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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1. 해인사 창사정신
    작성자/작성일
    두레박 24-05-03

    해인사는 신라 의상대사의 법손인 순응(順應), 이정(利貞) 두 스님이 신라 제40대 애장왕 3년(802) 10월16일 왕과 왕후의 도움으로 창건 되었다.
    해인사에 관한 종합적인 문헌으로 「가야산 해인사고적(伽倻山海印寺古籍)」이 있는데, 이는 해인사의 연기(緣起), 실화(失火)와 중창의 역사, 대장경의 인경(印經)에 관한 여러 사적과 문헌들을 모아 고종 11년(1874)에 판각한 것이다.

    이 「가야산해인사고적」에 수록된 문헌가운데 똑같은 이름의 「가야산해인사고적」(고려 태조 26년에 이루어진 것)과 신라 최치원(崔致遠)이 지은 「신라가야산해인사선안주원벽기(新羅伽倻山海印寺善安住院璧記)」의 두 기록은 해인사의 창건에 대하여 비교적 소상하게 전해주고 있다.

    해인사 창건의 참뜻은 해인(海印)이라는 낱말에 응집되어 있다.
    해인이라는 말은 화엄경의 해인삼매에서 비롯된 것으로 해인삼매는 일심법계의 세계를 가르키는 말이며 부처님 정각의 세계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곧 있는 그대로의 세계, 진실된 지혜의 눈으로 바라본 세계, 객관적인 사상의 세계이니 바로 영원한 진리의 세계이다.
    해인삼매는 또한 오염됨이 없는 청정무구한 우리의 본디 마음을 나타내는 말이며, 우리의 마음이 명경지수의 경지에 이르러 맑고 투명해서 있는 그대로의 세계가 그대로 비치는 세계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러한 모습을, 한없이 깊고 넓으며 아무런 걸림 없는 바다에 비유되어 거친 파도, 곧 우리들 마음의 번뇌망상이 비로소 멈출 때 우주의 갖가지 참된 모습이 그대로 물속에 비치는 경지를 해인삼매라 하였다.
    이러한 여실한 세계가 바로 부처님의 깨달음의 모습이요, 중생의 본모습이니 이것이 곧 해인삼매의 가르침인 것이다.
    청정도량 해인사, 이곳은 우리들 마음의 고향이다.

    그래서 황량한 대지를 방황하는 현대의 이방인들을 다정한 고향의 손짓으로 부르고 있다.
    팔만대장경, 높은 탑, 자연의 그윽함이 있다고 그런 것이 아니다.
    해인삼매의 한 생각, 맑은 마음 그 거룩한 도량이 바로 해인사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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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해인사 중창기
    작성자/작성일
    두레박 24-05-03

    창건 이후 해인사의 중창에 관한 기록은 최치원이 쓴 「신라 가야산 해인사 결계장기(結界場記)」에 있는데

    그 내용을 보면 해인사는 창건 당시 터가 험하고 규모가 작았는데 약 100년이 지난 효공왕 1년(897) 가을 다시 중창할 것을 합의하고 90일 동안 참선한 뒤에 3겹의 집을 세우고 4급의 누(樓)를 올려서 사역을 확정하였다고 한다.
    또한 해인사 중수에 관한 기록은 창건으로부터 130여년이 지난 고려 건국 초기의 『균여전』에 보인다.

    이곳 기록에 의하면 해인사의 희랑(希朗)대사는 신라말 왕건을 도와 견훤을 물리치는데 도움을 주었다.
    이에 대한 대가로 경중봉사(敬重奉事)하여 전지(田地) 500결(結)을 시사(施事)하고 옛 사우(寺宇)를 중신(重新)하였다고 한다. 이로 미루어 고려 태조 때 해인사는 창건 이후 희랑대사에 의해 확장되고 새로워진 것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하였다.
    그 때가 바로 930년 경이였다.
    그 후 고려시대에 들어와 해인사는 균여(均如)대사, 대각(大覺)국사 등 많은 고승대덕을 배출하였다.
    그러나 사우(寺宇)의 중수에 관한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다만 실록을 보관한 일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태조 2년(1393)에 정중탑을 중영(重營)하고 해인사는 여러 차례 중수를 한다.

    이는 조선 왕실이 해인사에 힘을 기울인 결과라 생각된다.
    특히 태조 때 고려대장경판이 해인사에 봉안 되었다.

    태조실록 7년(1398)에는 강화에 보관되어 있던 대장경을 서울의 지천사(支天寺)로 옮겼다는 기록이 나오고 정종실록 원년(1399)에는 해인사에 대장경이 있다는 기록이 있다.
    따라서 태조 때 장경판이 해인사로 이운(移運)되고 이때부터 법보종찰로 유명하게 되었다.

