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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금산사 도생승통
    작성자/작성일
    두레박 24-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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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생승통의 이름은 규(窺)이며, 고려 문종(文宗, 1046~1083)의 여섯 째 아들이다. 같은 시대를 활약했던 대각국사 의천(大覺國師 義天, 1055~1101)은 바로 스님의 친형이며, 문종의 넷째 왕자(王子)였다.

    고려시대 불교는 융성을 거듭하여 이미 이 시기에는 아들이 셋 이상 있는 집에는 한 아들을 출가시킬 정도로 불교에 대한 관심도가 높았다. 의천(義天)이 득도한 것은 문종 19년(1065)이었고 그때 나이가 11세였다. 도생(導生)이 득도한 것은 문종 23년(1069)이었다. 아마 어려서 출가했으리라 짐작된다.

    문종은 스님의 출가 의사를 확인하고 연덕궁(延德宮)으로 혜덕왕사(慧德王師)를 맞아들여 계를 받고 득도하도록 하였다. 스님은 오랫동안 법주사(法住寺) 주지직을 맡았다. 그러다 숙종 원년(1095) 혜덕왕사가 돌아가시자 금산사의 주지직을 겸임하게 된 것이다. 스님의 행적이나 만년에 대한 별다른 기록이 없다. 다만 스님이 통상 승통(僧統)으로 불리어졌고 금산사를 중창했다고 전해올 따름이다. 고려시대 승통은 교종의 최고 법계이므로 도생승통은 당시 최고의 지위까지 오른 스님이었다.

    이 문집은 고려 초기 대각국사 의천의 시문집으로 『대각국사문집』 20권과 『대각국사외집大覺國師外集』 13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각국사문집』에는 서序·기記·표表·사辭·장狀·서書·소문疏文·제문祭文·진찬眞讚·시문示文·시詩 등이 수록되어 있으며, 『외집』에는 편지글, 기記, 시詩, 비명碑銘 등이 있다. 권19에는 대각국사가 도생 승통이 속리사에 돌아가는 것을 전송하며 지은 시가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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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금산사 원명해원
    작성자/작성일
    두레박 24-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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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정집 가정집 稼亭集일제강점기 1939년27×18.6 국립중앙도서관>


    혜덕왕사 이후 금산사를 중창한 분이 원명 해원(圓明海圓 1262~1330)스님이다. 스님은 고려 말 원나라에서 유학하여 유식학과 계율로 크게 이름을 떨쳤으며 유가학승(瑜伽學僧)으로서 묘탑과 비석이 중국 숭은복원사(崇恩福元寺)에 전한다. 속성은 조(趙)씨로 완산주 함열군에서 대호군 조혁(趙奕)의 이들로 태어나 12세에 금산사의 석굉(釋肱)법사 문하에서 출가했다. 1294년(충렬왕 20)에 승과고시인 오교대선에 응시하여 상상과(上上科)에 합격한 후 불주사(佛住寺)의 주지를 맡았다.

    l305년에는 원나라 안서왕(安西王)이 스님의 계행이 매우 높다는 말을 듣고 사신을 보내 초빙했다. 1311년(충선왕 3) 원나라 무제(武帝)의 원찰로서 숭은복원사가 창건되었다. 원나라 인종은 중국의 여러 고승을 제쳐두고 스님을 초대 주지로 임명하였고, 이후 스님은 원 황실의 존경을 한 몸에 받게 되었다. 한편 스님의 명성은 되돌아 고려 국내에 자자하게 알려졌고, 이에 충숙왕은 1328년(충숙왕15) 원 황제에게 서신을 보내 스님을 돌려보내 달라고 요청하였다. 이에 스님은 충숙왕에게서 혜감원명편조무애국일대사(慧鑑圓明遍照無碍國一大師)라는 법호를 받고 귀국하여 금산사에 머물며 절을 중창하였던 것이다.

    스님은 마음가짐이 관대하고 온화하였으며, 몸가짐은 위엄이 있어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특히 유식학의 교의에 통달하여 많은 사람들과 논쟁을 펼쳤는데 그 때마다 사람들을 설복시켰다. 사람을 대함에 있어서는 천하고 귀함을 가리지 않았고, 한마음으로 맞으니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제자들에게는 향상 백성의 힘으로 이룩된 도량에서 사치와 음식을 탐하는 것은 어리석음이 아니면 미친 짓이라고 가르쳤다고 한다.

