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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11 건

소개
  1. 백양사 전각 배치도
    작성자/작성일
    두레박 24-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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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백양사 대웅전 白羊寺 大雄殿
    작성자/작성일
    두레박 24-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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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웅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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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강점기(1929년) 대웅전(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유리건판008215)


    백양사 대웅전은 1917년 만암 대종사가 백양사를 5창할 당시 건립되었다.
    이 건물은 역사가 오래되지는 않았으나 전통 건축 형태를 잘 간직하고 있다. 건물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대형 법당이며, 겹처마에 단층 팔작지붕을 얹은 다포집이다. 기단은 장대석을 2단으로 쌓아 조성하였고, 초석은 자연석이다. 기둥은 민흘림이며, 공포는 내 3출목, 외 2출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건물 내부에는 우물마루와 우물천장을 설치하였으며, 퇴칸에는 용 모양의 퇴량을 걸쳤다. 지붕 네 모서리에는 활주가 설치되었다. 한편 창호는 전면에 4분합 빗살문을 달았고, 측면과 후면 어칸에는 2분합 띠살문을 달았다. 건물 내에는 석가모니와 문수·보현 삼존이 봉안되어 있다.

    이 건물은 일제강점기 초기에 건립되어, 조선후기 다포 양식이 퇴화되는 모습을 엿볼 수 있다.
    특히 첨차살미의 최상단은 예리한 삼각형 모양에서 익공계로 변화하였으며, 쇠서도 매우 섬약해지고 있다. 이러한 특징은 조선후기 사찰 건물들에서 나타나는 공통된 경향으로서, 전면 기둥 간격이 모두 같은 것은 이 건물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3. 백양사 극락보전 白羊寺 極樂寶殿
    작성자/작성일
    두레박 24-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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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극락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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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강점기(1929년) 극락보전(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유리건판008217)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32호

    극락보전은 대웅전 남서쪽에 배치되어 있다.
    이 건물은 1574년(선조 7) 한응(또는 환응)스님이 조성하였다고 전하지만 관련 기록은 찾을 수 없다. 다만 「極樂殿佛糧禊序」에는 문정황후가 향을 하사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16세기 후반에 처음 조성된 것으로 파악된다. 또한 그 조성에 왕실의 지원이 있었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현재 건물은 1917년 만암스님이 사찰을 중창할 때 재건되었다.

    극락보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단층 맞배지붕 건물이며, 좌향은 동향이다.
    낮은 석조 기단 위에 주춧돌을 놓고 배흘림 기둥을 세웠으며, 창방 위에 평방을 놓고 기둥과 기둥 사이에 공포를 짜 올렸다. 공포는 안쪽이 3출목, 바깥쪽이 2출목인 다포양식이며, 架構는 2고주 7량이다. 천정은 우물천정이며, 바닥에는 우물마루를 깔았다. 문은 정면 가운데 칸에 빗살 3분합문을, 양 옆칸에 ‘井’자살 3분합문을 달았다. 맞배지붕이면서도 다포집으로 가구를 한 절충식 건물이다.

    극락보전 내에는 장성 백양사 극락보전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이 봉안되어 있다.
    또한 현재 성보박물관에 봉안되어 있는 1775년 작 아미타회상도는 극락보전 후불화였다.
    현재는 1995년에 새롭게 조성된 후불화가 전각 내에 봉안되어 있다.

    장성 백양사 극락보전 목조아미타여래좌상 長城 白羊寺 極樂寶殿 木造阿彌陀如來坐像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289호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은 극락전 주불로서, 높이 208㎝에 달하는 대형 불상이다.
    2005년 발견된 복장물에 따르면 1741년(영조 17) 명부전 시왕상 중수와 함께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최근 불상 대좌에서 1607년 11월 조각승 玄眞스님에 의해 불상이 조성되었다는 묵서가 발견되어, 임진왜란 직후에 제작된 것이 밝혀졌다. 이 불상은 장대한 규모와 긴 허리, 원만한 얼굴과 당당한 어깨, 신체 굴곡을 따라 자연스럽게 처리된 옷주름, 안정된 자태 등에서 현진스님 작품의 특징을 드러내고 있다. 이 불상은 제작시기와 대상, 발원 내용 등을 통해 임진왜란 전후 불상의 변화 양상을 밝혀낼 수 있는 중요한 사례이다. 이 불상은 2020년 4월 29일 국가지정문화재인 보물로 승격 지정이 예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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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성 백양사 극락보전목조아미타여래좌상 대좌 조성기
    萬曆三十五年丁
    米中寒日造成之記
    願我 佛像造成之
    然故先王先后祖宗列
    位仙加方成佛道坐
    蓮臺
    主上三殿壽萬歲
    畵員秩 持殿
    玄眞比丘 暉正比丘
    休逸比丘 飯頭惠貟比丘
    文習比丘 熟頭應祥比丘
    別座宗道比丘
    化主双願比丘
    1607년 정미년 11월,
    불상을 조성함으로써 돌아가신 선왕과 선왕후를 비롯한
    왕실의 조상들이 성불하고
    (극락세계에 왕생하여) 연화대좌에 앉기를 바랍니다.
    주상전하, 왕비전하, 세자저하의 만수를 기원합니다.

