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총 14 건

소개
  1. 실상사 전각 배치도
    작성자/작성일
    두레박 24-06-05
    aeb588726a38af010466156db839f79c_1717579129_34.jpg
     


  2. 실상사의 문화재 목록
    작성자/작성일
    두레박 24-06-05

    사적
    제309호 실상사 일원

    국보
    제10호 백장암 삼층석탑 (신라말)

    보물

    제33호 수철화상 능가보월탑 (신라말)
    제34호 수철화상 능가보월탑비 (신라말)
    제35호 실상사 석등 (신라말)
    제36호 실상사 부도 (고려시대)
    제37호 실상사삼층석탑(쌍탑) (신라말)
    제38호 증각홍척국사 응료탑 (신라말)
    제39호 증각홍척국사 응료탑비 (신라말)
    제40호 백장암 석등 (신라말)
    제41호 철조 여래좌상 (신라말)
    제420호 백장암 청동은입사향로 (1584)
    제421호 약수암 목조탱화 (1782)
    편운화상승탑 (후백제)

    지방유형문화재

    제45호 극락전 (1684)
    제88호 위토개량성책 (조선시대토지대장)
    제137호 보광전 범종 (1694)
    제258호 건칠아미타불좌상, 건칠관음보상립상

    중요민속자료

    제15호 석장승 3기


    aeb588726a38af010466156db839f79c_1717579100_79.jpg
     

  3. 실상사 보광전
    작성자/작성일
    두레박 24-06-05

    실상사의 주법당인 보광전은 1884년(고종 21)에 월송대사가 세운 것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건물이다. 건물 안에 모셔진 삼존상 중 본존불은 조선시대에 조성한 것이고, 좌우의 관음, 세지 두 보살은 원래 극락전에 아미타불과 함께 봉안되었던 것으로 월씨국(베트남)에서 모셔왔다고도 한다.

    현재는 단청이 되어 있지 않아 소박한 모습으로 실상사를 찾는 사람들을 맞이하고 있다. 그렇지만 조선후기의 건축양식을 살필 수 있는 좋은 자료로써, 보광전 주변에는 83평을 추정케 하는 주춧돌이 남아 있어 굉장한 규모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1991년 동국대 박물관에 의한 보광전 주변 발굴에 의한 보광전 주변 발굴에서 이미 증명된 적이 있다. 불상 뒤에는 아미타여래도가 있고, 불단 오른편에는 1981년에 만든 신중불화와 산신불화가 있다.

    실상사 동종(銅鐘)

    절에서 사용하는 종을 흔히 범종이라고 하는데, 그 소리로써 하루의 일과를 모든 대중에게 알리는 역할을 한다. 범종은 소리로 장엄하고 시간을 알려주며, 귀신을 쫓고 지상 및 하늘과 지옥의 모든 중생을 구제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실상사에는 통일신라시대의 범종이 있었는데 깨진 상태로 동국대학교 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고, 강희(康熙) 33년(1694)에 주조한 범종은 현재 보광전에 있다.

    이 종은 몸체의 위는 좁고 아래로 가면서 넓게 퍼진 모습이다. 종 몸체에 기록된 글에 의하면 강희 33년에 만든 것으로 무게는 800근이다. 종을 만든 사람은 김상립, 정칠립, 김천수, 김선봉 등으로 여기에서 처음으로 범종을 만든 사람을 편수(便手)로 기록하고 있다. 이와 같은 기록으로 보아 이 종은 침허대사가 실상사를 중창할 때 만든 것으로 보인다.

    용두(龍頭)는 앞을 바라보고 있고, 뒤에 붙은 소리통은 형식적으로 작게 만들었다. 상대(上帶)는 표현하지 않고 대신에 범자(梵字)를 돌아가며 새겼으며, 유곽(乳廓)은 종 몸체 중간쯤에 치우치게 배치하였다. 유곽대에는 당초무늬와 연꽃 모양의 유두(乳頭)가 9개씩 있고, 보살상은 유곽을 중심으로 합장한 채 서 있다. 보살이 서 있는 아래 부분에는 명문(銘文)이 있고 당좌(撞座)와 하대(下臺)는 표현하지 않았다.

    이 종에 얽힌 이야기로는 다음과 같은 것이 전해 온다. 즉 실상사를 중창하고 난 후 국왕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종을 만들고 아침 저녁으로 나라가 번창하기를 기도하며 종을 쳤다고 한다.

