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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통도사 설송당 연초대사
    작성자/작성일
    두레박 24-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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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후기의 승려로 호는 설송(雪松), 성은 백(白)씨, 자인현(慈仁縣;경북 경산군)에서 태어났다. 1688년(숙종14년) 13세에 청도 운문사로 출가하여 내전(內典)을 두루 섭렵하여 그 근원을 깊이 탐구하고 묘리를 체달하여 나갔다. 강석에 등단할 적이면 배우는 자들이 몰려들었다고 한다. 설송당은 처음에 석제(釋霽)를 스승으로 섬기고 뒤에 환성 지안(喚醒 志安)에게 참학하였다. 이 두 스승의 법을 함께 전해 받고, 청허 휴정 이후 갈라졌던 두 파를 하나로 통합하였다. 즉 유정(惟政), 응상(應祥), 쌍언(雙彦), 석제(釋霽)로 이어지는 교파(敎派)와 언기(彦機), 의심(義諶), 설제(雪霽), 지안(志安)으로 이어지던 선파(禪派)를 하나로 통일시켰다고 한다. 만년에는 뒤따르던 학인들을 사절하고 올연히 면벽참선하다가 하루는 시자를 불러 차 한 잔을 끓여 마신 뒤 게송을 쓰고는 천화하였다. 그때가 1750년(영조26년,丙辰) 5월 1일 세수75세, 법랍63년이었다. 다비한 뒤 사리 8과를 얻었는데 통도사와 운문사에 나눠 분장했다. 4년뒤 이천보(李天輔)가 지은 비가 운문사에 세워져서 오늘날에도 운문사와 통도사 두 곳에 스님의 부도가 전하고 있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비문에 “정(定)이 곧 지혜요, 지혜는 곧 정(定)이니 선교(禪敎)를 논하지 말라. 도에는 동정(動靜)이 없어 마치 달그림자 물에 비치듯 동서(東西)가 분조(分照)하니, 오직 스님의 심법(心法)은 이문일종(二門一宗)이라”고 찬하여 스님의 본래 면목을 잘 나타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

  2. 통도사 낙운당 지일대사
    작성자/작성일
    두레박 24-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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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통도사 성해당 남거스님
    작성자/작성일
    두레박 24-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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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54년 6월 7일 지금의 울산광역시 울주군 서생면 서생리에서 태어났다. 17세에 기장의 장안사로 출가. 취룡 태일(鷲龍泰逸)스님을 은사로, 해령(海嶺)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받았다.
    10년 뒤인 1880년부터 은사를 따라 통도사에 주석하게 된다. 이듬해 1892년 조선조 이후 끊어진 계맥을 이은 당대의 율사인 만하승림(萬下勝林)스님에게 대소승계(大小乘戒)를 수지, 눌암(訥庵)스님 문하에서 대교(大敎)를 마쳤다. 이후 화두를 들고 참선 정진했다. 39세(1892년)에 통도사 승통(僧統)에 취임해 사격(寺格)을 일신하였고, 51세(1904년)에 통도사 총섭(總攝)이 됐다. 1906년 황화각(皇華閣)에 불교전문강원을 설립해 원장 소임을 보면서 10여 년간 후학을 양성했다. 그 가운데, 황화각과 동곡루(同穀樓)를 중수했으며, 1911년 부처님 진신사리탑을 보수할 때 총지휘를 했다. 61세 되던 1914년에는 보광선원(普光禪院) 원장이 되어 납자들을 지도했고, 1927년(정묘년) 음력 12월29일 자시(子時)에 열반했다. 장례는 3일장으로 거행됐다. 제자 경봉은 은사의 열반을 다음의 시로 기렸다.

