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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천은사 부도전
    작성자/작성일
    두레박 24-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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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도(浮屠)는 부두(浮頭), 불도(佛圖), 포도(蒲圖)등으로 다양하게 표기되기도 합니다. 어원적으로는 부처님을 뜻하는 인도의 옛말 붓다(Buddha)에서 유래되었다고도 하고 탑을 뜻하는 스투파에서 나왔다고도 합니다. 일반적으로 부도라고 하면 스님들의 사리를 모신 승탑을 의미합니다.우리 나라에 불교가 들어온 뒤부터는 주검을 화장하여 그 유골을 거두는 장골(藏骨)이라는 불교식 장제가 널리 유행하게 되었습니다. 그에 따라 부도가 건립되기 시작하였으며, 특히 통일신라시대에 선종이 크게 일어남에 따라 스님들의 지위가 높아져 불탑처럼 스님의 부도도 많이 건립하게 되었습니다.부처님의 진신사리나 부처님을 상징하는 불경과 불상 등 법신사리를 봉안한 불탑은 가람의 중심이 되는 곳에 건립하는 반면에 승탑인 부도는 사찰 주변의 호젓한 곳에 석비와 함께 조영되었습니다.
    부도는 불탑과 구분하여 단층의 건물 모양을 하고 있으며 고려시대부터는 석등이 함께 조성되기도 하였습니다. 부도는 기본적으로 팔각원당형과 종형 또는 복발형의 두 가지 형식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구성요소를 살펴보면 불탑과 마찬가지로 기단부, 탑신부, 상륜부의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상륜부는 불탑보다 간단하게 구성되어 있습니다.
    탑비(塔碑)는 고승의 부도에 부속되어 석조로 조영되는 것으로써 일반적으로 대왕의 석비나 묘비와 그 형태는 동일하나 불교의 유물인 까닭에 그렇게 부르고 있습니다. 탑비에는 고승의 일평생 행적이 건립 년월일과 함께 새겨 지고 있어, 그 비문의 내용이 역사적으로 귀중한 사료가 되고 있습니다. 또한 서체는 금석학의 입장에서 중요한 연구자료가 되기도 한다. 탑비는 맨 밑에 구부(龜趺)가 조각되고, 그 위에 비신(碑身)이 세워지며, 상부에는 용 머리가 구름과 함께 화려하게 조각 장식되어 집니다.
    천은사 부도전은 일주문을 들어서기 전 좌측(향우)으로 약간 언덕인 산비탈에 석비(石碑) 2기와 함께 10여기 부도가 집중되어 있습니다. 모두 조선시대 후기에 속한 것들입니다. 부도가 조사를 숭배하고 이를 기리는 문손들의 공경심에서 우러나온 작업이라면 통일 신라시대 이후 계속하여 이어졌을 법도 한데 고려중기 이후 조선초기까지의 기간이 공백으로 남아있으니 이점에 대해서는 별도의 과제로 남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범란당 부도
    연화문을 엷게 조식한 원형의 대좌에 상후하박인 고복형의 탑신을 얹어놓았다. 옥개석은 방형으로 상면에는 전후좌우 사방에 세줄의 기왓골형을 조각하였으며 그 위에 보주를 표출하였다. 탑신 전면에는 「범난당영재탑(梵鸞堂英宰塔)」(자경 7cm)이라 음각명문하였고 뒷면에는 「불기이구오육년경향법려입(佛紀二九五六年京鄕法侶立)」(자경 3.7cm)이라 썼다.위 명문에 의하면 이 부도는 1929년에 세운 것임을 알 수 있다.(총고 128cm, 대좌직경 48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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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담당 부도
    이 부도는 천은사부도군(일주문옆)이 있는 곳에서 남쪽으로 약 100m 떨어진 숲속에 위치하고 있다. 천은사 부도중에서는 가장 규모가 큰 부도이다. 대좌는 원형인데 앙연이 조식되었으며 그 사이에 기둥을 세워 8면을 구분하였다. 탑신은 타원형인 고복형으로 하단에 예리한 꽃잎을 장식한 16엽연화문이 조각되었다. 역시 탑신 상단부에도 16엽연화문이 엷게 장식되었다. 탑신 전면에 「용담당(龍潭堂)」(자경 15cm)이라는 당호를 새겨놓았다. 상륜은 별석으로 하여 노반과 보륜·보주를 올려놓았다.(총고 170cm, 대좌직경 75cm)
    부도 바로 앞에는 이 부도의 주인공을 알려주는 석비가 있다. 비석크기는 총고 93cm, 폭 377.7cm, 두께 10.4cm로 전면에 「용담대화상사리탑(龍潭大和尙舍利塔)」(자경 6.3cm)이라 명문하였으며 뒷면에는 「숭정기원후임우십월일입 합사 전영 도감진초 별좌포성 주지 책영 홍주 차준 환척(崇禎紀元後壬午十月日立 合寺 全營 都監震楚 別座抱性 住持 策英 洪主 此俊 幻倜)」라 음각하였다.
    위 연대는 석비가 중앙에 균열되어 확실치는 않으나 "삼(三)"자가 결락된 것으로 보이는데 위"삼(三)"자가 확실하다면 위 연대는 1762년(임우, 영조38)으로 보아 틀림없을 것같다. 왜냐하면 남원출신인 "용담당"의 입적연대가 1762년이기 때문이다. 용담은 조관스님(1700∼1762)의 법호(法號)로서 전라남도 남원출신이며 19세기 감노사(지금의 천은사)에서 삭발하고 영·호남의 명사들을 찾아 선(禪)과 교(敎)를 두루 섭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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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해당 부도
    기단부에 중석이 없는 앙·복련이 장식되고 그위에 유곽이 없는 9개의 유듀만이 표출된 고복형의 탑신이 올려져 있다. 상륜은 앙련이 조식된 보주가 안치되어있다. 전면)에 「영해당정원지탑(影海堂正源之塔)」(자경 5cm)이라 명문하고 후면에는 「불기이오삼사년이월일(佛紀二五三四年二月日)」(자경 4cm)이라 썼다. 이 부도는 최근에 세운 것이다. (총고 170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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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印大부도
    비교적 잘다듬어진 8엽의 앙연을 조식한 원형의 대좌 위에 고복형의 탑신을 얹어놓았으며 그 위로는 4각형의 넓고 큰 옥개석을 올려놓았다. 옥개석 상면으로는 우동마루가 있고 그 사이에 기왓골이 조식되었다. 상륜부는 별석으로 하여 노반과 복발·보륜·보주를 장식하였다. 탑신에 당호의 명문이 마모되어 그 주인공이 누구인지를 알 수가 없다. 조성시기는 조선후기로 추정된다. (총고 170cm, 대좌직경 66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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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당대사(性堂大師) 부도
    비자연석을 약간 다음에 대좌로 삼고 그위에 별석으로 탑신을 올려놓았다. 탑신은 하후상박형의 석종형인데 하단에 두줄의 양각띠를 두르고 상단은 네군데에 유곽과 그 안에 9개의 유두를 조식하였다. 탑신전면에「성당대사(性堂大師)」(자경 8cm)라 명문하고 조성연대는 기록하지 않았다.상륜부는 탑신과 일석으로 하여 노반과 보륜·보주를 안치하였다. 조성시기는 조선후기로 추정된다. (총고 140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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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성서씨 부도
    천은사의 10여기 부도중 맨앞줄에 위치하고 있다. 지대석 없는 연화문을 조석한 앙연의 원형대좌에 반구형의 탑신을 앉히고 그 위로 방형의 옥개석이 연결되었다. 옥개석 상면은 각 모서리에 우동이 보이고 각4면으로는 팔작지붕형인 합각이 모각되었으며 정상에는 일석으로 하여 보주를 앉혔다.부도의 전면(前面)에는 「장성서씨사리탑」(자경 9cm)이라 쓰고 뒷면으로는 「씨칠십사가경이년정사치출사리무년이월자김추동입(氏七十四嘉慶二年丁巳齒出舍利戊年二月子金秋東立)」(자경 4cm)이라 음각하였다.위 내용에 의하면, 1797년(정조(正祖 21) 74세로 입면한 장성서씨의 치아사리를 그 다음해인 1798년(무오)에 그 아들 김추동이 세운 보도임을 알 수 있다.(총고 130cm, 대좌직경 50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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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공처사 부도
    자연암반을 지대석으로 삼아 그 위로 원형의 대좌 탑신과 옥개석을 올려놓았다. 대좌는 원형으로 아무런 조식이 없으며 탑신은 고복형인데 전면에 「현공처사박」(자경 4.5cm)이라 음각하였으나 밑부분이 판독불능이다. 후면에도 역시 장방형의 액면을 모각하고 그 안에 글자를 새겼으나 마모가 심해 판독을 할 수 없다.옥개석은 8각으로 일부가 파손되었으며 상면에는 우동마루가 표출되었으며 전각에 이르러서는 약간의 반전을 보였다. 상륜부는 옥개석과 일석으로 하였고 3단의 원형띠를 두르고 있다. 조성시기는 조선후기로 보인다.(총고 112cm, 대좌직경 68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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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천은사 창건과 역사
    작성자/작성일
    두레박 24-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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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방제일선찰 천은사(泉隱寺)는 구례군 광의면 방광리 70번지 지리산의 서남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대한불교조계종 제19교구 본사 화엄사의 말사로 화엄사, 쌍계사와 함께 지리산 3대사찰 중의 하나로 꼽히고 있습니다. 절은 지리산 가운데서도 특히 밝고 따뜻한 곳에 자리하고 있는데,지리산의 높고 깊은 계곡에서 흐르는 맑은 물이 절 옆으로 펼쳐지고 우람한 봉우리가 가람을 포근히 둘러싸고 있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워낙 광대한 지리산자락이라 교통이 불편하였으나 지금은 노고단에 이르는 지방도로가 절앞까지 이어져 있고 화엄사까지 직통하는 도로가 놓여 있어 어렵지 않게 절을 찾을 수 있습니다.산문과 일주문을 지나 독특하고 운치 가득한 수홍문을 건너 절을 찾는 즐거움은 아주 특별합니다. 지리산의 빼어난 산수와 풍광 그리고 그 속에서 불법의 진리를 만나는 것은 더 없는 보람일 것입니다.

