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총 34 건

소개
  1. 운문사 원광화랑연구소
    작성자/작성일
    두레박 24-05-02

    운문사 원광화랑연구소 설립목적
    천년고찰 청도 호거산운문사부설 <원광화랑연구소>의 설립 목적은 다음과 같다.
    원광법사의 불교사상과 세속오계정신에 대한 연구와 신라 화랑정신문화의 전반을 연구한다.
    인류가 나아가야 할 정신문화를 탐구한다.
    21세기 불교문화의 신청년 정신의 패러다임을 창출하여 사회에 실천하는 방안을 모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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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운문사 대중예불
    작성자/작성일
    두레박 24-05-02

    새벽예불 : 새벽 4시
    사시예불 : 오전 10시 40분
    저녁예불 : 동절기 저녁 6시 / 하절기 6시 30분

    새벽예불
    제가 이제 맑은 물을 단이슬 같은 차로 달여 삼보전에 올리오니 원컨대 거두어 주옵소서.
    예불시간마다 부처님께 귀의하고, 변하지 않는바 진리에 귀의하며 또 그것을 받들어 행하는 스님들에게 귀의한다.
    예불문이 그러하듯이 아침 저녁으로 모시는 이 의식에서 모든 수행자들은 석가모니 부처님과 여러 불보살, 10대 제자인 나한들과 삽삼조사 그리고 스님들께 마음을 다하여 귀의함을 고하며, 이로써 나를 비롯한 모든 중생이 일시에 성불하기를 기원한다.
    이것이 예불의 지극함이다.

    저녁예불
    청정한 계율의 향, 고요한 선정의 향, 법다운 지혜의 향, 장애 없는 자유의 향과 중생을 해탈로 이끄는 향
    구름 위에 펼쳐진 광명처럼 법의 세계를 비추나니 시방 삼세 부처님, 바른 법과 스님들께 공양합니다.
    고단한 발걸음 위에 저녁 종소리를 얹고 시방삼세 두두물물에 나투신 여러 부처님과 불보살님을 향해 귀의하기를 마음을 다한다.
    작은 전각에서부터 마지막 큰 법당에 이르기까지 부처님전에 초를 켜고, 향을 피어 올린다.
    작은 불빛이 어둠을 밀어내듯, 좋은 향의 향내가 약한 냄새를 몰아내듯, 스님들의 여민 옷깃과 진리의 바른 걸음걸이는 그 모습 자체로도 중생에게는 빛이요 향기이다.

  3. 운문사 금당 앞 석등 (보물 제193호)
    작성자/작성일
    두레박 24-05-02

    운문사 금당 앞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석등으로 보물 제193호로 지정되어 있다.

    방형 지대석 위에 상대·중대·하대석을 갖춘 기단부와 화사석, 옥개석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상륜부에 보주가 놓여 있다. 절제된 문양의 조식으로 기단부와 몸체의 비례 및 균형이 조화를 이루며, 부석사 석등 이후 통일신라시대 전형적인 석등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

    현재 금당 앞에 자리하고 있으나, 1935년 무렵에 촬영된 사진에 의하면 작압전 뒤로 석등 1기가 찍혀 있어 언제 현재의 위치로 이동되었는지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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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운문사 동호銅壺 (보물 제208호)
    작성자/작성일
    두레박 24-05-02

    운문사 동호는 청동으로 만들어진 항아리 모양의 불교 용기로, ‘감로준甘露樽’이라고도 부른다. 용도는 감로수를 담아 놓는 의식용 항아리일 가능성이 높으며, 높이는 55㎝, 입 지름은 19.5㎝, 몸통 지름은 31㎝로 보물 제208호로 지정되어 있다. 현재 고려시대 불교 용기로서는 향로, 정병 외에 용도나 형태에 있어 유일한 예로 뚜껑의 높이가 전체 높이에 비해 다소 높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으나, 안정된 비례감과 명문을 통해 고려시대 불교유물을 살펴 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또한 고려 후기의 문인 임춘林椿의 시문집인 서하집이 이 감로준에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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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운문사 원응국사비 (보물 제316호)
    작성자/작성일
    두레박 24-05-02

    고려시대 중기의 승려 원응국사의 행적을 기록한 비석으로, 보물 제316호로 지정되어 있다. 현재 귀부와 이수는 없으며 세 부분으로 쪼개진 비신을 붙인 다음 철로 된 지지대로 고정하여 지탱시켜 놓았다. 비신의 높이는 230㎝이며 폭은 90㎝이다.

    건립 연대는 비문이 파손되어 알 수 없으나, 원응국사가 입적한 다음 해 인종이 국사로 봉하고, 윤언이尹彦頤에게 비문을 짓게 하였다는 비문의 내용으로 보아 대략 1145년 전후로 추정된다.

    그리고 원응국사 비각 정면에 걸려있는 현판에 의하면 비각이 무너졌으나 다시 복구할 여력이 되지 않자 관찰사가 탄식하면서 비용을 보태주어 1877년 비각을 새로 건립하였다고 한다. 이후 1963년 새로 고쳐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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