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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금산사 환성지안
    작성자/작성일
    두레박 24-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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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환성 지안 진영, 조선 1799년, 비단에 색 122×81.7 통도사성보박물관,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450-3호)>


    스님의 성씨는 정(鄭)씨로서 춘천 사람이며 조선조 현종 5년(康熙 3, 1664)에 태어났다. 15세에 미지산(彌智山) 용문사(龍門寺)로 출가하여 머리 깎고 쌍봉 정원(雙峰淨源)에게 구족계를 받은 뒤 17세 되던 해에 편양 문손인 월담 설제月潭雪霽(1632-1704)에게 가르침을 구했다.

    월담은 한눈에 환성의 그릇 됨됨이가 범상치 않음을 알아차리고 마침내 의발(衣鉢)을 환성스님에게 전해준다. 헌헌장부로 성장한 환성은 용모부터 특이하여 사람들의 눈길을 끌기에 충분했다. 골격이 말쑥하고 엄숙하였으며 음성은 맑고 그윽하여 신비감을 자아냈다. 말은 조리가 분명하고 군더더기가 없이 간결하였으며 얼굴 빛 역시 늘 온화함을 잃지 않았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담긴 경전(經典)들을 깊이 연구하느라 침식(寢食)을 잊기 예사였다. 27세 되던 해에 환성은 모운진언(幕雲震言) 대사가 금산(金山: 금릉)의 직지사(直指寺)에서 법회를 개설한다는 소문을 듣고 그를 찾아간다. 모운(1622~1703)은 부휴(浮休)의 고재(高弟) 벽암(碧岩)의 제자로 당시 삼남(三南)에 이름을 떨치던 화엄의 대종장(大宗匠)이었다. 모운대사는 환성을 보자 크게 기뻐하며 비록 자신보다 20여 년 연하(年下)의 선지식이었지만 그를 공경해마지 않았다. 모운대사는 대중 수백 인이 모인 자리에서 환성스님에게 강석(講席)을 물려주며 고별 법어를 마치고 “내 이제 사자좌를 거두고 떠나노니 너희들은 스승의 예로써 이 스님을 섬기도록 하라.”는 당부의 말을 남긴 뒤 남모르게 훌쩍 떠나버렸다.

    모운대사가 강석(講席)을 물려주고 다른 산으로 떠난 뒤 환성스님은 대중들의 간곡한 청에 못 이겨 마침내 설법을 시작하였다. 종으로 횡으로 주도면밀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마치 강물이 쏟아져 내리듯 거침없는 환성의 설법에 대중들은 막혔던 가슴이 뚫리듯 시원하게 의문점을 해결하는 것이었다. 모운 진언대사로부터 강석을 물려받아 당시의 대강백이 된 환성 지안대사는 영조 1년(乙巳, 1725) 금산사(金山寺)에서 화엄대법회를 여니 1천4백 명의 대중들이 참석하여 대성황을 이루었다. 전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이 역사적 집회는 당시 조정을 긴장케 함으로써 뒷날 환성대사가 귀양 가서 죽도록 하는 비극의 불씨가 된다. 환성대사의 고난은 개인적 고난이 아니라 당시 혹독한 탄압을 받고 있던 불교 전체의 고난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제주도에 유배된 지 7일째 되던 7월 7일, 환성대사는 중생구제를 위한 원대한 서원(誓願)을 펴보지 못한 채 흘연 열반에 든다. 누려온 나이 66세, 법랍 51세였다. 환성대사의 열반은 곧 국가적 손실이라는 것을 시사하는 듯한 사건이 속출하였다. 3일 동안 한라산이 울고 바닷물이 끓어오르는 등 이변을 보이자 제주도 사람들은 환성대사를 삼성(三聖)의 예언에 나오는 바로 그분이라고 단정하였다.

