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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1. 백양사 팔층석탑(불사리탑) 八層石塔(佛舍利塔)
    작성자/작성일
    두레박 24-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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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사리탑 및 팔정도 석주


    이 탑은 대웅전 뒤뜰에 있으며, 1924년에 건립되었다.
    이 탑은 八正道를 상징하기 위하여 8층으로 조성하였으며, 탑 내에는 근대 불교계 지도자이자 민족대표 33인 중 한명이었던 龍城스님이 간직하고 있던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봉안되어 있다. 기단부는 3중이며, 최상층 기단은 원기둥 4개를 세워 탑신부를 받치도록 하였다. 탑신석에는 우주를 비롯한 별도의 조각이 없으며, 옥개석은 옥개받침이 얕고 전체적으로 납작한 형태이다. 상륜부는 보주형이다. 이 탑의 뒤편에는 만암스님이 비문을 쓴 사리탑비가 건립되어 있으며, 탑 정면에는 팔정도의 각 단어가 새겨진 석주가 4주씩 나란히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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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팔정도 석주(서) / 팔정도 석주(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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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사리탑 및 탑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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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사리탑 / 불사리탑비

  2. 백양사 승탑원 僧塔院
    작성자/작성일
    두레박 24-05-08

    백양사 성보박물관과 마주보는 계곡 동편 언덕에 입지한다.
    승탑원은 원래 쌍계루와 마주보는 곳에 있었지만(구 부도전) 2010년 성보박물관 조성 및 주변 정비 시 현재 위치에 재조성하였다. 현재 승탑원에는 曼菴堂塔을 비롯하여 無價堂塔, 慕雲堂塔, 碧虛堂塔, 影月堂塔, 棲雲堂靈骨塔, 지백당탑 등이 있다. 승탑은 모두 소요대사탑(1650년) 이후에 조성되었으며, 현대에 이르기까지 백양사를 거쳐가신 스님들의 사리탑들이다. 한편 서산대사 제자로서 백양사 21세 주지를 지낸 벽송대사탑을 비롯한 몇몇 승탑은 도난당했다.
    승탑 가운데 조선후기-1950년대 이전에 건립된 오랜 승탑들은 크게 두 가지 형식으로 나뉜다. 하나는 범종 형태를 띤 소요대사탑을 그대로 모방한 승탑군으로서, 만암당탑, 영월당탑, 모운당탑 등이 이에 속한다. 다른 일군은 방형 옥개석과 구형 탑신석을 갖춘 형식으로서, 당호가 없는 승탑 가운데 몇 예가 이에 속한다. 승탑원 내에는 승탑과 함께 건립된 많은 탑비들과 함께, ‘白巖山白羊寺紀蹟碑銘’ 등의 사적비도 함께 봉안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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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승탑원과 성보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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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백암산
    작성자/작성일
    두레박 24-05-08

    장성 백양사 백학봉(730m)은 장성군 북하면 약수리 산115-1번지 외 30필지 일원이며, 총 면적은 584,364㎡이다.
    백학봉은 백양사 대웅전과 쌍계루에서 바라보는 숲과 함께 백학봉 암벽 경관이 아름다워 2008년에 명승 제38호로 지정되었다. 이곳은 예부터 ‘대한 8경’의 하나로 손꼽힐 만큼 이름난 명승지이며, 정도전, 이색을 비롯하여 정몽주, 김인후, 정철, 송순 등이 이곳을 탐방하면서 백학봉과 쌍계루의 풍광을 읊은 시와 기문이 전하고 있어 역사적 가치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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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승 제38호 백학봉 범위


    식생환경

    산림청에서 제공하는 산림공간정보서비스에서는 백양사와 백암산 일대 임상이 활엽수군락과 침엽수군락, 침활혼효림으로 확인된다.
    산림공간정보서비스 임상도 내 분포 수종은 신갈나무군락, 기타활엽수, 기타참나무군락 등이 확인되고 있어 백암산 내 식생은 활엽수가 우점한다. 임상도에는 백양사 북쪽 임상이 침엽수군락으로 표시되어 있으나, 현장에서 확인한 결과 이 지역의 임상은 침엽교목인 비자나무군락으로 파악되었다.

