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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회암사지 당간지주
    작성자/작성일
    두레박 24-0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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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목 : 향토유적 제13호
    소재지 : 경기 양주시 회암동 산14-1
    시대 : 조선시대

    회암사지의 첫 번째 석축 모서리의 동쪽에 한 쌍,서쪽에 외짝 당간지주가 나란히 서 있다. 모두 넘어져 묻혀 있던 것을 1981년 9월 복원하였는데 정확한 원래의 위치는 알 수가 없다. 한 쌍으로 이루어진 서쪽 당간지주는 높이 325cm, 가로 52cm, 세로 58cm이며, 동쪽의 외짝 당간지주는 높이 325cm, 가로 61cm, 세로 55cm이다. 모두 황갈색의 화강암으로 만들어졌다.

    정두부는 사분원을 그리지 않고 수평으로 처리되었으며, 외측면도 볼록하지 않고 평평하게 다듬어져 있다. 그리고 당간을 가운데 세울 때 필요한 간공이나 간구가 내측면의 중앙부 및 정상부에 있어야 하는데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고려말이나 조선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모서리 처리는 내측면의 양쪽만 모죽임을 하였다. 당간좌는 보이지 않는다.

    당간지주가 있는 석축의 동쪽 15m 지점에는 높이 147cm,상면의 가로122cm, 세로 110cm, 두께 118cm, 하면의 가로 132cm, 세로 128cm, 두께 136cm의 당간지주석이 있다. 밑변이 넓고 올라갈수록 좁아진 사다리꼴의 지주석이며, ㄷ자형의 일석으로 안쪽이 비어 있어 깃대를 세울 수 있게 되어 있다. 주로 절의 입구에 괘불을 걸기 위한 시설로 생각된다. 이런 형태의 당간지주가 망월사에도 남아 있는데 모든 모서리는 모죽임을 하였고 양쪽으로 관통된 지름13~14cm의 둥근 간공이 위 아래에 있다.

    지주는 각 면에 아무런 장식없이 정연한 치석수법을 보이고 있는데 상단부로 갈수록 조금씩 가늘게 처리하였고, 지주 외면 외곽모서리는 6~7cm정도로 모를 깎았다. 지주 정상부도 평평하게 수평으로 다듬어져 있다.

    출처 : 문화재청 및 양주시청

  2. 회암사 지공선사
    작성자/작성일
    두레박 24-05-23

    서천국제납박타존자지공대화상(西天國提納薄陀尊者指空大和尙)

    인도의 승려로 법명은 제납박타(提納薄陀:禪賢)이다. 가섭(迦葉)으로부터 108세라고 한다. 인도의 동북지방 갠지즈강 유역에 위치했던 마가다국 만왕(滿王)의 왕자로 태어나 8세 때 중동부 인도에 위치한 나란다사 율현(律賢)에서 출가하였다. 19세때 남인도 능가국 길상산의 보명(普明)에게 의발(衣鉢)을 전해 받고 인도를 떠나 중국으로 왔다.

    고려에서는 1326년 3월부터 1328년 9월까지 머물렀으며 이때의 기록은 고려시대의 기록이나 조선전기의 지리지에서 찾을 수 있다. 비록 오랜 기간이 아니지만 고려 불교계에서의 그의 족적은 상당하다. 그는 1326년 3월 개경의 감로사(甘露寺)에 도착하였고, 금강산에서 법기보살도량(法紀菩薩道場)을 개최하였는데 이는 원 황실을 위한 불교의식이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금강산을 유력한 뒤 개경 동쪽의 숭수사(崇壽寺)에 주석하며 많은 사람들에게 계를 주었다. 1327년 10월에는 경원(慶原)을 저쳐 화산(華山)을 다녀 왔고, 이듬해 2월 통도사를 유력하였으며, 7월에는 연복정(演福亭)에서 계율을 설법했다.

    이밖에 영산현(靈山縣)ㆍ장단현(長湍縣) 등 여러 곳에서 그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나옹에게 천축(天竺)의 나란다사와 그 지세가 같다고 말하여 회암사의 중창동기를 제시하고 있음은 회암사도 그가 유력한 곳임을 의미한다. 회암사는 그가 고려에서 가장 중요시하였던 사원이었고, 대표적 계승자인 나옹이 중창하고 그의 석비와 부도를 세웠다. 이곳은 조선전기에 가장 큰 사원으로 그의 법통을 이은 고승들이 주석하면서 불교계의 주류를 이루었다. 화장사에는 그의 소상(塑像)뿐 아니라 유물이 밀집되었고, 묘향산의 안심사에도 그의 부도가 있다. 회암사에 남북으로 반대방향으로 임진강과 한강의 중부지역에 각각 자리잡은 화장사와 신륵사는 그의 기념사원이거나 문도와 특별한 관계가 있었다.

