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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1. 대흥사 침계루(枕溪樓)
    작성자/작성일
    두레박 24-05-11

    북원의 출입문으로 남ㆍ북원을 가로지르는 계류 금당천(金塘川)에 면하여 자리한 2층 누각건물이다. 심진교를 지나 누 아래의 어칸 통로를 통해 중정으로 출입하며, 대웅전 맞은편에 자리한다.

    주심포식 겹처마 맞배건물로 낮은 기단 위에 두리기둥을 세우고 정면 5칸, 측면 3칸으로 그 몸체를 구획지었다. 중층 누각건물로 하층은 돌담과 판장문으로 마감한 광으로 구성되며, 상층은 평면에 널마루를 깐 홀로 이루어진 강당류의 평면을 구성한다. 건물 외부는 대웅전을 향한 내벽을 제외하고 삼면을 판벽과 판문으로 처리하였으며, 어칸에는 원교(員嶠) 이광사(李匡師, 1705~1777)가 쓴 골기있는 필법의 ‘침계루(枕溪樓)’ 편액과 그 배면에 ‘원종대가람(圓宗大伽藍)’이라 쓴 두 기의 편액이 걸려 있다.

    공포는 이익공으로 내부기둥이 없는 오량가구를 구성하여 상부 서까래 사이로 회골이 드러나는 연등천장을 단장하고 있으며, 상하의 기둥을 서로 분리하여 상하층의 쓰임새를 구분짓고 있다. 건물은 30평의 규모로 상층에는 법고와 1587년명 범종ㆍ목어ㆍ운판 등 사물이 봉안되어 있으며, 좌우 측벽으로 감실형 틀 속에 금어 현암(玄菴)이 조성한 사천왕탱이 걸려 있다. 이외 대흥사의 사적과 내력을 알 수 있는 ‘대웅전중창상량문(大雄殿重創上樑文)’과 ‘중조성천불기(重造成天佛記)’ 등 24기의 현판과 시액이 침계루 사면에 걸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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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대흥사 백설당(白雪堂)
    작성자/작성일
    두레박 24-05-11

    북원 일곽의 침계루 우측에 자리잡은 승방으로 대흥사 전체를 통틀어 가장 규모가 큰 요사채이다.
    대웅전 중정의 서편을 가로막아 널찍하게 자리잡은 백설당은 ‘트인 ㅁ자’형 건물로 대흥사 사중의 대중방으로 이용된다. 구조는 대웅전을 향한 동편이 주건물로 3칸의 고량대실(高樑大室)로 구성되어 있으며, 6칸의 큰방과 큰 부엌, 그 끝자락 서편에 작은 승방들이 헛간과 이어져 있다. 이외 안마당 서변을 이룬 건물에는 작은 방들이 두줄 겹겹으로 배열되어 앞뒤 툇마루와 함께 연결되어 있으며, 그 모서리에 공양간이 자리한다. 안마당에는 겹겹이 겹쳐진 사변지붕과 용마루의 겹침 등 그 꺾임이 맑고 아담한 벽체와 조화를 이루며 구성되어 있어 막돌과 힌줄눈친 담장과 함께 변화있고 재미있는 외관을 보여준다.

    원래 북원에는 여러 채의 승방과 선당, 중료(衆寮)들이 있었음을 사지를 통해 알 수 있는데, 현재 백설당의 규모를 보아 여러 채의 승방들이 그 기능을 다하고 있다. 백설당 동편 처마 아래에는 제주도 유배 중에 추사가 쓴 ‘무량수각(無量壽閣)’이라는 편액과 구한말 명신으로 미불체를 구사한 해사(海士) 김성근(金聲根)이 쓴 ‘백설당(白雪堂)’이라는 두 기의 편액이 걸려 있다.

    건물은 낮은 기단 위에 자연초석을 세우고 두리기둥으로 그 칸을 세분화한 맞배지붕 건물로 공포가 소략한 주심포집이다. 건립시기는 분명치 않으나 대웅보전보다 후대에 건립된 것으로 1899년(광무 3) 10월 서상실(西上室)의 화재로 2년 뒤인 1901년에 건립된 것으로 전해진다. 주건물인 대중방은 절 안의 스님들이 모여 공양과 정진수행을 하는 대중법요의 장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내부에는 근래 널마루 다락을 없애고 사찰의 소임을 맡은 분들의 방명이 적힌 용상방(龍象榜)이 붙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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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대흥사 대향각(大香閣)
    작성자/작성일
    두레박 24-05-11