    劫前有樹本無影(겁전유수본무영) 공겁전의 본래 그림자 없는 나무가
    偶得春風現世眞(우득춘풍현세진) 우연히 봄바람 만나 세상에 나왔네
    莫問吾師歸去處(막문오사귀거처) 스승의 돌아간 곳 묻지 마라
    靈光空寂是靈眞(영광공적시영진) 신령한 광명 공적한 것이 이 영진일세

    또한, 한암스님은 경봉스님의 청으로 영찬(影讚)을 지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聖海大和尙影讚(성해대화상영찬)
    勤護三寶(근호삼보) 부지런히 삼보 수호하기를
    一片赤心(일편적심) 일편단심 이었네
    參尋祖意(참심조의) 조사의 뜻 참구하여
    透脫古今(투탈고금) 고금을 꿰뚫었네
    來耶去耶(내야거야) 오는 것이냐, 가는 것이냐
    明月胸襟(명월흉금) 밝은 달 흉금일세
    靈鷲山屹(영축산흘) 영축산 높이 솟고
    洛東江深(낙동강심) 낙동강 깊으노라

    세수 74세. 법납 58세. 碑(비)는 통도사 부도전에 봉안돼 있고, 문하에 구하천보(九河天輔, 1872~1965). 재하법성(齋河法晟). 경봉정석(鏡峰靖錫, 1892~1982). 경하달윤(鏡河達允)이 있다.

  4. 통도사 구하당 천보스님
    작성자/작성일
    두레박 24-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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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현대의 고승. 호는 구하(九河), 자호는 축산(鷲山), 성은 김씨이다. 본관은 경주로 울주군 두동면 봉계리에서 출생했다. 구하 천보(九河 天輔·1872∼1965)스님의 부친은 김한술(金漢述) 선생. 본관은 경주. 모친은 신씨(申氏)였다. 법명은 천보(天輔), 법호는 구하(九河)이다. 축산(鷲山)이란 자호(自號)를 사용했는데, 통도사의 영축산(靈鷲山)을 상징한다.

    어려서부터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고 부모에게 출가를 하겠다고 하고 집을 나섰다. 이때가 1884년 겨울로 갑신정변이 일어난 해였다. 13세가 되던 1884년 천성산 내원사에서 출가하여 행자생활을 시작했고, 경월도일(慶月道一)스님을 은사로 사미계를 받았다. 이듬해인 1890년 예천 용문사에는 용호해주(龍湖海株)스님 문하에서 경학과 참선을 공부하고 1896년 구족계를 수지했다. 같은 해 성해남거(聖海南巨)스님의 전법제자가 되어, 구하라는 법호를 받았다. 수행을 거듭하여 1905년 통도사 옥련암에서 정진하다 오도의 경지를 맛본다.

    1908년 명신학교를 비롯해 입정상업학교(지금의 부산 해동고등학교, 1932년)와 통도중학교(지금의 보광중학교, 1934년)를 설립하여 교감ㆍ교장을 역임하면서 어려운 절 살림과 암울한 일제치하의 시대 속에서도 인재양성에 힘썼다. 또한 통도사 주지로서 1910년 한일합방 후 30본산 주지가 되었으나 사규가 점차 무너짐을 보고는 후진으로 물러나 있었다.

    1919년 무렵 상해 임시정부의 재정이 매우 열악하다는 소식을 접하고 스님은 통도사의 재정으로 군자금을 지원했는데, 임시정부 국무총리인 안창호가 보낸 밀사에게 5천원, 경성 「화신공보」 사장 초월동조(初月東照)에게 2천원, 지암 종욱(鍾郁)이 군자금을 모집할 때 3천원, 독립운동가 정인섭에게 1천원 등 모두 1만3천원이었다. 또한 상해에서는 그와 성월 등이 함께 대한승려연합회 대표자 12인 선언서에 서명하는 등 항일운동에도 참여하였다. 어린이 교육에도 힘써 마산 대자유치원, 진주 연화사 유치원, 울산 동국 유치원 등을 설립하였다.

    1911년 11월부터 1925년 8월까지 통도사 주지를 역임했고,1917년 1월부터 3년간 삼십본산연합사무소 위원장을 지냈다. 불교중앙학림(지금의 동국대) 학장을 맡아 후학 양성에 힘썼다.

