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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1. 내소사 목조아미타삼존불상(木造阿彌陀三尊佛像)
    작성자/작성일
    두레박 24-0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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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소사 대웅보전에 봉안되어 있던 삼존불상은 조선 인조 11년(1633)에 청민선사가 조성하여 봉안한 것이라 전해지고 있다.


    지정번호 : 전북유형문화재 제255호
    지정연도 : 2018년 3월 9일
    소장 : 내소사
    시대 : 조선 후기
    크기 : 125cm X 98cm
    분류 : 불상

  2. 내소사 해안(海眼)대종사
    작성자/작성일
    두레박 24-0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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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1 3월 7일 전북 부안에서 출생
    1914 부안 내소사에서 만허 화상을 은사로 득도
    1917 백양사에서 만암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받음
    1918 백양사에서 견성오도
    1932 계명 학원 설립
    1936 금산사 주지에 취임. 서래 선림 개설
    1969 불교 전등회 대종사 추대
    19743월 9일 세수 74세, 법랍 57세로 입적

    탄생(誕生)
    해안(海眼) 큰스님은 1901년 전북 부안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 이름은 성봉(成鳳)이었다. 암울한 시대에 태어났지만 비교적 순탄하게 어린 시절을 보냈다.
    한창 한학에 열중하던 무렵 큰스님은 어떤 붓장수로 부터 변산의 내소사(來蘇寺)라는 절에 『맹자』를 천번이나 읽은 고매한 학자가 있다는 소식을 접했다. 부모의 허락과 배려로 내소사에 유학간 큰스님은 한학자 고찬(高讚) 선생을 만나 한학 공부를 하던 도중, 당시 내소사에 주석하며 가람을 크게 일으킨 만허 화상과 해후했으니 이 만남이야말로 불연의 시작이요, 큰스님이 한국 선불교의 토대를 굳건히 한 대선사로 다시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입산(入山)
    당시 큰스님의 나이는 14세였다. 첫눈에 예사 아이가 아님을 알아차린 만허 화상은 큰스님을 흔쾌히 제자로 삼았다.
    절에 눌러 살면서 스님들이 살아가는 모습에 점차 매력을 느낀 큰스님은 3년 후 백양사에서 만암 화상을 계사로 사미계를 받고 수행자의 길로 접어들었다.

    출가수행(出家修行)
    불연을 맺은지 4년, 계를 받고 수행자의 길에 들어선 지 불과 2년째 되던 해에 큰스님은 눈이 열리는 경지를 맛보았다.
    한 해가 저물어 가던 191 8년 납월, 성도절(成道節,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은 날)을 앞두고 연례행사로 열리는 7일 용맹정진에 몇몇 학인들과 함께 참여해 견성(見性)의 일미(一味)를 맛본 것이다. 이 순간의 기쁨을 큰스님은 이렇게 노래했다.
    목탁소리 종소리 또한 죽비소리에
    봉(鳳)은 은산철벽 밖을 넘어 날았네
    내게 무슨 기쁜소식을 있는지 묻는다면
    회승당(會僧堂)에서 만발공양(滿鉢供養)함이라 하리.

    교화(敎化)
    큰스님은 내외전(內外典)은 물론 외국에 유학해 견문을 넓히고 한학에도 깊은 조예를 가졌기 때문인지 큰스님은 교육 사업에도 각별한 관심을 보였다.
    1931년 내소사 앞 입암리 마을에 계명학원(啓明學院)을 설립해 미취학 아동과 무학자들을 교육하는 등 문맹 퇴치 운동에 앞장섰다. 35세 되던 해에는 백양사의 본말사 순회 포교사의 책무를 맡으면서 본격적인 중생 교화의 길로 접어들었다.
    본사인 금산사 주지로 있을 때에도 사내에 서래 선림(西來禪林)이라는 선원을 개설해 참선 수행과 지도, 후학 및 납자 제접에 전념했다.
    큰스님은 재가 신도들에게도 차별없이 가르침을 전했다. 이런 연유로 그의 주변에는 많은 재가 불자들이 모여들었다. 1968년 봄, 따르던 재가불자들이 모여 불교 전등회(佛敎傳燈會)를 조직하고 계절마다 정진 법회를 개최해 7일 또는 21일 참선 정진을 시작하자, 이 모임의 회주가 되어 성의를 다해 지도했다.