    백암산은 전라남도 장성군과 전라북도 순창군, 정읍시 경계에 있으며, 입암산(626m)과 함께 전라남도 북하면에 위치하고 있다.
    이 산은 높이 741.2m로 노령산맥에 속하며, 학봉-사장봉-상왕봉 등의 기암고봉과 절벽, 그리고 울창한 수림이 조화를 이루고 있어 경치가 뛰어나다. 백암산과 입암산은 장성군에서 자연이 가장 잘 보존되어 있는 곳으로서 전라북도 내장산과 함께 1971년 내장산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백암산 남사면 계곡에는 백양사가 있고 이곳 주변은 비자나무 자생 북방한계 지역으로 비자나무숲(천연기념물 제153호)이 있다. 백암산 숲은 1960년대 이후 조림 또는 산림 갱신으로 소나무림 또는 소나무-참나무의 혼효림이 차지하고 있다. 백암산 계곡부와 백양사계곡, 남창골에는 갈참나무, 굴피나무, 까치박달, 개서어나무, 굴참나무, 느티나무, 비목나무, 당단풍나무, 고로쇠나무, 이나무, 층층나무, 곰의말채, 물푸레나무 등으로 이루어진 낙엽활엽수림이 잘 보존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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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상도(산림공간정보서비스)


    백암산과 백양사 주요 식생

    굴거리나무(Daphniphyllum macropodum)
    굴거리나무는 우리나라, 중국, 일본 등에 분포 생장한다.
    우리나라에서는 남쪽 해안지대와 제주도, 전라도 내장산, 백운산 등 따뜻한 지방에서 자라고 있다. 이 나무는 교양목(交讓木)이라고도 불리는데, 자리를 물려주고 떠난다는 뜻으로 새잎이 난 뒤에 지난해의 잎이 떨어져 나가는 특성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굴거리나무는 백암산 넓은 지역에 분포 생장하고 있고, 내장산에도 군락을 이루며 생장한다. 이 굴거리나무군락은 굴거리나무가 자생하는 북방 한계지역이라는 학술적 가치가 인정되어 1962년 천연기념물 제91호로 지정·보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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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장산 굴거리나무 / 내장산 굴거리나무군락(문화재청)


    비자나무(Torreya nucifera)
    비자나무는 내장산 이남과 일본 등에서 분포 생장한다.
    주목과에 속하는 난대성 상록침엽교목으로 높이 25m, 지름 2m 정도까지 자라며 암나무와 수나무가 따로 있다. 이 나무는 수형이 아름다워 관상용으로 많이 이용되며, 열매는 구충제 및 변비 치료제나 기름, 감기약 등으로 사용된다. 또한 비자나무의 목재는 최고급 바둑판 목재로 이용될 정도로 목질이 좋다.
    백암산과 백양사 뒷산에 있는 비자나무숲은 산115-1번지와 산11번지 일원이며 총 면적은 710,697㎡이다. 비자나무가 생장 북방한계선인 이곳에 숲을 이루고 있고, 비자나무 생태와 비자나무 열매를 의약재료로 사용한 생활문화, 생물학적 가치가 높은 것이 인정되어 1962년 12월 7일 천연기념물 제153호로 지정되었다. 백양사를 중심으로 북방 한계선인 백암산 일대(300ha)에 비자나무 5,000여 그루가 숲을 이루고 있다. 비자나무숲이 천연기념물로 지정될 당시에는 비자나무가 자라는 가장 북쪽에 있는 숲이라고 해서 그 가치를 인정받았으나, 현재 내장산에서도 비자나무가 발견된다고 한다.
    백양사 비자나무 숲은 고려 말 고종(재위 1213-1259) 때 왕사(王師)를 지냈던 각진국사(覺眞國師)가 뒷산에 한 그루씩 심은 나무가 스스로 씨앗을 내려 숲을 이룬 것이라고 한다. 또한 1970년대까지 스님들이 당시 유일한 구충제였던 비자나무 열매를 거두어 마을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다고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장성현 ‘토산(土産)’으로 생강, 모시, 대, 감, 석류와 함께 비자가 언급되었고, 「장성군읍지(長城郡邑誌)」에는 ‘물산(物産)’으로 모시, 대, 석류, 매실과 함께 비자가 언급되었다. 그리고 5,000여 그루의 비자나무에서 열매가 약 20섬 정도 수확되었다고 한다. 이처럼 비자나무는 장성지역 주산물이었고, 조선중기 이전부터 백암산에서 생장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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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양사와 비자나무숲 / 약사암 입구 비자나무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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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연기념물 제153호 비자나무숲 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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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사암 입구 비자나무군락