    원나라에 돌아가서는 대부대감 찰한첩목아(察罕帖木兒)의 부인인 고려인 김씨가 세운 법원사에 머물렀다가 귀화방장(歸化方丈)에서 입적하였다. 1367년 보암장노(普菴長老)에 의해 그의 입적이 고려에 알려졌고, 1370년 사도(司徒) 달예(達叡)가 유골을 받들고 고려에 오자 왕이 직접 지공의 두골을 머리에 이고 궁중으로 옮겼다고 한다. 그리고 1327년(공민왕 21) 왕명으로 회암사에 사리탑을 세웠는데, 이색이 지은「서천제납박타존자부도명」이『목은집』에 전한다.

    나옹ㆍ백운화상(白雲和尙) 경한(景閑)ㆍ무학 자초(無學 自初)ㆍ대지국사 지천(大智國師 智泉)등이 대표적인 그의 문도이다. 나옹은 왕사(王師)로 책종되었고, 나옹의 문도인 환암 혼수와 무학 자초는 조선개국을 전후하여 가장 영향력이쓴 고승이었다.

  3. 회암사 나옹선사
    작성자/작성일
    두레박 24-05-23

    고려국공민왕사나옹대화상(高麗國恭愍王師懶翁大和尙) (1320-1376)

    영해 출신으로 성은 아씨(牙氏), 속명은 원혜(元惠)이며, 휘는 혜근(慧勤)이다. 나옹과 강월헌(江月軒)은 호이고, 시호는 선각(先覺)이다. 1340년(충혜왕 1) 친구의 죽음에 무상함을 느껴 공덕산 묘적암에서 요연(了然)선사에게 출가하였다. 또 1344년에는 수도하며 회암사에서 큰 깨달음을 얻고 이곳에 우거하고 있던 일본 승려 석옹(石翁)에게 이를 인가받았다.

    1347년(충목왕 3)에는 원나라에 가서 연경의 법원사에 머물며, 4년여를 지공에게 수학하였다. 1350년(충정왕 2) 평강의 휴휴암ㆍ자선사를 유력하였고, 이듬해 명주 모타낙가산에서의 관음보살 친견, 육왕사에서의 석가모니 예배, 승려 무상(無相)ㆍ고목영(枯木榮)과의 법론 토론, 1352년 복룡산의 천암장(千巖長) 방문 등 수도에 정진하였다.

    원의 순제(順帝)에 의해 연경 광제선사의 주지로 임명되어 개당(開堂)법회를 열고 금란가사를 하사받았으나 주지의 소임을 내놓고 다시 지공을 찾아 보고 1358년(공민왕 8)에 귀국하였다.

    오대산 상두암에 은거했다가 공민왕의 청으로 잠시 신광사에 머물며 후학을 지도하였다. 공부선(功夫選)의 시관을 역임하고 구월산ㆍ용문산ㆍ원적산ㆍ금강산 등을 순력한 뒤 회암사의 주지가 되어 1371년에는 왕에게 금란가사ㆍ내외법복ㆍ바리 등을 하사받고'왕사 대조계종사 선교도총섭 근수본지중흥조풍복국우세 보제존자(王師 大曹溪宗師 禪敎都摠攝 勤修本智重興祖風福國祐世 普濟尊者)'에 봉해졌다. 이후 잠시 송광사에 머물다가 다시 회암사주지가 되어 절을 중창하고 1376년(우왕 2)에는 문수회(文殊會)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왕명에 따라 밀양의 영원사로 가던 중 여주 신륵사에서 입적하였다.

    철저한 불이(不二)사상의 토대에서 선(禪)을 이해했고, 전통적인 간화선(看話禪)을 기본으로 임제종의 선풍을 도입하여 고려말 침체된 불교계를 일신시키려고 노력하였다. 적극적인 사회참여와 하화중생(下化衆生)의 보살도를 강조하기 위해 육대서원(六大誓願)을 세우기도 했다.

