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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선운사 고승
    작성자/작성일
    두레박 24-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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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파상언
    설파 상언(1707∼1791) 스님은 조선시대 화엄학 연구에 큰 업적을 남긴 고승으로서 호는 설파(雪坡), 법명은 상언(尙彦)이며 속성은 전주이씨이다. 전남 장성에서 태어나 일찍이 부모를 여읜 뒤 19세에 선운사로 출가하여 희섬(希暹) 스님의 제자가 되었으며, 연봉(蓮峰) 스님과 체정(體淨) 스님의 법맥을 이어받았다.
    한때 벽암(碧岩)의 법계(法系)에 속하는 회암(晦庵) 스님의 지도를 받았으나, 특별히 섬긴 스승은 체정이다. 1739년 용추사(龍湫寺)에서 처음으로 강좌를 열었는데, 그때 이미 삼승오교(三乘五敎)에 통달하였으며, 그 중에서도 특히 화엄학에 조예가 깊었다.

    당시까지 중국의 청량(淸凉)이 지은 『대방광불화엄경수소연의초 大方廣佛華嚴經隨疏演義抄』 90권이 우리나라 화엄학 연구의 지침서가 되고 있었는데, 내용이 너무 방대하고 어렵게 쓰여 있어 공부하는 이에 따라 잘못 이해할 가능성이 컸다. 이에 스님은 일일이 주석을 달고 알기 쉽게 분류한 『청량초적결은과 淸凉抄摘抉隱科』를 펴냄으로써 후학의 길잡이가 되도록 하였다.
    또한 『화엄경』의 여러 판본들의 차이점을 보유(補遺)하고자 해인사에 있는 모든 판본들을 합하여 80권본의 정본을 만든 뒤 낙안의 징광사(澄光寺)에 봉안하였다. 그 뒤 금강산ㆍ묘향산ㆍ두류산 등지에 머물면서 참선에 힘을 기울여 교와 선을 함께 닦았다.

    1770년 징광사에 불이 나서 화엄판목이 모두 불에 타서 없어지자 구송(口誦)으로 과거에 이루었던 80권본을 다시 판각하게 하였으며, 이를 영각사(靈覺寺)에 경판각을 짓고 봉안하였다. 만년에는 매일 1만 편씩 염불하기를 10여 년 동안 계속하였고, 1790년 12월에 병세를 보이다가 이듬해 1월 3일에 앉아서 입적하였다. 나이 85세, 법랍(法臘) 66세였다. 다비 후 제자들이 사리를 거두어 영원사와 선운사에 탑을 세웠다.

    백파긍선
    백파 긍선(1767∼1852) 스님은 조선시대 선문(禪門)의 중흥주로 추앙받는 고승으로서 법호는 백파(白坡), 법명은 긍선(亘琁)이며 속성은 전주이씨이다. 전북 무장에서 태어나 12세에 출가하여 선은사(禪隱寺) 시헌(詩憲) 스님의 제자가 된 뒤 연곡(蓮谷) 스님에게 사미계를 받았으며, 21세 때 상언(尙彦) 스님으로부터 구족계를 받았다.
    그뒤 평안북도 초산의 용문암(龍門庵)에서 수행하다가 도를 깨우쳤으며, 지리산 영원암(靈源庵)으로 가서 상언스님으로부터 인가를 받고 1년간 공부를 계속하다가 영구산 구암사(龜巖寺)에서 설봉 회정(雪峰懷淨) 스님의 법통을 계승하였다.