    매화나무(Prunus mume)
    매화나무는 낙엽활엽교목으로 중국이 원산지이고 우리나라 중부이남 지방에서 잘 자라지만 중부 지방에서도 분포 생장하고 있다.
    백양사 우화루와 우화루 남쪽 담 사이에는 백양사 ‘고불매(古佛梅)’로 불리는 매화나무가 생장하고 있다. 이 매화나무는 수령이 350년이 넘고 3월 말부터 4월 초까지 아름다운 담홍색 꽃과 은은한 향기를 피우는 홍매(紅梅) 종류로서, 2007년 10월 천연기념물 제486호로 지정·관리되고 있다. 고불매는 1700년 경부터 이곳에서 북쪽으로 100m 정도 떨어진 옛 백양사 앞뜰에 심어져 있었고, 1863년 사찰을 현재 위치로 옮기면서 홍매와 백매 한 그루씩도 같이 옮겨 심었다고 한다. 이후 백매는 고사하였고 홍매만 남았다. 1947년 만암대종사가 부처님의 원래 가르침을 기리자는 뜻으로 백양사 ‘고불총림(古佛叢林)’을 결성하면서 ‘고불매’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부르게 된 나무로서 역사성과 학술적 가치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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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양사 고불매 / 백양사 고불매와 백학봉


    갈참나무(Quercus aliena)
    갈참나무는 동아시아 남부, 중국, 대만, 일본 등지에 분포하며, 우리나라에서는 온대림을 구성하는 나무이며, 해발고도 50-1,000m에서 자생한다.
    백양사로 진입하는 도로에 갈참나무가 군락으로 생장하고 있다. 이 중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갈참나무가 있는데, 이 나무는 수령이 700년으로 생물학 자료로서 천연기념물 지정 가치가 높다.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영풍 병산리 갈참나무(수령 600년)만 천연기념물로 지정·보호되고 있다. 따라서 백양사 갈참나무군락과 가장 오래된 백양사 입구의 갈참나무는 백양사와 함께 이어온 역사성과 생물학·생태학 가치가 있으므로 추후 천연기념물로 지정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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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양사 입구 갈참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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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양사 구 부도전(舊 浮屠殿)
    작성자/작성일
    두레박 24-05-08

    전라남도 장성군 북하면 약수리 산115-1


    구 부도전은 묘련암 서쪽에 인접해 있으며, 쌍계루와 정면으로 마주보고 있다.
    이곳은 남향(S-20°-E) 평탄지이며, 2010년도까지는 소요대사탑을 비롯한 승탑을 봉안하였던 곳이지만 현재는 공터로 남아 있다. 평탄지 규모는 36.4×14.2m이며, 약 2단 가량으로 구획되어 있다. 평탄지 곳곳에는 승탑 기단이나 적심으로 사용하였던 석재들이 있다.
    한편 이곳은 묘련암과 불과 30m 가량 떨어져 있어, 과거에는 묘련암 영역에 포함되어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오랜 기간 동안 부도전으로 사용되어 왔기 때문에 건물지 등 유구 흔적은 노출되어 있지 않으나, 평탄지 내에 다량의 기와편이 산포되어 있다. 평탄지 내에서 확인된 유물은 어골문 와편과 조선후기 수파문 기와편 등이며, 그 양상은 묘련암과 유사하다. 이곳은 1864년 백양사가 현재의 위치에 건립되기 이전 사찰의 중심 영역이 있던 곳으로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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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백양사 중창기
    작성자/작성일
    두레박 24-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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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93년(태조 2)에 작성된 백양사 소장의 한 문헌에 의하면 조선 초 백양사의 사세를 짐작케 한다.

    즉, 「白嵓寺傳帳受」의 백양사의 전각을 주제별로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즉, 丸器庫, 漆器庫, 鋪陳庫, 布貨庫, 穀食庫, 燈油寶庫, 文書庫, 間閣庫, 佛寶庫, 法寶庫, 佛藏庫, 鍮銅鐵庫 등으로 나누어 운용하였던 듯하다. 백양사 ‘灯油寶·靜庵和尙忌日寶·大藏寶·長年寶·長灯寶’라는 기록에 의하면 1407년 무렵에 寺院寶가 운영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각진국사 복구와 조카인 文貞公 李嵓(1297-1364)이 발원하여 사재를 들여 대장경을 봉안하고 가족의 長年寶와 大藏寶, 忌日寶의 비용이 모두 300석으로 운용되었다고 한다.

