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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1. 실상사 극락전
    작성자/작성일
    두레박 24-06-05

    극락전의 옛이름은 부도전(扶道殿)으로 계오대사가 1684년(숙종 10)에 건물을 짓고 부도전(浮屠殿)이라 하였다. 이와 같이 부도전이라 한 것은 근처에 홍척국사와 수철화상의 부도가 있기 때문이다. 1751년(영조 27)에 포문비구(抱文比丘) 한심(漢諶)이 옛 연하당(蓮荷堂)과 금당(金堂)의 기와를 사용하여 요사채를 수리하고 부도전(扶道殿)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1788년(정조 12년)에 금파 관오대사가 대시주 이휘와 별좌 홍찬, 재민과 더불어 중수하였다. 1832년(순조 32)에 의암대사가 기봉, 처윤과 함께 중건하여 극락전으로 이름을 바꾸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극락전은 명면 3칸, 측면 2칸인 맞배지붕의 목조건물로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 45호이다. 불단 위에는 아미타여래좌상이 있으며, 그 좌우에는 목조보살상이 있었으나 몇 년 전에 분실하였다. 극락전 요사채는 1932년에 남성법(南性法) 스님이 영원사(靈源寺)에서 옮겨 세운 것으로, 지리산의 기운이 솟아오르는 명당으로 알려져 수행납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2. 실상사 역사
    작성자/작성일
    두레박 24-06-05

    지리산 자락이 감싸 안은 듯 평화롭고 풍요로운 고을 남원시 산내면에 천년 고찰 실상사(實相寺)가 있다. 지리산의 북쪽 관문인 인월에서 심원, 달궁, 뱀사골 방면으로 향하다 보면 삼거리가 나오는데 여기서 왼쪽 마천방면으로 가다 보면 만수천(萬壽川)변에 천년의 세월을 버티고 지내온 실상사가 나타난다.

    만수천과 뱀사골 방면에서 흘러내리는 물줄기가 만나는 지점이 산내면 면소재지, 즉 인월에서 뱀사골 방면으로 가다 보면 나타나는 삼거리 부근이다. 이 삼거리에서 동쪽을 향해보면 천왕봉이 손에 닿을 듯 눈 앞에 선하다. 그 발 아래 산내면 입석리 들판이 넓게 펼쳐지는데 그 곳에 실상사가 자리잡고 있다.

    실상사는 지리산 깊은 계곡에서 흐르는 만수천을 끼고 풍성한 들판 한가운데 위치해 있으며 동으로는 천왕봉과 마주하면서 남쪽에는 반야봉, 서쪽은 심원 달궁, 북쪽은 덕유산맥의 수청산 등이 병풍처럼 둘러싸인 채 천년 세월을 지내오고 있다. 대부분 우리나라의 사찰이 깊은 산중에 자리잡고 있는데 비해 지리산 자락의 실상사는 들판 한가운데 세워져 있는 것이 특이하다.

    지리산 사찰 중 평지에 자리한 절은 이 곳 실상사와 단속사가 있는데 단속사는 폐허가 된 채 석탑만 남겨져 있는데 비해 실상사는 여전히 사찰의 역할을 하고 있다.

    실상사의 역사 개관 천년사찰, 호국사찰로 잘 알려진 실상사는 신라 흥덕왕(興德王) 3년(서기 828년) 증각대사 홍척(洪陟)스님이 당나라에 유학, 지장스님의 문하에서 선법(禪法)을 배운 뒤 826년 귀국했다가 선정처(禪定處)를 찾아 2년동안 전국의 산을 다닌 끝에 현재의 자리에 발길을 멈추고 창건했다. 증각대사가 구산선종(九山禪宗) 가운데 최초로 남원시 산내면 입석리에 절을 세운 것이다.

