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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통도사 벽안당 벽안스님
    작성자/작성일
    두레박 24-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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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벽안(碧眼)은 법호, 법명은 법인(法印)인 스님은 1901년 경북 경주시 내남면에서 태어난 스님은 35세 때 금강산 마하연에서 정진하면서 당대의 선지식인 석우(石友)스님 회상에서 불가의 도리를 배우고 정진했다. 제방선원을 돌며 화두를 참구하던 스님은 3년 뒤 양산 통도사에서 경봉(鏡峯)스님을 은사로 모시고 득도한다. 늦은 나이에 출가를 했지만 누구보다 치열하게 정진을 하고 어른 스님들을 모시는데 정성을 다했다. 스님은 경봉스님께 매일 아침 문안을 드렸다. 지팡이를 쥐고 극락암에 도착한 벽안스님은 은사 스님이 주석하는 경내에는 지팡이를 짚고 들어가지 않았다. 암자 입구에 있는 감나무에 지팡이를 세워놓고, 들어갔다. 은사 계신 곳에 지팡이를 짚고 가는 것이 예의가 아니란 생각 때문이었다.

    스님은 천성산 내원사 선원에서 하안거 정진 중이던 스님은 깨달음의 경지에 접하고 오도송을 읊는다.

    大道元來無繫縛(대도원래무계박) 대도는 원래 얽매임이 없으니
    玄機何處關形成(현기하처관형성) 현묘한 기틀 어찌 모양에서 찾으랴
    九旬磨劍寒霜白(구순마검한상백) 구순 안거에 서릿발 같은 지혜의 칼을 가니
    擊罷祖關各方行(격파조관각방행) 조사관을 격파하고 마음대로 노닐리라

    이후 통도사와 범어사 해인사 등의 선방에서 정진을 거듭한다. 43세에는 범어사에서 영명(永明)스님을 계사로 구족계와 보살계를 수지했다. 통도사 주지를 두 차례 지내시면서 청렴결백하고 公私를 구별하는데 있어 엄격함을 지니고 있었다. 공석에서는 가을서리(秋霜)와 같은 엄정(嚴正)한 자세를 유지했지만, 사석에서는 봄바람(春風)같은 따뜻함으로 대중들을 제접했다. 원효학원 이사와 동국학원 이사 및 이사장을 역임했고, 조계종 중앙종회 초대의장을 비롯해 2 · 3대 의장을 역임하면서 종단 발전의 초석을 놓았다. 1966년에는 세계불교승가대회 한국불교대표로 참석했으며, 1980년에는 조계종 원로원장으로 추대됐다.

    스님은 말년에 머물던 요사채에 ‘寂墨堂(적묵당)’과 ‘淸白家風(청백가풍)’이란 편액을 걸어 놓았다. 이는 당신이 지녔던 수행의 면목을 보여주는 글귀이다. 붓글씨 또한 스님 성품을 닮아 단아했다. 스님은 1987년 12월25일 통도사 적묵당에서 고요히 열반에 들었다. 세수는 87세 법납 53세였다. 임종게는 다음과 같다.

    靈鷲片雲(영축편운) 영축산의 구름
    往還無際(왕환무제) 오고 감에 때(時)가 없네
    忽來忽去(홀래홀거) 홀연히 왔다가니
    如是餘時(여시여시) 때가 이와 같네

  2. 통도사 노천당 월하스님
    작성자/작성일
    두레박 24-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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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의 고승. 1915년 음력 2월 25일 충남 부여군 군수리 파평 윤씨 집안에서 태어났다. 노천은 법호(法號)이고 법명이 월하(月下)이다. 속명(俗名)은 희중(喜重). 조선말 통도사에 주석했던 성해(聖海)스님의 사법제자(嗣法弟子) 구하(九河,1872-1965)스님의 법을 이었다.

    어릴 때 집 근처의 고란사 스님들을 보면서 출가를 결심하였다. 이때 속가의 부모님이 설득했지만 결국 18세인 1933년 강원도 유점사에서 성환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받고 득도한 후, 1940년 통도사에서 구하스님으로부터 비구계와 보살계를 받고 법을 이었다. 오대산 한암스님 회상에서 안거를 성만하셨다. 1944년 4월 철원 심원사에서 대교과를 졸업하고, 1950년도부터 30여년간 통도사에 전계대화상으로 후학 양성에 힘쓰셨다.

