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총 53 건

소개
  1. 대흥사 수심당(修心堂)
    작성자/작성일
    두레박 24-05-11

    선방스님들의 요사체로 사용되고 있는 건물 입니다.


    0ba86e1a6ce03e03ea10fefc4559481f_1715373760_81.jpg
    0ba86e1a6ce03e03ea10fefc4559481f_1715373761_33.jpg
     

  2. 대흥사 전각의 독특한 공간구성
    작성자/작성일
    두레박 24-05-11

    0ba86e1a6ce03e03ea10fefc4559481f_1715372931_56.jpg
     

    가람배치 형식이 아닌 자유롭게 배치한 독특한 공간 구성
    넓은 산간분지에 자리잡은 대흥사는 좀 특이한 가람 배치를 보이고 있다. 절을 가로 지르는 금당천을 사이에 두고 북쪽과 남쪽으로 당우들을 배치하였는데, 다른 절에서 보이는 가람배치 형식을 따르지 않고 당우들을 자유롭게 배치하는 독특한 공간구성이 특 징이다.

    『대둔사지』에서는 이 같은 절의 공간 구성을 크게 북원(北院)과 남원(南院) 의 2구역으로 구분하였다.
    북원에는 대웅보전을 중심으로 명부전, 응진전, 산신각, 침계루, 백설당, 청운당, 대향각, 선열당 등의 전각과 요사채들이 하나의 무리를 형성하여 배치되어 있다.

    남원에는 천불전을 중심으로 용화당, 가허루, 봉향각, 동국선원, 적묵당, 세심당, 정진당, 만월당, 심검당 그리고 종무소 등의 전각과 요사채들이 또 하나의 무리를 형성하여 배치되어 있다.

    또 남원의 오른편에는 서산대사의 사우인 표충사와 그 부속건물인 비각, 조사전, 의중당, 강례재, 명의재, 보련각 그리고 최근에 증 개축한 성보박물관이 있으며, 표충사 뒤편에는 대광명전, 그리고 요사채로 이루어진 대광명전이 위치하고 있다.

    따라서 대둔사의 가람 배치는 크게 남원과 북원으로 나눌 수 있으며, 남원의 구역에 위치한 표충사와 대광명전 일원을 다시 세분하면 북원과 남원, 그리고 표충사, 대광명전 네 구역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이 중 표충사와 대광명전 일원은 후대에 조성된 별원(別院)의 성격을 띠고 있는 것으로 보아, 대둔사의 옛 모습은 침계루 앞 계곡을 중심으로 남원, 북원 일대에 집중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북원구역] 침계루를 지나 북원 안마당으로 들어가면 정면에 대웅보전, 그 좌우에 명부전과, 응진전, 산신각이 나란히 있다.
    응진전 앞 3층석탑은 이 절의 유물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보물 제320호로 지정되어 있다.

    [남원구역] 범종각과 법당으로 천불전, 동국선원이나 용화당 등 강원과 승방 몇채가 각각 돌담으로 구획되어 있다. 천불전의 지붕과 건물의 맵시가 매우 경쾌하며 정면3칸 분합문 전체가 아름다운 꽃창살이다. 내부에는 경주에서 초의스님을 비롯한 8분의 스님들이 직접 깎아 제작운반해 온 옥돌 불상 천 분이 모셔져 있다.

    [표충사] 절에서는 흔하지 않은 유교형식의 사당으로, 서산대사를 중심으로, 사명당 유정, 뇌묵당 처영스님의 진영을 봉안하고 있다. 유물전시관인 성보박물관에는 서산대사의 가사와 발우, 친필선시, 신발, 선조가 내린 교지 등 유물과 정조가 내린 금병풍 등이 보관돼 있다.

    [대광명전구역] 표충사 뒤편으로 300미터쯤 들어간 곳에 호젓하게 자리한 대광명전은 현재 선원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 외에 8칸짜리 일자집인 보현각, 요사채도 있다.

    이 밖에 경내 당우들에 걸려 있는 현판 글씨들은 당대 명필들이 쓴 조선시대 서예의 진면목을 보여준다. 표충사는 정조대왕, 대웅보전, 천불전, 침계루는 원교 이광사, 백설당 지붕밑 무량수각은 추사 김정희, 가허루는 전주에서 활약하던 호남의 명필가 창암 이삼만의 글씨이다.

  3. 대흥사 호국도량
    작성자/작성일
    두레박 24-05-11

    0ba86e1a6ce03e03ea10fefc4559481f_1715370873_99.jpg
     

    대한불교 조계종 제22교구 본사 호국도량은 근대 이전 대둔사와 대흥사로 불리었다가 근대 이후 대흥사로 정착되었다. 해남 두륜산(頭輪山)의 빼어난 절경을 배경으로 자리한 이 곳 대흥사는 한국불교사 전체에서 대단히 중요한 위상을 차지하고 있는 도량으로서 특히 임진왜란 이후 서산(西山)대사의 의발(衣鉢)이 전해지면서 조선불교의 중심 도량이 되었고,  한국불교의 종가집으로 그 역할을 다해온 도량이다.

    풍담(風潭)스님으로부터 초의(草衣)스님에 이르기까지 13 대종사(大宗師)가 배출되었으며, 만화(萬化)스님으로부터 범해(梵海)스님에 이르기까지 13 대강사(大講師)가 이 곳에서 배출되었다.

    암울했던 조선시대의 불교 상황을 고려한다면, 이들의 존재는 한국불교의 오늘이 있게 한 최대 원동력과도 같은 것이었다.

