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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선암사 조사전
    작성자/작성일
    두레박 24-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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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종 사찰에서 그 종파를 연 조사(祖師)를 봉안한 곳이다. 조사당이라고도 한다. 조사전이 없는 절에서는 영각(影閣)을 짓고, 국사를 배출한 절에서는 대신 국사전(國師殿)을 짓기도 한다. 고려시대 16국사를 배출한 송광사가 국사전을 짓고 16국사의 영정을 모시는 것이 그 예이다. 영각을 지은 사찰은 그곳에 이름 있는 선사의 영정을 모시고 제의를 받는다. 교종이 소의경전에 근거를 두고 있는 데 반하여 선종은 이심전심(以心傳心)의 심법에 의지하는 바 크다. 때문에 법을 전하는 스승이나 전해 받는 제자나 눈에 보이는 어떤 것이 아니라 서로 마음으로 깨달음의 정도와 경계를 증명하고 인증 받아 법을 전한다. 이른 인가(印可)라 한다.


    후일에 의발(衣鉢)을 전하는 제도나 인가의 제한이 사라졌지만, 처음에는 한 제자에게만 인가를 하고 그 징표로서 의발을 전하였다. 이에 따라 자연스레 생긴 것이 일종일파(一宗一派) 사자상전(師資相殿)의 기풍이며, 이 때문에 문종 스승에 대한 공덕이 깍듯할 수 밖에 없었다. 그 중에서도 조사에 대한 존숭을 더하여 부도(浮屠)를 세우고 탑비를 건립하는 외에 사찰 경내에 따로 전각을 지어 영정을 봉안하고 제의를 받들었다. 이렇게 조사를 존숭하기 위한 전각이 바로 조사전이다.


    조사전은 사찰 내의 가장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는데, 살림집에서의 가묘(家廟)나 유교 서원의 후묘선학(後廟先學) 배치법을 따른 것이다. 이는 조령(祖靈)과 생령(生靈)이 한자리에 모여 살고 있음을 표방한 것이며, 후인들이 선인이 가던 길을 따르고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또 건축 구조상으로는 한국 사찰에서 보이는 층단식 가람배치에서 가장 깊은 곳은 가장 높은 곳이며, 아래로부터 올라오던 동선이 우주공간으로 승화하는 곳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2. 선암사 용왕단(龍王壇)
    작성자/작성일
    두레박 24-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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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찰에서 용왕 또는 용신을 모셔 둔 사당을 말한다. 사찰에서 용은 주로 법당 안팎에 조각이나 그림으로 그려져 있는데, 더러는 별도로 단을 두고 상(像)을 만들어 모시기도 한다. 해안이나 섬에 있는 사찰에는 그러한 예가 흔하다. 용은 고대 인도의 사신(蛇神) 신앙에서 발생한 것으로, 불교에 수용된 뒤에는 불법(佛法)을 수호하는 신으로 자리 잡았다.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불법이 가 나라로 전파되면서 점차 형상이 바뀐 점이다. 특히 발톱의 수가 그렇다. 인도의 용은 발톱이 6개, 중국은 5개, 우리나라는 4개, 일본은 3개이다.


    용은 불교 이외에 민간신앙에도 자리 잡았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 진평왕 때 용왕에게 기우제를 지냈다고 하며, 이때 용왕단이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나라에서 용왕도량을 열기도 한 고려시대에는 용왕단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용왕도량은 3~7일 동안 열리는데, 궁전이나 사찰 또는 선상에서 《운우경(雲雨經)》을 독송하였다고 한다.


    사찰에서 불경을 보관하는 건물을 해장각(海藏閣) 또는 해장보각(海藏寶閣)이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용왕과 깊은 관련이 있다. 사람들이 불법을 믿지 않을 때가 오면 용왕이 세상의 모든 불경을 용궁에 모아 놓고 지킨다고 해서 붙은 명칭이다.

  3. 선암사 산신각(山神閣)
    작성자/작성일
    두레박 24-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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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신을 모시는 전각이다. 사찰에 따라서는 산령각(山靈閣)이라고도 부른다. 또 삼성각(三聖閣)을 두어 칠성신·독성(獨星)과 함께 모시는 경우도 흔하다. 본래 산신은 도교에서 유래한 신으로, 불교가 전래되기 전에 많이 듣던 토착신이다. 특히 산지가 70%나 되는 한국에서는 삼국시대부터 조선말에 이르기까지 산신신앙이 널리 유행하였다. 이 산신이 불교에 수용되면서 호법신중(護法神衆)의 세계로 들어와 신중탱화의 중단 내지 하단에 자리 잡다가 나중에는 그 기능이 강화되어 단독으로 모셔진다. 그 중에서 산신은 한국 민족 신앙의 주요 대상으로서 우리의 생활공간으로 바짝 다가왔던 토속 신앙이다.