    이(理)와 사(事)를 두루 겸비한 스님은 1954년 효봉 청담 인곡 경산 스님과 함께 사찰정화 수습대책위원회에 참가해 불교정화운동에 앞장섰다. 1955년 조계종 중앙종회의원이 되었고, 1956년 통도사 주지를 하시면서 사찰내 폐습을 일소하고 강원과 선원을 복원했다. 또한, 상하이 임시정부에 많은 독립운동자금을 대는 큰 자금줄의 역할을 하기도 했다.

    1958년 조계종 총무부장 권한대행, 1958년 조계종 감찰원장, 1960년 중앙종회 의장직을 수행했다.
    1970년부터는 통도사 조실로 통도사 보광전 염화실에 주석하며 통도사를 위해 일생을 바치게 된다.
    1975년 동국학원 재단이사장, 1979년 조계종 총무원장, 1980년 종정 직무대행 등을 역임했으며 1984년에는 영축총림 방장으로 추대됐다.

    1994년 종단 개혁때는 조계종 개혁회의 의장을 역임했으며 1994년에는 조계종 제9대 종정으로 취임했다. 1998년 종단사태 이후 2001년에 다시 영축총림 방장을 재추대 되어 영축총림 수장으로, 종단의 어른으로 자리하였다.

    스님은 50여년 가까이 통도사 보광선원을 떠나지 않고 조실로 머물면서 눈푸른 납자들을 지도해왔다. 함께 수행하며 늘 수좌들을 자상하게 지도했던 스님은 졸음에 겨워하는 납자들을 야단치거나 죽비로 때리는 대신 “졸음이 올 때는 일어나 경행(輕行)하라”고 이르며 자비롭게 대해왔다. 언제나 문을 열어놓은 채 지위고하와 노소를 막론하고 방문자들을 맞았고, 대중운력에 빠지지 않고 손수 자신의 빨래까지 하는 수행자의 청규(淸規)를 지켜왔다. 詩(시) · 書畵(서화)에도 능했던 스님은 옛 조사스님들의 선시 전통을 이으면서도, 간단 명료한 언어와 선기 넘치는 선시를 지어왔다. 스님의 선시는 1998년 문도들에 의해 《월하대종사 상당법어집》으로 묶여진 바 있다.

    월하스님은 자신의 가풍에 대해 “안으로 구하는 것이 없고, 밖으로도 구하는 것이 없는 것 자체”라고 말하였다. 대중교화에도 남다른 애정을 지녀, 1920년대 중반부터 통도사에서는 대중법회를 개설하여 한 달간 전국 고승들의 법문을 들려주는 화엄산림이 현재까지 면면히 이어오고 있는데, 이러한 교화사업이 안정되게 이루어지고 있는 데는 방장스님의 원력이 남달랐기 때문이다.

    이후 늘 통도사를 지키는 어른으로서 사격을 일으키고 후학을 양성하였다. 1994년에는 종단개혁의 깃발이 오른 뒤 종정의 자리에 올라 종단어른으로 역할을 하였으며, 1998년 종단사태 이후 2001년에 다시 영축총림 방장으로 재추대되어 영축총림 수장으로 후진양성에 필력을 다하였다.

    통도사가 오늘날 불지종가(佛之宗家) 총림(叢林)에 걸맞은 가람의 위용(偉容)을 갖출 수 있었던 것도 스님의 힘이 컸다. 특히 1992년엔 정신대 할머니들을 위한 나눔의 집 건립기금으로 아무도 모르게 1억5000만원을 희사하기도 했다. 상좌들이 이 사실을 뒤늦게 알고 언론에 알렸다가 오히려 호된 꾸중을 들었다는 일화는 스님의 기품을 엿보게 하는 대목이다.

    월하스님이 2003년 12월 4일 오전 9시 15분께 세수 89세, 법랍 71세로 통도사 정변전에서 아래의 열반송을 남기고 열반하셨다.