    또한 기록에 의하면 세조 3년(1458)에 임금이 죽헌(竹軒)에게 명하여 대장경 50벌을 인경(印經)하고 신미(信眉), 학조(學祖) 두 스님에게 장경판전을 시찰하게 하고 그 결과 보고에 따라 판고가 비좁고 허술하므로 경상감사에게 명하여 판전 40칸을 다시 짓게 하였다고 한다.
    그 후 세조가 1468년 승하하자 정희(貞熹)왕후는 해인사를 중건하기 위한 원력을 세우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1483년 세상을 떠난다.
    해인사가 현재의 규모로 확장된 시기는 대체로 성종 12년(1481)에서 21년(1490) 사이라고 본다.
    성종 19년(1488) 덕종의 비 인수(仁粹)왕비와 예종의 계비 인혜(仁惠)왕비가 선왕의 뜻을 받들어 도목수 박중석(朴仲石) 등을 보내어 학조(學祖)대사로 하여금 판전 30칸을 짓게 하고 보안당이라 이름을 붙였다.
    그리고 1490년까지 많은 전각과 요사 등 160여칸을 완성하여 사찰의 면모를 일신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들은 성종 22년(1491) 조위(曺偉)가 쓴 『해인사 중수기』에 기록되어 있다.
    그 후 해인사는 임진왜란 때도 전화(戰禍)를 면했으나 그 후 여러 차례 화재를 입었다.

    그 내용을 보면 아래와 같다.
    숙종 21년(1695) : 동쪽의 많은 요사와 만월당, 원음루 화재
    숙종 22년(1696) : 서쪽의 여러 요사와 무설전 화재
    영조 19년(1743) : 대적광전 아래 수백칸 당우 화재
    영조 39년(1763) : 화재
    정조 4년(1780) : 무설전 화재
    순조 17년(1817) : 수백칸 당우 화재
    고종 8년(1871) : 법성요 화재

    이와 같이 1695년 이후 1871년까지 해인사에는 일곱 번의 큰 화재가 있었으나 판전 건물은 피해가 없었다.

    해인사에서 비교적 오랜 건물은 대적광전, 응진전, 퇴설당, 구광루, 해탈문 등이며 대장경판전 외에는 모두 순조 17년(1817) 직후의 건물이고 나머지 건물은 훨씬 후의 건물들이다.

  3. 신라가야산해인사 선안주원벽기
    작성자/작성일
    두레박 24-05-03

    「신라가야산해인사 선안주원벽기」에서 말한 해인사의 창건

    (전략)
    조사(祖師)인 순응대덕은 신림(神琳) 석덕에게 법을 배우고, 대력(大曆) 초년(766, 신라 혜공왕 2년)에 중국에 건너갔다. 마른 나무에 의탁하여 몸을 잊고 고성이 거처하는 산을 찾아서 도를 얻었으며, 교학을 철저히 탐구하고 선(禪)의 세계에 깊이 들어갔다. 본국으로 돌아오게 되자 영광스럽게도 나라에서 선발함을 받았다.
    곧 탄식하여 말하기를 "사람은 학문을 닦아야 되며 또한 세상은 재물을 간직함이 중하다. 이미 천지의 정기를 지녔고 또한 산천의 수려함을 얻었으나, 새도 나뭇가지를 가려서 앉는데 나는 어찌 터를 닦지 아니하랴"하고 정원(貞元) 18년(802) 10월 16일 동지들을 데리고 이곳에 절을 세웠다.
    산신령도 묘덕(妙德)의 이름을 듣고 청량한 형세의 땅을 자리잡아 주었으며 오계를 나누어 꾸며서 일모(一毛)를 다투어 뽑았다.
    이때에 성목왕태후(聖穆王太后)께서 천하에 국모(國母)로 군림하시면서 불교도들을 아들처럼 육성하시다가 이 소문을 듣고 공경하며 기뻐하시어 날짜를 정하여 귀의하시고 좋은 음식과 예물을 내리셨다.
    이것은 하늘에서 도움을 받은 것이지만 사실은 땅에 의하여 인연을 얻은 것이다.
    그러나 제자들이 안개처럼 돌문으로 모여들 때 스님은 갑자기 세상을 떠나셨다.
    그리하여 이정 선백(利貞禪伯)이 뒤를 이어 공적을 세웠다.
    중용의 도리를 행하여 절을 잘 다스렸고 주역 대장(大壯)의 방침을 취하여 건축을 새롭게 하였다.
    구름처럼 솟아오르는 듯, 노을이 퍼지는 듯, 날마다 새롭고 달마다 좋았다.
    그리하여 가야산의 좋은 경치는 도를 성취하여 터전에 알맞게 되었으며, 해인의 귀한 보물은 지대한 가치를 가지게 되었다.