    26세 때에 백양산 운문암(雲門庵)에서 강좌를 열어 대중 1백여 명에게 선강(禪講)을 한 뒤 20여 년 동안 후학들을 지도하였다.
    1811년에는 "불법의 진실한 뜻이 문자에 있지 않고 도를 깨닫는 데 있는데도 스스로 법에 어긋한 말만을 늘어놓았다"고 참회한 뒤, 평안북도 초산 용문동으로 들어가서 5년 동안 수선결사운동(修禪結社運動)을 전개하였다. 그 뒤 다시 운문암에서 수도와 포교로써 선법을 현양하여 크게 이름을 떨쳤으며, 사람들이 '호남선백'이라고 불렀다. 이때 선의 지침서인 『선문수경 禪門手鏡』을 저술하였는데, 이 책은 당시 선사들 사이에서 일대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1830년에 다시 구암사로 돌아와서 선강법회를 열어 후학들을 지도하였고, 1840년부터 화엄사(華嚴寺)의 선사영당 옆에 작은 암자를 짓고 좌선하다가 1852년 4월에 입적하였는데, 그때의 나이 86세, 법랍 74세였다. 다비 후에 제자들이 구암사에 탑을 세우고 영정을 화장사(華藏寺)에 봉안했으며, 1858년에 추사 김정희(金正喜)가 찬한 비를 선운사에 세웠다. 법계는 휴정(休靜)의 4대파 중의 하나인 편양문파(鞭羊門派)에 속하며, 화엄사상과 선을 겸수하는 가풍을 지닌 지안(志安)의 문손으로서 법맥은 휴정-언기(彦機)-의심(義諶)-설제(雪霽)-지안(志安)-체정(體淨)-상언-회정-긍선으로 이어진다. 대표적인 제자로는 유형(有炯)ㆍ한성(翰醒)ㆍ정관(正觀) 등이 있다. 율과 화엄과 선의 정수를 모두 갖춘 거장으로서, 평소에 교유가 깊었던 김정희는 초상화를 그린 뒤 그를 '해동의 달마(達磨)'라고 격찬하였다.

    스님은 김정희, 초의(草衣) 선사 등과 선문의 요지에 대해 거침없는 상호토론을 벌여 근세 불교계의 가장 치열한 교리논쟁을 유발시킴으로써 당시 불교계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으며, 이러한 논쟁은 이후로도 제자들에 의해 계속 이어졌다. 이처럼 한말의 격변기를 살면서 전통 선지를 재정립하여 산문(山門)을 충실히 지켜나가고자 힘쓴 대종장(大宗匠)의 면모를 읽을 수 있다.
    서로는 『정혜결사문 定慧結社文』ㆍ『선문수경』ㆍ『육조대사법보단경요해 六祖大師法寶壇經要解』 1권, 『선문염송사기 禪門拈頌私記』 5권, 『금강경팔해경 金剛經八解經』 1권, 『선요기 禪要記』 1권, 『작법구감 作法龜鑑』 2권, 문집인 『백파집』 4권 등이 있다.

    환응 탄영
    환응 탄영(1847∼1929) 스님은 한말의 율사(律師)로서 호는 환응(幻應), 법명은 탄영(坦泳)이며 속성은 김씨이다.

    전북 무장에서 태어나 14세에 선운사(禪雲寺)로 출가하여 성시(性諡) 스님을 은사로 득도하였고, 19세에 율사 서관(瑞寬) 스님에게 구족계를 받았다.그뒤 8년간 전국의 고승을 찾아 교학과 선학을 닦았고, 특히 계율을 엄격히 실행하여 율사로서 명망이 높았다. 서관스님에게 입실하고 법을 이은 뒤 백암산 운문사(雲門寺)에서 강단을 열어 화엄대교를 선양하여 학인을 지도하였다. 이곳에서 10여 년 동안 교학을 전수하다가 노령이 되자 운문사 옆에 따로 별당을 조성하여 '우은난야(遇隱蘭若)'라 이름 짓고 이곳에서 주로 참선 정진하였다. 시문(詩文)조차 수행에 방해가 된다고 하여 짓지 않았을 정도로 율행(律行)에 청정하였으며, 관세음보살과 영산(靈山) 16아라한에게 조석으로 분향, 공양하기를 만년까지 게을리 하지 않았다. 1912년 일제의 사찰령으로 전국의 사찰이 31본산체제로 개편된 뒤 대중의 간청으로 백양사(白羊寺) 주지를 맡아 3년간 승풍과 기강을 바로잡았다.

    1917년 선운사로 돌아가서 율전(律典)을 강의하였고, 1928년에는 조선불교중앙종회에서 교정(敎正)으로 추대되었다.
    4월 7일에 목욕재계하고 조용히 입적하니 나이 83세, 법랍 70세였다.

    석전 정호

    석전 정호(1870∼1948) 스님은 근대불교의 선구자적 역할을 한 분으로서 호는 영호(映湖) 또는 석전(石顚), 법명은 정호(鼎鎬)이다.
    속성은 밀양박씨이며, 박한영(朴漢永)이라는 속명으로 더욱 잘 알려져 있다. 전북 전주에서 태어나 19세에 전주 태조암(太祖庵)으로 출가하여 금산(錦山) 스님의 제자가 되었다.

