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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산조사 삼법(三法)과 대비화상(大悲和尙)
    작성자/작성일
    두레박 24-05-03

    쌍계사는 통일신라 723(성덕왕22)년에 삼법과 대비 두 화상이 육조혜능조사(六祖慧能祖師)의 정상(頂相), 즉 두상을 봉안하고 작은 움막을 세운 것이 그 시초입니다.
    삼법화상에 대한 기록은 자세하지 않으나 쌍계사의 개산과 창건에 관련된 여러 기록들이 있으며, 이를 정리하여 생애와 쌍계사 개산에 대해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삼법화상의 출생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661(문무왕 1)년경에 태어나 739(효성왕 3)년에 입적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676(문무왕 16)년에 의상대사의 제자가 되어 구족계를 받았으며 너무도 총명하여 경장과 율장을 통달하였다.
    당시 중국에는 육조혜능조사께서 크게 선풍을 일으키고 있었는데, 그를 찾아가서 도를 묻고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714(성덕왕13년)에 육조혜능조사가입적하였다는 말을 전해 듣고 매우 애통해 하였다.
    6년이 지난 뒤 금마국(⾦⾺國) 미륵사(彌勒寺)의 주창(主晶)스님이 당나라에서 가지고 온 육조혜능조사의 설법집 『법보단경法寶壇經』을 읽던 중에 육조혜능선사가 이르기를, “내가 입적한 뒤 70년이 지나서 유이보살(有⼆菩薩)이 종동방래(從東⽅來)하리니, 동방에서 두 명의 보살이 와서 동토유연지국토(東⼟有緣之國⼟)에 가서 불법을 널리 홍포하리라.”는 대목을 읽다가, “내가 마땅히 힘껏 도모하여서 우리나라에 만대萬代의 복전福⽥을 지으리라.”고 생각하고 이에 김유신(⾦庾信)의 부인이었던 법정(法淨)비구니에게 2만 금을 빌려 상선을 타고 당나라로 가서 홍주(洪州)의 개원사(開元寺)에 가서 머물렀다. 그곳에는 신라 백율사(栢栗寺)의 대비선백(⼤悲禪伯)이 있었는데, 두 사람이 서로 친하여 의논하던 중, 이 절에 기거하던 장정만(張淨滿)에게 2만금을 주고 육조혜능조사의 정상頂相(두상)을 취하여 오게 하였다. 그 후 귀국하여 법정비구니가 머무는 영묘사(靈妙寺)에서 밤마다 육조의 정상에 공양을 올렸다. 그러던 중 한 스님이 꿈에 나타나, 자신의 인연 터가 지리산 아래 눈속에 등나무꽃이 핀 곳이니 그곳으로 옮기도록 명하였다. 이에 대비선백과 함께 눈덮힌 지리산을 헤매다가 12월인데도 따뜻하기가 봄과 같고 등꽃이 만발한 곳이 있어 이곳에 돌을 쪼아서 함을 만들고 깊이 봉안한 뒤 조그마한 움막 속에서 선정 닦기에 힘썼다. 18년 동안 이곳에서 수행하다가 739년 7월 12일에 목욕하고 『법보단경(法寶壇經)』을 염송하다 앉아서 입적하였다. 문인들이 유체를 받들어 운암사(雲巖寺)에 유장하였다.”

    이와 같이 쌍계사의 개산은 삼법과 대비화상이 육조혜능조사의 정상을 봉안한 것으로부터 시작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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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창건조사 진감혜소대선사(眞鑑慧昭⼤禪師)
    작성자/작성일
    두레박 24-05-03

    국보47호인 ‘진감선사대공령탑(眞鑑禪師⼤空靈塔)’비에 의하면, 진감선사 혜소(慧昭)는 전주 금마(현 익산) 사람으로 774(혜공왕 10)년에 출생했습니다. 아버지는 최창원(崔昌元)으로 재가신도이면서 출가한 스님과 같이 수행했습니다. 어머니 고씨(顧⽒)가 어느 날 잠깐 낮잠이 들었는데 꿈에 한 인도 승려가 찾아와 “내가 어머니의 아들이 되기를 원합니다”하고는 유리항아리를 주고 갔으며, 그 후 진감선사혜소를 잉태하여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진감선사 혜소의 선조는 한족(漢族)으로 산동지방의 벌족(閥族)이었는데 수·당의 고구려 원정 때 종군하여 고구려에 왔다가 금마사람이 되었다고 하기도 하고, 고구려 멸망 후 그 유민이 안승을 따라 금마에 많이 정착하게 되어 신라 골품제 사회 속에 재편성되는데, 이때 고구려 유민임을 숨기고 요동정벌군의 당나라 사람으로 자처한 것이라는 설도 있습니다.