    환성당 지안 진영 喚醒堂 志安 眞影(1664-1729)은 뒷면에 제찬과 제작연대가 적혀 있어 가경 4년(1799) 여름에 옥인玉仁이 그렸음을 알 수 있다. 화면 중앙에 위치한 스님은 의자에 앉아 우측을 바라보았다. 왼손에는 금빛의 용머리 장식이 있는 불자를 세워 들고 오른손으로는 불자의 수술을 가볍게 쥐고 있다. 의자 등받이 좌우 끝에도 용머리 장식이 있고 등받이 부분은 금문양이 있는 녹색 천이 드리워져 있다.『선문오종강요禪門五宗綱要』는 숙종 15년(1689)에 환성지안이 선종오가의 강요를 여러 문헌들에서 발췌하여 편집한 책이다. 북해 함월北海涵月이 쓴 서문에 의하면, 오가五家, 즉 임제종臨濟宗·운문종雲門宗·조동종曹洞宗·위앙종潙仰宗·법안종法眼宗의 사상이 여러 문헌에 산재해 있어 살피기 어려우므로 환성 지안이 문헌 속의 요의要義를 채집하여 편찬하였으며, 자신이 틀린 부분을 교정하고 빠진 것을 보충하였다고 한다. 함경도 안변 석왕사釋王寺에서 간행되었다.

    환성시집 喚醒詩集은 환성 지안의 시문집이다. 지안은 자가 삼낙三諾, 호가 환성喚醒이며, 월담 설제月潭雪霽의 법을 받았다. 이 시집은 1권1책의 목판본이며 내용은 모두가 시이다. 권두에 오봉鼇峰의 서序가 있고 권말에 해원海源이 찬한 행장이 있다. 오언절구 59수, 칠언절구 61수, 오언율시 16수, 칠언율시 10수, 끝에는 호암虎岩과 풍담楓潭의 임종게臨終偈 3수 등이 수록되어 있다. 영조 27년(1751) 안변 석왕사釋王寺에서 개판하였다. 이들 시는 모두 선의 경지에서 속세의 먼지가 탈락된 정신세계를 음미한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스님의 시문집이 많지만 선시禪詩로서는 이 시를 능가하는 것을 찾아보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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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문오종강요 禪門五宗綱要> / <환성시집 喚醒詩集>

  2. 금산사 용명당 각민대사
    작성자/작성일
    두레박 24-05-06

    용명당 각민대사는 1846년(조선헌종 朝鮮憲宗 12年) 8월 9일 전주에서 아버지 동래정씨 석노와 어머니 청송 심씨 사이에서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약관의 나이에 영주 정토사 지진장노(智眞長老)에게 출가(出家)하여 승려가 되었다. 조선 말(朝鮮末) 국내외 사정이 매우 혼란할 때 대사는 금산사 주지로 재직하는 동안 안으로는 금산사의 가람수호를 위해서, 그리고 밖으로는 호남 도승통(都僧統)을 이곳 금산사에 두어 호남지역 전체의 불교발전을 도모하는 등 그의 열과 성의를 다하였다.

    그 무렵 인근 지역에는 금광의 불법채굴이 크게 유행하였다. 1900년 대한제국(大韓帝國) 광무(光武 4年)에는 금산사 사리탑 아래까지 채광(採鑛)을 하고자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대사는 지방판서(地方判書)와 서울의 중앙내자원(中央內臟院)에 경내의 불법 채광에 대한 그 부당성을 널리 알리고 진정(陳情)을 올리는 등 혼신의 노력으로 가람을 수호하고자 하였다. 마침내 1901년(光武 5年) 12월 말에도 공식적으로 불법 채광 금지령이 내려졌음에도 불구하고 1902년(光武 6年) 1월 1일 금산사로 모여 크게 소란을 피우면서 채광을 계속하려고 하였다. 대사는 이 소란꾼들의 손에 의해서 현재의 경내 가운데 잣나무 아래에서 57세의 나이로 불의에 입적하였다.

  3. 금산사 창건과 역사
    작성자/작성일
    두레박 24-05-06

    금산사는 백제법왕 원년(599)에 창건되었다.