    천은사는 신라 때 창건된 고찰이다. 신라 중기인 828년(흥덕왕3)에 인도의 덕운(德雲) 스님이 중국을 통해 우리나라에 들어와 명산을 두루 살피던 중 지리산에 들어와 천은사를 창건했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조선시대 천은사 중건 당시 지어진 극락보전 상량문에 의하면 창건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당 희종 건부2년(875년)에 연기(도선국사)가 가람을 창건하였고 후에 덕운이 증수하였다."
    "<唐 僖宗 乾符二載 緣起相形而建設 德雲因勢而增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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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데 일제시대에 간행된 구례읍지에는 이 기록에서 창건주 연기는 도선국사(道詵國師, 827~898)의 별호인데 이것을 유래로 잘못해석하여 도선국사 이후의 스님인 덕운을 창건주로 왜곡 전해지고 있었다. 우리나라의 많은 사찰들이 도선국사가 창건주로 되어 있는데, 이는 중국 유학시 일행선사로 부터 3천8백 비보사찰을 중건 혹은 창건토록 하라는 가르침에 따라 신라 조정에 긴밀히 모의하여 신라 국토 곳곳에 사찰과 탑을 건립하였던 점을 생각하면 천은사도 바로 이러한 경우일 것으로 짐작되는데 이렇게 볼때 인근 화엄사의 창건연대(544년)와 비교해 볼때 도선국사가 창건했다기 보다는 중창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따라서 창건주에 대한 기록은 밝혀진 바 없어 그 시기와 유래를 지금으로서는 알 수가 없다.