    一物脫根塵(일물탈근진) 한 물건이 이 육신을 벗어나니
    頭頭顯法身(두두현법신) 두두물물이 법신을 나투네
    莫論去與住(막논거여주) 가고 머뭄을 논하지 말라
    處處盡吾家(처처진오가) 곳곳이 나의 집이니라.

  3. 통도사 금강계단
    작성자/작성일
    두레박 24-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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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도사 창건의 기본정신은 부처님 사리(舍利)를 봉안한 금강계단(金剛戒壇)에 있다. 이 계단은 통도사의 정신적인 근거가 되기도 하며 창사후 가장 중요한 기록을 마련하고 있다. 그래서 통도사 역사에 관해 언급하고 있는 자료들은 어느 것이나 통도사의 변화에 대해 기술하기보다는 바로 금강계단의 변천과 그역사를 강조하기 때문에 통도사 창건은 금강계단의 역사와 함께 시작된다고 하겠다.

    『삼국유사』제3권 탑상(塔像) 제4 전후소장사리조(前後所將舍利條)에 의하면 “선덕왕때인 정관(貞觀) 12년 계묘년(癸卯 643)에 자장율사스님께서 당에서 모시고 온 부처님의 두골(佛頭骨), 부처님의 치아(佛齒)등 사리(佛舍利) 100립과 부처님이 입으시던 비라금점가사(緋羅金點袈裟) 한 벌이 있었는데 그 사리를 3분하여 일부분은 황룡사탑(皇龍寺塔)에 두고 일부분은 태화사탑(太和寺塔)에, 일부분은 가사(袈裟)와 함께 통도사 계단에 두었으며”라고 하였다. 계단은 2층으로 상층(上層) 가운데에 범종 모양을 하고 있는 석개(石蓋)를 안치하였다. 이 내용은 곧 통도사의 불사리 금강계단과 함께 부처님의 친착가사(親着袈裟) 봉안 사실을 전해주는 중요한 기록이다. 본래 금강계단이 축조되기 이전 통도사는 큰 못이었다. 창건주 자장스님께서는 못을 메워 금강계단을 설치하고 통도사를 창건하셨다.

    자장스님께서 당나라 오대산 문수보살상 앞에서 기도를 드리고 있을 때의 일이다. 문수보살이 승려로 화현하여 가사 한 벌과 진신사리 1백과, 불두골(佛頭骨), 손가락뼈(指節), 염주, 경전 등등을 주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이것들은 내 스승 석가여래께서 친히 입으셨던 가사이고 또 이 사리들은 부처님의 진신사리이며, 이 뼈는 부처님의 머리와 손가락 뼈이다. 그대는 말세(末世)에 계율을 지키는 사문(沙門)이므로 내가 이것을 그대에게 주노라. 그대의 나라 남쪽 축서산(鷲栖山 : 영축산의 옛이름) 기슭에 독룡(毒龍)이 거처하는 신지(神池)가 있는데, 거기에 사는 용들이 독해(毒害)를 품어서 비바람을 일으켜 곡식을 상하게 하고 백성들을 괴롭히고 있다. 그러니 그대가 그 용이 사는 연못에 금강계단을 설치하고 이 불사리와 가사를 봉안하면 삼재(三災 : 물, 바람, 불의 재앙)를 면하게 되어 만대에 이르도록 멸하지 않고 불법이 오랫동안 머물러 천룡(天龍)이 그곳을 옹호하게 되리라.”

