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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1. 보문사 석굴암 만든이들
    작성자/작성일
    두레박 24-06-11

    긍탄스님
    비구니의 영원한 어머니 긍탄스님


    서울 성북구 보문동에 위치한 탑골승방 보문사를 총본산으로 하고 있는 대한불교 보문종은 세계적으로 유일하게 비구니스님들로만 구성된 종단이다. 보문종에서는 현재 설월당 긍탄스님을 창종주로 모시고 있는데, 일찍이 현실자각과 의식있는 비구니들을 양성하여 그들을 중심으로 불교중흥에 앞장설 수 있도록 그 터전을 마련 하고자 했던 긍탄스님의 원력이 비구니 종단의 창종으로 이어졌다고 할 수 있다.

    스님은 7세의 어린나이로 출가해 한 평생 생활 그 자체로써 정진수행의 면모를 보여주어 지금도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스님의 유업을 받들어 오늘도 여법한 비구니 종단으로서 사회사업에 앞장서고 있는 보문종은 현재 40여 개 말사에 200여명의 비구니 스님과 5만 여명의 신도를 확보 하고 있다. 교세로 볼 때 그리 크다고 할 수 있는 종단은 아니나, 종도간의 우애와 화합이 가장 잘되고 있는 종단으로 손꼽는데 누구도 주저 하지 않는다.

    한평생 고고한 삶

    최초로 비구니 승단의 위상을 정립한 후 세납 96세의 일기로 고고한 삶의 여정을 마친 긍탄스님은 1885년 4월15일 서울 성동구 왕십리에서 부친 경주 이씨 춘근과 모친 순흥 안씨 3남매중 고명딸로 태어났다. 어려서 부친이 돌아가시자 1891년 8월 모친에 의해 세장(世長)스님을 은사로 보문사에서 출가하게 되니, 나이 겨우 7세였다. 그 후 모친께서도 강원도 철원 보개산 석개암으로 출가해 『금강경』 과 『관음경』을 하루 한편씩 독송하는 한편 문수 지장, 관음주력과 여러 곳의 선방에서 화두 정진에 몰두해 당대의 고승 한암스님으로 부터 칭송을 받을 정도였다고 전한다. 따라서 모친의 본분사가 스님의 수행에 많은 지침이 되었을 것이라는 추이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모친의 영향에 힘입은 스님은 18세 되던 해인 1902년 금강산 장안사 주지 벽하스님께 사미니계를 수지하고, 1903년 동학사에서 사집과 수료 후 1910년 만화스님께 구족계를 받았다. 이후 동학사에서 경학을 마친 스님은 1912년 보문사 주지로 부임해 33년간 재직하는 동안 정(定)과 혜(慧)를 닦는데 소홀함이 없었다. 스님은 평소 다음과 같은 『초발심자경문』 의 경구를 인용하며 후학을 경책했다.
    3일동안 닦은 마음 천년의 보배요, 백 년 동안 탐한 욕심은 하루아침의 티끌이라.

    三日修心 千載寶 白年貪物 一朝塵 (삼일수심 천재보 백년탐물 일조진)
    스님은 또 “중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공부를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후학들을 향한 스님의 이러한 채찍질은 다름 아닌 자신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오대산 상원사 한암스님 회상에서 거듭 세 철을 나는 것을 시작으로 범어사 대성암, 화엄사 구충암, 수덕사 견성암, 서울 정릉 대원사 등지와 칠불암, 수정암, 윤필암, 부도암 등 전국 각지의 선방에서 안거 수행을 멈추지 않아 당시 칭찬을 아끼는 이가 없었다.
    파거불행노인불수 (坡車不行老人不修)

    당시 스님의 도반이 한국불교계 최초의 비구니 선풍을 일으킨 묘리 법희 스님과 뒤를 이어 비구니 선풍을 진작시킨 만성스님 등이었다는 사실은 스님의 구도열을 미루어 짐작 할 수 있는 대목이다. 지금도 후학들에게 회자되고 있는 하나의 일화는 오늘날 비구 스님들 못지 않는 수행 면모로 비구니 선풍을 진작시킬 수 있었던 본보기가 되고 있다.