    21세에 장성 백양사(白羊寺)의 환응(幻應) 스님에게 4교(四敎)를 배우고, 선암사(仙巖寺)의 경운(擎雲) 스님에게 대교(大敎)를 배운 뒤, 구암사(龜巖寺)에서 처명(處明) 스님의 법을 이어받았다. 1896년 구암사에서 개강한 뒤 해인사ㆍ법주사ㆍ백양사ㆍ화엄사ㆍ범어사 등지를 다니면서 법회를 크게 펼쳐 불경을 강의하였다. 1908년 쇠퇴한 불교를 혁신하려는 뜻을 품고 상경하여 불교개혁운동에 힘을 기울였으며, 1911년 해인사 주지 이회광(李晦光)이 일본 조동종(曹洞宗)과 우리나라 불교와의 연합을 꾀하였을 때, 한용운(韓龍雲)ㆍ성월(惺月)ㆍ진응(震應)ㆍ금봉(錦峯) 스님 등과 함께 한국의 불교전통은 임제종(臨濟宗)임을 내세워 연합조약을 무효화시켰다.

    1913년에는 『해동불교 海東佛敎』를 창간하여 불교유신을 주장하고 불교인의 자각을 촉구하였다. 1914년에는 고등불교강숙(高等佛敎講塾), 1916년에는 불교중앙학림(佛敎中央學林)의 강사로서 후진 양성에 힘을 쏟았고, 1926년 서울 안암동 개운사(開運寺)에 선불장(禪佛場)이라는 강원을 개설하여 불교계의 영재들을 배출하였다.
    1929년 조선불교 교정(敎正)에 취임하여 종단을 이끌었으며, 1931년에는 동국대학교의 전신인 불교전문학교 교장으로 선임되었다.
    광복 이후 조선불교중앙총무원회의 초대 교정으로 선출되어 불교계를 이끌다가 만년에 정읍 내장사(內藏寺)에서 노년을 보내다가 입적하니 나이 79세, 법랍 61세였다. 금봉ㆍ진응스님과 함께 근대불교사의 3대 강백(講伯)으로 추앙받았다.

    경사자집(經史子集)과 노장학설을 두루 섭렵하고 시와 문장에 뛰어난 대고승으로서의 면모뿐만 아니라, 불교계의 향방을 바로잡기 위해 거침없이 활동하는 실천적인 인물로서 평가받고 있다.
    법맥은 상언(尙彦)-긍선(亘琁)-설두(雪竇)-설유(雪乳)-정호(鼎鎬)로 이어지며, 대표적인 제자는 운기 성원(雲起姓元) - 청담 순호(靑潭淳浩) - 운허 용하(耘虛龍夏) - 운성 승희(雲性昇熙) - 석문 남곡(石門南谷) - 청우 경운(聽雨景雲)등이다. 저서로는 『석전시초 石顚詩抄』ㆍ『석림수필 石林隨筆』ㆍ『석림초 石林抄』 등이 있다.

  2. 선운사 대웅보전 보물 제 290호
    작성자/작성일
    두레박 24-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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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운사의 본전(本殿)으로서 신라 진흥왕 때 세운 것으로 전하며, 지금 있는 건물은 조선 성종 3년(1472)에 중건하여 임진왜란 때 전소되었다가 광해군 5년(1613)에 다시 지은 것이다. 건물의 평면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규모로 긴 장방형 평면을 이루고 있고, 전체적으로 기둥 옆면 사이의 간격이 넓고 건물의 앞뒤 너비는 좁아 옆으로 길면서도 안정된 외형을 지니고 있다.

    다포계(多包系) 맞배지붕에, 벽의 양 측면에는 풍우를 막기 위해 널판으로 풍판(風板)을 대었다. 막돌로 허튼 쌓기를 한 얕은 기단 위에 막돌 초석을 놓고 약한 배흘림이 있는 두리기둥을 세웠다.

    정면의 모든 칸에는 빗살 창호를 달았으나 후면에는 중앙 칸에만 창호를 달고 양 측면의 협칸에는 교창(交窓)을 달았다. 동쪽 면은 모두 벽체로 처리하고 서쪽 면에는 외짝 출입문을 달았다.
    내부는 통칸으로서 불벽(佛壁)을 한 줄로 세워 그 앞에 불단을 만들었으며, 불단 위에는 흙으로 빚은 소조(塑造) 삼세불을 봉안하고 삼존 사이에는 근래에 조성된 보살입상을 협시로 세웠다.

