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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능가사 대웅전
    작성자/작성일
    두레박 24-0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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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물 제1307호


    대웅전은 절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건물로 석가모니불을 모시는 전각이다. 능가사는 팔영산 아래에 있는 평지사찰로 일명 보현사라고도 한다.

    임진왜란 때 불에 탔던 것을 조선 인조 22년(1644)에 벽천대사가 다시 지어 능가사라 했다. 이 건물의 규모는 정면 5칸, 측면 3칸이다. 지붕은 옆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각지붕이다. 기둥은 약간 거칠게 다듬은 배흘림 형태이다.

    특이한 것은 건물 방향이 입구에 맞춰 북향으로 되어 있다는 점이다. 조선후기의 건물이지만 규모가 크고, 건축양식이 우수하며 보존상태도 양호하다. 지금의 모습은 최근에 해체 보수한 것이다.

    능가사대웅전은 18세기 중엽에 중건된 정면 5칸, 측면 3칸, 57.58평의 건물로 공포는 외3출목, 내4출목, 다포계의 일반적 수법을 따랐지만 정면 기둥머리의 안초공 수법과 건물 내·외부에 연봉 등으로 화려하게 장식한 기법은 보물로 지정된 영광의 불갑사대웅전, 부안의 개암사대웅전과 그 맥을 같이 한다.

    포벽 수장재에 도드라지게 새긴 첨차(檐遮)는 사찰건물에서 보기 드문 예에 속하는 등 조선 중·후기 호남지역 사찰건축의 일면을 보여주는 건물로 학술적·미술사적으로 중요한 가치가 있다.


  2. 능가사 동종
    작성자/작성일
    두레박 24-0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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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물 제1557호

    종신에 「강희삼십칠년 무인삼월일 흥양팔영산능가사 康熙三十七年戊寅三月日 興陽八影山楞伽寺…’」 라는 문구가 있어 절대연대(1698년,숙종 24)를 알수 있는 귀중한 유물이다.

    높이는 154㎝, 입술 지름은 101.5㎝(1구)이다. 쌍용으로 정상에 여의주를 물고 있으며, 음관(용통)을 두지 않고 조그마한 운형 구멍으로 대신하고 있다. 천판은 이중의 연꽃무늬를 조각하였는데, 상단은 16엽이고 하단은 활짝핀 무늬이다. 그 밑으로 보이는 상대에는 범자문을 돌렸으며, 4면이 장방형인 유곽 안에 9개의 유두를 뚜렷하게 조각했다.

    양 옆에는 천의를 걸친 보살입상과 문짝 모양을 장식하였는데, 그 안에 ‘주상전하수만세’라는 문구가 양각되었다. 또 종신 중앙부에는 주역에서 나타나는 전양인 건에서 전음인 곤에 이르기까지의 팔괘를 양각으로 둘렀는데, 이는 조선 범종에서 볼 수 없는 특이한 점이라 할 수 있다. 팔괘 밑으로 음각의 명문대가 있는데, 여기에 능가사 창건주인 정현대사의 이름이 보인다. 하대로 내려와서는 두 줄의 띠를 둘렀고 그 안에 꽃잎과 당초문대를 돌렸다.

    이 종은 용뉴의 웅건한 표현과 단정한 보살입상, 세부 문양의 정교함 등 김애립 범종의 완숙한 기량이 유감없이 발휘된 17세기를 대표하는 범종으로 꼽기에 손색이 없는 수작이다.

  3. 능가사 사적비
    작성자/작성일
    두레박 24-0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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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흥 능가사 사적비(高興 楞伽寺 事蹟碑)는 전라남도 고흥군 점암면 능가사에 있는 조선시대의 사적비이다. 1978년 9월 22일 전라남도의 유형문화재 제70호로 지정되었다

    사적비란 어떠한 사건에 관련된 사실이나 자취를 기록한 비로, 이 비는 능가사의 창건에 관하여 기록하고 있다. 능가사는 비문에 의하면, 신라 눌지왕 3년(419)에 아도화상이 창건하였고, 창건 당시에는 ‘보현사’라 이름하였다 한다. 임진왜란으로 불에 타 버린 것을 인조 22년(1644) 정현대사가 다시 건물을 지어 ‘능가사’라 고쳐 부르게 되었다.