    이 후 스님은 귀국하여 나쁜 용들이 산다는 못에 이르러 용들울 위해 설법을 하여 제도하고 못을 메워 그 위에 금강계단을 쌓았다.
    사찰에서 스님들에게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스님에게 항복한 독룡은 모두 아홉 마리였는데, 그 가운데서 다섯 마리는 오룡동(五龍洞)으로, 세 마리는 삼동곡(三洞谷)으로 갔으나 오직 한 마리의 눈먼 용만은 굳이 그곳에 남아 터를 지키겠다고 굳게 맹세하였으므로 스님은 그 용의 청을 들어 연못 한 귀퉁이를 메우지 않고 남겨 머물도록 했다고 한다. 그곳이 지금의 구룡지인데 불과 네댓 평의 넓이에 지나지 않으며 깊이 또한 한 길도 채 안 되는 조그마한 타원형의 연못이지만 아무리 심한 가뭄이 와도 전혀 수량이 줄어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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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강계단의 역사
    작성자/작성일
    두레박 24-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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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강계단은 연못을 메우고 건립한 통도사의 대웅전 바로 뒤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은 통도사 창건의 근본정신을 간직하고 있는 최상의 성지(聖地)이며 가람배치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금강계단의 금강이라는 말은 금강석(金剛石), 곧 다이아몬드를 의미한다. 어떤 물건이라도 금강석을 깨뜨릴 수 없지만 금강석은 모든 것을 깨뜨릴 수 있다. 그래서 불경(佛經)에서는 이러한 금강석의 강인한 특징을 반야(般若)의 지혜를 표시하는 비유로 써왔다.

    곧 반야의 지혜로 모든 번뇌, 망상과 미혹의 뿌리를 끊어 버리므로 그 반야의 지혜가 금강석과 같다는 말이다. 반야의 지혜는 계(戒), 정(定), 혜(慧) 삼학(三學)을 완성함으로써 성취된다. 이 삼학 가운데서 가장 기본이 되는 바탕은 부처님의 행동을 닮아가는 연습인 계율의 실천에 있다. 계율이 기본적으로 몸에 배지 않고서는 아무리 훌륭한 일을 한다 해도 그것은 사상누각에 불과하다. 그리고 계율이란 그릇과 같아서 자칫 잘못하면 깨질 우려가 항상 있다. 그래서 계의 그릇은 금강과 같이 견고하게 보존해야 하는 것이다. 부처님의 진신사리는 삼학의 결정체이며 반야의 화현(化現)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금강과 같이 견고함으로 그 사리를 모신 계단을 금강계단이라 한다.

    자장스님은 당나라에 유학하기 이전부터 철저히 계율을 몸소 실천한 수행자였다. ‘계를 지키고 하루를 살지언정 파계를 하고 백년을 살지 않겠다.’는 그의 철저한 계율의 정신은 문수보살로부터 사리와 가사를 받은 사실로 나타났고 이 불신(佛身)이 통도사에 안치됨으로써 통도사는 계율의 근본도량이 된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귀의함에 있어서 첫째 요건은 계율을 실천하는 데 있다. 그래서 승속(僧俗)을 막론하고 불문(佛門)에 들어서기 위해서 비구는 250가지 계율인 구족계(具足戒)를 받아야 하고 재가신도는 오계(五戒)를 받아야 참다운 불자(佛子)로서의 일보를 걷게 되는 것이다. 비단 출가자뿐만 아니라 불자들의 일상생활에는 항상 계율을 지키는 자세가 기본적으로 정립되어야 한다. 그래서 승려는 승려대로 청정한 모습으로 사회의 귀감이 되어야 하며 재가신도는 그 나름대로 철저한 윤리의식 속에 이 사회를 정토로 일구어 나가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계율이 단순한 금계(禁戒)에 머무르지 않고 모든 중생들에게 이익을 주겠다는 보살계(菩薩戒)로 확산될 때 대승불교의 참된 이상(理想)이 이 땅에 펼쳐질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신라의 대국통 자장스님께서 이 땅에 금강계단을 설치한 참된 의미이다. 그래서 통도사 금강계단에서 계를 받는 일은, 부처님에게서 직접 계를 받는 것과 동일한 의미를 지니므로 통도사의 금강계단은 오늘날 까지도 승려들의 유일한 정통을 잇는 수계(受戒)의 장소로 인식되고 있다.