    6·25 당시 보문사에서 묘리 법희스님과 함께 수행정진에 몰두하고 있던 어느 날, 인민군의 습격을 받았다. 부지불식간에 일어난 사건이었던지라 대중은 황급히 몸을 감추었고, 경내는 긴장감이 감돌던 터였다. 그러나 두 스님은 추호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선삼매에 들어간 두 비구니스님들의 얼굴은 오히려 차분히 가라 앉아 있었다. 이를 바라보던 인민군들은 감탄해 마지 않다가 조용히 경내를 떠났다. 적도 감화시킬 수 있는 금강과 같은 수행력, 그것이 두 비구니 스님이 후학에게 남겨준 납자의 참모습이었다.

    70세에 이르러서는 피부병을 얻게 되었는데, 스님의 구도정진의 틈새를 피부병이라고 치고 들어 올 수 없는 없었다. 『금강경』과 「츰부다라니」 를 독송한 지 3년만에 완쾌를 보이는 위신력을 시현해 보였던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만년에 이르러서는 ‘수레가 부숴 지면 갈 수가 없듯이 노년에 이르면 수행하기가 어렵다. (坡車不行老人不修)’ 며 젊었을 때 부지런히 공부에 전념할 수 있도록 제자들을 일깨워 주는 일을 잊지 않았다.

    정혜겸수와 불교의식의 전수

    노스님은 비구스님에 버금갈 만큼 뛰어 났으며, 얼굴이 광채를 발하여 거기서 풍기는 기품만 보고서도 신도들의 환희심은 대단했다. 독특한 수행기풍으로 비구들의 의식을 일깨우며 한국불교의 한 축을 형성했던 스님에 대한 손상좌 법준스님의 회고담이다. 법준스님이 회상하는 노스님은 한마디로 비구스님 못지 않는 장대한 기품을 자랑했다. 그러나 남달리 자상한 성품을 갖추고 있었다는 사실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라고 법준스님은 부언한다.

    스님이 보문사 주지로 재직 중이던 어느 날 맏상좌인 은영스님이 탁발을 나간 후 늦은 저녁이 되도록 돌아오지 않은 일이 있었다. 상좌가 무사히 돌아오기만을 초조하게 기다리던 스님은 저녁도 잊은 채 걱정이 태산이었다. 비구니라 할지라도 여자의 몸이라서 항시 조심할 수밖에 없었던 터였기 때문이다.

    그러한 일이 있은 후 은영스님은 “은사스님이 저토록 걱정하시니 내 어찌 탁발을 나갈 수 있겠느냐”며 그로부터 탁발행각을 그만 두게 되었다. 무릇 『부모은중경』 에 자식을 멀리 보내고 기다리는 어머니의 마음을 연상하게 하는 일화가 아닐 수 없다.
    스님은 또 정혜겸수는 물론 몸소 실천불교에 앞장 선 이면에 전통 불교의식에도 남다른 점이 있었다. 나이 11세 때 이미 범패, 바라, 나비 등 불교의식 절차에 모르는 것이 없을 정도로 일가견을 이루었다고 하니, 그래서 붙여진 별명이 ‘탄인도(坦引導)스님’이었다.
    대한불교 보문종의 탄생

    오늘날 비구니 승단의 총림으로서 그 위상을 정립한 보문사의 사격(寺格)은 사실상 스님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데 종도들은 이의를 달지 않는다. 1912년 보문사 주지로 부임하던 시절 당시 절은 말이 아니었다. 오래전부터 절에서 잡일을 해오던 ‘청운’이라는 자가 자기 절의 땅문서를 훔쳐 그걸 판돈까지 다 써버린 일이 발생한 직후 였던지라, 가람을 다시 일으키기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스님은 어이가 없었다. 그렇다고 마냥 주저앉아 있을 수만도 없는 처지 였다. 그 길로 탁발에 나선 것도 업연이라 생각했다.