    삼존은 중앙의 비로자나불을 주존(主尊)으로 하여, 왼쪽에 아미타불과 오른쪽에 약사불을 모셨다. 삼존불상 뒤의 후불벽화는 1688년(숙종 14)에 조성한 것으로, 중앙의 비로자나불회도를 중심으로 좌우에 아미타회상도·약사회상도가 각각 자리 잡고 있다. 천장에는 사실감이 돋보이는 커다란 운룡문(雲龍紋)이 그려져 있고, 안쪽 천장에는 우물 정(井)자 모양을 한 우물천장을 설치하여 구름ㆍ학ㆍ연꽃 등으로 장엄하였다. 내부 벽에는 산수ㆍ비천ㆍ나한 등을 벽화로 장식하였고, 닫집과 중앙의 불단 등은 비교적 간략하고 단순한 모습이다. 이 건물은 미술사적으로 조선 후기의 뛰어난 건축기술과 조형미를 지니고 있다.

  3. 선운사 소조비로자나삼불좌상 보물 제 1752호
    작성자/작성일
    두레박 24-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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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창 선운사 소조비로자나삼불좌상((高敞 禪雲寺 塑造毘盧遮那三佛坐像)의 형태는 넓고 당당한 어깨, 긴 허리, 넓고 낮은 무릎으로 인하여 장대하고 웅장한 형태미를 보여준다. 이러한 장대하고 웅장한 형태미를 갖춘 대형 소조상들은 법주사 소조비로자나삼불상, 귀신사 소조비로자나삼불상, 완주 송광사 소조석가여래삼불상 등 17세기 전반기 각지의 대표적인 사찰에서 조성된다. 대형의 소조불상의 조성 목적은 이전 시대와 달리 새로워진 불교계의 위상을 한껏 드러내고, 전란으로 소실된 불상을 빠른 시간 내에 재건하고자 하는 의지가 담겨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이 비로자나삼불상은 양대 전란 이후 재건불사 과정과 당시 달라진 시대적 분위기를 직·간접적으로 대변해 주는 매우 귀중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또한 대좌의 밑면에 기록한 묵서명에서 불상의 조성과정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비로자나, 약사, 아미타라는 삼불상의 존명을 분명히 적시하고 있어 비로자나 삼불상의 도상연구에 기준이 된다. 그리고 1633년이라는 정확한 제작시기와 17세기 전반기의 대표적 조각승 무염과 그의 문하승(門下僧)에 의해 제작되었다는 정확한 조성주체가 밝혀져 있고, 대형의 상임에도 불구하고 조각적·종교적 완성도가 높은 우수한 작품이다.

  4. 선운사 금동지장보살좌상 보물 제 279호
    작성자/작성일
    두레박 24-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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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운사에 봉안되어 있는 조선 초기의 금동지장보살좌상으로 높이는 1m이다. 머리는 고려시대 지장보살상에서 폭넓게 나타나는 두건(頭巾)을 쓴 모습이며, 두건을 묶은 좁은 띠가 이마를 두른 후 귀를 덮고 양 가슴부분까지 내려와 있다.

    풍만한 얼굴에 조그마한 아래턱 주위로 살집이 많은 이중턱을 이루어 후덕한 인상을 주며, 목에는 굵게 주름진 삼도(三道)가 표현되어 있다. 하체는 무릎 높이가 낮아서 상체에 비해 빈약한 편이고, 결가부좌한 다리는 옷에 덮혀 있어 보이지 않는다.

    오른손은 어깨 높이까지 들어서 엄지와 넷째손가락을 맞댈 듯 굽혔고, 왼손은 아랫배에 붙여서 엄지와 중지를 약간 구부렸는데 비교적 사실적으로 표현되었다.
    어깨에서 끈으로 매듭지은 독특한 치레장식이 특징적인데, 이는 고승의 진영이나 불ㆍ보살상에서 보이는 형식이기도 하다.
    겉옷 안에는 수평으로 가로질러 가슴까지 올라온 군의(裙衣)를 띠매듭으로 단정하게 동여매었다.

    이 보살상은 선운사 도솔암에 봉안되어 있는 고려 후기의 선운사지장보살좌상(禪雲寺地藏菩薩坐像, 보물 제280호)과 목걸이 장식이나 밋밋한 가슴표현 등이 유사하지만, 머리가 크고 하체가 빈약하여 신체비례가 부자연스러운 점, 목이 짧고 어깨가 올라가 움츠린 듯한 자세, 간략한 장식과 형식적인 옷주름 등은 고려 보살상의 양식에서 벗어난 것으로 조선 초기의 양식을 반영하고 있다.