    태어나면서 울지 않았으며 7~8세가 되어 아이들과 놀 때에는 언제나 나뭇잎을 태워 향을 삼고 꽃을 따서 공양을 올리는가 하면, 때로는 서쪽을 향해 꿇어앉아 해가 저물어도 움직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처럼 어릴 때부터 불교에 관심이 많았으나 부모에 대한 지극한 효성으로 생선장수를 하며 가족을 봉양하는데 힘썼습니다. 부모님이 돌아가시자 “길러 주신 은혜를 오로지 힘으로써 보답하였으니, 이제 도의 뜻을 어찌 마음으로 구하지 않으랴” 하였습니다.

    31세 되던 804(애장왕 5)년에 세공사(歲貢使)에게 가서 뱃사공이 되기를 청하여 중국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때 육조혜능조사의 법손인 창주(滄洲)의 신감대사(神鑑⼤師)를 만나게 되었는데, “반갑다. 이별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기쁘게 다시 서로 만났구나”라고 하면서 맞아 주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인연으로 37세(810)에 숭산(崇⼭) 소림사(少林寺) 유리계단(瑠璃戒壇)에서 구족계를 받으니, 어머니가 꾼 꿈과 일치하였습니다. 계를 받고 나서 경을 배웠는데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알아 스승을 능가하였습니다. 이때 우리나라에서 온 도의선사(道義禪師, 후에 가지산문의 제1조)를 알게 되었으며, 821년 도의선사가 귀국한 뒤에도 진감혜소선사는 종남산(終南⼭) 높은 봉우리에 들어가 소나무 열매를 먹으며 3년간 정혜를 닦았습니다. 그 후 3년 동안 자객(紫閣)으로 나와 짚신을 삼아 널리 보시하다가 57세(830)에 드디어 귀국하니 흥덕왕이 매우 기뻐하였습니다.

    상주 로악산(露岳⼭) 장백사(지금의 남장사)에 주석하게 되자 찾아오는 이가 구름과 같아서, 좋은 경계를 찾아 남령의 강주 지리산에 이르렀습니다. 지리산(현 국사암)에 머물며 선(禪)을 전파하면서 넓은 가람(절)터를 찾던 중, 어느 날 호랑이 몇 마리가 집에서 기르는 개처럼 앞길을 인도하여 위험한 곳을 피해 평탄한 곳으로 가니, 이곳이 바로 화개곡(花開⾕)의 옛날 삼법화상이 남긴 절터였습니다.
    이 터에 육조영당을 짓고 대나무통으로 물을 끌어와 집둘레 사방에 물을 대어 ‘옥천사(⽟泉寺)’라 명명하니. 곧 쌍계사의 창건이 이루어지게 된 것입니다.

    65세(838)에 민애왕이 왕의 자리에 올라 불교에 깊이 의탁하였는데, 스님을 친견하기를 수차 청하였으나 스님은 “부지런히 선정에 힘쓰는 것이 본분”이라며 끝내 응하지 않았습니다. 선사께서는 육조혜능조사의 영당을 세우고 채색·단청하여 널리 중생제도에 이바지하였으며, 고운 최치원선생은 “혜원공(慧遠公)의 노산(廬⼭) 동림사(東林寺) 경치(호리병속의별천지)를 신라에 옮겨 왔다”고 찬탄하였습니다. 850(문성왕 12)년 정월 9일 이른 아침, 문인들에게 “만법이 모두 공하니 내가 장차 가려 한다. 일심으로 근본을 삼아 너희들은 힘써 노력하라. 탑을 만들어 유체를 보존하지 말고 명(銘)으로써 행적을 기록하지도 말라”는 말을 마치고 앉아서 입적했습니다.

    진감선사에 의해 비로소 쌍계사가 처음으로 가람의 면모를 드러내게 되었는데, 당시에는 옥천사(⽟泉寺)라 불렀습니다. 헌강왕이 즉위하여 보니 이웃 고을에도 같은 이름의 옥천사가 있으므로 백성들이 미혹할까 염려하다가, 그 절터를 살펴보니 동구에 두 시냇물이 마주 대하고 있으므로 ‘쌍계사(雙磎寺)’라는 제액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이로부터 옥천사는 쌍계사라는 이름으로 오늘날까지 이르고 있습니다. 선사는 신라에 육조 남종선을 최초로 전파하였으며 불교의식인 범패를 가르침으로 불교의식을 완성했고, 차나무를 화개곡(동) 일대에 번식시켜 이것이 다도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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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중창조사(重創祖師)
    작성자/작성일
    두레박 24-05-03

