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총 14 건

소개
  1. 백련사 응진전
    작성자/작성일
    두레박 24-06-07

    응진(應眞) 이란 존경받고 공경받을 만하다는 뜻이다.

    응진당은 나한전이라고도 불리며, 석가모니 부처님을 중심으로 16나한상과 영산회상도를 봉안하고 있다.

    16나한은 수행을 통해 모든 허물이 사라지고 번뇌가 없이 자유로운 마음을 가지신 분으로, 미륵보살이 다시 이 세상에 오기 전까지 이곳에 머물면서 불법을 호소하고 불자를 구제하라는 부처님의 명을 받들어 아직 이 땅에 현존한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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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백련사 부도전
    작성자/작성일
    두레박 24-06-07

    천연기념물 제51호로 지정된 동백나무 숲 안에는 고려, 조선 시대의 부도가 곳곳에 숨바꼭질하듯 흩어져 있다. 부도란 스님들이 열반에 드신 후 다비식을 해서 나온 사리들을 모셔놓은 탑이다. 동백숲 안에는 원묘국사증진탑으로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23호인 강진백련사원구형부도(康津白蓮寺圓球形浮屠), 대웅보전을 중수하신 월인당 총신 스님의 부도, 그리고 이름을 알 수 없는 2기의 부도가 있다. 이 외에 백련사에는 응진전 앞에 춘파당 부도, 철 입구 축대 위 부도, 그리고 명부전 앞에 부도의 잔해가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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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백련사 삼성각
    작성자/작성일
    두레박 24-06-07

    삼성각에는 독성탱화와 칠성탱화, 그리고 1931년에 그려진 산신탱화가 모셔져 있다.

    삼성각은 불교가 한국의 민간신앙을 받아들여 만들어진 전각으로, 만덕산 삼성각은 예로부터 큰 인물이 많이 나온다고 해서 자손들을 위해 기도하는 부모들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특히 산신탱화는 일제 강점기에 그려진 것으로 소나무 아래에서 부채를 들고 있는 산신령과 까치 호랑이, 그리고 지팡이 끝에 물병을 매달고 있는 동자가 민화풍으로 친근하게 묘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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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백련사 만경루
    작성자/작성일
    두레박 24-06-07

    멀리 보이는 푸른 바다 티끌 없는 거울이나
    울 옆의 긴 대 바람에 소리내고
    난간 앞의 그윽한 꽃 눈 속의 봄이라.

    조선 성종대의 문인 김유가 백련사 만경루에 올라 쓴 시이다.

    만경루는 오랜 세월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아온 누각으로, 만경루에서 바라보는 백일홍 너머 구강포 바다는 남도의 정취를 물씬 느낄 수 있는 풍경을 자랑한다.

    예전에는 스님들이 이곳을 선방 삼아 수행을 했으나 지금은 템플스테이 수련 공간으로 쓰이면서 백일홍이 활짝 피는 날 ‘만경루 작은 음악회’ 등의 문화행사 공간으로도 활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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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스님의 법명은 혜장(惠藏), 호는 연파(蓮坡) 또는 아암(兒庵)
    작성자/작성일
    두레박 24-06-07

    아암 혜장(兒庵 惠藏 1772~1811)은 조선 최고의 실학자인 다산 정약용과 한국 차 문화 중흥조 초의스님과 차에 의해 깊은 연관을 맺은 선사로 우리에게는 다산이 혜장에게 차를 달라고 지은 ‘걸명소’라는 시로 알려졌다. 다산은 강진에 유배되던 당시 백련사의 주지로 있었던 혜장스님과 수시로 만나 차를 즐기며 인간적인 대화에서부터 학문적인 토론에 이르기까지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또한 혜장은 다산에게 경학을 배우고 차를 권유하여 다산으로 하여금 차 생활을 알게 하였다.

    스님의 법명은 혜장(惠藏), 호는 연파(蓮坡) 또는 아암(兒庵).

    속명은 김홍조(金弘祚), 자(字)는 무진(無盡)인데 초명(初名)은 팔득(八得)이라고 하였다. 다산이 쓴 비문에 의하면 혜장선사는 지금의 해남 화산방 사람으로 어려서 출가하여 춘계 천묵선사에게서 가르침을 받았다. 천묵선사는 외전에도 해박하였다고 한다. 혜장선사가 불교 외에 유학 등에 식견이 높은 것은 천묵선사의 영향을 받았으리라 짐작된다. 혜장선사는 혜지가 뛰어나 수행한 지 몇 년 만에 스님들 사이에 이름을 떨쳤다고 한다.

    스님이 아암이란 호를 갖게 된 것은 다산이 유달리 고집이 세고 자존심이 강한 혜장에게 “자네도 어린아이처럼 유순할 수 없겠나?”하고 책망하자 스스로 호를 아암(兒菴)이라고 지어 불렀다고 한다. 혜장스님은 법랍 40세 밖에 살지 못했다. 다산은 스님의 열반을 아쉬워하며 시를 읊었다고 한다. 혜장은 『역경(易經)』을 중심으로 유학의 경전에 대한 공부가 심오하여 사대부들과의 교류가 대단히 많았다. 다산, 추사를 위시하여 명공거경들과 시문을 나누고 선문답을 하면서 우의를 공고히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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