    (하략)
    이 기록에 의하면 순응은 신림의 제자였는데 766년, 당나라로 구법의 길을 떠났다가 돌아온 뒤 신라 애장왕 3년(802)에 가야산에 해인사를 창건하기 시작했다.
    이 소식을 들은 성목왕태후가 불사(佛事)를 크게 도왔는데 갑자기 순응이 입적하게 되자 그의 뒤를 이어 이정이 이 절을 크게 완성하였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4. 가야산해인사고적
    작성자/작성일
    두레박 24-05-03

    「가야산해인사선안주원벽기」보다 43년 뒤인 천복(天福) 8년(943, 고려태조 26년)에 지어진 「가야산해인사고적」에는 해인사의 창건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사람의 잘되고 못 됨은 곳에 달려 있고, 땅의 성하고 쇠함은 시절에 관계되는 것이다.
    가야산(일명 牛頭山) 해인사는 해동의 명찰이다.
    옛날 양나라 때, 보지공이 임종할 때에 「답산기」를 제자들에게 주면서 유언하기를 "내가 죽은 뒤에 고려의 두 스님이 와서 법을 구할 것이니 그때 그들에게 이 「답산기」를 전해주라"고 하였다.
    그 뒤에 과연 신라의 순응, 이정 두 스님이 중국에 가서 법을 구하였는데, 보지공의 제자가「답산기」를 내어 주면서 공이 임종할 때 하던 말을 전하였다.
    두 스님이 그 말을 듣고 공의 묘소에 찾아가서 "사람은 고금이 있거니와 법에야 어찌 앞뒤가 있겠습니까?" 하면서 밤낮 이레동안을 선정에 들어 법을 청하였다.
    어느날 묘문이 저절로 열리면서 공이 나와서 법을 말씀하고 의발과 신발을 전해 주면서 말하기를 "너희 나라 우두산 서쪽에 불법이 크게 일어날 곳이 있으니, 너희들은 본국에 돌아가 별비보대가람 해인사를 세우라."하고는 다시 묘문 안으로 들어갔다.
    두 스님이 신라로 돌아와 우두산 동북쪽으로 고개를 넘고 다시 서쪽으로 내려가다가 사냥꾼들을 만나 "그대들이 이 산을 두루 다녀 잘 알 것이니, 어디 절을 지을 만한 곳이 없던가?"하고 물었다.
    사냥꾼들은 "여기에서 조금 내려가면 물 고인 데(지금의 바로 대적광전자리)가 있고 또 거기에는 철와(지금은 비로전 지붕에 있음)가 많으니 거기에 가서 보시오"하고 대답하였다.
    두 스님은 물 고인 곳에 이르러 보니 마음에 흡족하였다.
    풀을 깔고 앉아 선정에 들었는데, 이마에서 광명이 나와 붉은 기운이 하늘에 뻗쳤다.
    그때 마침 신라 제 39대왕(40대의 잘못임) 애장왕의 왕후가 등창병이 났는데, 어떠한 약을 써도 효력이 없으므로 임금이 신하들을 여러 곳에 보내어 고승 석덕의 구호를 찾고 있었다.
    사신이 지나가다가 하늘에 치솟는 붉은 기운을 바라보고, 이상한 사람이 있는가 여겨, 산 아래에 이르러 숲을 헤치면서 수십리나 들어갔으나 시내가 깊고 골짝이 좁아 더 나아갈 수가 없었다.
    한참 망설이고 있었는데, 때마침 여우가 바위 위로 지나가는 것을 보고 신기하게 여겨 따라가다가 두 스님이 선정에 들어 방광하는 것을 보았다.
    공경하여 예배하고 왕궁으로 함께 가기를 청하였으나 두 스님은 허락하지 아니 하였다.
    "이 실 한끝은 궁전 앞에 있는 배나무에 매고, 다른 한 끝을 아픈 곳에 대면 병이 곧 나으리라"고 하였다.
    사신이 돌아가 임금에게 여쭈었더니 그대로 시행하였다.
    과연 배나무는 말라 죽고 병은 나았다.
    임금이 감격하여 나라 사람들을 시켜 이 절을 짓게 하였으니, 때는 애장왕 3년(802) 임오(壬午), 당(唐)의 정원(貞元) 18년이다.
    임금이 친히 이 절에 와서 전답 2천 5백결을 시납하고 경찬하였다.
    (하략)
    이 가야산해인사고적」은 누구에 의해 지어진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끝의 '천복팔년계묘시월의판성적'이란 간기에 의해 이 글이 고려 태조 26년에 이루어졌다는 것만 알 수가 있을 뿐이다.
    어떻든 이 「가야산해인사고적」과 앞에 인용한 최치원의 「신라가야산해인사서안주원벽기」의 두 기록을 통하여 해인사의 창건과 그에 얽힌 내용을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볼 수가 있을 것이다.