    당시 우리나라는 일제치하에서 일본 식량공급지로 전락하였고 인심이 흉흉하여 불안한 시기 였다. 때문에 양 어깨에 바랑자국이 나고 발꿈치가 불어 트도록 탁발을 다녀야 겨우 한 되박 정도의 시주밖에 얻을 수 없었다. 그렇게 3년 동안 탁발한 결실로 겨우 절논 아홉 마지기를 마련할 수 있었다. 보문사 중창의 시작이었다. 1917년에 『화엄경』 을 인간(印刊)하여 대웅전에 봉안 했으며, 만세루(지금은 소실됨) 수축과 관음전 신축, 대웅전 보수와 대종주조 등 호구책도 어려운 시기에 지금의 보문사의 기초를 닦아 놓았던 것이다.

    보문사에서 비구니 수행가풍을 떨치며 30여 년간 가람수호에 진력해 오던 스님은 비구니들의 보다 더 응집된 수행력의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급기야 세계적으로 유일한 비구니 승단의 결집이 이뤄지고, 하나의 여법한 종단으로서 그 면모를 일신하니 ‘대한불교 보문종’의 창종이다. 1972년 4월 20일의 일이었다. 스님이 초대종정으로 추대되었고, 오늘날까지 비구니 승단의 정신적 지주로 받들어지고 있다.

    그러나 평생을 비구니의 위상을 정립하고자 혼신을 다했던 스님은 1980년 8월 27일 허상을 거두고 홀연히 열반에 들었다. 세수 96세요 법랍89세였다. 문도들이 스님을 기리고자 유물전을 마련했으나, 애석 하게도 1백일 탈상 후 전기누전으로 전소 되고 말았다. 기이 한 것은 유물전에 모셔진 불상이나 탱화 등은 전혀 불길이 닿지 않은 채 오로지 스님의 유물만 뜬구름 없어지듯 사라졌다는 사실이다.

    손상좌 법준 스님은 “노스님께서는 평소 상을 내는 것을 싫어하셨는데, 아마도 상에 얽매이는 제자들의 어리석음을 일깨워 주고자 몸소 자신의 물건만을 가져가신 것이 아닌가” 라고 말씀하셨다 한다.

    은영스님
    고해에 우뚝 선 원력보살 은영스님 - 보문사 중창 사회복지 원력의 상징


    보암당(寶菴堂) 은영(恩榮)스님은 세계적으로 유일한 비구니 종단 ‘대한불교 보문종’의 창종 주역이요, 비구니계의 무한한 능력 발휘의 상징인 대비구니이다. 정법을 위하여 끝까지 굴복하지 않는 자부심과 참다운 신심으로 생활불교의 이상실현에 앞장섰던 금세기 대표적인 원력비구니로서, 단지 비구니이기 때문에 받은 숱한 서러움을 사찰 중건 불사의 원력과 사회복지사업의 의지로 키워내 오늘날 법륜상전의 묘력이 되고 있는 은영스님은 그대로 한 송이 연꽃이 되어 지금도 뭇 중생들의 귀의처가 되고 있다.
    스님은 1910년 정월 15일 충남 대덕군 북면 미호리에서 부친 송헌대와 모친 박상품화 사이의 넷째딸로 태어났다. 아이가 걸작으로 생겼다 하여 걸례(傑禮)라 이름 했다가 부처님의 은혜를 영광스럽게 하고 삼보의 은혜를 갚을 수 있는 영광된 자리를 마련할 사람이라는 뜻에서 ‘은영’이라고 불렀다.

    1918년 어머니를 따라 계룡산 동학사로 출가하니, 나이 아홉 살이었다. 동학사는 오래 전부터 비구니 스님들의 학문도량으로 이어져 왔기 때문에 스님이 이 절에 왔을 때에도 50여 명의 학인들은 대은(大隱)스님의 강의를 듣고 있었다.
    보문사 출신으로 수년 전부터 이곳에 와서 대교과를 이수하고 있던 긍탄스님을 만나게 되는 인연을 접하게 된 것도 여기서다. 긍탄스님은 일곱 살에 입산하여 수행도덕이 풍만하고 덕행이 원만하여 많은 대중으로부터 공경을 받고 있던 터였다. 스님은 긍탄스님을 은사로 정하고 비구니로서의 행습을 익히기 위한 청규생활에 들어갔다. 출가 이듬해인 1919년에는 만호강백과 대은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수지했다.
    긍탄스님과의 인연

