 알 수 없는 상태이다. 일부 자료에는 선본암중수기문(禪本庵重修記文)이라는 자료가 있으며, 여기에 극달화상의 창건설이 언급되어 있다고 밝한 바 있지만, 이 자료의 성격이나 현존 여부도 파악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선본사의 정확한 창건 시기를 언급하는 것은 그 자체로 무리한 일이 되겠으나, 여기서는 극달화상과 선본사 소재 유물에 대한 검토를 통하여 창건 시점을 유추해 보고자 한다.


    우선 선본사의 창건주로 등장하고 있는 극달화상이라는 스님에 대한 검토이다. 이 스님은 이른바 정사류(正史類)에 해당하는 역사서나 주요 불교 문헌에는 전혀 나타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선본사와 인접해 있는 팔공산 동화사(桐華寺) 관련 일부 문헌에 그 법명이 보이고 있어 눈길을 끈다. 즉 극달화상은 동화사의 창건주로 일부 자료에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조선불교선교양종제일수찰대본산경북달성군공산면동화사적비(朝鮮佛敎禪敎兩宗第一首寺刹大本山慶北達城郡公山面桐華寺跡碑)」라는 자료에 실려 있는 다음의 내용을 검토해 보기로 했다.
    (동화사는) 생각컨대 극달존숙(極達尊宿)께서 부악(父岳)의 남쪽 기슭에 창건하고 유가(瑜伽)라고 이름을 붙였으니, 때는 신라 소지왕 15년인 계유(癸酉)년 이었다.


    이 사적비는 1931년에 김정래(金鼎來)라는 분이 찬술하였으며, 여기서 동화사는 신라 소지왕 15년, 493년에 극달화상이 창건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사실 동화사의 창건에 관한 내용도 몇가지 설이 함께 제기되어 있는 상태이다. 극달화상의 창건을 신뢰하기 어렵다고 보는 사람들은 흥덕왕(興德王) 7년인 832년을 동화사의 실질적인 창건연도로 보고 있디고 하다. 즉 「삼국유사(三國遺事)」 권4 <심지계조(心地繼組)> 조에 실려 있는 내용으로 보아 동화사의 실질적 창건주는 심지(心地)라는 스님이며, 그 창건시기는 832년이라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같은 혼동도 결국 극달화상이라는 스님의 행장이 불분명한 상태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여하튼 동화사는 지금까지도 극달화상을 창건주로 인식하면서 그 분의 영정을 소중하게 봉안하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비록 행장은 부명치 않지만 극달이라는 법명을 지닌 스님은 이렇게 팔공산의 주요 사찰 창건주로 지금까지 인식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과연 극달화상은 어느 시기에 생존하였던 인물로 보아야 할까? 이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선본사 일대에 현존하는 몇가지 유물 자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정확한 시기 산출은 어렵겠지만, 이들 유물의 연대 추정을 통해, 선본사의 창건시기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선본사의 유물 가운데 특히 주목되는 것은 <선본사삼층석탑(禪本寺三層石塔)>(경상북도유명문화재 제115호)이다. 운이 석탑은 8세기 전반에 조성된 것으로 추측되고 있으며, 팔공산에 산재하고 있는 석탑 가운데 가장 이른 시기에 해당하는 것으로 주목되는 유물이다. 따라서 이 석탑만 놓고 본다면 선본사는 늦어도 8세기 전반 이전에 가람의 형태를 갖추고 있었으며, 팔공산의 여러 사찰 가운데서도 매우 이른 시기에 창건된 사찰로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선본사의 가장 중요한 유물인 이른바 '갓바위 부처님'도 석굴암 불상보다 이른 시기인 8세기 초반 이전에 이미 조성된 것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갓바위 부처님'의 조성시기를 보더라도 역시 선본사의 창건은 8세기 이전에 이루어진 것으로 확신할 수 있다고 하겠다. 그러면 선본사와 동화사의 창건시기로 등장하고 있는 491년, 493년은 어느 정도의 신뢰성을 지니고 있는가? 이에 대해 많은 사람들은 신라 왕실에서 불교를 공인하는 527년 이전의 일이므로 그대로 믿기 어렵다는 견해를 밝히고 있다. 고구려와 백제를 통해 신라 일부의 사람들에게 불교가 전파되고 있긴 하였지만, 불교의 공인 이전에 사찰을 건축하고 불상과 탑을 조성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이다. 따라서 선본사의 창건 시점은 6세기 중.후반부터 8세기 이전이라고 일단 가정할 수 있으며, 창건주인 극달화상도 그 시기에 활동했던 스님이 아닐까 한다. 아울러 지금 동화사에 봉안 중인 극달화상의 진영에 '公産開祖極達和尙之眞影' 즉 '공산의 개조' 라는 표현이 들어 있는 것으로 보아 스님은 불교가 팔공산에 자리잡는 과정에 있어 가장 큰 공헌을 하였던 인물로 짐작된다.