    쌍계사에 관한 고려와 조선 전기의 자세한 문헌자료는 없으나 1446년 선비대사의 팔상전 중수, 1506년 진주목사 한사개(韓⼠价)의 중수, 1549년 서산대사의 중수가 이어진 것으로 보아 사격(寺格)이 매우 높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현존하는 사료들을 토대로 쌍계사의 연혁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 1549년 청허휴정(淸虛休靜)스님이 쓴 「지리산 쌍계사 중창기」를 들 수 있습니다. 이 기록을 보면 1549(중종 35)년에 세월이 오래되어 탱자가지가 숲을 이루고 비석이 초인들에 의해 박락(剝落)되어 있는 것을 보고, 중섬(仲暹)스님이 조정에 나아가 비석이 지극한 보배임을 알리고 조처를 취해줄 것을 간(諫)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에 예조에서는 반경 5리에 금표(禁標)를 세워 그 안에서는 나무를 치거나 불을 놓는 것을 금하였는데, 3년이 지나지 않아 주변 풍광이 예전과 같은 모습을 되찾았다고 합니다.

    이에 팔영루(⼋詠樓) 5칸의 지붕을 다시 이고 ‘진감선사대공령탑(眞鑑禪師⼤空靈塔)’비 앞 뒤에 석대를 쌓았으며, 연못을 만들어 물을 흐르게 했습니다. 1543(중종 38)년 여름에 운수승(雲⽔僧) 전수(專修)가 중창할 뜻을 세우고 시주를 모집 하였는데, 몇 해가 지나지 않아 대웅전을 세우고 차례로 금당과 방장을 지어 낙성을 하게 됐습니다. 이는 임진왜란 이전의 기록으로 쌍계사의 면모를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자료입니다. 이 외의 기록들은 모두 임진왜란 이후의 기록들로서, 청학루와 성보전에 보관된 현판류와 개인 문집 등에 단편적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들입니다. 자료를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857년 침명한성(枕溟罕醒, 1801~1876)이 쓴 「영남하동 쌍계사 사적기문」현판을 보면, 임진왜란으로 폐허가 된 사찰을 숭정(崇禎) 연간(1628~1644)에 덕화(德化)스님을 화주로 하여 벽암당(碧巖堂) 각성(覺性)스님과 소요당(逍遙堂) 태능(太能)스님 등이 옛 터가 협소하므로 지금의 자리에다 별도로 중창했다고 합니다. 이때 응진당·명왕전·관음전을 비롯하여 화엄전·팔영루와 여러 요사를 건립하여 뜰 가운데 현재의 ‘진감선사대공령탑(眞鑑禪師⼤空靈塔)’비를 두게 됐습니다. 그 뒤 1675(숙종1)년에 인계(印戒)스님이, 1695(숙종21)년에 백암당(栢庵堂) 성총(性聰)스님이, 1735(영조11)년에 법훈(法訓)스님이 중수 하였으며, 1864(고종 1)년 봄에 담월(潭⽉), 용담(⿓潭)스님께서 금당 안에 육조정상칠층보탑을 건립했습니다. 1975년 후에는 고산(杲⼭)대선사에 의해 현재 모든 전각의 중수가 이루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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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삼신산 쌍계사 三神山 雙磎寺
    작성자/작성일
    두레박 24-05-03

    이 절은 723년(성덕왕 23)에 의상의 제자인 삼법이 창건하였다. 삼법은 당나라에서 귀국하기 전에 “육조혜능의 정상을 모셔다가 삼신산의 눈 쌓인 계곡 위 꽃이 피는 소에 봉안하라.”는 꿈을 꾸고 육조의 머리를 취한 뒤 귀국 하였다. 그리고 한라산ㆍ금강산 등을 두루 다녔으나 눈이 있고 꽃이 피는 땅을 찾지 못하다가, 지리산에 오자 호랑이가 길을 안내하여 지금의 쌍계사 금당 자리에 이르렀다. 그곳이 꿈에 지시한 자리임을 깨닫고 혜능의 머리를 평장한 뒤 절 이름을 옥천사ㅁ라 하였다. 그 뒤 840년(문성왕 2)에 진감국사가 중국에서 차의 종자를 가져와서 절 주위에 심고 대가람을 중창하였다. 정강왕 때 쌍계사로 이름을 바꾸었으며,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벽암이 1632년(인조 10)에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나한전ㆍ명부전ㆍ팔상전ㆍ적묵당ㆍ청학루ㆍ천왕문ㆍ금강문ㆍ일주문ㆍ대방 등이 있다. 중요문화재로는 국보 제47호인 진감국사대공탑비와 보물 제380호인 부도가 있다. 대공탑비 는 887년(진성여왕 1)에 진성여왕이 진감국사의 도덕과 법력을 흠모하여 시호와 탑호를 내리고 이를 만들도록 한 것이다. 비문은 최치원이 쓴 것으로 우리나라 4대 금석문 가운데 첫째로 꼽힌다. 또한, 적묵당은 보물 제458 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밖에도 지정은 되지 않았지만 육조혜능의 정상을 안치한 7층의 육조정상탑과 마애여래좌상ㆍ아자방의 터가 있다. 관장하는 말사는 43개이며, 4개의 부속암자가 있다. 절에는 500m 거리의 암자인 국사암 뜰에는 진감국 사가 짚고 다니던 지팡이가 살았다는 천년이 넘는 느릅나무 사천왕수가 있고, 신라의 원효와 의상이 도를 닦았고 1205년(희종 1) 보조국사가 머물렀던 곳이라 하여 그 시호를 딴 불일암이 있다.