    다시 1년 후인 1920년에 이미 주지로 가 있던 긍탄스님을 따라 서울 보문사로 올라왔다. 보문사로 올라와 보니 절에서 일하던 ‘청운’이라는 자가 사찰 소유의 전답을 다 팔아 챙겨 달아난 후였다. 결국 동냥중이 되어버린 은사스님과 함께 이집 저집을 다니며 탁발로 연명하다시피 하였으며, 밥장사와 나물장사까지 할 수 밖에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그렇게 각고의 고생 끝에 모은 돈과 당시 보문사 근처에 살던 지혜룡, 지운양 부자의 시주금 등에 힘입어 요사채를 신축하고 기울어져가는 대웅전을 중창할 수 있었다. 나이 겨우 19세 때의 일이었다. 법당 중수와 더불어 사중의 고민거리였던 지금의 선불장 뒤에 위치하고 있던 산내묘소 이전문제 등을 해결하고 하니 천하가 통일된 것만 같았다. 그러다보니 떠나갔던 대중이 다시 모여들어 40여 명을 헤아리게 되었다.

    당시 개화물결을 타고 변화되어 가는 사회현상을 바라보던 스님은 마침내 1936년에 보문사에 불교강원을 개설하고, 전북 전주 정혜사 영명스님을 초대 강사로 초빙했다. 이 강원개설은 비구니 대강백 수옥스님을 비롯해 대저술가 안진호스님과 이종익 박사, 이섭 교수, 황영진 선생 등이 차례로 강사직을 역임하며 수많은 비구니 학인들을 배출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보문종의 전 종정 일조 스님과 혜안 스님이 보문사로 온 시기도 이즈음이다. 이에 앞서 스님은 1935년 나이 26세 때 서울 원통사에서 백용성 화상을 계사로 구족계를 수지했다.

    시자원(施慈園) 설립
    보문사에 불교강원을 개설한 스님은 1941년 사집과를 졸업한 후 삼각산 청룡암의 주지로 부임했다. 1943년에는 대교과를 졸업하고 그해 보문사에서 대덕법계위에 당호를 ‘보암(寶菴)’이라 하였다. 1945년에 이르러 급기야 보문사 주지로 취임하면서 오늘날 보문종의 기초를 쌓는 서원 다섯 가지를 세우게 된다.

    첫째, 대지를 매입하여 절 주변 환경을 정리하는 것이요.
    둘째, 절 경계를 이루는 담장을 쌓아 시비의 요소를 제거하는 것이요.
    셋째, 구도의 정신을 바로 세우기 위한 건축불사를 통해 도량을 청정하게 장엄하는 일이요.
    넷째, 도제양성을 통해 불교의 생명을 잇는 것이요.
    다섯째, 복지사업을 통해 명실 공히 대자대비행을 실천하는 일이다.

    이 서원은 머지않아 이루어지게 된다. 스님은 우선적으로 삼성각 대지 3천여 평을 매입하여 앞서 잃었던 절 땅을 다시 확보했다. 또한 사찰경계를 낱낱이 측량하고 이후 13년에 걸쳐 붉은 벽돌로 6척 높이의 담장을 성처럼 쌓아 올렸다. 담을 쌓고 보니 도량이 가을 하늘처럼 드러났고, 시비의 염려는 저녁 연기처럼 사라졌다. ‘억척 비구니’로 불리 우게 된 까닭이었다.

    이렇듯 서원이 하나씩 이루어지면서 보문사가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자 스님은 새로운 경지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은사인 긍탄스님과 함께 불교전통음악인 범패를 배워 부처님의 덕을 찬탄하고 바라, 승무 등 불공의식을 여법히 전수, 계승하고자 함이었다. 탑골승방 보문사가 ‘재받이 스님들이 모인 장소’라는 별칭을 갖게 된 것도 여기서 연유한다. 봉원사, 백련사, 안정사 등 태고종 사찰에 비견 할 만큼 스님의 불교전통 전승의지는 불교의식을 대중화하고 특수화하여 보문사 발전에 큰 영향을 끼친 것은 물론이었다. 특히 스님은 옛 곡조가 든 우리말 법문인 ‘화청’을 잘하여 교단 내에서 이름을 드날리기도 하였다.