    포교의 중요성도 강조하며 마산 포교당 정법사(1912), 진주 포교당 연화사(1923), 창녕 포교당 인왕사(1923), 물금 포교당(1924), 언양 화장사(1927), 창원 구룡사(1929), 의령 수월사(1930), 부산 연등사(1932), 울산 포교당 해남사(1936), 양산 포교당 반야사(1940) 등 많은 포교당을 설치하여 부처님의 전법을 전하는데 힘을 쏟았다. 또한, 역경사업에도 힘써 통도사. 해인사. 범어사 3곳이 힘을 모아 해동역경원(海東譯經院)을 설립하기도 했다.

    이밖에도 1912년 11월 대한승려연합회 독립선언서 발표 동참, 백산상회 안희제와 범어사 김상호를 통해 상해임시정부에 독립자금 제공, 1920년 3월 의춘상회(의춘신탁)를 설립해 독립자금 마련, 1920년 4월 동아불교회를 설립해 항일불교운동을 시도하는 등 조국해방을 위해 힘을 쏟았다. 1949년에는 중앙불교 총무원장을 역임하고, 1965년 10월3일 원적에 들었다. 세수 94세. 법납 81세였다. 제자는 전 종정 월하(月下) 스님 등 30여명의 출가제자가 있다.

    문손들에 의해 구하스님의 시문과 금강산을 유람하고 쓴 기행문인 『축산문집(鷲山文集)』과 『금강산관상기(金剛山觀相記)』가 최근 출간되었다..

  5. 통도사 경봉당 정석스님
    작성자/작성일
    두레박 24-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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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봉 정석(鏡峰靖錫 1892-1982) 스님은 근현대의 고승으로서 광주 김씨이며, 속명은 용국(鏞國), 호는 경봉(鏡峰), 시호는 원광(圓光)이다. 경상남도 밀양출신으로 아버지는 영규(榮奎)이며, 어머니는 안동 권씨이다. 7세 때 밀양의 한학자 강달수(姜達壽)에게 사서삼경을 배웠으며, 15세 되던 해 모친상을 겪고 인생의 무상함을 깨닫고, 16세때 양산 통도사의 성해(聖海) 선사를 찾아가 출가했다.

    1908년 3월 통도사에서 설립한 명신학교(明新學校)에 입학하였으며, 그해 9월 통도사 금강계단(金剛戒壇)에서 청호(淸湖) 스님을 계사(戒師)로 사미계를 받았다. 1912년 4월 해담(海曇) 스님으로부터 비구계와 보살계를 받은 뒤 통도사 불교전문강원에 입학하여 불경연구에 몰두하였다.

    강원을 졸업 후, 하루는 경을 보다가 "종일토록 남의 보배를 세어도 본디 반 푼 어치의 이익도 없다[終日數他寶, 自無半錢分]"는 경구를 보고 커다란 충격을 받고 참선공부를 하기 위해 내원사(內院寺)의 혜월(慧月) 스님을 찾아 법을 물었으나 마음속의 의문을 해결할 수 없었다. 이에 해인사 퇴설당(堆雪堂)으로 가서 정진한 뒤, 금강산 마하연(摩訶衍)ㆍ석왕사(釋王寺) 등 이름난 선원을 찾아다니면서 공부하였다. 이때 김천 직지사에서 만난 만봉(萬峰) 스님과의 선담(禪談)에 힘입어 ‘자기를 운전하는 소소영영(昭昭靈靈)한 주인’을 찾을 것을 결심하고, 통도사 극락암으로 자리를 옮겨 3개월 동안 장좌불와(長坐不臥)하면서 정진을 계속하였다.

    1927년에 통도사 화엄산림법회(華嚴山林法會)에서 법주(法主) 겸 설주(說主)를 맡아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정진하던 중, 4일 만에 천지간에 오롯한 일원상(一圓相)이 나타나는 경지에 이르렀다. 그러나 일물(一物)에 얽힌 번뇌가 완전히 없어지지 않았음을 스스로 점검하고 다시 화두를 들어 정진하다가 1927년 11월 20일 새벽에 방안의 촛불이 출렁이는 것을 보고 크게 깨달았다. 그날 새벽 두시 반 경 바람도 없는 데 촛불이 흔들리는 소리를 내며 춤추는 것을 보는 순간 의문 덩어리가 일순간에 녹아내린 것이다. 뜨겁게 타오르던 불길 같은 마음이 식어버리자 이렇게 게송을 읊었다.