    예부터 금강산을 봉래산, 한라산을 영주산, 지리산을 방장산(⽅丈⼭)이라 하여 금강산, 지리산, 한라산을 삼신산(三神⼭)이라 불렀습니다. 쌍계사는 삼신산의 하나인 방장산이라 부르던 지리산 남쪽 기슭에 위치한 대한불교조계종 제13교구 본사이다.

    쌍계사는 개산(산문을 열다.)과 창건 둘로 나뉘다.
    개산은 통일신라 723(성덕왕22)년에 삼법(三法), 대비(⼤悲) 두 스님이 중국선종의 6대조인 육조혜능조사의 정상(두상)을 모시고 설리갈화처(雪裏葛化處, 눈 속에 칡꽃이 핀 곳)에 정상을 봉안한 것이 ‘개산’이다.

    창건은 통일신라 840(문성왕2)년에 진감혜소(眞鑑慧昭, 774~850)선사가 당나라 육조혜능조사의 선법을 잇고 귀국해 삼법, 대비 두 화상께서 육조혜능조사의 정상을 봉안한 곳에 조사의 영당(影堂)을 짓고 절을 크게 확장하여 옥천사(⽟泉寺)라 하고 이곳에서 선(禪)과 불교음악인 범패(梵唄)를 가르쳤다.

    진감혜소선사가 창건하기 전인 통일신라 828(흥덕왕2)년에는 대렴공이 당나라 사신으로 갔다가 귀국하면서 차나무씨를 가져와 왕명으로 처음 심은 차나무를 화개 일대에 번식시키고 77세로 입적(⼊寂)하니 승납(僧臘) 41세였습니다. 그 후 헌강왕(獻康王)은 이웃 고을에 옥천사가 있어 사람들이 미혹할까 염려하다가 산문밖에 두 시내가 만나 흐르니 ‘쌍계사’라는 사찰 이름을 내려 지금에 이른다.

    일찍이 통일신라시대 대학자인 고운 최치원 선생은 쌍계사를 ‘호리병 속의 별천지(壺中別有天地)’라고 극찬을 했고, 그 옛날 이상세계를 꿈꿨던 사람들이 그 실현을 위해 살았던 곳을 ‘청학동’이라고 하는데 청학동이 바로 불일산방 아래에 있다.
    쌍계사에서 템플스테이를 하고 다녀가는 청소년들은 ‘꿈속에서 왔다 간 것 같다’라고 쌍계사의 아름다움을 소감문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서산대사의 중창기를 보면 중섬(中暹), 혜수(蕙修)스님의 대대적인 중창이 있었으나, 임진왜란으로 폐허가 되었다.
    임진왜란 후 벽암(碧巖), 소요(逍遙), 인계(印械), 법훈(法訓), 용담(⿓潭)스님 등이 중창을 하였고, 이후 1975년부터 고산(杲⼭)대선사에 의해 복원(復元), 중수(重修) 중창(重創)을 거쳐 현재와 같은 대가람(가치가 높거나 규모가 큰 절)의 사격을 갖추게 됐다.
    쌍계사에는 국사암, 불일암, 도원암, 덕봉암, 응봉암 등 산내암자가 있고, 그 외에도 죽기 전에는 나오지 말라는 상사관원과 하사관원이 있으며 청학동에는 불일산방이 있다.

    문화재로는 국보 1건, 보물 13건 392점(경판 3종 368매 포함), 시·도지정 유형문화재 12건 1389점(경판 30종 1375매), 문화재자료 5건, 국가지정 명승(‘쌍계사일원’과 ‘불일폭포일원’)이 있고, 경상남도 기념물 제61호인 차나무 시배지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