    선운사지장보살좌상과 함께 그 예가 드문 지장보살상의 하나로, 조선시대 지장신앙의 양상을 보여주는 귀중한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 지장보살상은 일제강점기에 도난을 당한 적이 있는데, 이때 영험함을 보인 사실로 인해 더욱 널리 추앙받고 있다. 1936년 어느 여름에 일본인 2명과 우리나라 사람 1명이 공모하여 보살상을 훔쳐간 뒤, 거금을 받고 매매하여 일본으로 건너가게 되었다.

    그런데 이때부터 지장보살상이 영이(靈異)를 나타내기 시작하여, 소장자의 꿈에 수시로 나타나서 "나는 본래 전라도 고창 도솔산에 있었다. 어서 그곳으로 돌려 보내달라"고 하였다. 소장자는 다소 이상한 꿈으로만 생각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으나, 이후로 병이 들고 가세(家勢)가 점점 기울게 되자 꺼림칙한 마음에 보살상을 다른 이에게 넘겨 버렸다. 그러나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지장보살이 소장자의 꿈에 나타났으나 그 역시 이를 무시하였고, 집안에 우환이 끊이지 않게 되자 다시 다른 이에게 넘기게 되었다.

    그후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치면서 이 보살상을 소장한 사람들이 겪은 일들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으며, 마지막으로 소장하게 된 사람이 이러한 사실을 고창경찰서에 신고하여 모셔갈 것을 부탁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당시 선운사 스님들과 경찰들이 일본 히로시마로 가서 모셔오게 되었는데, 이때가 도난당한 지 2년여 만인 1938년 11월이었다. 당시 잃어버린 보살상을 다시 모시고 온 사실을 기념하기 위해 찍은 사진에도 사건에 대한 개요가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으며, 당시 주지는 '이우운(李雨雲)'으로 기재되어 있다.

  5. 선운사 지장보살좌상 보물 제 280호
    작성자/작성일
    두레박 24-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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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운사 도솔암 도솔천내원궁(兜率天內院宮)에 봉안되어 있는 고려 후기의 금동지장보살좌상으로 높이는 96.9㎝이다.

    대좌(臺座)와 광배(光背)가 모두 없어지고 불신(佛身)만 완전하게 남아 있는데, 상체가 늘씬하고 당당하여 고려 후기의 장곡사금동약사여래좌상(보물 제337호)이나 문수사금동불좌상과 흡사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길상좌(吉祥坐)를 한 탄력적인 하체나 부드럽고 단아한 어깨선, 상ㆍ하체의 비례 등이 전체적으로 균형잡힌 형태를 지니고 있다. 머리에는 두건을 썼는데, 이마를 감싼 후 귀 뒤로 넘겨서 어깨까지 천을 늘어뜨린 모습이다.

    이러한 형태의 두건을 쓴 지장보살〔被巾地藏〕의 모습은 고려시대에 널리 유행하였던 도상적 특징으로, 현존하는 많은 고려불화에서 그 예를 살펴볼 수 있다. 얼굴은 둥글고 단아한 인상을 주고 있으며 전체적으로 이목구비 등을 세부적으로 꼼꼼하게 표현하였다. 양 귀에는 만개한 화문(花紋)을 띠로 연결하여 귓불에 묶은 이식(耳飾)을 착용하고 있어, 고려시대의 일반적인 보살상이 원형 고리를 길게 늘어뜨려 매달고 있는 것과는 사뭇 다른 특이한 형태라 하겠다.

    오른손은 가슴 부분에 들어 엄지와 중지를 맞댄 중품인(中品印)을 취하고 왼손은 가슴과 배 중간쯤에 들어 법륜(法輪)을 잡고 있는데, 이는 육도중생을 구제한다는 의미로서 보주(寶珠)ㆍ석장(錫杖)ㆍ법륜 등의 지물을 들고 있는 지장보살의 일반적인 특성을 표현한 것이다. 앉은 자세는 오른발을 왼 무릎에 올린 모양으로 발을 실감나게 표현하였다. 어깨나 소매ㆍ무릎 등에 몇 가닥의 간단한 주름만을 표현하여, 상에 나타난 선묘는 유려하게 휘어지는 맛과 함께 단순ㆍ명쾌한 특징을 지니고 있다. 이 보살상은 고려 후기의 불상양식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우아하고 세련된 당대 최고의 걸작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