    고려시대의 금강계단

    『삼국유사』에 의하면 고려초에 사리와 가사를 덮은 석종이 개봉된 사실이 있었다. 민간에 유포된 당시의 이야기로는 고려초의 관직을 뜻하는 안렴사(按濂寺)가 통도사에 와서 금강계단에 예를 표한 뒤 돌 뚜껑을 들어내고 사리를 들여다보니 처음엔 긴 구렁이가 사리를 보관한 석함(石函) 속에 있는 것을 보았고 두 번째는 큰 두꺼비가 쪼그리고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고한다. 그 뒤로는 감히 돌 뚜껑을 들어보지 못했다고 한다.
    수도를 강화도로 옮긴 때인 고종 22년(1235)에 상장군 김공(金公) 이생(利生)과 유시랑(庾侍郞) 석(碩)이 고종의 명을 받아 낙동강 동쪽을 지휘하던 차에 절에 와서 돌 뚜껑을 들어내고 예를 표했다. 이때 돌함 속에 있는 유리통 하나가 금이 가서 유공(庾公)이 마침 갖고 있던 수정통을 기부하여 거기에 사리를 보관했다고 한다. 그 후, 1264년 원나라 사신들과 여러 사람들이 와서 그 돌함에 예배드렸으며, 사방의 운수승(雲水僧)들이 몰려와서 예참했다 한다.
    또한 원나라에 머물던 인도의 지공(指空)[지공·나옹·무학의 3화상 중의 한 분임]스님은 금강산 법기도량(法起道場)에 참배하는 것과 금강계단의 사리와 가사에 참배하는 것을 큰 영광으로 알았으며, 또한 스님은 1326년 고려에 와서 금강산에 머물면서 계를 설하였고 통도사에 와서 금강계단을 참배하여, 가사와 사리를 친견한 공덕을 높이 평가했다. 아울러 지공스님은 고려에 들어올 때 『문수사리무생계경(文殊師利無生戒經)』을 가져왔다고 하는데, 이와 동일한 경전으로 생각되는 『문수사리최상승무생계경(文殊師利最上乘無生經)』목판본이 통도사 성보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무생계경』이란 “모든 중생이 유무(有無)와 성상(性相)에 집착하지 않고 수행하면 일체가 불생불멸(不生不滅)한다는 법리(法理)를 증득할 수 있다”는 내용이다.
    1377년과 1378년에 계단은 큰 수난을 받았다. 고려의 국력이 쇠약해지는 틈을 타 동해변에 왜적이 침탈이 빈번해질 때였다. 당시의 통도사 주지였던 월송(月松) 대사는 우왕 3년(1377)에 왜적이 내침하여 사리를 가져가려 하자 그것을 가지고 도망쳤다가 다시 1379년 왜적이 사리를 침탈하려고 했을 때 사리를 가지고 통도사를 빠져나와 서울까지 올라와야 했다.

    조선시대의 금강계단
    1592년의 임진왜란으로 금강계단은 또다시 왜적에 의해서 큰 시련을 겪게 되었다. 왜적은 계단을 파괴하고 사리와 영골(靈骨)을 탈취했던 것이다. 그러나 불행 중 다행히도 부산 동래에 사는 백옥(白玉)거사가 왜인의 포로로 잡혔다가 그 사리와 영골을 가지고 도망쳐 나왔다. 그로부터 11년 뒤인 선조 36년(1603) 사명대사(泗溟大師) 유정(惟政)은 왜적의 침탈을 염려하여 사리를 크고 작은 두 개의 함에 넣어 은사이신 금강산의 서산대사(西山大師) 휴정에게 보냈다. 그러나 휴정스님은 “온 국토가 침탈당하고 있는 이 마당에 동해변에 있는 이곳 금강산도 안전하지 못하다. 영축산은 문수보살께서 친히 계단을 설치하라고 부촉한 장소이다. 계를 지키지 않는 자라면 그에게는 오직 금과 보배만이 관심의 대상일 것이고, 믿음의 보배인 사리가 목적이 아닐 것이니 옛날 계단 터를 수리하여 사리를 봉안하라”고 하면서 한 함은 돌려보내고 나머지 함은 태백산(太白山) 갈반사(葛盤寺)에 봉안하게 했다. 사명대사는 휴정대사의 명을 받고 계단을 수리하여 사리를 안치하였다. 그 뒤 여러 번의 중수를 거쳐 오늘날의 모습으로 전해오기까지 금강계단은 한국 불교의 중심지로서 그 역할을 다해 왔다.