    증각대사의 높은 불심을 높게 기린 흥덕왕이 절을 세울 수 있게 해줬고 왕은 선강태자(宣康太子)와 함께 이 절에 귀의했다. 증각은 실상사를 창건하고 선종(禪宗)을 크게 일으켜 이른바 실상산파(實相山派)를 이루었고 그의 문하에서 제 2대가 된 수철화상과 편운(片雲)스님이 가르친 수많은 제자들이 전국에 걸쳐 선풍(禪風)을 일으켰다.

    신라 불교의 선풍을 일으키며 번창했던 실상사는 그 이후 조선시대에 접어들면서 화재로 전소됐다가 3차례에 걸쳐 중수 복원돼 오늘에 이른다. 세조때(1468) 원인 모를 화재로 전소됐다는 기록과 정유재란 때 왜구에 의해 전소됐다는 설이 동시에 전해지고 있다.

    화재로 인해 실상사의 승려들은 숙종 5년(1680)까지 약 200년 동안 백장암에서 기거했으며 절에는 철불, 석탑, 석등 등만 남아 있었다 한다. 그러다가 숙종 때 300여 명의 수도승들과 함께 침허대사가 상소문을 올려 36채의 대가람을 중건했다. 또 순조 21년(1821) 의암대사가 두번째 중건을 했으며 고종 21년(1884)에 월송대사가 세번째 중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여기서 제3중창을 하게 된 것은 고종 19년(1882) 어떤 사람들이 절터를 가로챌 목적으로 방화를 했기 때문이다. 또한 실상사는 6•25를 맞아서는 낮에는 국군, 밤에는 공비들이 점거하는 등 또 한 차례의 수난을 겪게 됐는데 용케도 사찰만은 전화를 입지 않았다.

    천년 세월을 보내오면서 호국사찰로 알려진 실상사에는 유독 일본, 즉 왜구와의 얽힌 설화가 많이 전해진다. 앞서 언급한 사찰의 전소원인을 정유재란 당시의 왜구에 의한 것으로 보고 있는 부분에서도 일본과 관련된 전설을 엿볼 수 있다. 또한 약사전의 약사여래불은 천왕봉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는데 천왕봉 너머에는 일본의 후지산이 일직선상으로 놓여져 있다 한다. 이 때문에 가람배치도 동쪽을 향해 대치형을 하고 옆으로 강이 흘러 대조적이다.

    이 절에는 "일본이 흥하면 실상사가 망하고 일본이 망하면 실상사가 흥한다"는 구전이 있는데 이는 천왕봉 아래 법계사에서도 전해지고 있어 흥미를 끈다. 이를 증명하기라도 하듯 실상사 경내의 보광전 안에 있는 범종에 일본 열도의 지도가 그려져 있는데 스님들이 예불할 때마다 종에 그려진 일본열도를 두들겨 치고 있다. 이는 앞서 언급했듯 우리나라와 실상사가 흥하면 일본이 망한다는 구전에 의한 것으로 여겨진다. 스님들이 이 속설에 따라 범종의 일본지도를 많이 두드린 탓에 범종에 그려진 일본지도 중 훗카이도와 규슈지방만 제 모양으로 남아 있을 뿐 나머지 열도는 희미해져 가고 있다.

    최근의 독도 영유권에 대한 일본의 망언이 있는 오늘날 한일관계를 두고 볼 때 보광전의 범종에 얽힌 사연이 갖는 의미는 우리에게 많은 점을 일깨워주기에 충분하다. 이 같은 전설과 구전들을 살펴볼 때 실상사가  일본에 대한 호국사찰이며 불교문화의 큰 도량임을 알 수 있다.

    실상사에는 백장암과 서진암, 약수암 등의 암자가 있으며 이 곳에는 신라시대의 많은 문화유산들이 산재해 있다. 국보 제10호로 지정된 백장암 삼층석탑은 전형에 구애받지 않은 자유로운 설계를 하고 있어 통일신라를 대표하는 공예탑이기도 하다.