    그런데 이 범종에는 우리 나라 지도와 일본의 지도가 새겨져 있어, 이 종을 치면 일본의 경거망동을 경고함과 동시에 우리 나라를 흥하게 한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이와 같은 소문 때문에 일제 말기에는 주지스님이 문초를 당하기도 하였으며 종 치는 것이 금지되기도 하였다. 지금도 지도 일부가 그대로 남아 있어 그러한 사실에 신빙성을 더하고 있다.

  4. 실상사 약사전
    작성자/작성일
    두레박 24-06-05

    약사전은 몸과 마음의 질병을 낫게 함으로써 중생을 교화하는 서원을 세운 약사여래를 봉안하는 전각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건물이다. 1883년 함양, 산청 유생들의 방화에도 불타지 않고 지금까지 남아 있는데, 특히 ㅈ우앙의 꽃문창살은 단청이 선명해 아름다움을 더하고 있다. 전각 안에는 통일신라시대에 철로 만든 약사불상과 불상 뒤에는 조선 후기에 그린 약사불화가 있다.

    철조 약사여래좌상

    약사여래는 중생의 병고 뿐만 아니라 현실세계의 부족함을 채워주는 현실이익적인 부처님이다. 이처럼 약사여래는 인간의 생노병사 가운데 가장 고통스러운 병과 관련이 있기 때문에 우리 나라에 약사신앙이 전래된 이후 계속 신앙되었다.

    약사불상이 다른 불상과 구별되는 가장 큰 특징은 한 손에 약그릇을 들고 있는 점이다. 그러나 현재 약사불로 신앙되고 있는 불상 가운데는 약그릇을 가지고 있지 않는 경우도 있는데, 실상사의 약사여래도 약그릇을 갖고 있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이 불상을 통일신라 말 구산선문에서 본존으로 모시던 노사나상(盧舍那像)이라고도 하며, 근래에는 원래의 손이 아미타 수인을 하고 있어 아미타불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제2대 조사인 수철국사가 약사여래상과 석탑 2기를 세웠다는 설이 있어 현재 약사전에 봉안된 철조여래상은 수철국사가 조성한 약사불이 아닌가 한다.

    이 불상은 실상사가 중창될 때까지 들판에 있었으며, 약사전을 세운 후 그 안에 봉안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불상에는 보화(寶貨)가 많이 들어 있다는 말이 있어 일찍부터 도굴꾼에 의해 훼손된 적이 있다. 불상의 복장품에는 효령대군의 발원문과 사경(射經) 및 인경(印經)이 수백 권이나 있었고, 고려판 화엄경소 등 보기드문 서적도 있었다고 한다. 그 중 일부는 도난 당하였고, 나머지는 건물과 함께 불탔다고 한다.

    실상사 약사여래불상은 9세기에 접어들면서 유행하는 철불(鐵佛)의 초기작품으로써 귀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이 불상은 건장한 신체와 물결식의 옷주름에서 가장 융성했던 시기의 양식이 남아 있음을 엿볼 수 있다.

    현재의 두 손은 나무로 만들어 끼워넣은 것으로, 1987년 복원할 때 나온 철제 손과 같은 모양이다. 대좌는 흙으로 만들었으나 허물어진 곳이 많아 자세한 모습은 알 수 없다.

  5. 실상사 명부전
    작성자/작성일
    두레박 24-06-05

    명부전은 갖가지 지옥의 장면을 그린 시왕(十王)의 그림이나 조각을 모신 전각으로 주존은 지장보살이다.

    실상사의 명부전은 길선당(吉禪堂)의 옛터에 건립된 것으로 장육전(丈六殿) 동쪽에 있던 것으로 1821년(순조 21)에 의암대사가 옮겨 지은 것이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건물로 안에는 지장보살 삼존상, 시왕상 10구, 판관상 6구, 인왕상 2구가 있다. 지장보살상 뒤에는 1987년에 조성한 지장시왕도가 있다.

    시왕상은 본존을 중심으로 오른쪽으로는 제1 진광대왕, 제3 송제대왕, 제5ㅓ 염라대왕, 제7 태산대왕, 제9 도시대왕이 있고, 왼쪽으로는 제2 초강대왕, 제4 와관대왕, 제6 변성대왕, 제8 평등대왕, 제10 전륜대왕이 배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