    입적(入寂)
    1974년 3월 7일, 큰스님은 자신의 일흔 네번째 생일과 불교 전등회 창립 4주년을 기념해 열린 법회에서 운집한 불자들에게 자신의 임종이 다가왔음을 알리는 마지막 법문을 내렸다.
    이틀 후 1974년 3월 9일 새벽, 예불이 끝나자 대중들은 큰스님의 안부를 살피고자 조실 안으로 모여들었다. 잠시 침묵을 지키던 큰스님은 열반송이라도 남겨달라는 제자들의 애타는 요구를 끝내 물리치지 못해 게송을 읊었다.
    생사 없는 곳에
    따로 한 세계가 있으니
    때묻은 옷이 떨어져 다하면
    바로 이 달 맑은 때이니라
    그리고 열반에 드니 세수 74세, 법랍 57세였다.

  3. 내소사 우암(愚岩)대선사
    작성자/작성일
    두레박 24-0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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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3 음력 9월 6일 영광군 백수면 논산리에서 출생
    1963 부안 내소사에서 해안스님을 은사로 득도
    1968 전등회 창립
    1973 범어사에서 고암대종사를 계사로 구족계를 받음
    1983 내소사 주지에 취임
    2001 봉래선원 개설
    20056월 13일 세수 73세, 법납 42세로 입적

    탄생(誕生)
    스님께서는 1933년 음력 9월 6일 영광군 백수면 논산리에서 아버지 영성정씨 재수공과 어머니 전주이씨 사이에서 탄생하였다. 학창 시절에, 진리에 대한 갈증으로 신앙생활을 하였는데, 그 사상에 많은 논리적 모순을 발견하고 의문점을 물어보니 그저 “믿음이 부족해서 비롯된 어리석음이니 신명을 다해 기도하라.”는 말 뿐이었다. 스님은 곧“의심이 가득한 채 기도하는 것은 신과 나 자신을 기만하는 일”이라 생각하게 된다. 1958년 서울대 농대를 졸업 후 전북 군산의 시청 공무원으로 근무하면서도‘내가 갈 길은 이것이 아니다.’그럼“가장 잘 사는 법은 무엇일까?' 하는 생각들이 잠시도 떠나지 않았다. 깊은 명상 후에 '바로 대자유다.'라고 생각했으나 최고의 진리라는 종교와 사상들은 하나같이 '나를 구속하고 억압하는 굴레로구나'라고 생각하게 되어, 속세에서의 생활보다는 산사에 머물기를 즐기며 불경공부도 하게 된다.

    입산(入山)
    어느 날 영광 불갑사 스님에게 훗날 은사가 된 해안스님이 지은 ‘금강경 해제’를 받았다. 무심코 책장을 넘겨보다가 '무유정법명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는 구절에서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대자유의 세계를 발견하게 된다. 이후 3여년간 해안스님과 수십 통의 편지로 공부 방법과 경계에 대한 질의 그리고 이에 대한 응답과 격려를 서로 왕래하며 불법에 대한 신심을 더욱 키웠다.

    출가수행(出家修行)
    스님은 마지막으로 스승에게서 받은 "백지서신"에서 자신의 길에 대해 더 이 상의 한 점 의혹이 없어서 주저 없이 출가를 하게 된다. ‘말로써 불법에 대해 시시비비 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직접 뛰어들리라.’생각하시고 바로 내소사 옛 선원인 서래선림에서 입재한 21일간의 용맹정진법회에 참가하였다. 법회가 끝나고 참석했던 사부중 모두 제 일상으로 돌아갔지만 스님은 법당에서 한 발짝도 떼지 않았다. 해안스님이 하산하지 않는 이유를 물으니 “내 필생의 과제를 못 마쳤는데 어떻게 절 아래로 내려가 천연덕스럽게 살 수 있겠습니까.”라고 대답하였다. 1963년 9월 스님의 근기를 알아본 해안스님은 삭발염의를 허락하였다. 1964년 4월 다시 맹렬한 구도의지를 내어 지장암 나한전에서 백일간의 용맹정진에 들어 침식을 잊고 의단에 몰입하니 스승은 몸소 왕래하며 거처와 공양물을 살펴주였다. 1968년 스승을 조실로 모시고 사부중이 함께 견성성불을 목적으로 참선정진하는 모임인 전등회를 창립하여 정진하였다. 1973년 범어사에서 고암대종사를 계사로 하여 구족계를 수지하였고 다시 통도사 서래선림에서 수선안거 이래 통도사 극락선원, 해인사선원, 대흥사선원, 전등선원, 봉래선원 제방선원을 다니시며 정진하였다.

