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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1. 운문사 승가대학
    작성자/작성일
    두레박 24-05-02

    운문사는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 신원리 호거산에 있는 사찰로 대한 불교 조계종 제9교구 본사인 동화사의 말사이다.
    560년(신라 진흥왕 21)에 한 신승이 창건하였다.
    608년(진평왕 30)에 원광 국사가 제1차 중창하였다.
    원광국사는 만년에 가슬갑사에 머물며 일생 좌우명을 묻는 귀산과 추항에게 세속오계(世俗五戒)를 주었다고 한다.
    제2차 중창은 당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와 후삼국의 통일을 위해 왕건을 도왔던 보양(寶壤)이 오갑사(五岬寺)를 중창하였다.
    943년 고려 태조 왕건은 보양의 공에 대한 보답으로 운문선사(雲門禪寺)라 사액하고 전지(田地) 500결을 하사하였다.
    제3차 중창은 1105년(고려 숙종 10) 원응국사가 송나라에서 천태교관을 배운 뒤 귀국하여 운문사에 들어와 중창하고 전국 제2의 선찰로 삼았다.
    1690년(숙종 16) 선교를 두루 겸비하신 설송(雪松)대사가 제4차 중창을 한 뒤 약간의 수보(修補)가 있어 왔다.
    1907년 만일염불회를 주관하신 운악(雲岳)대사가 제5차 중창을, 1912년 긍파(肯坡)대사가 제6차 중창을 하였다.
    1913년 고전(古典)선사가 제7차 수보하였고, 비구니 금광(金光)선사가 제8차 수보를 하였다.
    1977에서 98년까지 명성스님이 주지로 있으면서 대웅보전과 범종루와 각 전각을 신축, 중수하는 등 경내의 면보를 한층 일신하였다.
    현재는 30여동의 전각이 있는 큰 사찰로서 규모를 갖추었다.
    운문사는 1958년 불교정화운동 이후 비구니 전문강원이 개설되었고, 1987년 승가대학으로 개칭되어 승려 교육과 경전 연구기관으로 수많은 수도승을 배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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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운문사 한문 불전 대학원
    작성자/작성일
    두레박 24-0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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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문사 ‘漢文佛典僧伽大學院’은 구족계를 수지한 비구니 스님들이 한문 불전과 불교 교학을 수학하고 연찬하는 전문교육기관이다. 대소승불교의 삼장을 체계 있게 공부하며, 주 교재를 한문 원전으로 학습한다. 불교학과 불교사상 및 불교교리 전반에 대한 심도 있는 이해와 연구를 통하여, 교수 및 전문 인력을 육성하여 전통 승가교육의 가풍을 전승 하고자 설립한다.

    槪要
    운문사 한문 불전 대학원은 한문 불전과 문헌을 학습함으로써 한문 불전 번역 연구와 한문 불전 경학 연구를 병행한다.
    대승경전인 화엄경, 능엄경, 금강경 등과 대승불교의 대표적 논서인 대승기신론 등의 주요 전적을 한문 원문으로 학습하고 대승불교의 기본 사상을 이해하며 불교한문 원전 해석능력을 갖춘 인재를 양성하고자 한다.

    目標
    대승불교의 주요 경전과 사상의 연구
    한문 불전과 문헌 학습을 통한 번역과 경학 연구
    전통 불교 교육의 계승 및 수행 체계 실현

  3. 운문사 보현율원
    작성자/작성일
    두레박 24-05-02

    운문사 보현율원은 지계(持戒) 생활이 없는 곳에는 승가도 성립될 수 없다는 큰스님들의 뜻을 이어받아 부처님의 지고지순(至高至純)한 계행(戒行)을 전문적으로 익히고 연구하고자 2008년 4월 설립되었다.

    설립목적
    석가세존의 유훈을 이어받아 자장율사의 남산율맥을 계승하여 수행자의 청정지계가풍을 확립하고자 한다.
    또한 대애도비구니의 계율정신에 의거하여 청정하게 수행하고 나악 중생 교화에 기여하고자 함을 목적으로 한다.