    그러한 와중에도 스님은 계속해서 대중을 위한 선방식 법회장소인 선불장을 완공했다. 천연수 개발과 상하 2층 지하 1층의 건물을 불연석으로 지었으며, 특히 지하실의 오밀조밀한 설계는 당시 건축계에 일대 혁명을 일으켜 일본과 중국 불교계에서도 설계도를 가져갈 정도였다. 1958년의 일이다.

    스님의 원력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법보전을 지어 장경을 배치하고, 1962년 산령각 신축, 1969년 범종각 신축 및 대종주조, 1970년 극락전, 호지문, 시왕전, 보광전 등을 건립했다. 그러나 당시 조계종은 총무원이 비구, 대처승으로 나뉘어 서로 대립하는 가운데 순수한 사찰들까지도 모진 바람을 맞는 경우가 빈번하게 발생했다. 보문사도 그러한 사찰중의 하나였다. 그리하여 스님은 비구, 대처 싸움에 휘말릴 것을 우려하여 독립적인 권리능력을 인정 받고 누구한테도 침해를 받지 않게 하기 위한 방편으로 ‘재단법인 보문원’을 설립하기에 이른다. 1971년, 스님의 나이 62세 때였다.

    재단법인 보문원 이사장에 취임한 스님은 법인 첫 사업으로 시자원을 건립하여 한의원 시설 등 스님들의 노후대책과 외로운 노인들을 위한 경로사업의 길을 열었다. 보문종이 사회복지사업의 물꼬를 트면서 대중회향의 전범을 보이는 계기가 여기서 출발하게 된 것이었다.
    석굴암 세워 생활불교 구현

    호국충효, 남북통일, 국태민안 등을 기원한다는 명목으로 경주 석굴암을 보문사 도량에 그대로 재현시킨 ‘보문사 석굴암’은 스님의 원력의 총체로 일컬어지는 건축물이다. 소요된 석채 2천 4백 톤, 철재 25톤, 시멘트 1만포, 연인원 7만여 명이 동원된 이 건축불사는 보문종의 최대 불사로 손꼽힌다. 1970년 8월에 착공되어 1972년 6월에 준공을 한 건물이다.

    당시 불교관련 대석학들은 이 석굴암을 두고 찬사를 주저하지 않았다. 이병도 교수는 “가히 동양문화의 중흥을 위한 방향제시”라고 찬탄했으며, 김원룡 박사와 이선근 박사는 “한국 석불사업의 금자탑이자 조국통일의 심벌”이라고 칭송했다. 또 이기영 박사는 “생활불교의 이상을 재현하였다”고 평가했다.

    스님은 계속해서 1972년 4월 20일에 세계적으로 유일한 비구니 종단 ‘대한불교 보문종’을 창종, 등록하여 초대 종정에 은사인 긍탄스님을 추대하고 총무원장에는 자신이 취임하기에 이른다. 1977년에는 보문사 정문 앞에 지금의 은영유치원과 독서실이 있는 동원정사를 건립하고, 1979년에는 생애 마지막 불사가 된 석가여래 진신사리 묘보탑인 9층 석탑을 조성하면서 스님의 원력불사는 일단락되었다.

    보문사는 이로써 1만여 평의 대지 위에 큰법당, 노전, 삼성각, 산령각, 범종각, 극락전, 호지문, 시왕전, 보광전, 시자원, 석굴암, 관음전, 법보원, 9층석탑 등이 질서정연하게 그 위용을 드러냄으로써 보문시현하고 원력홍심한 관음보살의 대원력을 실천하는 도량이 되었다.
    보암의 덕은 이렇듯 구천에 높이 빛나고 은영의 혜(惠)는 사해에 드날렸음인데 무상이라 무아라, 일생 동안 한국불교를 위한 원력비구니인 은영스님은 애달프게도 1981년 음력 9월 11일 보문사에서 홀연히 사바의 연을 접고 만다. 세수 72세요 법랍 63세였다.
    은영스님 수시법어(隨時法語) - “바로 알고 바로 살라”

    이 세상 모든 것은 인연법에 의하여 만들어져 있다. 스님들이 없었다면 절이 없을 것이요, 죄인이 없다면 교도소가 없고 선한 일을 한 사람이 없다면 천당도 있을 수 없다. 남자가 있으니 여자가 있고 스승이 있으니 제자가 있고 국토가 있으니 인민이 있다. 의사는 환자를 의지하여 존재하고 자식은 부모를 의지하여 존재하고 나무는 땅을 의지하여 존재하니 이 세상 어떠한 것도 고립독존(孤立獨存)하는 것이 없다.