    고려시대에 들어와서는 절은 더욱 번성하여 충렬왕 때(1275~1308)에는 ‘남방제일선원(南方第一禪院)’으로 지정되었다. 그후 계속해서 많은 수도자가 진리의 광명을 터득하는 수행처로서의 역할을 이어나갔다. 그러나 아쉽게도 절의 역사 가운데 많은 부분이 공백으로 남아 있고, 더욱이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임진왜란등의 병화를 겪으면서 대부분 소실되는 등 점차 쇠퇴의 길로 접어 들었다.

    이후 다시 역사에 등장하는 것은 1610년(광해군2)의 일이다. 당시 절의 주지 혜정선사(惠淨禪師)가 소실된 가람을 중창하고 선찰로서의 명맥을 이끌어 나갔다. 뒤이어 1679년(숙종5)에도 단유선사(袒裕禪師)가 절을 크게 중수했는데, 이로부터 절이름을 감로사에서 천은사로 바꾸었다.

    1715(숙종41)에는 팔상전에 영산회상도를 조성하였고, 1749년(영조25)에는 칠성탱화를 조성하였다. 1774년(영조50) 5월에는 혜암선사(惠庵禪師)가 그 전 해에 화재로 소실되었던 전각을 중수하면서 절을 새롭게 중창하였다. 혜암선사는 수도암(修道庵)에 주석하고 있었는데 당시의 남원부사 이경륜(李敬倫)에게 도움을 구하고 산내의 여러 사찰과 힘을 합쳐 2년간에 걸친 중창불사를 원만히 이루어냈다. 지금의 가람은 대부분 이때 이루어진 모습이니 혜암선사의 중창은 절의 역사에 있어서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현재 절 일원이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35호로 지정되어 있다.

    천은사 설화와 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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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절이름이 바뀐 데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한다. 단유선사가 절을 중수할 무렵 절의 샘가에 큰 구렁이가 자주 나타나 사람들을 무서움에 떨게 하였으므로 이에 한 스님이 용기를 내어 잡아 죽였으나 그 이후로는 샘에서 물이 솟지 않았다.
    그래서 ‘샘이 숨었다’는 뜻으로 천은사라는 이름이 붙였다고 한다. 그런데 절 이름을 바꾸고 가람을 크게 중창은 했지만 절에는 여러차례 화재가 발생하는 등의 불상사가 끊임없이 일어났다. 마을사람들은 입을 모아 절의 수기(水氣)를 지켜주던 이무기가 죽은 탓이라 하였다. 얼마 뒤 조선의 4대 명필가의 한 사람인 원교 이광사(李匡師, 1705~1777)가 절에 들렀다가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자 이광사는 마치 물이 흘러 떨어질 듯 한 필체[水體]로 ‘지리산 천은사’라는 글씨를 써 주면서 이 글씨를 현판으로 일주문에 걸면 다시는 화재가 생기지 않을 것이라 하였다. 사람들은 의아해 하면서도 그대로 따랐더니 신기하게도 이후로는 화재가 일지 않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