    『가정집稼亭集』은 고려 후기 학자 이곡李穀(1298-1351)의 시문집이다. 이곡은 36세에 원나라 제과制科에 등제하여 이후 고려와 원의 관직을 제수除授받았다. 고려와 원을 넘나들며 문인, 스님들과 교류하였다. 그의 문집에도 다채로운 내용이 들어있다. 고려와 원, 두 나라의 사회·문화를 포괄하고 있어 사료적 가치가 높다.『가정집』 권6에는 혜덕왕사 이후 금산사를 크게 중창한 원명 해원圓明 海圓(1262-1330)의 「대숭은복원사고려제일대사원공비大崇恩福元寺高麗第一代師圓公碑」 비문이 수록되어 있다.

    원명 해원은 12세에 금산사에서 출가하였다. 1305년에는 원나라 안서왕安西王의 초청으로 원나라에 건너갔으며 1312년 숭은복원사崇恩福元寺가 창건되자 숭은 복원사의 첫 번째 주지가 되었다. 1328년 충숙왕이 금산사에 주지할 것을 청하자 귀국하여 금산사에 주석하고 금산사를 중창하였다.

  3. 금산사 소요태능
    작성자/작성일
    두레박 24-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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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님의 법명은 태능(太能), 법호는 소요(逍遙)이며 성은 오(吳)씨이고 본관은 담양(潭陽)이다. 조선 명종 l7년(嘉靖41, 1562) 임술 9월에 태어 났다. 13세 되던 해 백양산(白羊山)에 놀러갔다가 물외(物外 : 物外庵)의 선경(仙境)을 보고 느낀 바 있어 출진(出塵)을 결심, 진(眞) 스님을 쫓아 머리 깎고 경률(經律)을 익혀 그 뜻에 통달하였다.

    태능은 또 휴정(休靜) 대사가 묘향산에서 선풍(禪風)을 크게 진작시키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가 조사서래의(祖師西來意)를 묻는다. 휴정은 한번 보매 태능을 법기(法器)라 여기고 제자로 받아들였다. 태능스님은 휴정대사의 회상에서 3년여 선(禪)을 참구한 끝에 스승의 명에 따라 당(堂)을 열고 법화(法化)를 편다. 이때의 나이 20세였다.

    서산의 제자 중에서 태능스님은 편양(鞭羊)스님과 함께 선(禪)의 두 우두머리로 추앙되었으며 뒤에 태능스님의 문하가 일파를 이루니 소요파(逍遙派)라고 불리웠다. 태능스님으로부터 선종(禪宗)을 이은 이는 침굉 현변(枕肱 懸辯)스님이고, 교종(敎宗)을 전수받은 사람은 해운경열(海運 敬悅)스님이며 전법(傳法)제자만도 30여 명에 이른다. 현재 금산사에 비석이 있는데, 백헌(白軒) 이경석(李景奭)이 비석 글을 지었다. 보개산 심원사(深源寺), 지리산 연곡사(燕谷寺), 두륜산 대둔사(大芚寺)에 부도(浮屠)가 있다. 효종이 ‘혜감(慧鑑)선사’ 라는 시호를 내렸다.

    소요당대사비 逍遙堂大師碑는 효종 2년(1651)에 건립된 소요 태능逍遙太能(1562-1649)의 비이다. 효종이 혜감선사慧鑑禪師라 시호를 내리고 금산사에 비를 세우도록 하였다. 이경석李景奭(1595-1671)이 비문을 찬하고, 조진석趙晋錫(1610-1654)이 글씨와 전액을 담당하였고 글씨는 해서楷書로 썼다. 13세 때 출가하여 부휴浮休의 문하에서 배운 뒤 사명대사 문하에 들어 그의 법을 받았다. 편양 언기鞭羊彦機와 함께 사명대사의 가르침을 이은 2대 선승으로 추앙받았으며, 양대 법맥(편양파와 소요문파)을 이루었다. 소요 태능과 금산사의 관계에 대해서는 자세한 내용이 전하지 않지만, 스님의 입적 후 금산사에 비가 세워졌다는 사실로 볼 때 금산사는 스님에게 있어 중요한 도량이었음을 알 수 있다.