    첫째,
    서두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해인사는 신라 제40대 애장왕 3년(802) 10월 순응, 이정 두 스님에 의해 창건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거의 모든 기록과 일치하는 것이다.


    둘째,
    순응은 신림의 제자였다.
    그런데 신림은 의상의 제자였으므로 결국 순응은 의상의 손제자가 되는 셈이다.
    이런 점에서 「삼국유사에서」말하는 이른 바 화엄십찰의 하나로 해인사가 포함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하겠다.


    셋째,
    순응은 당나라에 유학을 다녀왔던 스님이었다.
    그가 중국으로 건너갔던 때는 대력 초년으로 766년의 일이었다.
    그러나 순응과 이정 두 스님이 보지공의 제자로부터 「답산기」를 전해 받고 또 이미 250여 년 전에 죽은 보지공으로부터 우두산에 별비보대가람 해인사를 창건하라는 부촉을 받았다고 하는 「가야산해인사고적」의 기록은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아무래도 이것은 해인사의 창건을 신비화시키고자 한 후세인들 심리적 표현의 결과라고 하겠다.


    넷째,
    해인사의 창건에는 신라 왕실의 각별한 도움과 후원이 있었던 것을 알 수가 있다.
    이에 대하여 「해인사선안주원벽기」에서는 성목왕 태후의 귀의와 대시주를 말하고 있고, 「해인사고적」에서는 애장왕비의 난치병 치유가 인연이 되어 애장왕이 크게 도움을 주었다고 하여 양자 사이에 차이가 있기는 하나, 왕실의 도움이라고 하는 점에서는 일치하는 것이다.
    애장왕은 서기 800년에 13세의 나이에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숙부인 언승이 섭정을 하였다.
    그리고 왕 3년에 아찬 김주벽의 딸을 후궁으로 맞아들였고 6월 정월에 비 박씨를 왕후로 했다고 하는 「삼국사기」의 기록이 있으므로 왕 3년에 왕후의 병을 고쳐 주었다는 「해인사고적」의 기록은 납득이 가지 않는다.
    그러므로 불심이 강했던 애장왕의 할머니인 성목왕 태후가 해인사 창건의 대시주였다는 최치원의 기록을 따르는 것이 순리일 것으로 생각된다.

  5. 해인사 대장경
    작성자/작성일
    두레박 24-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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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려진 바의 의하면 부처님을 따랐던 수많은 제자와 중생들에게 한 설법과 교화 내용은 생전에는 문자로 기록되지 못했다.
    80생애를 마치고 열반에 드신 후 제자들은 부처님의 말씀을 기록으로 남겨야 할 절실한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고 그리하여 만들기 시작한 최초의 기록이 패엽경(貝葉經)이다.

    패엽경이란 최초의 불교 결집에서 만들어진 결집경전(結集經典)으로 패다라(貝多羅)에 송곳이나 칼끝으로 글자를 새긴 뒤 먹물을 먹여 만들었다.

    패다라는 인도에서 종이 대신 글자를 새기는 데 쓰였던 나뭇잎을 말하는데, 흔히 다라수(多羅樹) 잎이 많이 쓰였으므로 그렇게 불려졌다.
    다라수는 종려나무와 비슷하고, 그 잎은 바탕이 곱고 빽빽하고 길다.
    글 쓰느데 사용하려면 말려서 일정한 규격으로 자른 다음, 칼이나 송곳으로 자획(刺劃)을 만들고 먹을 넣는다.
    그 크기 6~7 센티미터, 길이 60~70 센티미터 정도이며 양쪽에 구멍을 뚫어 몇십 장씩 실로 꿰어 묶어둔다.
    패엽경이 최초로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은 부처님이 돌아가시던 해였다.