    통일신라의 의적화상은 당나라 현장문하에서 유학하고 금산사에 돌아와 25부 70여권의 방대한 유식사상의 저술을 남겼다. 숭제법사와 진표율사를 거쳐 고려 혜덕왕사로 이어지면서 유식학 법상종의 종주로 자리매김하였다.

    정유재란 후, 1635년 수문대사가 금산사를 중건하면서 미륵과 화엄의 2원 체계로 도량을 정비하였다. 조선영조 원년 환성 지안대사는 전국에서 모여든 1,400여 스님이 운집한 가운데 화엄산림을 개최하였다. 근래들어 월주스님에 의해 미륵바로알기운동을 펼치고 있으며, 대사회 활동을 통해 자비와 보살행을 몸소 실천하는 사찰임을 증명해 보이고 있다.

    금산사는 백제시대에 창건되어 1400여 년의 역사를 이어 오늘날까지 법등을 밝혀온 유서 깊은 명찰이다. 금산사 일원은 사적 제496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호남평야 가운데 우뚝 솟은 모악산 서쪽 자락에 위치해 있다. 정유재란 때 왜군의 방화로 모든 건물과 산내의 40여 개 암자가 완전히 소실되는 등 수난을 겪었으나 이후 많은 문화재가 조성되어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다.

    금산사는 백제 법왕1년(599년)에 나라의 복을 비는 자복사資福寺로 창건된 것으로 전한다. 진표율사眞表律師가 금산사의 숭제법사崇濟法師에게 출가했다는 기록과 통일신라 초에 활동한 의적義寂(681-?) 스님이 당나라 현장스님에게 유학하고 돌아와 금산사에 머물며 25부 70여권의 방대한 저술을 남겼다는 기록들을 통해 당시 금산사가 창건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금산사가 대사찰의 면모를 갖춘 것은 통일신라시대 진표율사가 주석하며 시작되었다. 진표율사는 미륵전을 짓고 미륵장륙상을 조성하였으며 해마다 단壇을 열어 법시法施를 널리 베풀었다.

    후삼국시대에 금산사는 다시금 역사서에 등장한다. 후백제의 군주 견훤이 아들 신검 등에 의해 금산사에 감금되었다가 탈출하여 왕건에게 투항하였다는 내용이다. 금산사에는 ‘견훤성문’으로 불리는 개화문과 석성 등 견훤과 관련된 유적이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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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산사사적 金山寺事蹟 History of Geumsansa Temple, 조선 1705년, 33.3×21.4 규장각한국학연구원>


    백제 : 이 세상의 도솔천 모악산 금산사
    중관 해안中觀海眼이 쓴 『금산사사적』(1635) 에는 “백제 법왕 1년(599)에 법왕이 즉위하여 살생을 금지하는 법을 발표하고, 이듬해(600)에 금산(사)에 38명의 승려를 득도시켰으며, 또 왕흥사王興寺를 창건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진표율사가 금산사의 숭제법사에게 출가했다는 기록이나 통일신라시대 활동한 의적스님이 금산사에 주석했다는 기록을 보면 금산사가 백제시대에 창건되었음은 확실하다.

    통일신라 : 진표율사, 미륵신앙의 토대를 세우다
    진표율사는 신라 경덕왕 대에 활동한 스님으로 사실상 금산사의 창건주라고 할 수 있다. 진표율사에 대한 기록은 『삼국유사三國遺事』의 「진표전간眞表傳簡」과 「관동풍악발연수석기關東楓嶽鉢淵藪石記」, 『속고승전續高僧傳』 등에 비교적 상세하게 남아 있다.