     『소요당집逍遙堂集』은 서산대사의 제자인 소요 태능스님의 문집이다. 스님의 입적 후 약 150년 뒤인 정조 24년(1800)에 태능스님의 6대 법손인 춘담春潭 스님이 시 200여 수를 모아 담양 옥천사玉泉寺에서 간행하였다. 책에 수록된 시는 대부분 선의 세계를 음미한 것이며, 가까운 스님이나 선비들과 주고받은 시도 일부 수록되어 있다. 이들 시 이외에도 「용추사법당중창기龍湫寺法堂重創記」 1편이 수록되어 있다. 이 책은 1920년에 간행한 신문관新文館 연인본鉛印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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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요당대사비, 조선 1651년, 높이 296> / <소요집, 일제강점기 1920년 반곽 17.2×11.7 동국대학교 중앙도서관>

  4. 금산사 뇌묵 처영대사
    작성자/작성일
    두레박 24-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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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뇌묵대사 처영 진영, 조선후기, 원광대학교 박물관>


    조선시대는 사찰을 줄이고 스님의 도성출입도 제한하는 등 억불숭유抑佛崇儒 정책을 시행했다.  이로 인하여 불교계는 전반적으로 위축되었다. 도첩제를 더욱 강화하고 연소자의 출가를 금하였으며, 특히 불교종단을 7종에서 선교 양종으로 줄이고 각각 18개씩 36개 사찰만을 남겼다. 금산사는 태종 대에 전라도 지역의 선종사찰에서 제외되었으며, 세종 대 선교양종의 지방 본산 사찰 18사에도 들지 못했다. 이처럼 금산사는 침체되었으나 1492년 세조의 서자 덕원군 이서李曙가 금산사를 불사한 기록이 있어 당시 왕실과 연관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선조 25년(1592)에 발발한 임진왜란은 7년에 걸쳐 조선의 국토를 황폐화시켰다. 많은 인명피해가 생기고 사찰과 문화재는 약탈당하였다. 이에 대항하여 한민족의 강인한 저항의식이 곳곳에서 의병의 봉기로 이어졌는데 출가자인 스님들도 각지에서 일어나 왜적과 싸웠다. 선조는 서산대사 휴정에게 팔도도총섭八道都摠攝의 직함을 제수하였고 서산대사의 제자들이 중심이 되어 전국에서 의승군이 일어나니 그 수가 5천이나 되었다. 호남지역 또한 의승군이 집결하였는데, 그 중심 사찰이 금산사였다.

    호남의 의승군을 이끈 뇌묵 처영雷黙處英은 금산사에서 출가하였고 후에 묘향산으로 가서 서산대사에게 선종의 종지宗旨를 전수받았다. 뇌묵 처영대사는 사명 유정대사와 함께 서산대사의 2대 제자로 일컬어진다. 왜란이 일어나자 처영스님은 금산사를 중심으로 승병 1천여 명을 모아 전투에 참가하여 호남 승군의 총수로서 많은 전과를 올리고, 권율과 행주대첩에 1천여 승군을 이끌고 참여하여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처영스님을 중심으로 화엄사, 대흥사, 백양사, 내장사 등의 스님들이 곳곳에서 일어나 왜적을 물리쳤다. 그 공로로 총섭의 지위를 받고, 후에는 ‘국일도대선사부종수교보광현랑뇌묵國一都大禪師扶宗樹敎葆光玄朗雷黙’이라는 법호를 받았다. 이 시기 조정에서 전국의 사찰 가운데 선교16종 규정소를 설치하였는데, 금산사는 전라우도 규정소로 지정되어 도내의 여러 사찰을 관할하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전라좌도와 전라우도를 관할하는 규정소로 확대되었다.

    뇌묵대사 처영은 서산대사 휴정, 사명대사 유정, 기허대사 영규와 함께 조선시대 대표적인 의승장으로 손꼽히는 인물이다. 묘향산妙香山 수충사酬忠祠에는 휴정, 유정, 처영 세 분의 의승장이 함께 배향配享되어 있어, 의승장으로서의 위상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뇌묵대사는 권율權慄 장군과 함께 행주대첩을 승리로 이끌었다. 등받이가 높은 의자에 앉은 뇌묵대사는 왼손에 용머리와 영락으로 장식된 불자를 들고 오른손에는 염주를 쥐고 있다. 화면 왼쪽의 상단에 뇌묵대화상진雷默大和尙真이라 영제影題를 썼다.