    그 가운데 「間閣庫」에 의하면 태조대 당시 백양사의 전각은 彌陀殿(3칸)과 大藏殿(3칸), 鐘樓殿(3칸), 三寶(2칸), 大稤(3칸), 監院房(多), 東司(2칸), 僧堂(5칸), 沙門(1칸), 上室(6칸), 侍者寮(3칸), 寮連(12칸), 客寮(3칸), 㕑舍(3칸), 食堂(3칸), 洗閣(3칸), 樓橋(3칸), 中行廊(3칸), 南行廊(10칸), 砧家, 馬厩(3칸) 등이었다. 1393년(태조 2)에는 76칸 이상으로 11세기에 비해 크게 감소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우리 사촌형인 전에 兩街에 있었던 中晧가 傳住하면서 대중을 거느리고 作法하며 祝上하옵던 때 慈恩宗의 中德 戒天이 長城邑에 원래 속해있던 資福寺는 버려두고 한번 휴식을 취할 정도의 거리에 있는 同 白巖寺를 자복사에 求望하여 關字를 함부로 받아 가지고 내려와서 前의 寶長과 色掌들이 모두 쫒아보내고 同 寶長 등의 임의로 임명하니 各村에 資福을 정하는 뜻에 합당하지 않습니다.……

    위의 기록에 따르면 백암사는 固城 李氏 文貞公 杏村 李嵒(1297-1364) 내외손들의 원당이었는데 1407년 무렵 백양사의 경영권이 慈恩宗의 中德 戒天 등에게 넘어갔다. 이에 고성 이씨 가문에서는 장성 감무에 이를 철회해 달라고 요청하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당시 백양사는 資福寺가 되었다고 하나, 국가에 의해 지정된 것은 아닌 듯하다. 세 달 후인 1407년(태종 7) 12월 2일에 여러 읍의 자복사를 지정하였는데 장성의 자복사로 백양사가 국가 지정 자복사가 되지 못했던 것 같다. 아마도 읍에서 지정한 자복사가 아니었을까 한다.
    그로부터 2년 후인 1409년에는 제4차 전장법회가 개최되었다. 主法 前興天社主 悟世如幻圓照無 證道利生 大曹溪宗師 眞應尊者 熙嚴의 주관 하에 大維那 普智圓明大禪師 覺圓, 記事 熙演·海證, 首堂佐 信禪 등이 실무를 맡았다. 覺圓이 기록한 「白巖寺 轉藏法會 堂司榜」에 의하면 堂頭 즉, 주지는 前兩街都僧錄大師 慈慧圓融大師 晦極과 華嚴契內 前龍泉社主 法蓮과 더불어 왕실과 만민을 위한 서원을 세우고 전장법회를 개최하였다. 主法 前 興天社主悟世如幻圓照無礙證道利生大曹溪宗師 真應尊者 熙嚴을 위시하여 우바새․우바이 등 속인들도 대거 참여하였다. 晦極은 승록사의 최고 승직인 兩街都僧錄을 지낸 고승이며, 전장법회를 주관한 책임자는 전 흥천사주 真應尊者 熙嚴이었다. 이와 같이 조선 건국 후 抑佛崇儒 시책이 단행되는 분위기 하에서도, 백양사는 불교의 사세를 진작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그 무렵 中皓는 호가 晦堂으로, 백양사 주지로 있다가 1426년(세종 8)무렵 천태종 각림사 주지에 재임하였다. 중호는 1426년(세종 8) 천태종이 선종에 통합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기에 判禪宗事였다. 1445년(세종 27) 무렵 선종판사였던 松隱 學蒙은 고려 말 시중 杏村 李嵓 (1279-1364)의 외종손이었으며, 이암의 외현손인 高第 道庵과 白奄寺에 주석하였다. 즉, 중호 이후 선종판사는 中演(세종 15년 무렵), 行乎(세종 20년 무렵), 卍雨(세종 25년 무렵)이며 이후 학몽이 선종판사였다.
    또 경기도 監司에게 유시하기를,……또 驪興 神勒寺에는 文度公의 影幀을 모셨는데, 의지 없는 雜僧들이 잘 수호하지 못하여 형편 없이 되었다기에, 이제 전라도 長城 白巖寺의 승려 學蒙을 들어가 살게 하였으니, 잘 安接시켜 주게 하라.
    이와 같이 고려 말 이존비의 집안인 고성 이씨 가문에서는 수선사 제13세 사주 각진국사 복구를 비롯한 고승을 배출하였으며, 조선 초까지 이어졌다.