    장성 백양사 극락전 아미타회상도 長城 白羊寺 極樂殿 阿彌陀會上圖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91호
    백양사 극락보전에 봉안되어 있던 후불화로서, 1775년에 제작된 대형 아미타불화이다.
    이 그림은 원래 극락보전 목조아미타불좌상 후불벽에 봉안되어 있었으나, 1994년 도난당했고, 2006년에 회수한 이래 현재와 같이 박물관에 봉안되었다.
    그림은 폭 23.8-58.4㎝의 비단 5폭을 이어 가로 234.2㎝, 세로 338.7㎝의 화면을 이루었으며, 목조아미타여래좌상과 함께 전각에 비해 규모가 상당히 큰 편이다. 화면은 상·하 2단으로 나누어, 상단에 아미타여래좌상과 4보살, 나한, 팔부중 2구가 배치되었고, 하단에는 사천왕과 4보살이 있다. 이 불화는 아미타여래를 중심으로 좌우대칭 구도를 이루고 있지만, 각 인물들이 바라보는 곳이 모두 다르고 서로 대화하듯 자유롭게 그려져 있다. 색채는 대부분 다홍빛 적색과 연녹색을 위주로 하여 18세기 후반 불화의 색감과 수화승 嗇旻스님의 화풍을 잘 드러내고 있다. 다만 여러 부분에서 후대 덧칠 흔적이 확인된다.
    그림 하단의 화기는 거의 손상 없이 완전하다. 화기에는 “乾隆四十年……金魚秩白月大宗師嗇旻 祐隱 片手戒憲 淨訔 宥閑 斯定”이라 기록되어 있어, 1775년이라는 제작 연대와 嗇旻스님의 작품임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아미타회상도 腹藏囊에 들어 있던 발원문에는 ‘煥月堂 旻肅이 돌아가신 어머니와 외조모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며 단독으로 시주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그림은 ‘호남불화’의 대표자인 義謙스님이 이룬 18세기 전반의 화풍을 계승한 色敏스님의 대표작이자 만년작으로서, 의겸스님의 화풍이 엿보이면서도 간략화된 구도, 역삼각형 얼굴형, 적·녹색 위주의 세 가지 색채 흐름을 보여주는 점 등에서 색민스님의 화풍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 그림은 색민스님의 만년기 작품 경향을 파악할 수 있는 작품이자, 의겸스님의 맥을 가장 잘 계승한 18세기 호남불화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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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백양사 사천왕문 白羊寺 四天王門
    작성자/작성일
    두레박 24-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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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44호

    백양사 사천왕문은 사찰 중심영역으로 진입하기 위한 관문에 해당하는 위치에 있다.
    이 건물 역시 대웅전과 함께 1917년 만암스님의 중창 때 건립된 것이다. 건물은 동향으로 건립되어 있어 남향인 대웅전과는 좌향이 완전히 다르다.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2칸이며, 지붕은 풍판을 지닌 겹처마 맞배지붕이다. 장대석 기단 위에 막돌 초석을 얹고 기둥을 세웠고, 기둥 위에는 2익공을 두고 외1출목의 행공첨차를 지녔다. 이는 익공식과 주심포식을 병용한 절충식이라 할 수 있다. 창방 위 구조는 무고주 5량이다. 중앙 어칸은 사찰로 통하는 문으로 사용하며, 좌·우 협칸에는 사천왕을 각 2구씩 봉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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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백양사 쌍계루 雙溪樓
    작성자/작성일
    두레박 24-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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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쌍계루는 1351년 각진국사가 처음으로 창건하였다.
    이때 누각 명칭은 “橋樓”라 하였으나, 이후 1370년 청수스님이 중창하면서 圃隱 鄭夢周에게 기문을 부탁하여 ‘두 계곡이 만나는 곳에 있는 누각’이라는 의미로 “雙溪樓”라 하였다. 쌍계루는 조선 전 시기에 걸쳐 백암산 내 명소로 자리매김하였으며, 유·불교를 막론하고 많은 문인들이 이곳을 찾아 시를 짓거나 글을 남겼다. 쌍계루 내 현판에 적힌 많은 시문들은 조선시대 이 누각의 명성을 입증하는 것이다. 특히 쌍계루에 관하여 포은 정몽주 이외에도 목은 이색, 삼봉 정도전이 기문을 남겼으며, 면앙정 송순, 노사 기정진, 최익현, 서옹스님 등이 남긴 시문이 현판으로 전하였다.
    쌍계루는 여러 차례에 걸친 사찰 중건 시 중수를 거듭하였으며, 1950년 6·25 전쟁으로 백양사가 피해를 입었을 때 함께 소실되었다. 현재의 쌍계루는 1986년에 건립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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