    불교가 대중화되기 시작한 것은 삼국시대부터이므로 산신도 비교적 일찍 불교에 수용되었을 것을 여겨지나, 산신각이 세워진 것은 조선 중기 이후부터이다. 대개 전각의 뒤쪽에 세우며, 크기는 정면1칸, 측면 1칸이 보통이다. 산신각 내에는 산신을 그린 탱화를 모시는데 대개 흰 수염, 대머리, 긴 눈썹이 휘날리는 모습으로 표현된다. 손에는 하얀 깃털부채나 파초선·불로초 등을 들고 있고 주로 봉래산·영주산·방장산 등의 삼신산을 배경으로 한다.


    한라산이나 속리산·계룡산·지리산 등지의 사찰에는 드물게 여자 산신을 모시는 경우도 있다. 여자 산신은 트레머리에 댕기를 두르고 치마저고리를 입고 있다. 호랑이에 걸터앉거나 기대고 있는 모습이며, 손에는 대개 불로초를 들고 있다. 이 밖에 북건(福巾)이나 유건(儒巾)·정자관(程子冠)을 쓰고 지팡이를 든 유교적 산신도 있고, 삭발한 스님이 《묘법연화경》과 같은 불경을 들고 있는 불교식 산신도 흔하다. 이 경우 의상은 가사와 비슷하나 적.녹색이 주류를 이룬다.

  4. 선암사 칠성각
    작성자/작성일
    두레박 24-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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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앙에 치성광여래를 두고 좌우에 일광보살과 월광보살, 그리고 상단 좌우에 칠 여래, 하단 좌우에 칠원성군이 배치 되어 있다.
    중앙에 치성광여래(치성광여래)를 두고 좌우에 일광보살(일광보살)과 월광보살(월광보살), 그리고 상단 좌우에 칠 여래, 하단 좌우에 칠원성군이 배치되어 있다. 칠성의 역할은 다음과 같다.


    제 1성(성)은 자손에게 만덕(만덕)을 주고,
    제 2성(성)은 인간의 장애와 재난을 없애주며,
    제 3성(성)은 업장을 소멸시켜주고,
    제 4성(성)은 구하는 모든 것을 모두 얻게 하며,
    제 5성(성)은 일백 가지 장애를 없애주고,
    제 6성(성)은 복덕을 두루 갖추게 하며,
    제 7성(성)은 수명을 오래도록 연장시켜 준다.


    사찰의 전각을 그 중요도에 따라 상단·중단·하단으로 나눌 때 하단에 속하는 전각이다.
    도교에서 유래한 칠성신을 모신다. 칠성신은 옛날부터 우리나라 민간에서 재물과 재능을 주고 아이들의 수명을 늘려주며 비를 내려 풍년이 들게 해주는 신으로 믿어왔다. 이 칠성신이 불교에 흡수되면서 처음에는 사찰의 수호신으로 자리 잡았다가 점차 본래의 기능을 되찾아 별도의 전각인 칠성각에 모셔지게 되었다. 정면 1~2칸, 측면 1칸으로 대부분 규모가 작지만, 삼성각이라고 해서 칠성신을 산신·독성과 함께 모실 때는 칠성만을 모시는 전각보다 크게 짓기도 한다.
    남극노인성 등 하늘의 천체와 관련있는 신들이 나오는 경우가 흔하다. 전각의 명칭칠성(칠성)은 구체적으로는 탐랑·거문·녹존·문곡·염정·무곡·파군의 일곱 별로, 각각 부처로 바뀌어 칠 여래가 되는데. 예를 들면 제칠파군성군약사유리광여래는 칠성 중 파군이 여래로 바뀐 것이다.