    뇌묵대사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어 스님의 행장行狀은 물론이고, 생몰년도 알려져 있지 않다. 다행히 임진왜란 때 뇌묵대사의 활약이 『난중잡록』에 언급되어 있어 뇌묵대사의 의승군 활동을 일부나마 확인할 수 있다. 『난중잡록』은 남원 출신의 의병장 조경남趙慶男(1570-1641)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에 대해 기록한 것이다. 선조 15년(1582)부터 왜란의 정국이 일단 정리되는 광해군 2년(1610)년까지의 본편과 병자호란을 중심으로 다룬 『속잡록續雜錄』으로 구성되어 있다. 조경남 자신이 의병장으로 활동한 사실뿐 아니라 당시 나라 전체의 역사적 상황과 풍속을 상세히 기록하여 당시의 사회전반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선조수정실록』이 편찬될 때에 조정에서 원본을 빌려가 참고할 정도로 당시에 이미 역사성을 인정받았다.

    이 승장인僧將印은 뇌묵 처영에게 하사한 것으로 구리로 만든 도장이다. 뇌묵대사는 행주대첩 이후 교룡산성蛟龍山城 수축을 명받아 남원으로 이동하였다. 교룡산성의 승병장이 된 후 7개월 만에 성을 크게 수축하여 호남 방어에 크게 기여하였다. 이에 조정에서 산성별장山城別將임을 증명하는 의미로 이 도장을 새겨 보낸 것이다. 도장은 산성 내의 선국사善國寺 주지에게 대대로 전해 내려오다, 동학혁명군 김개남金開南이 교룡산성을 본거지로 활동할 때 유실한 것을 1960년 당시의 주지였던 보월寶月스님이 보제루普齊樓 마루 밑에서 발견했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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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룡산성승장동인, 조선 1592년 혹은 1593년 7.8×6.3×6.5 전라북도 민속문화재 제27호>

  5. 금산사 수문대사
    작성자/작성일
    두레박 24-05-06

    조선 초기에는 왕실이나 사대부의 아녀자들을 중심으로 불교가 신봉되어지기도 하였으나 불교는 점차 쇠퇴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조선중기 이후로는 민중불교가 되어 민중에 의해 신행되었다. 이러한 때에 민간신앙으로 전해지던 불교신앙은 억불숭유정책에 의한 불교의 탄압으로 사찰과 불상 그리고 많은 불교문화재가 변란을 당하는 과정에서 백성들과 더욱 밀접한 관계가 되어 신봉되어진다.

    임진왜란 때 금산사 주지로 계시던 뇌묵 처영대사가 승병 훈련소를 설치하여 왜군들에게 조직적으로 대항하였다. 그러나 정유재란 때에 왜군들이 금산사에 들이닥쳐 신라 혜공왕 때 세워진 미륵전과 혜덕왕사에 의해 크게 중창되었던 86채의 전각들을 모두 불태워 버려 금산사는 진표율사가 봉안한 미륵장륙상 철제 대좌를 빼고는 모두 소실되었다. 그 후 조선 인조13년(1635년)에 수문대사와 지훈, 덕행, 천성, 응원, 학련, 대전, 운근 등 15명의 화상에 의해 35년간 금산사는 새롭게 태어나게 된다. 당시 2개의 불전형(佛典形)으로 다시 중창 되었는데 대적광전을 중심으로 한 화엄신앙이 그 하나이고, 삼층 미륵전을 중심으로 하는 미륵신앙이 그것이다. 이 두 개의 불전은 남과 북 그리고 동과 서를 가르며 교차되게 건립되어졌다.

    '삼층장육전' '미륵수계전' 등은 미륵전이라는 삼층 건물로 통합하여 만들어졌으나 1930년도에 이교도들의 방화에 의해 미륵장륙상이 크게 훼손되었고 이를 1937년도에 다시 복원하였고 그후 1993년에 이르러 완전 해체하여 보수공사를 완료하였다. 그리고 수문대사에 의해 화엄신앙과 아미타신앙, 약사신앙, 나한신앙이 한곳에 모여 `대적광전'이라는 명칭 아래 하나의 법당으로 건립되어졌으나 1986년 원인 모를 화재에 소실되고 태공 월주스님에 의해 대적광전과 나한전으로 따로 재건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