    교화(敎化)
    해안스님의 입적이후 스승의 부촉하신대로 전등회를 이끌며 2005년까지 60여회 정진법회를 열었다. 해인총림 해인사 선원장, 조계종 총무원 교무부장, 조계사 주지 동명불원주지 서울 성북동 전등사 주지, 한일불교교류협회 이사 등 잠시 종단의 소임을 맡았다. 1983년 출가본찰인 내소사에 돌아와 보니, 법당과 요사의 지붕은 비가 새고 도량은 축대가 무너져 잡초와 잡목이 무성하였다. 내소사는 선사 스님들의 부도가 모셔져 있고 특히 관해스님 만허스님을 거쳐 은사 해안스님이 주석하였고 또한 스승에 대한 감사를 잊지 못해 도량을 일신하기로 결심하고 불사를 시작하였다. 20여년간 선원. 요사. 종각등을 포함 지장암, 청련암 등 무려 32동의 건물을 새로 짓고 도량을 일신 정비하였으니, 도량 어느 곳 하나 손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다. 스님은 아마 전생부터 내소사를 크게 중창하고자 원력을 세워온 분이리라. 2001년에는 서래선림을 대신해 선원과 회승당을 신축하여 봉래선원이라 현판을 걸고 눈푸른 납자들과 사부중이 항시 정진을 하고 있으니, 평소 말씀하신대로 불사본분이 정진하여 성불함에 있음을 몸소 실천하였음이다.

    입적(入寂)
    2005년 6월 13일 오후 2시 쯤. 아 스님도 제행이 무상함을 몸소 보이심인가? 평소와 다름없이 대중들과 점심 공양과 차담을 하고 도량을 둘러본 후 주석하시던 처소에 들어 아무런 말씀 없이 홀로 입적하니 세수 73세 법납 42년이였다.

  4. 내소사의 전설
    작성자/작성일
    두레박 24-05-07

    스님, 이제 그만 들어가시지요. 이렇게 나와서 1년을 기다려도 목수는 오지 않으니, 언제 대웅전을 짓겠습니까?
    내일은 소승이 좀 미숙해도 구해 오겠습니다.

    허, 군말이 많구나.

    그리고 기다리실 바엔 절에서 기다리시지 하필이면 예까지 나오셔서...

    멍청한 녀석. 내가 기다리는 것은 목수지만 매일 여기 나오는 것은 백호혈(白虎穴)을 지키기 위해서니라.

    노승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늙은 호랑이가 포효하며 노승 앞에 나타났다. 호랑이의 안광은 석양의 노을 속에 이글거렸다. 아무 일 없었던 듯 노승이 주장자를 휘저으며 호랑이 앞을 지나려 하자 대호는 앞발을 높이 들고 노승을 향해 으르릉댔다.
    안된다고 해도 그러는구나. 대웅보전을 짓기까지는 안돼.

    노승은 주장자를 들어 소나무 허리를 때렸다. 팽하는 소리가 나자 호랑이는 '어흥'하는 외마디 울부짖음을 남기곤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날 저녁 타 버린 대웅전 주춧돌에 앉아 산을 내려다보던 노승은 사미승을 불렀다.
    너 일주문 밖에 좀 나가 보아라. 누가 올 터이니 짐을 받아 오도록 해라.

    이 밤중에 어떻게 일주문 밖을 나가라고 하십니까?

    일주문 밖과 여기가 어떻게 다르기라도 하단 말이냐?

    마지못해 대답을 하고 간신히 일주문에 다다른 사미의 가슴은 철렁했다. 무슨 기다란 동물이 기둥에 기대어 누워 있지 않은가. 입 속으로 염불을 외우며 다가서니 누워 있던 사람이 일어났다. 나그네였다.
    어서오십시오. 스님이 마중을 보내서 왔습니다.