    그런데 이러한 모든 인연이 무엇에 의하여 만들어지고 있느냐, 이것은 오직 한 마음이다. 마음이 시키는 대로 몸이 움직여 갖가지 선악의 업이 지어진다. 그러므로 불도를 믿는 사람은 마땅히 마음을 깨달아야 한다. 바른 마음으로 먹고 바르게 살아가는 사람은 당연히 바른 과보를 받게 되고 비뚜러진 마음을 먹고 비뚜러진 생활을 하는 사람은 비뚜러진 과보를 받게 된다. 길을 낼 때 이 길을 바르게 내느냐 비뚜러지게 내느냐 하는 것은 설계사의 마음에 달려 있듯이 세상 모든 것은 사람의 설계에 의하여 만들어지게 된다.

    사람의 행동은 눈, 귀, 코, 혀, 몸, 뜻 여섯 가지 감각기관에 의하여 나타난다. 눈으로 빛을 보고 청, 황, 적, 백을 가리는 마음, 귀로 소리를 듣고 강하고 부드러운 것을 가리는 마음, 코로 냄새 맡고 좋고 나쁨을 가리는 마음, 혀로 맛보고 짜고 싱거운 것을 가리는 마음, 몸으로 부딪쳐 보고 차고 더움을 가리는 마음, 뜻으로 헤아려 보고 분별 시비하는 마음, 이들 마음에 의하여 인생의 행로가 개척된다. 눈을 둥글둥글 원만하게 쓰는 사람은 보는 세계에 시비가 없고, 귀를 뾰족뾰족 광대하게 쓰는 사람은 곡직(曲直)의 세계에 걸리지 않는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사람에게 여섯 개의 고리가 있으니 그 고리에 틈이 생기면 잠가놓은 쇳대가 흔적없이 빠져 마음의 문을 열지 못하게 된다고 하였다.

    눈도 둥글둥글, 귀도 둥글둥글, 코도 둥글둥글, 입도 둥글둥글, 몸도 둥글둥글, 생각도 둥글둥글 연잎처럼 맑고 깨끗하게 쓴다면 그 사람의 가는 길은 평탄하고 넓을 것이다. 8정도란 다른게 아니다. 이 여섯 가지 감각기관을 바르게 써서 스스로 인연의 올가미에 매이는 사람이 되지 않도록 나아가는 것이다.

    한봉덕 화백
    석굴암을 조성한 한봉덕 화백


    한화백은 1970년 7월 어느 날 오후 화실에서 낮잠을 자는데 큰 용 두 마리가 서로 엉기면서 입에서 불을 내뿜는 꿈을 꾸다가 놀라서 깼다고 한다. 잠시 후 봉원사 불화명장 만봉스님이 들려서 보문사 주지 은영스님이 봉원사에 조성한 석불을 보고 보문사에도 석불을 조성하고 싶다고 적당한 사람을 소개해 달라고 해서 들렸다고 하며 같이 가보자고 해서 보문사를 방문했다고 한다.

    은영스님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은영스님이 “해봅시다!” 하는 약속도 아닌 한마디만 듣고 절을 나서서 집으로 돌아오다 뒤를 문득 돌아보니 일주문에 용두마리가 꿈에서 본 그대로 용트림을 하고 있어서 커다란 인연인가보다 싶어서 바로 경주 석굴암을 방문해서 본존불을 마음에도 새기고 스케치도하고 했다고 한다. 처음엔 본존불만 조성하려고 했으나 한화백이 경주 석굴암을 몇 번인가 다녀오면서 석굴암 전체를 조성하고픈 욕심이 생겨 은영스님을 졸라 지금의 석굴암이 완공되었다고 한다.
    한화백은 조성 후기 심정을 “석공 김대성이 석굴암을 조성하게 된 것은 부모에 대한 효성처럼 보이기만 하나 실은 호국안민의 뜻과 커다란 신심 때문이었음을 여긴다” 며 거대한 불사에 적은 자금과 날마다 노심초사하며 지낸 삼년여년의 시간은 자신에게 평생 잊을 수 없는 귀중한 시간이라고 적고 있다.