    당대의 문인 사가정 서거정이 학몽의 족질이기도 하였는데, 학몽의 수제자인 道庵도 고성 이씨 가문 출신이었으며, 도암의 문도는 守伊이다. 도암은 서거정(1420-1488)보다 다섯 살 아래이므로 1425년 출생하였다. 따라서 여기서의 守伊는 涵虛堂 己和(1376-1433)와는 다른 인물이다. 아울러 도암 역시 후대에 백양사를 중창한 道巖 印正(1805-1883)과 다른 인물이다. 도암은 李輯, 서거정과 함께 행촌 이암의 외현손이었으며, 楊州 佛巖里 사람인데, 서거정의 別業 또한 그 이웃에 있었다.

    백암사는 高麗 侍中 杏村인 李文貞公의 願刹인데, 그의 아들 平齋 文敬公과 손자 容軒 國老가 각기 先人의 뜻을 이어서, 출가한 자손 중에 操行이 있는 자를 가리거나 승려 가운데 명망이 있는 자를 간택하여 이 절을 주관하게 함으로써 서로 전하여 수호해 온 지가 이미 100여 년이 되었다. 지난번에는 행촌의 外曾孫인 判禪宗事 松隱 蒙大師가 이 절을 주관하였고, 그의 高弟가 바로 道庵 成上人인데 松隱이 道庵에게 이 절을 전하였으니, 道庵도 山門에서 宿望이 있는 사람이다. 그가 이 절에 머무른 지 지금 거의 30여 년에 이르는 동안, 道風을 크게 선양함으로써 명성 높은 고승들이 마치 비린내를 좋아하여 달려드는 개미들처럼 도암을 歆仰하여 서로 다투어 달려왔다.

    인하여 생각하건데 서거정이 예전에 興天寺로 松隱을 찾아뵈었더니, 松隱이 서거정을 族姪이라 하여 정성껏 대우해 주고 이어 松隱에 대한 說을 지어 달라고 부탁하였는데, 松隱은 다시 白巖寺로 가게 되었다. 그 후 서거정이 설을 지어서 도암을 통하여 부쳐 드렸더니, 뒤에 松隱이 서거정에게 이르기를 ‘그대의 설이 老僧의 기본 취지에 잘 부합한다.’ 하고는 道庵을 돌아보고 이르기를 ‘반드시 기록해 놓아야 한다.’고 하였다. 그 후 얼마 안 되어 松隱이 示寂하였으므로 지금은 松隱을 생각만 할 뿐 만날 수가 없으나, 道庵을 만나니 애오라지 스스로 위로가 된다.
    당시 백암사의 주지는 成萬德이었는데 그 다음의 주지직을 도암이 맡았다. 도암은 田上人과도 친밀한 사이였으며, 도암의 도반이 도명이 아닐까 한다.

    그런데 洪鍾應(1783-?)이 지은 「極樂殿佛糧禊序」에는 문정왕후가 향과 축문을 써서 4대 왕의 묘호 및 정승, 國舅, 공주 순으로 극락보전에 위패를 두어 승려로 하여금 주장하게 하였다. 문정왕후(1501-1565)는 1544년 인종이 즉위하면서 왕대비가 된 이후 백양사에서 國魂祭를 설행하였다. 그 후 백양사에서는 왕실을 위한 축원이 이루어졌다.

