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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축서사 석등(문화재자료 제158호)
    작성자/작성일
    두레박 24-0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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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58호
    명칭 : 축서사석등 (鷲棲寺石燈)
    수량/면적 : 1기
    지정(등록)일 : 1985.08.05

    축서사 내에 자리하고 있는 8각 석등으로, 등불을 밝혀두는 화사석(火舍石)을 중심으로 아래에는 3단의 받침돌을 두고, 위에는 지붕돌과 머리장식을 얹었다.
    아래받침돌에는 연꽃을 새겼는데, 꽃잎의 끝마다 작은 꽃조각이 달려 있다. 그 위에 세운 가운데기둥은 약간 짧은 편으로 아래받침돌과 윗받침돌을 이어주고 있다. 윗받침돌의 밑면에는 아래와 대칭되는 연꽃조각을 두었다. 화사석은 네 곳에 창을 두어 불빛이 퍼져 나오도록 하였는데, 짧은 가운데기둥에 비해 몸집이 커보여 전체적으로 무거운 느낌을 주고 있다. 심하게 부서진 지붕돌은 특별한 조각을 두지 않았고, 꼭대기에는 지붕을 축소한 듯한 머리장식을 올려놓았는데 여덟 귀퉁이마다 조그마한 꽃조각이 솟아 있다.
    전체적인 구성이나 조각기법으로 보아 고려시대 전기에 세웠을 것으로 추측된다.


    석등은 높이 2.3m쯤 되는데 원래는 석탑앞에 있었으나 지금은 대웅전 앞으로 옮겼다. 귀꽃이 장식된 복련하대석(覆蓮下臺石), 간주(幹柱) 중대석, 상대석으로 구성된 대석위에 화사석(火舍石)이 옮겨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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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축서사 삼층석탑(문화재자료 제157호)
    작성자/작성일
    두레박 24-0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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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석탑(石塔)은 선방 앞에 위치하고 있으며 하층기단과 3층 옥개석(屋蓋石) 이상이 없어졌으나 통일신라시대(統一新羅時代)의 전형적인 3층 석탑의 뛰어난 모습을 남기고 있다. 하층 기단부(基壇部)는 갑석(甲石)만이 원 위치에 남아 있으며 하대갑석(下臺甲石) 밑에도 잘 다듬어진 기단 면석으로 보이는 석재들이 탑을 둘러싸고 있으나 모두 이탑과 관련있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3층 기단은 면석이 한 돌로 되어있으며 가운데 탱주를 하나씩 양각하였다.
    옥신석은 사방에 우주만 새기고 탱주는 없다.
    1층 옥개석과 2층 옥개석도 한 돌로 되어있으며 2층 옥신석은 1층에 비해 높이가 매우 낮은 편이다.
    신라 이래 보존되어 신앙의 대상이 되어 오던 이 탑은 원래는 3층이었다고 한다 일제때 일본인들이 도과하여 파괴하고 탑속에서 나온 사리와 유물은 일본으로 가져가버리고 옥석 사리함만 현재 국립박물관에 소장하고 있다. 이 사리함에 서기로 환산 867년이란 연대가 있어 신라후기의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밖에 잘 다듬었던 흔적이 보이는 맷돌, 주춧돌, 석축등 석재들이 사찰 주변 곳곳에 흩어져있는 것으로 볼 때 축서사는 상당히 큰 가람이었던 것임을 추측할 수 있다.

  3. 연대별로 본 축서사
    작성자/작성일
    두레박 24-05-31

    축서사(鷲棲寺)는 신라 제30대 문무왕 13년 서기 673년 의상조사가 창건하신 사찰입니다.


    673년 신라 문무왕 13년
    신라 제 30대 문무왕 13년(서기 673년) 의상(義湘)대사께서 경상북도 봉화군 물야면 개단리 1번지에 창건하시다.


    1100년 고려중기
    고려 중기 전성기에는 건물 30여동, 대중은 200여명, 스님들이 축서사 땅이 아니면 밟고 다니지 않는다고 할 정도로 부찰이었고, 공양을 지으려고 쌀을 씻으면 뿌연 쌀뜨물이 10리 밖까지 내려갈 정도였다고 한다.


    1600 ~ 1800년대
    보광전 상량문에 의하면 이 절은 광서(光緖) 7년(서기 1875년)만 해도 대웅전, 보광전, 약사전, 선승당, 동별당, 서별당, 청련당, 백화당, 범종각 등 여러 동의 건물과 산내 암자도 상대, 도솔암, 천수암 등 3개는 되었고 대중은 44명이었다.


    1900년(조선조 말기)
    조선 말기 을사보호조약(서기 1905년)과 정미 7조약(서기 1907년)이 강제로 체결된 것에 반대하는 의병이 무장봉기할 때 축서사가 의병들의 기지 역할을 한다하여 작전상 방화하여 보광전 1동만 남기고 전소하다.


    1940년(일제침략기)
    일제 때 한동안 패사로 있다가 일제 말기에 삼성각을 복원하고 요사 2동을 1957년과 1982년에 각각 신축하다.


    1950년(해방 이후)
    해방 이후 역대 주지로는 황공스님, 월주스님, 홍재일스님, 고우스님, 무량스님, 무여스님 등이 역임하다.


    1996년(1990년대 후반)
    1996년 4월 1일부터 중창불사를 위한 토목공사 및 석축공사를 시작하여, 1997년 후원채(72평, 목조토와)를 건립하고, 1999년 10월 10일에는 대웅전을 완공하고, 3존불을 봉안하다.


    2003년 1월 10일 운수각 완공
    2003년 10월 선열당(68평) 완공
    2003년 4월부터 안양원(68평), 신검당(68평), 강의동 공사 시작됨


    2006년
    누각, 종각, 일주문, 극락전, 선방, 5층 보탑, 보일러실 2동, 목욕탕, 창고동, 화장실 신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