    북원의 침계루에 들어서면 우측편에 있는 전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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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대흥사 천불전(千佛殿)
    작성자/작성일
    두레박 24-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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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불전 기도 영험 유래 (千佛殿 祈禱 靈驗 由來)

    이 곳 千佛殿에 봉안된 천불상은 1813년(순조 13년)에 완호윤우선사(玩湖尹佑禪師)께서 千佛殿을 중건하시고 和順 쌍봉사 화승(畵僧) 풍계대사(楓溪大師)의 총지휘로 경주 불석산에 나오는 옥석(玉石)으로 10명의 대둔사(현대흥사)스님들께서 직접 6년에 걸쳐 정성스럽게 완성한 千佛로서 그 조각 자체가 서로 다른 형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으며, 정교함과 신비스러움이 더한 천 분의 부처님입니다.

    千佛殿 중앙 삼존불은 목불로써 중앙에는 석가모니불, 좌우보처에는 문수. 보현 보살상을 모셨으며
    千佛이란? 다불사상(多佛思想)에 근거하여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三世)에 거쳐 이 세상에 출현하시는 부처님으로 화장세계를 이루고 있다는 뜻이며 경주에서 조성된 千佛을 2척의 배에 나누어 싣고 순조 17년(1817년) 정축(丁丑) 11월 18일 경주 장진포를 출발하여 울산을 거쳐 부산 앞바다를 지나 해남 대둔사(대흥사)로 향하여 항해 도중 한 척의 배가 울산진에서 풍랑을 만나 표류하다가 일본의 축전(筑前) 대도포(大島浦)에 표착하였다. 이 배에는 768여구의 옥불을 싣고 있었다.
     
    배를 발견한 일본인들은 기쁜 마음으로 서둘러 절을 짓고  불상을 봉안하려 했다. 그러나 이 불상들이 축전(筑前) 대도포(大島浦) 현감 꿈에 우리는 조선국 해남 대둔사(대흥사)로 가는 중이니 이 곳에 봉안해서는 안 된다'고 여러 번 현몽하자 현감은 사람을 보내어 사정을 확인한 후 그 다음 해 7월14일 대둔사(대흥사)로 돌려보내게 되었다. 일본인들이 옥불을 돌려보내기 아쉬워 불상 밑면에 '日'자를 새겨 보냈다고 『일본표해록』에 기록되어 전해지고 있다.

     千佛殿에 봉안된 옥 불상은 근세에도 그 영험을 보였는데 처음에는 가사(袈裟: 부처님과 스님들께서 입는 옷을 칭함)를 입지 않은 모습이었으나 경상도 신도님 꿈에 여러 차례 가사 불사를 해줄 것을 현몽 하여 서둘러서 가사를 만들어 입혀 드리게 되었다.
    千佛께서 입으셨던 가사는 가사불사에 동참한 신도들 가정에 소장하게 되면 온갖 근심과 걱정 장애가 없어지고 지극 정성으로 염원하는 마음속의 소원이 꼭 성취되는 영험이 있어 그 이후 유명한 기도처로 널리 알려진 千佛 기도 도량입니다.
     이 글을 접하시는 여러분들께서도 千佛殿 기도를 통한 영험을 성취하시기 바랍니다.
     
     千佛殿 懸板 (천불전 현판, 조선후기 원교 이광사 친필)
    千佛殿 柱聯 (1917年 오인당 안규동 전서 古 예서체 친필)
    (世尊坐道場) 세존이 앉으신 이 도량에
    (淸淨大光明) 청정한 대광명 빛나니   
    (比如千日出) 마치 천 개의 해가 떠서   
    (照耀大千界) 대천세계를 밝게 비추이듯 하네

    千佛殿으로 들어서는 門인 가허루(駕虛樓, 懸板 글씨는 全州出身 蒼岩 李三晩先生 親筆 ) 문지방은 U자 형으로 마치 소의 멍에와 같이 생겼으며, 千佛殿 앞산의 悟道재 능선과 千佛殿 뒷산의 悟心재 능선으로 연결되어 이어지는 허공 가운데 다리를 의미하며, 또한 인간세상(此岸)과 부처님의 세계(彼岸)로 연결시키는 교량 역할을 이르는 뜻이다.