  4. 회암사 무학대사
    작성자/작성일
    두레박 24-05-23

    조선국태조왕사무학대화상(朝鮮國太祖王師無學大和尙) (1327-1405)


    삼기(三岐:합천군 삼가면)출신으로 속성은 박씨이고, 휘는 자초(自初), 당호는 계월헌(溪月軒)이다. 1344년(충혜왕 5) 소지(小止)에게 출가하였고, 혜명국사(慧明國師)에게 불법을 배우며 부도암에 머물다가 1346년(충목왕 2)『능엄경』을 읽다가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이후 진주 길상사ㆍ묘향산 금강굴 등을 유력하고, 1353년(공민왕 2) 연경으로 가서 지공에게 배웠으며, 이듬해 법천사에서 나옹을 처음 만난 후 무령 오대산ㆍ서산 영암사 등으로 나옹을 찾아가 수도하였다. 1356년 귀국하였으나, 나옹 또한 귀국하여 천성산 원효암에 머무르자 1359년(공민왕 8) 다시 찾아가 나옹이 전하는 불자(佛子)를 받았고, 1371년(공민왕 20)에는 송광사에서 나옹에게 의발(衣鉢)을 받기도 하였다. 1376년(우왕 2) 회암사의 중창이 끝난 후 나옹이 그를 수좌로 삼으려고 하자 사양하였고, 나옹이 입적하자 명산을 유력하며 자취를 감추고 왕사로 삼고자 하는 공양왕의 뜻을 사양하였다.

    1392년 조선이 건국되면서 왕사에 책봉되었고,'대조계종사 선교도총섭 전불심인 변지무애 부종수교 홍리보제 도대선사 묘엄존자(大曹溪宗師 禪敎都摠攝 傳拂心印 辯智無碍 扶宗樹敎 弘利普濟 都大禪師 妙嚴尊者)'라는 호를 받았으며, 태조의 명에 따라 회암사에 머물렀다. 1393년 지공과 나옹의 사리탑을 회암사에 건립하는 수탑(壽塔)을 세우고, 이듬해 용문사로 들어갔다가 1402년(태종 2) 다시 회암사에 잠시 머물다가 금강산 진불암을 거쳐 1405년 금강암에 거처하다가 입적하였다.

    이성계의 꿈을 풀이하여 왕이 될 것을 예언했다거나, 한양 천도와 관련한 풍수설화 등에서 조선 태조와의 밀접한 관계를 짐작할 수 있다. 특히 조선 건국 직후에는 태조에게 유교와 불교의 작용이 다르지 않음과 백성의 어버이로서의 태도를 설법하기도 하였다.

  5. 회암사 월초대화상
    작성자/작성일
    두레박 24-0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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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초화상 (1858~1934) 은 속명이 거연 ( 巨淵 ) 으로 서울에서 태어나 15 세 때 경기도 양주의 봉인사 부도암에서 환옹 환진스님에게 출가하였다. 1892 년 남한총섭 ( 南漢摠攝 ) 이 되고 , 이듬 해에는 북한총섭이 되어 전국 승군을 총괄하였다.1894 년 갑오경장 때 승군제도가 폐지되었으니 스님이 마지막 총섭이 되는 셈이다.

    1900 년에는 은평구의 수국사 ( 守國寺 ) 를 대규모로 중창하였고, 이후 화계사에 머물면서 개화사상과 신문화에 대한 깊은 관심이 싹텄다. 재래의 불교를 탈피하고 일본의 발달된 포교방식을 받아들여 한국불교를 혁신시켜 근대화하기 위해 스님은 이보담 및 이동인 등과 뜻을 같이하였다

    스님은 이들과 함께 1902 년 동대문밖에 원흥사를 창건하여 전국 사찰의 관리서를 두었다. 1904 년 원흥사가 문을 닫게 되자 이곳의 전각 일부와 불상 불화 등 불구 일체를 봉선사로 옮겼다. 지금도 봉선사에 남아있는 칠성탱화와 독성탱화 등은 본래 원흥사에서 조성된 것들이다.

    스님은 한국불교의 발전을 이루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근대적 교육이 필요함을 절감하고 1905 년 원흥사 자리에 동국대학교의 전신이 되는 명진학교를 설립하였다. 1906 년에는 봉선사의 교종판사가 된 후 줄곧 봉선사에 머물며 1926 년까지 꾸준히 가람을 중수하고 제자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1934 년에 집적하니 나이 77 세, 법랍 63 년이었다. 스님은 한국 근대불교의 선각자였고 당대 제일의 강백 ( 講伯 ) 으로서, 운허 용하 (1892~1980) 스님도 그의 가르침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