    비는 거북받침돌 위로 비몸을 세우고, 그 위로 구름과 용이 새겨진 머릿돌을 얹은 모습이다. 고흥 능가사 사적비 건립연대 표기 ‘숭정기원후재경오(崇禎紀元后再庚午)’는 1690년으로 알려 졌는데, 숭정 재위 기간의 경오(1630년)는 포함하지 않고 그 뒤로 이어지는 두번째 경오로 보아야 하고, 비문 찬자, 서자, 관련 인물의 활동연대와 비교하여 보면 건립연대는 1750년이다.

    비의 몸돌은 화강암을 매끄럽게 갈아서 만든 것으로 별다른 조식이 없다. 이수는 장방형으로 매우 화려한 느낌을 준다. 이수 하단은 전.후면에 8엽의 앙련과 운룡문,화문을 조식하였다.상단은 두 마리의 용이 중앙의 여의주를 향해서 서로 안쪽을 보게하였다. 네 귀퉁이에는 역시 용을 새기고 정면과 중앙에 오른편측면에는 귀면상을 조식하여 장식을 더하고 있다.

  4. 능가사 목조사천왕상
    작성자/작성일
    두레박 24-0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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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흥능가사목조사천왕상 - 전라남도 시도유형문화재 제224호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24호. 능가사 천왕문 내부에 안치되어 있는 4구의 사천왕상이다. 좌우 2구씩 목책 안에 안치되어 있는데, 천왕문 입구 왼쪽 앞쪽에 북방 다문천왕이, 뒤쪽에 서방 광목천왕이 배치되고, 오른쪽 앞쪽에 동방 지국천왕이, 뒤쪽에 남방 증장천왕이 배치되어 있다.

    이 사천왕상 중 동방 지국천왕상에서 발견된 발원문과 능가사사적비 등에 이 사천왕상이 1666년(현종 7)에 조성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사천왕상이 안치된 천왕문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규모로, 1995년 천왕문 해체 복원시 발견된 상량문에 의하여 1666년에 건립된 후 1824년(순조 24)과 1931년에 중건되었음을 알 수 있다.

    사천왕상은 나무로 제작되었고 서 있는 입상이 아니라 의자에 걸터앉은 자세의 의좌상(椅座像)으로, 높이는 450㎝이다. 머리에는 화려한 연화문이 그려진 원통형의 보관을 쓰고, 머리 양 옆으로 보관에 달린 끈이 휘날린다. 얼굴은 불법을 수호하기 위하여 험상궂은 표정을 하면서도 눈썹과 수염 등에서 부드럽고 해학적인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천왕상은 갑옷을 입은 무장형으로 어깨 위로 한 가닥의 천의(天衣)가 휘날리고 있다.

    천왕이 든 지물은 북방 다문천왕이 당(幢)을, 서방 광목천왕은 용과 보주를, 동방 지국천왕이 비파를, 남방 증장천이 칼을 들고 있다. 이와 같이 조선 후기에 제작된 대형 사천왕상은 중국 원대와 명대에 갑옷을 입고 위협적인 얼굴을 한 용맹스런 장수의 모습에 비파, 용과 보주, 당, 탑 등의 다른 지물을 가지고 있다.

    조선 후기 사천왕상은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사찰의 중창과 중수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는 인조와 숙종 연간에 집중적으로 조성된다. 능가사 사천왕상의 특징은 다른 사찰에 봉안된 것보다 크고, 천왕문에 사천왕상을 배치한 방향이 다르다. 또한 동방 지국천왕 발 아래에는 동녀(童女)가 천왕의 왼쪽 다리를 받쳐 들고 있어 특이하다.

  5. 능가사 응진당
    작성자/작성일
    두레박 24-0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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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응진당은 나한전(羅漢殿)이라고 부르기도 하며, 석가모니 삼존불을 모시고, 좌우에 부처님의 제자들인 16나한(아라한의 줄인 말)을 봉안한 법당이다. 원래 소승불교의 수행자 중 가장 높은 지위에 오른 고승을 지칭하는 말이였으나, 아라한(阿羅漢)과를 증득하여 마땅히 존경과 공양을 받을 만한 큰 성인이라는 뜻으로 응공이라고도 한다.

    부처님으로부터 미륵불이 출현할때까지 중생을 교화하라는 수기를 받은 분들이다. 일반적으로 석가여래와 16나한상을 모신 전각을 응진전이라고 하며, 석가삼존불과 500나한을 모신 전각은 나한전이라고 한다. 여기서 500이란 숫자는 부처님이 열반하신 후에 마하가섭이 부처님 생전에 설법하신 내용을 정리하기 위해 제1차 경전결집을 위한 회의를 진행했을 때 칠엽굴에 모인 비구(아라한)가 500명인데서 유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