    한화백의 석굴암조성 인연 공덕으로 아미타회상에 왕생하셨으리라 믿으며 지금의 석굴암이 모든 불자들의 귀의처가 된 그의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1923년 평북 영변출생
    조선일보사 주최 현대 작가 초대전 창립의원 및 공모전 심사위원 5회
    신상회 창립대표 간사 및 공모전 심사위원 7회
    서울에서 개인전 7회*국제 현대작가전 2회 출품 (동경 국립 미술관)
    동경 올림픽전 출품 (공보부 주관)
    사단법인 한국 청소년 미술 협회이사장
    봉원사 석불조성
    1997년 타계

  2. 보문사의 문화재 - 법화경(法華經)
    작성자/작성일
    두레박 24-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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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화경(法華經)
    종목 : 보물 제 1164-2호
    명칭 : 묘법연화경 권3~4, 5~7 (妙法蓮華經 卷三~四, 五~七)
    분류 : 기록유산 /전적류/목판본
    수량/면적 : 5권 2책
    지정(등록)일 : 2014.01.20

    『묘법연화경』 은 구마라집(姚秦, 344~413년)이 한역한 불교경전으로 『법화경』 이라 약칭하기도 하는데, 초기 대승경전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불교경전으로, 『화엄경』 과 함께 한국 불교사상을 확립하는 데 가장 크게 영향을 미쳤다. 보문사 소장의 이 『묘법연화경』 은 초인본(初印本)이 아닌 후인본으로, 보존 상태가 온전하고, 인쇄 상태와 지질도 뛰어나 자료로서의 가치를 높게 평가받아 보물 1164-2호로 지정되었다. 현재 전하는 것은 법화경 7권 가운데 권3~4와 권5~7을 각각 한 책으로 묶은 것이며, 닥종이에 찍은 목판본으로 크기는 세로 35.6cm, 가로 21.6cm이다.

    이 책들은 조선 전기 왕실에서 주도하여 간행한 불경으로, 김수온(金守溫, 1410~1481년)의 발문에 1472년(성종3)이라는 간행 시기와 세조의 왕비인 정희왕후(貞熹王后)가 죽은 아들 예종(睿宗)을 위해 발간한다는 간해 연유가 분명하게 남아 있고, 보존상태도 원래의 표지만 없어졌을 뿐 온전하다.

    또한 장막동(張莫同), 최금동(崔今同), 고말종(高末終), 이영산(李永山) 등 일류 각수들이 참여하여 판각이 정교하고, 정밀하게 인출하여 먹색이 진하고 고르다. 한 책(권5~7)의 서배(書背)에는 비단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본래 비단 표지의 포배장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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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보문사의 문화재 - 극락보전 영산회상도(極樂寶殿 靈山會上圖)
    작성자/작성일
    두레박 24-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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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문사 극락보전 영산회상도(普門寺 極樂寶殿 靈山會上圖)
    종목 : 서울特別市 有形文化財 第98號
    명칭 : 普門寺 極樂寶殿 靈山會上圖
    분류 : 佛畵
    수량 : 1점
    지정일 : 1996. 9. 30

    보문사 극락보전 내에 있는 이 후불탱화는 석가여래가 법화경을 설파한 영산회상의 장면을 묘사한 불화이다. 가로 140, 세로 180 크기로 비단에 채색하였고, 중앙의 석가여래를 중심으로 아래쪽 좌우에 협시보살인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배치하였다.

    석가여래의 머리 위쪽에는 관음보살과 지장보살을 왼쪽에, 중앙에는 삼존불이 그리고 위쪽 좌우에는 미륵보살과 지장보살이 있으며, 사방 귀퉁이에는 다문천왕, 증장천왕, 광목천왕, 지국천왕의 사천왕이 배열 되어있다.

    주불의 주위로는 10대 제자와 화불 2위를 오른쪽에 배열하였으며, 금강역사나 용왕, 천신의 모습이 생략되어 있고, 사대보살과 사천왕상은 모두 두광을 표현하고 붉은 색을 많이 사용하였는데, 이는 이 시대 불화의 특징이다. 표현기법이 정교하고 구도에서도 좌우대치의 조화를 잘 이루고 있다.