    대흥사는 호국불교(護國佛敎)의 정신이 살아 숨쉬고 있는 도량이다. 서산대사의 구국 정신은 이미 잘 알려진 내용이지만, 지금 경내에 자리하고 있는 표충사(表忠祠)는 개인의 수행에 앞서 국가의 안위를 보다 우선시했던 한국불교의 전통을 대표하는 전각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매년 학생들과 시민들이 이곳에서 서산대제 및 나라사랑을 위한 각종 행사에 참여해 오고 있다.

    대흥사 경내와 산내 암자에는 중요한 성보문화재가 상당수 존재한다.호국도량
    북미륵암 마애여래좌상(국보 제308호), 탑산사 동종(보물 제88호), 북미륵암 삼층석탑(보물 제301호), 응진전 삼층석탑(보물 제320호), 서산대사 부도(보물 제1347호), 서산대사 유물(보물 제1357호), 천불전(보물 제1807호), 천불상(전남유형문화재 제52호), 용화당(전남유형문화재 제93호), 대광명전(전남유형문화재 제94호), 관음보살도(전남유형문화재 제179호), 표충사(전남기념물 제19호) 등의 지정문화재와 대흥사 도량 전체가  사적명승 제9호로 지정되어 대흥사의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대변해 주고 있다.

    조선중기 이후 수많은 선승(禪僧)과 교학승(敎學僧)을 배출하면서 한국불교의 중심도량으로 성장한 대흥사. 한국불교의 가장 대표적인 호국도량의 위상을 간직하고 있는 이 곳 대흥사는 지금도 성불(成佛)과 중생구제의 서원을 간직한 뭇스님들의 정진이 끊이지 않는 청정수행도량이다.

  4. 대흥사 창건연기
    작성자/작성일
    두레박 24-05-11

    우리나라 대부분의 사찰에는 다양한 창건연기가 전하고 있다.
    이들 창건연기는 역사적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해당 사찰의 전통과 사상적 배경을 이해하는 데 있어 반드시 참고할 필요가 있는데 대흥사에도 몇 가지 창건연기가 전하고 있다.

    대흥사의 창건연기를 전하고 있는 자료로는 『죽미기(竹迷記)』, 『만일암고기(挽日菴古記)』, 『북암기(北菴記)』 등이 있으며, 1823년(순조23) 간행된 『대둔사지(大芚寺志)』는 이들 자료를 종합한 내용과 함께 이때까지의 사찰역사를 총정리해 놓은 중요 자료이다.


    0ba86e1a6ce03e03ea10fefc4559481f_1715370820.jpg 


    [창건설]
    426년(백제 구이신왕7)의 신라 정관존자(淨觀尊者) 창건설이다.
    신라의 정관스님이 426년 대흥사 산내 암자의 하나인 만일암을 창건, 이후 508년(무령왕8)에 이름을 알 수 없는 선행(善行) 비구가 중건하였다고 하나 안타깝게도 이 자료에서 창건주로 소개한 정관존자는 생애나 활동 내용이 전혀 알려져 있지 않은 인물이다.

    『죽미기』는 544년(신라 진흥왕5) 아도화상(阿度和尙)의 창건설을 전하며, 자장(慈藏)스님과 도선(道詵)스님이 계속해서 중건하였다는 기록도 함께 실려 있다.
    현재 사찰 내에서는 대체로 아도화상의 창건설을 따르고 있다.

    따라서 현재로써는 대흥사의 정확한 창건 시점을 밝히기가 매우 어려운 상태라고 하겠다.
    하지만 지금 응진전(應眞殿) 앞에 세워져 있는 삼층석탑의 제작 연대가 통일신라 말기 경으로 추정되고 있는 상태이므로 대흥사는 늦어도 통일신라 말기 이전에 창건된 고찰로 보아야 한다.

    또한 정관존자나 아도화상 같은 분들이 창건주로 인식되고 있었다는 점은 그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대흥사의 전통을 이해하는 데 있어 반드시 중시되어야 할 내용이다.

  5. 대흥사 연혁
    작성자/작성일
    두레박 24-05-11

    0ba86e1a6ce03e03ea10fefc4559481f_1715370767_97.jpg
     

    『대둔사지』에 의하면 고려 후기의 천태종 소속 고승인 진정국사(眞靜國師) 천책스님의 주석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즉 천책스님이 대흥사 북암(北庵)에 한동안 주석하였으며, 『대둔사지』를 편찬하기 얼마 전까지만 해도 스님이 사용하던 발우가 이 곳에 전해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천책스님이 대흥사 인근의 백련사(白蓮寺, 현 대흥사의 말사)에서 출가하고 그곳에서 장기간 주석하였다는 사실을 감안해 본다면, 이 기록은 상당한 타당성을 갖추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이 절 앞마당에 신암(信菴), 사은(思隱), 성유(性柔) 등 세 분 고승의 부도가 세워져 있다는 기록이 실려 있는데, 이들 고승도 역시 고려시대에 활동했던 스님들로 대흥사의 장구한 역사를 보여주고 있다.

    대흥사의 위상이 크게 부각된 시점은 서산대사의 의발(衣鉢)이 이 곳 대흥사에 전해지고 조정과 불교계에서 모두 대흥사를 중시하기 시작했던 조선중기 이후부터이다.

    이미 잘 알려져 있듯이, 서산대사의 의발이 전해진 이후 대흥사에서는 13대종사와 13대강사가 계속 배출되어 조선 불교계를 이끌어왔으며, 조선의 조정에서는 표충사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으므로써 호국정신의 근원지와도 같은 위상을 세우게 되었다.

    이러한 대흥사는 일제강점기에 시행된 30본말사법 제도 아래에서 44개의 사암을 관장하는 본사로 지정되었다가 현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22교구 본사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