    금강계단의 초창과 중건사실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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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리신앙
    작성자/작성일
    두레박 24-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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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리는 불자가 존중하는 신앙(信仰)의 대상이다. 이 사리는 옛적부터 계(戒), 정(定), 혜(慧)의 삼학(三學)을 성취(成就)했을 때 나타나는 결정체라고 한다. 『통도사 사적기(通度寺 事蹟記)』「사리영이편(舍利靈異篇)」에 보면 사리의 영이함에 관한 많은 이야기들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첫째는 사부대중(四部大衆) 가운데 어느 누구든지 사리(舍利)를 첨례(瞻禮)하고 공양할 때에는 먼저 다섯 가지 법신(法身)의 향기가 산내에 드높아 내원(內院)에 머물고 있는 사람들이 이상한 향기를 맡고 감탄하는 일이다.


    둘째는 인연의 유무를 따라서 사리가 나타나기도 하고 나타나지 않기도 하고 빛나면서 수정통(水晶筒) 가운데 붙어서 나오지 아니하며 혹은 절반만 있고 절반은 없으며 혹은 크기도 하고 작기도 하며 때로는 순금색(純金色)이거나 또 순옥색(純玉色)이며 절반은 금이며 절반은 옥이며 또 크고 작음과 숨고 나타남이 같지 아니한 것이다.


    셋째는 사람들이 첨례할 때 맑은 하늘에서 갑자기 비가 내리기도 하며 우천(雨天)이 홀연히 개기도 하며 검은 구름이 깔리고 우레 소리를 내며 폭풍이 갑자기 비를 내려 수목(樹木)을 쓰러뜨리기도 하여 그 길흉(吉凶)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넷째는 사람들이 첨례하기 위하여 동구(洞口)로 들어올 때면 계단 석종(石鍾) 위에서 먼저 오색광명(五色光明)이 크게 천지(天地)를 비춰 훤히 산과 골짜기를 밝히는 것이다.


    다섯째는 사람들이 첨례(瞻禮)하여 향과 초를 태워 여러 가지로 공양하고 부지런히 정진(精進)하면 계단(戒壇)의 반상에 변신사리(變身舍利)가 모래알처럼 무수히 나타나는 것이다.


    여섯째는 사리를 첨례하려는 사람이 몸과 마음이 부정(不淨)하여 하심(下心)하지 못하고 원문(院門)을 소란스럽게 하면 일원중(一院中)에 먼저 비위를 상하는 고약한 냄새가 나서 그 사람이 곧 광란(狂亂)하여 땅에 쓰러져 귀신의 말을 지껄이다가 결국 미치게 되는 것이다.


    일곱째는 금강계단 석종 부도의 여의주석 반석 아래 움푹 파인 곳에 항상 물이 가득 차 있고 그 가운데 한 쌍의 푸른 달팽이가 매양 붙어 있는데 석종을 들 때 사람이 보면 사방으로 흩어져 간 곳을 알지 못하다가는, 사람이 없어지면 잠깐 사이에 들어와서 전과 같이 있는 것이 사시(四時)에 끊어지지 아니하고 죽지 아니하여 항상 붙어 있으면서 나타나기도 하고 나타나지 않기도 하는 것이다.


    여덟째는 금강계단 위로는 모든 날 짐승이 그 가운데를 날아가지 아니하고 또 그 위에 오줌과 똥을 주지 않는 것이다.
    이와 같이 여덟 가지의 사리에 대한 신령(神靈)스러움과 길흉변동(吉凶變動)이 사리영이편(舍利靈異篇)에 기록(記錄)되고 있다. 통도사에서는 이런 사적기(事蹟記) 기록 못지않게 지금도 간혹 사리탑 계단에서는 밤중에 광명이 뻗어 올라 대낮처럼 밝아 대중이 깨어나서 첨례하는 일이 있으며 그럴 때면 멀리 양산(梁山)에서는 통도사에 화재가 생겼다고 야단들이라고 한다. 뿐만 아니라 상노전(上爐殿)의 스님들이 혹시 예불시간에 일어나지 못하면 종소리와 목탁소리가 들리게 되니 이는 불사리를 봉안한 적멸보궁(寂滅寶宮)만이 갖는 특별한 영이(靈異)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