    보문사의 극락보전은 고종 2년(1865)에 중수 되었는데, 탱화는 이로부터 2년 후인 고종4년 (1867)에 그려진 것이다.

  4. 보문사의 문화재 - 극락보전 신중도(極樂寶殿 神衆圖)
    작성자/작성일
    두레박 24-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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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문사 극락보전 신중도(普門寺 極樂寶殿 神衆圖)
    종목 : 서울特別市 有形文化財 第99號
    명칭 : 普門寺 極樂寶殿 神衆圖
    분류 : 佛畵
    수량 : 1점
    지정일 : 1996. 9. 30

    인도의 재래적인 토속신인 신중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다.

    신중은 불교의 토착화 과정에서 수용된 불교의 호법신들인데, 이처럼 별도로 그림을 그려 신앙의 대상을 삼기도 하였다. 우리나라에서 신중탱화는 우리의 고유 신앙과 융합되어 한국적 특색이 표현되고 있다. 보문사 신중탱화는 비단 바탕에 채색하여 그렸으며, 크기는 가로 200, 세로 140이다.

    화면을 상하로 구분하여 제석과 범천은 상단에 용왕은 중단에 위태천(동진보살)은 하단에 배치하였다. 상단에는 제석과 범천을 중심으로 하늘의 천인상을 그려 놓고, 중단에는 산신과 조왕을 비롯하여 중국의 복덕대신, 토지대신, 가람대신과 인도의 야차, 아수라 등 10여 위의 신중이 묘사되어 있다. 하단에는 위태천을 중심으로 천룡, 천왕등 6위가 포함되어 모두 약 30여 위의 호법선신인 신장을 그려 넣었다.

    색상의 사용법, 인물의 표현기법, 제작연대 등은 극락보전 안에 있는 영산회상도와 같다.

  5. 보문사의 문화재 - 지장보살도(地藏菩薩圖)
    작성자/작성일
    두레박 24-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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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문사 지장보살도(普門寺 地藏菩薩圖)
    종목 : 서울特別市 有形文化財 第100號
    명칭 : 普門寺 地藏菩薩圖
    분류 : 佛畵
    수량 : 1점
    지정일 : 1996. 9. 30

    1867년에 그려진 지장보살도는 사람들이 죽은 후의 세계를 주관하는 지장보살을 그린 불화로 시왕도, 현왕도, 삼장탱화와 함께 대표적인 지옥계불화이다. 지장보살은 윤회에서 고통 받는 중생을 구제하고 명부세계를 관장하는데 중국의 시왕사상이 우리나라에 전해지면서 시왕과 같이 신앙의 대상이 되어 그림으로 표현되었다.

    가로 145, 세로 200의 크기로 비단에 채색된 이 불화는 비교적 상세한 화기도 함께 기록되어 있어 당시의 보문사 사정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고 있으며, 19세기 후반의 최고 금어로 꼽혔던 응석스님이 그린 것이다.

    묘승전의 지장탱화는 구도에서 매우 독특한 면을 보여주고 있는데, 화면 중앙에 커다란 원을 그리고 그 안에 지장삼존을 묘사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 커다란 원 좌우에는 도명존자와 무독귀왕을 그리고 위, 아래 두 줄로 시왕을 나누어 배치하였고 위와 아래 네 곳에는 석류를 비롯한 지물을 지닌 동자, 동녀를 각각 배치하였고, 아래쪽에는 판관, 녹사, 우두와 마두, 나찰, 사자등이 역시 위, 아래 두 줄로 대칭을 이루며 벌려 서 있다.

    색상은 붉은색이 주조를 이루고 있으나, 인상적인 것은 화면 중앙에 지장삼존불을 감싸고 있는 전신광의 역할을 하는 커다란 원 안에 칠해진 금니이다. 이 탱화는 조선후기 지장탱화 가운데서 구도의 특이함이나 시왕의 복색 등 여러 면에서 특색이 있는 작품으로 주목된다.
    색상의 사용법과 표현기법, 그리고 제작연대 등은 극락보전 내의 영산회상도, 신중도와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