    나그네는 아무 말 없이 걸망을 둘러메고 걸었다.
    손님, 짐을 저에게 주십시오. 스님께서 짐을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나그네는 묵묵히 걸망을 건네주었다.
    손님은 어디서 오시는 길입니까? 이 짐 속엔 뭣이 들었길래 이리 무겁습니까? 노스님과는 잘 아시나요?

    나그네는 대꾸가 없었다. 그는 다음날 부터 대웅전 지을 나무를 찾아 기둥감과 중방감을 켜고 작은 기둥과 서까래를 끊었다. 다음에는 목침만한 크기로 나무를 자르기 시작했다. 하루, 이틀, 한 달, 두 달, 목수는 말없이 목침만을 잘랐다. 사람들은 그가 미쳤다며 비웃었다. 그러나 노승은 말없이 웃기만 했다.
    어언 다섯 달. 목수는 비로소 톱을 놓고 대패를 들었다. 목침을 대패로 다듬기 시작한 지 3년, 흡사 삼매에 든 듯 목침만을 다듬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여보 목수양반, 목침 깎다가 세월 다 가겠소.

    사미의 비웃는 말에도 목수는 잠자코 목침만을 다듬었다. 사미는 슬그머니 화가 나 목수를 골려 주려고 목침 하나를 감췄다. 사흘이 지나 목침깍기 3년이 되던 날. 목수는 대패를 버리고 일어나더니 노적만큼 쌓아올린 목침을 세기 시작했다. 무수한 목침을 다 세고 난 목수의 눈에선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일할 때와는 달리 그의 얼굴에는 절망이 깃들었다. 연장을 챙긴 목수는 노승을 찾아갔다.
    스님, 소인은 아직 법당 지을 인연이 먼 듯하옵니다.

    절에 와서 처음으로 입을 여는 목수를 보고 사미의 눈은 왕방울만큼 커졌다.
    왜 무슨 까닭이 있었느냐?

    노승은 조용히 물었다.
    목침 하나가 부족합니다. 아직 저의 경계가 미흡한가 봅니다.

    가지 말고 법당을 짓게. 목침이 그대의 경계를 말하는 것은 아닐세.

    사미는 놀랐다. 목침으로 법당을 짓는 것도 신기하지만 그 산더미 같은 목침 속에서 하나가 없어진 것을 알다니-. 목수는 기둥을 세우고 중방을 걸고 순식간에 법당을 완성했다.
    법당에 단청을 하려고 화공을 불러왔다. 노승은 대중에게 엄격히 타일렀다. 화공의 일이 끝날 때까지 아무도 법당 안을 들여다봐서는 안되느니라. 화공은 한 달, 두 달이 지나도 밖에 나오질 않았다. 사람들은 법당안에 그려지는 그림이 보고 싶고 궁금했다. 그러나 법당 앞에는 늘 목수가 아니면 노승이 지키고 있었다. 어느 날, 사미는 법당 가까이 가서 목수에게 말했다.
    스님께서 잠깐 오시랍니다.

    목수가 법당 앞을 떠나자 사미는 재빠르게 문틈으로 법당 안을 들여다봤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림 그리는 사람은 없는데 오색 영롱한 작은 새가 입에 붓을 물고 날개에 물감을 묻혀 벽에 그림을 그리고 있지 않은가. 사미는 문을 살그머니 열고 법당 안으로 발을 디밀었다. 순간 어디선가 산울림 같은 무서운 호랑이의 울음소리가 들리면서 새는 날아가버렸다. 노호 소리에 놀란 사미가 어슴프레 정신을 차렸을 때 노승은 법당 앞에 죽어 있는 대호를 향해 법문을 설했다.
    대호선사여! 생사가 둘이 아닌데 선사는 지금 어느 곳에 가 있는가. 선사가 세운 대웅보전은 길이 법연을 이으리라.

    때는 1633년. 내소사 조실 청민선사는 대웅보전 증축 후 어디론가 자취를 감췄다. 변산반도 한 기슭에 자리한 내소사 대웅전(보물 제291호)은 지금도 한 개의 포가 모자란 채 옛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포'라고 하는것은 기둥위로 가로 질러있는 보 위에 나뭇가지 처럼 나와 있는 것인데 한개 있으면 잇궁(일포), 세개면 삼포, 오포, 구포, 귀공포 등으로 불리어짐. 보와 석가레 사이를 멋지게 장식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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