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총 6 건

소개
  1. 산사유거(山寺幽居) 부안 개암사
    작성자/작성일
    두레박 24-05-07

    개암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4교구 본사인 선운사(禪雲寺)의 말사입니다. 634년(무왕 35) 백제의 왕사(王師) 묘련(妙蓮)이 창건한 백제의 고찰입니다. 사찰의 이름을 개암(開巖)이라 부르게 된 배경은 뒷산 정상의 웅장한 우금바위(또는 우금암) 전설와 관련된 것으로 여겨집니다. 마한의 효왕(孝王) 28년에 변한의 문왕이 진한과 마한의 난을 피하여 이곳에 도성을 쌓을 때, 우(禹)와 진(陳)의 두 장사를 보내어 감독하게 하고 좌우 계곡에 왕궁전각을 짓게 하였는데, 동쪽을 묘암(妙巖), 서쪽을 개암(開巖)이라 부르게 된 데서 비롯되었습니다.

    즉 우금바위에 천연석굴이 있어 그 바위를 개암이라 불렀는데, 바위의 모습이 멀리서 보면 크게 둘로 이루어진 듯하여 '바위가 열린 상태'라는 의미의 개암(開巖)이라 칭했다는 구전도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찰이 그렇듯이 개암사 창건에 대한 역사 기록도 조선 후기에 편찬된 사적기(寺蹟記)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사적기는 1658년 金波堂 如如스님이 엮은 개암사중건사적기(開巖寺重建寺蹟記)와 1640년 월파자(月坡子) 최경(崔勁)이 지은 법당중창기문(法堂重創記文), 1941년 주봉당(舟峰堂) 상의(尙毅) 스님이 편찬한 개암사중건연혁기(開巖寺重建沿革記) 등이 있습니다.

    그 내용을 시기별로 정리하면, 먼저 법당중창기문의「별기(別記)」에 인용된 원효방상량문(元曉房上樑文)에는 백제와 관련된 이 지역의 역사적 위치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에 따르면 백제 멸망 직후 묘련의 제자 도침(道琛)이 무왕의 조카 복신(福信)과 더불어 이 지역에서 백제부흥운동을 펼쳤고, 개암사는 원효방(元曉房)의 본사로서 백제부흥운동 당시 구심축을 이룬 장소입니다.

    즉 634년 묘련이 처음 설립한 후 676년에 원효ㆍ의상 스님이 우금암(禹金巖) 아래에 있는 우금굴에 머물면서 암자를 중수했는데, 이 우금굴은 이후 원효방이라 불리면서 조선 시대 후기까지 개암사의 산내 암자로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원효스님의 자취를 지닌 원효방은 이후 수많은 시인 묵객들의 시에도 등장하였으며, 7세기 중엽에 존재했다면 당시부터 개암사의 부속 암자였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또한 『삼국유사(三國遺事)』 권4 「관동풍악발연수석기(關東楓岳鉢淵藪石記」에는 진표율사(眞表律師)가 개암사의 부속암자인 부사의방장(不思議方丈)에서 참선 득도한 기록이 있습니다.

    황금전(黃金殿)을 중심으로 하여 동쪽에는 청련각(靑蓮閣), 남쪽에는 청허루(淸虛樓), 북쪽에는 팔상전(八相殿), 서쪽에는 응진당(應眞堂)과 명부전(冥府殿)을 지었으며, 총 30여 동의 건물을 세워 ≪능가경 楞伽經≫을 강의하면서 많은 사람을 교화하였고, 이 때문에 산의 이름을 능가산이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1414년(태종 14) 폐허가 된 것을 선탄(禪坦)이 중창하였으나 임진왜란으로 황금전을 제외한 전 당우가 소실되었습니다.

    그 뒤 1636년(인조 14) 계호(戒浩)가, 1658년 밀영(密英)과 혜징(慧澄)이 대웅전을 중건하였으며, 1728년(영조 4) 법천(法天)·찬견(贊堅)이 명부전을 중건하고, 1733년 하서암(下西庵)·석주암(石柱庵)·월정암(月精庵)을 중건하였습니다. 1737년 시왕상과 16나한상을 조성하였으며, 1783년 승담(勝潭)이 중수하였습니다.

    1913년 화은(華隱)이 선당(禪堂)을 짓고, 1960년 대웅보전을 해체 복원하였습니다. 1993년 응향각을 복원하였고, 이듬해 일주문을 짓고 응진전을 해체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 당우 및 문화재
    현존하는 당우(堂宇)로는 대웅보전을 비롯하여 인등전·응향각·응진전·일주문과 월성대 및 요사가 있습니다. 이 가운데 대웅보전은 보물 제292호로 지정된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서 대표적인 조선 중기 건물입니다. 예전의 황금전이 바로 지금의 대웅보전입니다.

    이 절에서 500m 떨어진 곳에 울금바위라는 큰 바위가 있고, 이 바위에는 모두 3개의 동굴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원효방이라는 굴 밑에는 조그만 웅덩이가 있어 물이 괴입니다. 전설에 의하면 원래 물이 없었으나 원효가 이곳에 수도하기 위해 오면서부터 샘이 솟아났다고 합니다.

    원효대사와 의상대사, 진표율사, 원감국사 등 고승대덕이 인연을 맺었던 오랜 역사를 간직한 고찰로 절이 자리 잡고 있는 변산은 우리나라의 8승지로 손꼽힐 정도로 아름다운 풍경을 지닌 개암사는 특히 절의 배경이 되는 우금암이 백제부흥 운동의 근원지로 삼한시대에 창건되었다고 하는 전설을 지니고 있으며 백제무왕 16년(676)년에 원효와 의상대사가 이곳에 와 머물면서 다시 고려시대에 송광사 출신의 원감국사가 절을 중창하여 황금전 청련각 백옥교 청혀루 금지등 화려한 면모를 갖추게 되었으며 고려 말 조선 초를 거치면서 서해안에 왜구들로 인하여 다시 폐허가 되었던 개암사는 조선태종14년 1414년에 주지 선탄스님에 인하여 다시 중수되었습니다.

    그러나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개암사는 다시 폐허가 되었으며 인조 15년 1636년 계호대사 대법당을 중건한 후 약 370년에 걸쳐 절 안의 많은 건물과 주변 암자의 대 가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때 중창된 전각 중 현존하는 것은 대웅보전뿐입니다. 근래에 와서는 1990년부터 현재 회주이신 혜오스님의 원력으로 전각의 중건으로 현재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고, 현 주지 무등스님은 개암사와 불교문화의 부흥을 소원하시며 기도 정진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