    매우 이른 시기부터 가람의 형태를 갖추고 있었던 선본사의 역사는 앞서 언급하였듯이 거의 알려진 내용이 없다. 다만 「선본암중수기문」이라는 자료에 의거했다는 몇개의 연혁이 밝혀져 있으며, 여기서는 이를 중심으로 간략하게나마 선본사의 연혁을 구성해 보기로 하겠다.


    491년 (신라소지왕3) 극달화상이 선본사 창건
    638년 (선덕여왕7) 의현스님이 관봉의 약사여래좌상(갓바위부처님)을 조성함
    1614년 (조선 인조19) 수청스님이 사찰을 중창함
    1766년(영조4) 기성화상이 사찰 중건
    1802년 (순조2) 일암당 스님을 증명으로 하여 국성스님등이 신중탱화 조성
    1820년 (순조20) 운암화상이 사찰 중수
    1877년 (고종14) 낙허화상이 사찰 중수 이후 월인화상도 사찰 중수
    1957년 사찰 일부 수리
    1962년 10월 2일자 <동아일보>에 '갓바위부처님'이 소개되면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
    1985년 극락전을 중창하고 선방 및 산신각을 신축
    1990년 칠성각 개축
    1994년 10월 대한불교 조계종 직영사찰이 됨


    이상이 현재까지 알려지고 있는 선본사 역사와 관련한 내용들이다. 491년의 창건설이 안고 있는 문제점과 창건 시기에 관계된 내용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다. 아울러 '갓바위 부처님'이 조성되었다고 하는 638년은 뚜렷한 명문(銘文)이나 문헌적 근거에 의한 것이 아니라 설화의 내용에 근거한 것임을 밝혀둔다.


    위의 연혁에서 선본사의 중창주로 등장하고 있는 수청(秀廳).기성(箕成).운암(雲岩).낙허(樂虛).월인(月印)스님 등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확인할 길이 없다. 다만 1802년에 조성된 신중탱화는 확실한 내용의 화기(畵記)를 포함하고 있어 주목된다.또한 화기 가운데는 '...奉安千此庵秩'이라는 글귀가 포함되어 있어 이 불화가 선본사에서 조성된 후 '갓바위부처님' 아래 지금의 전각으로 옮겨져 봉안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으며, 이를 통해 19세기 초반의 가람 구조도 지금과 유사한 형태로 구성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고 하겠다. 또 화기 가운데의 본암질(本庵秩)에 있는 '조실정우(祖室挺玗)'라는 글도 눈에 띈다. 약사신앙의 성지인 선본사의 역사가 이렇게 소략한 형태로 전해지고 있다는 사실은 큰 안타까움이 아닐 수 없다. 앞으로도 선본사의 역사를 찾아내기 위한 작업은 계속되어야 하겠지만, 문헌자료의 한계를 감안한다면 선본사 일대에 대한 지표조사.발굴조사 등의 고고학적 조사가 시급히 이루어졌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 본다.


    갓바위 부처님이 세상 사람들의 주목을 끈 것은 지금으로부터 그다지 오래된 일은 아니다. 물론 그전부터 계속 있어왔던 불상이지만 조선시대를 지나오면서 한 때 세상 사람들의 머리에서 잊혀졌고 그것은 근처 부락민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다가 1960년대 초반에 석굴암이 본격적으로 세인의 관심을 끌게 되면서 앞서 말한 군위 삼존불이 발견되어 이른바 '제2의 석굴암'으로 불렸는데, 팔공산도 함께 본격적으로 조사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 때 갓바위 부처님이 발견. 조사되면서 전국적인 관심을 받게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1962년 당시의 신문을 보면 갓바위 부처님의 발견을 나름대로 특필(特筆)하고 있는데, 그때의 신문 기사를 보면 당시의 발견에 대한 흥분이 그대로 읽혀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