    제자들은 생전에 부처님께서 설파한 가르침을 흩어지지 않게 보존하기 위해 각자 들은 바를 여시아문(如是我聞), 즉 ‘내가 들은 바는 이와 같다.’고 하여 서로 논의하고 모아서 결집(結集)하였다.
    구체적으로는 왕사서의 칠엽굴에서 가섭(迦葉)을 상좌로 500명의 비구가 모여 경(經), 율(律), 2장(藏)의 정리하여 다라수 잎에 새긴 것이다.
    이후 부처님의 말씀을 기록하여 널리 반포할 목적으로 간행한 기록을 모두 대장경(大藏經)이라고 부르기 시작하였다.

    대장경은 일체경(一切經), 삼장경(三臧經) 또는 장경(藏經) 등으로 부르기도 하며 경장(經藏), 율장(律藏), 논장(論藏)의 삼장으로 구성된다.
    삼장(三臧)이란 인도의 고대언어인 산스크리트(梵語) 혹은 빨리(Pali)어로 된 뜨리삐따까(Pitaka)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경장이란 부처님께서 따르는 제자와 일반 대중을 상대로 설파한 내용을 기록한 경을 담아 놓은 광주리란 뜻이고, 율장은 제자들이 지켜야 할 계율(戒律)의 조항과 그밖에 공동생활에 필요한 규범을 적어 놓은 율을 담은 광주리란 뜻이다.
    논장은 위의 경과 율에 관하여 스님들이 이해하기 쉽게 해설을 달아 놓은 글, 즉 논을 담은 광주리란 뜻이다.

    처음엔 이 세 가지 종류의 부처님 말씀을 기록하기 위해 다라수 외에도 나뭇잎, 대나무 등 여러 가지 재료를 사용하였는데 부처님이 태어난 아열대 지방의 기후는 너무 덥고 습하여 오랫동안 보존 할 수 없었으므로 못쓰게 되면 다시 만드는 일을 반복하게 되었다. 이런 과정을 거치는 동안에 기록의 내용은 조금씩 달라지고 부처님이 돌아가신 후 자연발생적으로 생긴 여러 종파들은 제각기 다른 대장경을 기록으로 남겼으며 대표적인 것이 지금 산스크리트어 혹은 빨리어로 기록된 뜨리삐따까이다.
    차츰 여러 종파의 인도불교는, 부처님 가르침 그대로 사성제. 팔정도를 닦아나가는 엄격한 자기 수행 중심의 소승불교에서, 중생을 올바른 길로 이끌어 부처님의 경지에 다다르게 하는 것을 이상으로 삼는 대중적 대승불교로 통합되고 경, 율, 논 삼장의 내용을 정비하면서 인도를 중심으로 세력을 넓혀갔다.

    그러나 아직은 오늘날 남아있는 것과 같은 형식의 대장경이 없는 상태에서 중국으로의 포교활동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중국에 불교가 전해지게 되면서 인도어로 된 불경들을 중국어로 번역하는 일이 중요해졌다. 처음에 산발적이었던 번역사업은 포교활동과 함께 당시 나라를 통치하던 지배계층이 관심을 갖게 되자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다.
    불경의 번역사업은 통치의 한 수단으로 국가적인 행사가 되었으며 최초로 동진(東晋)의 도안(道安, 344~385)이 한나라 이래의 각종 번역 불경의 총목록을 작성한 이후 당나라 개원 18년인 730년 지승(智昇)이 쓴 개원석교록(開元釋敎錄)이라는 번역서 목록 등은 번역불경을 정리한 좋은 예였다.

    중국에서 산발적으로 이루어져오던 불경의 번역사업이 체계적으로 정일되기 시작한 연대는 양·진 시대까지도 거슬러 올라갈 수 있으나, 실제로는 수·당 시대까지도 손으로 베껴쓰는 필사본의 수준을 넘지 못하였다.
    필사본 번역불경은 옮겨 쓰는 과정에 이중으로 번역되거나 잘못 번역하는 등 정확을 기하지 못했고 종이가 흔치 않았던 시절이므로 나뭇잎, 대나무, 나무 껍질 등의 사용으로 보관에 많은 문제가 발생하자 오랫동안 보관이 가능한 재료를 찾게 되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 돌을 재료로 한 석판(石板)대장경, 금속판에 새긴 금속판대장경도 쓰이게 되었다.
    중국 운거서 방산석경 1만여 장은 지금 남아있는 가운데 대표적인, 돌로 만든 대장경이다.
    그러나 취급과 보존, 또 인쇄하여 널리 알리는데 편리한 점을 고려한다면 나무를 대신할 만한 재료가 없었으므로 자연스럽게 목판(木板)대장경이 필요하다고 느끼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