    고려시대 : 법상종의 중심도량이 되다
    법상종法相宗은 유식사상唯識思想과 미륵신앙을 기반으로 성립된 종파로, 고려시대 11세기 초 목종과 현종 이후 왕실과 관련을 맺으면서 크게 융성하였다. 이 시기에 법상종의 대표적인 사찰인 금산사 또한 중흥하였다. 혜덕왕사 소현慧德王師 韶顯(1038-1096)이 금산사의 주지로 취임하면서 금산사는 최대의 전성기를 맞이한다. 혜덕왕사가 금산사에 주석하는 동안 남아 있는 법당을 모두 보수·중축하는 것은 물론 새롭게 중창하였다. 현존하는 석조물인 방등계단, 석련대, 노주 등이 이때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금산사의 사역이 대사구大寺區, 봉천원구奉天院區, 광교원구廣敎院區의 세 구역으로 나뉘게 된 것도 모두 혜덕왕사의 중창에서 비롯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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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산사 봉천원 추정지역 출토유물 金山寺 奉天院 推定地域 出土遺物 고려, 수막새 지름 15, 금산사성보박물관>


    조선 : 자비심으로 나라를 지켜내다
    조선시대 금산사는 1492년 세조의 서자 덕원군 이서李曙가 금산사를 불사한 기록이 있어 당시 왕실과 연관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선조 25년(1592)에 발발한 임진왜란은 7년에 걸쳐 조선의 국토를 황폐화시켰다. 호남지역 또한 의승군이 집결하였는데, 그 중심 사찰이 금산사였다. 호남의 의승군을 이끈 뇌묵 처영雷黙處英은 금산사에서 출가하였고 후에 묘향산으로 가서 서산대사에게 선종의 종지宗旨를 전수받았다. 뇌묵 처영대사는 사명대사 유정과 함께 서산대사의 2대 제자로 일컬어진다. 총섭의 지위를 받고, 후에는 ‘국일도대선사부종수교보광현랑뇌묵國一都大禪師扶宗樹敎葆光玄朗雷黙’이라는 법호를 받았다. 이 시기 조정에서 전국의 사찰 가운데 선교16종 규정소를 설치하였는데, 금산사는 전라우도 규정소로 지정되어 도내의 여러 사찰을 관할하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전라좌도와 전라우도를 관할하는 규정소로 확대되었다.
    인조 13년(1635)에 이르러서야 금산사는 낙성을 보게 되었는데, 오늘날 우리가 보는 금산사 가람은 이때 복원된 것이 대부분이다. 사찰 중건과 함께 당시 주지였던 지훈 스님과 간고 천택스님, 용면 응지스님 등이 주선하여 중관 해안스님으로 하여금 1635년 11월 『금산사사적』을 편찬하게 하였다. 현재 필사본으로 전하고 있는 『금산사사적』은 재건 공사와 함께 자료를 수집하여 작성한 것이다. 또한 조선 후기 금산사에는 호남불교의 중심 사찰이라는 위상에 걸맞는 스님들이 주석하였다. 대표적인 스님으로 백곡 처능 선사, 남악 태우 대사, 환성 지안대사 등을 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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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산사도, 허련 許鍊, 조선 19세기, 종이에 엷은 색 21×26.7 전북대학교 박물관>


    근현대 : 일제하 금산사의 수난과 극복
    1935년 3월 큰 화재로 미륵전 본존불이 전소되었다. 당시 공모전이라는 파격적인 방식(불모 일섭스님 등 당대 유명 작가 5인 응모)으로 진행되었는데 일본 동경대에서 수학하고 갓 돌아온 김복진씨가 당선되어 복원불사가 시행되었다. 김복진은 서양조각을 공부한 근대 조각가이다. 그는 새로운 재료인 석고를 이용하면서도 전통을 계승한 미륵대불을 완성하였다. 1961년에 금산사의 주지로 부임한 태공 월주 스님은 미륵전을 비롯하여 많은 불사를 이루었고 여러 스님들의 노력으로 현재에 이르고 있다. 1962년 조계종 통합종단이 만들어지면서 17교구의 본사로서 조계종의 종헌과 종지종풍을 따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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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0년대 금산사 전경(상단 왼쪽부터 금산사전경, 미륵전, 미륵삼존불(1935년 화재 전)
    대적광전(화재 전), 대적광전 오여래육보살(화재전), 방등계단과 오층석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