    천불전(千佛殿)_보물 제1807호
     천불전은 높이 쌓은 석축단(石築壇) 위에 낮은 기단(基壇)에 세운 전면 3칸, 측면 3칸으로 된 다포계(多包系)의 팔작지붕의 건물이다.
    자연석(自然石) 기초(基礎) 위에 일부 괴목(槐木)으로 민흘림기둥을 세웠으며 견고하게 보이는 창방(昌枋)과 평방(平枋)을 놓고 내4출목(內四出目), 외3출목(外三出目)의 다포작(多包作)을 꾸몄다.
    건물 앞면에는 궁창판에 안상(眼象)을 하였고 정교(精巧)한 국화무늬(菊花紋)·연화무늬(蓮華紋)의 꽃살 분합문(分閤門)을 달았는데 중앙칸은 3짝, 좌우협칸(左右夾間)은 2짝이다.
    내부 중앙에 목조(木造)의 본존불(本尊佛)을 봉안(奉安)하였으며 주위에 옥석(玉石)으로 조각한 천(千)의 작은 불상을 배열(配列)한 것이 특이(特異)하다. 기록에는 순조(純祖) 11년(1811) 불탄 것을 동(同) 13년(1813)에 중건(重建)하였다고 한다.
    순조 11년(1811)에 불에 탄 뒤 2년 뒤에 다시 지어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앞면 3칸·옆면 3칸 규모이며,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다. 내부의 중앙에는 목조 본존불이 모셔져 있으며, 6년의 기간에 걸쳐 만들어진 천 개의 불상이 배열되어 있다.

    석조천불상(石造千佛像)
    1813년에 중건된 천불전에는 중앙에 목조석가삼존상과 그 주위로 1,000구의 석조여래좌상이 봉안되어 있다. 계단식 불단 위에 봉안된 천불은 천불전 중창주인 완호(玩虎)대사의 제자인 풍계(楓溪)대사의 발원으로 경주지역 옥석으로 조성되었으며, 현재 보물 제1807호로 지정되어 있다.
    천불에 전하는 전설은 1821년 풍계대사가 쓴 『일본표해록(日本漂海錄)』에 등장한다.
    풍계대사의 지휘로 천불전에 봉안할 천불이 6년에 걸쳐 완성된 후, 몇 척의 배에다 싣고 바닷길을 통해 대흥사로 향하던 중 풍계대사가 탄 배가 울산진(蔚山津)에서 풍랑을 만나 표류하게 되었다.
    표류한 배는 일본 나가사키현(長崎縣)에 닿았는데, 배에 실린 천불을 본 일본인들이 이를 봉안하기 위해 급히 절을 지으려 하자 불상들이 그들의 꿈에 나타나 “우리는 조선국 해남 대둔사의 불상으로서 이곳에 봉안해서는 안 된다.”고 현몽하였다. 그들은 천불의 영험을 신비로이 여겨 대둔사로 천불을 돌려보냈으며, 그곳에 왔던 옥불상들 밑바닥에 ‘日’자를 새겨 보냈다고 전한다.
    천불은 19세기 불상으로 모두 불신(佛身)에 회칠로 장엄되어 있으며, 일률적인 자세로 신체에 비해 상호가 큼직한 모습이다. 상호는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단아한 모습이며, 귀를 특히 크게 표현하였다. 나발에 중앙계주와 정상계주가 모두 표현된 소형불상과 중앙계주가 큼직히 솟은 중형불상으로 구분된다.
    불상은 높이 25㎝ 안팎의 소형불상이며, 중앙 목조삼존상 뒤쪽으로 항마촉지인을 결한 석조 석가여래삼존상이 천불의 주불로 봉안되어 있다. 천불전에 봉안된 옥불상은 근래에도 그 영험을 보였는데, 경상도 불자들의 꿈속에 현몽하여 ‘가사를 입혀 달라’는 요구에 따라 4년마다 한번씩 가사를 입히고 있으며, 갈아입은 헌 가사를 지니고 있으면 근심과 걱정이 없어진다고 전해진다.

  5. 대흥사 가허루(駕虛樓)
    작성자/작성일
    두레박 24-05-11

    남원(南院)의 출입문으로, 사찰의 중심에 있다. 휘어진 자연목으로 만든 문턱을 넘어 짧은 통로를 지나가면 천불전(전라남도유형문화재 제48호)을 비롯해 용화당·동국선원·봉향각·승방 등이 나온다.
    단층 주심포 맞배지붕 건물로 정면 5칸, 측면 2칸 규모이다. 건물 중앙은 통로로, 나머지 공간은 창고로 사용되고 있다. 정면 좌우측에는 돌벽을 쌓았으며, 뒷면은 판장문으로 단장하였다. ‘가허루(駕虛樓)’라는 현판 글씨는 비운의 명필 창암(蒼巖) 이삼만(李三晩, 1770~1845)이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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