    백양사에는 조선후기 불교를 중흥한 청허 휴정(1520-1604)의 문도들이 주석하였다. 청허의 문도인 소요 태능, 진묵 일옥, 기허 영규 등이 바로 그들이다. 逍遙 太能(1562-1649)은 ‘13세 때 백양산에서 놀다가 物外庵에 와서 속세를 벗어날 뜻을 가졌다. 그리하여 性眞大師에 의하여 머리를 깎고 經律을 배울 때에는 그 뜻을 철저히 밝혔다.’고 한다. 소요는 白羊山 물외암의 性眞大師로부터 구족계를 받고 출가하였다. 또한 雪潭 自優(1769-1830)의 「夢行錄」에 의하면 소요는 만년에 정토사 香閣에 글씨를 남겼다고 한다. 청허 휴정의 문도인 震黙 一玉(1562-?)은 임진왜란 직전에 백양사 조실로 있었다는 설화가 전하고 있다. 이 소요와 진묵은 임진왜란시 의승으로 참전하지 않고 수행으로 일관하였지만, 白巖寺 僧 處能과 영규 등이 의승전에 참가하였다고 한다.
    특히 1592년(선조 25) 7월20일 長城 南門(현재의 북일면 오산) 의병 봉기시 백암사의 승려들도 참전하였다. ????남문창의록????에 따르면, 그들은 1592년 금산의 패전 소식을 듣고 격문을 낸 김경수(1543-1621)에 호응하여 봉기하였다. 「호남 오산 남문창의비」에는 의승장 處能·啓默·戒閒·德仁·慈惠·義寬·處閒·學仁·惠仁 등 9명이 기록되어 있다. 장성 남문의병에는 장성 白岩寺·修道寺·鷲棲寺, 진원 下淸寺, 고창 文殊寺, 흥덕 烟起寺, 담양 玉泉寺 등 장성 인근 사찰의 승려 105명이 참전하였다. 1592년 7월 25일에는 장성 白巖寺 處能을 비롯한 修道寺 啓默, 鷲棲寺 戒閑, 진원 下淸寺 德仁 등이 장성 의병청에 합류하여 참전하였다.

    백양사 소장 문헌 ????白羊寺四明日薦靈戰亡錄????(불기2957년 경오 4월 작)에 ‘義兵僧將 通政大夫 靈圭, 義兵僧將 通政大夫 希黙, 義兵 僧將 印眞’이 권율, 이순신, 조헌 등 순국 의병과 더불어 기록되어 있다. 이에 의하면 靈圭와 希黙, 印眞 등 의승장을 비롯한 의승들은 백양사와 내장사 등에서 참전하였던 것이다.

    白羊寺雲門庵創修事蹟 「第1重刱記」에 의하면 1597년 왜군이 백양사 근처인 笠巖鎭에 침략해 오자 이에 항전한 듯하다. 이 전란으로 인해 백양사가 훼손되어 1624년까지 28년간 폐허로 남아 있었다. 그 뿐만 아니라 선조대 무렵에 기근과 역병이 돌아 민들이 많이 죽자, 관찰사가 조정에 보고해 백양사에서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이는 백양사 뒤의 학바위에서 고려 때부터 조선 중종 때까지 천제를 지냈기 때문인 듯하다.

    또한 소요 태능의 高師인 如如子 知白 繼愚가 1627년에서 1631년(인조 9)까지 백양사 운문암을 중창하였다. 여기에는 인조의 어머니인 仁獻王后의 대시주로 이루어졌다. 그런 인연 때문에 백양사 운문암에는 阿彌陀九品會圖와 불상 그리고 인헌왕후의 영정이 봉안되었다.
    그 후 백양사는 1857년(철종 8)에 대원군의 봉산원당이 되었다. 封山이란 胎室이 있는 산 주위에 禁標를 세우는 것이다. 봉산은 왕이나 왕비의 陵墓를 보호하고 胎를 묻기 위한 胎封封山과 栗木封山, 香炭封山 등으로 나뉘며, 원찰이 있는 산은 거의가 봉산으로 지정되었다. 백양사에도 1856년(철종 7)부터 1887년(고종 24)까지 10여 차례에 걸쳐 完文과 節目 등이 발급되어 僧役이 減役 및 免役 되었다. 백양사는 封山願堂으로서 四山에 禁標가 세워져 보호받음으로써, 벌목 금지 조치까지 내려졌다.
    한편 백양사는 지금의 쌍계루 뒤쪽에 자리하고 있었는데, 1864년(고종 1) 홍수로 사찰 전체가 휩쓸려 내려가면서 道巖 印正(1805-1883)이 현재의 자리로 옮겨 재건하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