    실상사의 문화유적은 보물급에는 수철화상능가보월탑(33호, 905), 수철화상능가보월탑비(34호), 석등(35호, 개산당시), 부도(36호, 고려), 삼층쌍탑(37호, 887년), 증각대사응료탑(38호, 861년 이후), 증각대사응료탑비(39호), 백장암석등(40호, 9세기 중엽), 철제여래좌상(41호, 개산당시), 청동은입사향로(420호, 1584년), 약수암목조탱화(421호, 1782년)등 11점이 보존되어 있다. 지방유형문화재로는 극락전(45호,1684년), 위토개량성책(88호, 토지대장), 보광전범종(138호, 1694년), 백장암보살좌상(166호,고려), 백장암범종(211호, 1743년)등 5점이다. 중요민속자료는 실상사 입구의 만수천을 가로지르는 해탈교 양쪽에 세워져 있는 석장승 3기(15호)가 그것이다.

    장승은 벅수라고도 하는데 보통 한 쌍으로 세워져 있으나 이 곳의 장승은 남녀를 판별할 수 없으며 만수천 양쪽에 원래는 4기가 세워져 있었다. 절을 향해 건너기 전에 세워진 한쌍의 돌장승 중 오른편 장승은 1936년(또는 1934년) 홍수 때 떠내려 가고 없다. 잡귀를 막기 위해 세워진 "상원주장군(上元周將軍)은 두 눈과 코가 크고 둥글며 머리에는 모자를 쓰고 손은 창을 든 것 같은 모습이며 "대장군(大將軍)"은 뒤에 만들어진 듯 이렇다 할 특징은 없다. 실상사에는 이렇듯 호국의 정신이 흐르며 찬란한 신라불교문화의 숱한 문화재가 잘 보존돼 있는 천년고찰이다.

  3. 실상사 신중도 實相寺 神衆圖 Guardian Deities of Silsangsa Temp…
    작성자/작성일
    두레박 24-05-07

    조선 1752년
    면에 색
    150.2×113.3
    금산사성보박물관

    1752년 조성된 실상사 신중도는 화면과 화기가 잘려 도난당할 뻔한 흔적이 남아 있다. 상단에 황색과 녹색의 구름을 표현하고, 합장을 하고 중앙을 향해 있는 제석천과 범천이 자리하였다. 그 양 옆으로 일궁천자와 월궁천자를, 제석천과 범천 사이에는 번과 당을 들고 있는 동자와 동녀를 배치하였다. 그 아래 화면 중앙에는 깃털장식의 투구를 쓴 위태천도 합장을 한 채 서있다. 하단에는 용왕과 무장신들을 배치하였다.

    화기에는 건륭乾隆 17년(1752) 극락전에 봉안하였으며 대법당 삼장도와 함께 동시 조성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신중도는 전라남도 무주군에 위치한 북고사北固寺 용화전龍華殿 신중도와 매우 유사한 도상과 구도를 가지고 있다. 이 불화를 그린 회밀廻密은 18세기 중엽 활약한 화승으로 상한작은 1745년 <나주 다보사多寶寺 괘불도>이며, 하한작은 1757년에 그린 <구례 화엄사 대웅전 삼신불도> 중 <비로나자불도>이다. 이 작품들의 수화사가 의겸이었으므로 희밀은 그 유파의 일원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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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실상사 독성도 實相寺 獨聖圖 Hermit Sage of Silsangsa Temple
    작성자/작성일
    두레박 24-05-07

    조선 1874년
    면에 색
    85.5×68.5
    금산사성보박물관

    왕실발원으로 조성된 실상사 독성도는 왕실의 옥체안녕玉體  安寧과 만세천추萬歲千秋를 기리며 순종이 태어난 1874년에 제작되었다.
    나반존자는 방형의 좌석坐席 위에 주장자挂杖子를 짚고 앉아 있다. 상단에는 흰 선으로만 구름을 표현했으며, 우측에는 패를 그려 넣어 화기를 기록하였다. 소나무나 암벽 등의 배경 묘사가 간결하고 색감이 강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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