  5. 선암사 괘불탱
    작성자/작성일
    두레박 24-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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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목 : 문화재 자료 27호(부산)
    지정일 : 2014.10.4
    분류 : 유물, 불교회회, 탱화, 불도
    시대 :일제강점기


    1957년 간행된 '부산교육'이라는 잡지에 게재된 내용에 따르면 당시 이 지역 학교 교사들이 조사한 것으로 극락전 불존불에 철불석가모니상이 모셔져 있는데 원효대사께서 인도에서 모셔온 철불(鐵佛)이라고 전해온다고 하였고 150여 년 된 원효대사 초상화가 있다고 조사되어 있다. 이 철불에 대한 기록이 1966년 발간된 개항90년과 1969년에 발행된 부산의 고적과 유물에도 그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까지도 있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이불상의 행방을 알 수 없다. 아마 이불상이 있었다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철불상의 하나로서 그 문화재적 위상으로 선암사의 사격이 한층 높아졌을 것이다.


    더욱이 원효대사 초상화 불화도 그 행방을 알 수 없다. 1969년 당시 선암사의 경내 전각은 극락전 외 소림당(小林堂) 칠성각(七星閣) 산신각(山神閣) 독성각(獨聖閣) 삼성각(三聖閣) 등 6동(棟)이 배치되어 있었다고 하며 특히 독성각 중앙의 나한상(羅漢像)은 500년 이상 된 고불(古佛)이라고 전하고 있다. 현재 대웅전 뒤 극락전 영역 마당 한쪽에 석탑 옥개석 3개가 있는데 개략적 형태로 보아 신라시대 석탑부재로 보이는데 원래 견강사에 있던 석탑을 이곳으로 옮겨 놓은 것으로 짐작된다.


    이 괘불은 1926(불기 2953)년 금어편수(金魚片手) 소가(小可) 비구(比丘) 구봉경운(龜峰鏡雲)에 의해 조성된 것으로 화기에 ‘미륵존상(彌勒尊像)’이 라고 기록되어 있다. 도상은 화면에 거신형 광배를 지고 본존이 입상으로 꽉 차게 표현한 것이다.


    방형얼굴에 높은 육계, 큼직한 계주, 또한 이목구비는 도식적으로 정돈된 느낌이 강하다. 왼손은 손바닥을 위로 향하고 오른손은 시무외인으로 마치 꽃가지를 받쳐 드는 형태로 표현하고 있다. 의습도 적색을 중심으로 녹색과 군청을 회색의 군의에서 음영을 강하게 사용하고 있다. 얼굴과 가슴과 두 팔, 두 발 등에서 윤곽에 음영을 사용하여 서양식의 명암법을 사용하고 있다. 두발은 연화대좌에 직립하고 있어 직선적인 느낌이 든다. 광배는 녹색의 두광과 광선문의 신광이 결합된 거신형 광배이다.


    이 괘불은 생경한 얼굴의 표현과 명암, 직립된 자세, 탁한 색채 등은 조선 말기에서 근대화로 변화되는 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 같은 해에 조성된 충남 향천사(香泉寺) 괘불(1926년) 금호당(金湖堂) 약효(藥效)가 표현한 둥근 얼굴과 뾰족한 유계, 유난히 작게 표현한 두 손 등과는 다른 충청도 일원과 경상도의 지역적인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화기의 “세존응화이천오십삼년병인이월 동래군서면 선암신화성(世尊應化二千五十三年丙寅二月 東萊郡西面 仙巖新畵成)/미륵존상잉봉안간본사(彌勒尊像仍奉安刊本寺)" 정확한 기록이 남아 있어 당시의 도상적인 특징을 살필 수 있다. 조선말기에서 일제 강점기의 즉 20세기에서 21세기까지 괘불이 15여점이 전해오는데 대부분 영산회상도의 개념이지만 여래형이면서 시무외인을 짓거나 꽃가지(용화수)를 들고 있는 모습이어서 미륵불일 가능성이 있다. 예를 들면 개운사(開運寺) 괘불(1879년), 내원암 괘불(1885년), 봉은사 괘불(1886년), 화장사(華藏寺) 괘불(1901년)은 여래형에 꽃가지(용하수)를 들고 있어 미륵존불로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남양주 흥국사(興國寺) 괘불, 망월사(望月寺) 괘불, 해인사(海印寺) 괘불 등은 시무외인(施無畏印)의 수인을 하고 있어 미륵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부산 선암사 괘불의 화기 기록을 통해 조선후기에서 말기까지 괘불의 도상은 영산재를 지내는 영상회상도의 개념에서 현재와 미래를 상징하는 의미로써 "미륵불"과 미륵보살이 대중적인 관심을 끌고 있었다는 점을 살필 수 있다.화기에 많은 시주자들의 명단으로 보아 대규모의 괘불 조성이 이루어 졌을 것으로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