    我是訪吾物物頭(아시방오물물두) 내가 나를 바깥 것에서 찾았는데
    目前卽見主人樓(목전즉견주인루) 눈앞에 바로 주인공이 나타났도다
    呵呵逢着無疑惑(가가봉착무의혹) 하하 이제 만나야 할 의혹 없으니
    優鉢花光法界流(우발화광법계류) 우담발라 꽃빛이 온 누리에 흐르는구나.

    이후, 한암, 제산, 용성, 전강 스님등과 교류하면서 친분을 두터이 한다. 1932년 통도사 불교전문강원장에 취임한 뒤부터 50여 년 동안 한결같이 중생교화의 선구적 소임을 다하였다. 1935년 통도사 주지, 1941년 조선불교중앙선리참구원(朝鮮佛敎中央禪理參究院 지금의 선학원) 이사장을 거쳐 1949년 4월에 다시 통도사 주지에 재임되다. 1953년 극락호국선원(極樂護國禪院) 조실(祖室)에 추대되어 입적하던 날까지 이곳에서 설법과 선문답으로 법을 구하러 찾아오는 불자들을 지도하였고, 동화사(桐華寺)ㆍ내원사(內院寺) 등 여러 선원의 조실도 겸임하여 후학들을 지도하였다. 언제나 온화함과 자상함을 잃지 않았고, 청렴하고 검소한 생활을 하였으며, 꾸밈없는 활달한 경지에서 소요자재하였으므로 항상 열려진 문호에는 구도자들이 가득하였다.

    1967년 서울탑골공원에 '만해선사기념비'를 세우고 '경봉장학회'를 설립하기도 하였다. 한시와 묵필에도 뛰어났으며 선지식으로는 드물게도 70여년 동안 계속 日記를 남기기도 하였고, 지금 흔히 쓰는 해우소(解憂所)라는 말도 경봉스님이 지은 것이다.

    82세부터는 매월 첫째 일요일에 극락암에서 정기법회를 열었다. 90세의 노령에도 시자의 부축을 받으며 법좌에 올라 설법하였는데, 매 회마다 1천여 명 이상의 대중들이 참여하였다. 또한 가람수호에도 힘을 기울여 통도사의 삼성반월교(三星半月橋)와 장엄석등(莊嚴石燈) 18좌(座)를 세웠고, 극락암 조사당의 탱화조성 및 추모봉행, 특별정진처인 아란야(阿蘭惹)의 창건, 극락호국선원 정수보각(正受寶閣) 신축 및 무량수각(無量壽閣)의 중창 등을 주관하였다. 이밖에도 경봉장학회를 설립하였으며, 탑골공원 안에 만해선사기념비 건립도 추진하였다. 또 18세 때부터 85세까지 67년 동안 매일의 중요한 일을 기록한 일지를 남겼는데, 이 일지에는 당시의 사회상과 한국불교 최근세 역사가 그대로 담겨 있다.

    1982년 7월 17일(음 5월 27일)임종이 가까워 왔음을 느낀 시자 명정(明正)스님은 "스님 가시고 나면 스님의 모습을 어떻게 뵙겠습니까?"하고 물었다. 잠시 침묵이 흐른 후 스님은 좌우로 돌아보고 임을 열었다. "야반삼(夜半三更)에 대문 빗장을 만져보거라!"는 말을 남기시고 열반에 드시니 세수 91세, 법납 75세 였다. 저서로는 법어집인 『법해(法海)』,『속법해(續法海)』와 시조집인 『원광한화(圓光閒話)』, 유묵집인 『선문묵일점(禪門墨一點)』, 서간집인 『화중연화소식(火中蓮花消息)』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