    보현율원의 율훈
    一. 持戒第一
    二. 持戒淸淨
    三. 攝化衆生

    율원의 설립목표
    대소율장의 전문적 연구
    습의와 예참의 올바른 전승
    율학을 전승할 율사의 양성

    2008년 4월 4일 대중스님들의 "계! 정! 혜!" 삼학을 외치는 소리와 함께 운문사 보현율원 현판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운문사 본현율원 개원식에는 교육원장 청화스님, 운문사 보현율원 율주이신 명성스님, 운문사 주지 진성스님, 대구 동화사 총무국장 현관스님 등 사부대중 100여명이 참석해 율원 개원을 축하해 주셨다.
    또한 보현율원 1기 율원생으로 입한한 9명의 스님은 소정의 교육기관을 거쳐 비구니 율사로 탄생할 것이다.
    개원식 날 교육원장 청화스님은 "보현율원의 개원을 계기로 계율에 대한 많은 연구가 이뤄지길 바란다"고 축사를 해주셨고, 운문사 보현율원 율주 명성스님은 '말이 행(行)보다 지나치는 것을 부끄러이 여겨라'는 뜻의 '치기언과기행(恥其言過其行)' 을 언급하며 율원 스님들의 정진을 당부했다.
    교과목으로는 1년차 때 계율 개론, 사미니 율의 및 주석서, 남북전율장 비교 연구, 선원청규 등으며 2년차 때는 사분비구니 율장, 범망경, 비구니 교단사 (인도, 중국, 한국 비구니전) 등이다.

  4. 운문사 역사
    작성자/작성일
    두레박 24-05-02

    제2차 중창은 당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와 후삼국의 통일을 위해 왕건을 도왔던 보양(寶壤)이 오갑사(五岬寺)를 중창하였다.
    943년 고려 태조 왕건은 보양의 공에 대한 보답으로 운문선사(雲門禪寺)라 사액하고 전지(田地) 500결을 하사하였다.
    제3차 중창은 1105년(고려 숙종 10) 원응국사가 송나라에서 천태교관을 배운뒤 귀국하여 운문사에 들어와 중창하고 전국 제2의 선찰로 삼았다.

    조선시대에는 임진왜란 때 당우 일부가 소실되었다.
    1690년 (숙종 16) 설송(雪松)대사가 제4차 중창을 한 뒤 약간의 수보(修補)가 있어 왔다.
    1835년 운악(雲岳)대사가 제5차 중창을, 1912년 긍파(肯坡)대사가 제6차 중창을 하였다.
    1913년 고전(古典)선사가 제7차 수보하였고, 비구니 금광(金光)선사가 제8차 수보를 하였다.
    1977에서 98년까지 명성스님이 주지로 있으면서 대웅보전과 범종루와 각 전각을 신축, 중수하는 등 경내의 면모를 한층 일신하였다.
    현재는 30여 동의 전각이 있는 큰 사찰로서 규모를 갖추었다.
    운문사는 1958년 불교정화운동 이후 비구니 전문강원이 개설되었고, 1987년 승가대학으로 개칭되어 승려 교육과 경전 연구기관으로 수많은 수도승을 배출하고 있다.

    나말려초의 운문사
    [운문사사적]에 의하면 557년(진흥왕 18 년)에 한 신승(神僧)이 북대암 옆 금수동에 작은 암자를 짓고 3년 동안 수도하여 도를 깨닫고 도우(道友) 10여 인의 도움을 받아 7년 동안 5갑사를 건립하였는데, 동쪽에 가슬갑사, 서쪽에 대비갑사(현 대비사), 남쪽에 천문갑사, 북쪽에 소보갑사를 짓고 중앙에 대작갑사(현 운문사)를 창건하였으나 현재 남아 있는 곳은 운문사와 대비사 뿐이다.
    그후 600년 (신라 진평왕 22) 원광 국사가 중창하였다.
    그는 대작갑사와 가슬갑사에 머물면서 점찰법회를 열고, 화랑도인 추항과 귀산에게 세속 오계를 내려줌으로써 화랑정신의 발원지가 되었다. 오갑사가 창건된 시기는 신라가 불교를 중흥하고 삼국통일을 위해 국력을 집중하여 군비를 정비할 때였다.
    이때 오갑사가 운문산 일대에 창건되고 화랑수련장이 만들어 진다. 그것은 곧 신라가 서남일대 낙동강 유역으로 국력을 신장해가는 과정으로써 운문사 일대가 병참기지로서 당시 신라로서는 전략상의 요충지였기 때문이다.

    고려, 조선시대의 운문사
    [삼국유사] 보양이목조에는 "후삼국을 통일하면서 태조왕건은 운문사에 있던 보양국사의 계책으로 이 일대를 평정하였다.
    그 뒤 후삼국의 사회적 혼란을 어느 정도 수습한 왕건은 937년(태조 20년), 대작갑사에 '운문선사'라는 사액과 함께 전지 500결을 하사하였다." 고 한다.
    이 때부터 대작갑사는 운문사로 개칭되었고, 경제적 기반을 튼튼히 구축한 대찰로서 지위를 가지게 되었다.
    1105년(고려 숙종 10) 원응국사 학일이 제3차 중창한 후 왕사로 책봉되었다.
    원응국사는 1129년(인조 7) 부터 이 절에 머무르실 때 운문사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1277년 일연선사는 고려 충열왕에 의해 운문사의 주지로 추대되어 1281년까지 머무르셨다.
    이 곳에서 일연은 『삼국유사』 의 집필을 착수하였다. 운문사의 절 동쪽에는 일연선사의 행적비가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다.조선시대인 18세기 중반, 운문사는 설송 연초대사가 제4차 중창할 때와 19세기 전반 헌종 년간에서 운문사의 사세는 상당했다. 운문사의 제5차 중창주인 운악화상은 1839년에 오백전을 중수하였다. 이듬해 응진전과 명부전, 미타전, 내원암, 북대암등을 중건하였다. 그리고 다음해에는 청신암을 창건하였고, 1842년 금당을 중건하였다.

    근현대의 운문사
    해방이후 제 1세 김상명 스님에서 제 4세 박상웅스님까지 잠시 대처승이 거주하였다.
    1950년대 교단정화 이후 비구니 정금광 스님이 1955년 초대 주지로 취임하여 제 8차 보수.중창하였다.
    이후 2.3대 유수인, 4대 배묘전 , 5대 이태구, 6대 안혜운, 7대 위혜안 스님을 거쳐 8대부터 12대까지(1977~1998) 전명성 스님이 운문사 주지와 학장을 겸임하면서 제9차 중창불사를 이룩, 대웅보전과 요사 등 29동을 신축하고, 만세루 등 기타 전각들을 중수하는 등 명실공히 대가람으로서의 면모를 일신하였다.

    이어 1998년부터 제13대 주지로 송혜은 스님이 부임하면서 선원을 신축하여 교와 선을 아울러 익힐 수 있는 도량으로 가꾸었다. 2002년부터 제14대 주지는 흥륜강사스님이 소임을 사셨으며, 15대는 2010년까지 진성스님이 주지를 맡았다.
    2014년까지 일진강사스님, 2018년까지 진광강사스님이 소임을 살았으며 현재는 운산강사스님이 주지 소임을 살고 있다.
    1997년 비구니 강사를 양성하는 전문 교육기관으로는 최초로 승가대학원이 개설되었다.
    1958년 비구니 전문강원이 개설된 이래 수많은 졸업생을 배출하였고, 1987년 승가대학으로 명칭이 바뀌고 전문교과 과정과 교수진을 확보하여 승가대학의 명분에 걸맞는 교육을 진행하고 있다.
    현재 대략 160여 명의 비구니 스님들이 이곳에서 경학을 수학하고, 계율을 수지봉행하고 있으며,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는 백장 청규를 철저히 실천하고 있다.
    운문승가대학은 국내 승가대학 가운데 최대의 규모와 학인수를 자랑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