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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1. 흥덕사지 출토유물 - 귀면와당 조각
    작성자/작성일
    두레박 24-07-21

    귀면와당(鬼面瓦當)은 금당지 북서편 기단부(基壇部)에서 출토된 것으로 전체적으로 회색을 띠고 있으며 마멸된 부분에는 약간씩 검은색이 보인다. 대토는 흥덕사지에서 출토된 와당 가운데 가장 정선된 것으로 모래가 거의 섞이지 않았다.


    현재 주연부(周緣部)는 모두 없어졌으나 다른 귀면와편(鬼面瓦片)에서 살펴보면 높은 주연부에 굵은 연주문(連珠紋)이 조출되었다. 귀면의 눈썹과 동그란 눈은 툭 튀어 나왔고 이마에는 머리털이 2-3가닥 양옆으로 흘러내려져 있으며, 앞면의 절반을 차지한 입에는 이빨과 혀가 비교적 작게 표현되어 있다.


    턱밑에 나타난 수염은 곡선적(曲線的)이며 양 볼에서는 당초문과 비슷한 형상을 하였다. 이 기와는 고려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크기는 현재 직경 13cm, 두께 2.8cm이다.

  2. 흥덕사지 출토유물 - 기타유물
    작성자/작성일
    두레박 24-07-21

    기타의 유물로는 연화문과 귀목문(鬼目紋) 등이 있는 숫막새편과 당초문과 귀목문 등이 있는 암막새편을 비롯하여 통일신라 또는 고려시대의 토기와 청자편(靑瓷片) 등이 다수 수습되어 있다.

  3. 흥덕사지 설명
    작성자/작성일
    두레박 24-07-21

    금당지


    발굴 당시 금당지의 동쪽 끝과 남쪽 끝은 파괴되어 그 원형을 알 수 없었으나, 북면과 서면이 잘 남아있어 이를 토대로 건물의 형태를 복원할 수 있었다. 금당지는 정면 5칸, 측면 3칸의 건물지로 측면의 중앙킨은 다른 칸보다 넓은 편이다.


    기단(基壇)은 원토층이 석비래층 위에 약 117 30 15cm, 37 29 11cm 크기의 화강석을 다듬어 지대석을 놓고 그 위에 65 67 17cm의 면석(面石)을 놓았음이 확인되었으며, 그 위에 갑석(甲石)을 올려놓은 가구식기단(架構式基壇)으로 추정된다.


    주초석(柱礎石)은 굴곡이 심한 부식암반층(腐蝕巖盤層)을 정지(整地)하고 낮은 부분은 진흙다짐을 한 후 주먹 크기의 자갈돌로 적심(積心)을 하고 그 위에 자리잡고 있다. 또한 금당지 건물의 가장 큰 특징은 외곽의 주초(柱礎)는 2단으로 양각된 원형주초를 사용하였고 내부는 모두 방형주초를 사용하였다는 점이다.


    북면의 중앙에 계단석이 남아있으며 계단 양측에 작은 맷돌을 세웠던 홈이 마련되어 있고 작은 맷돌의 잔편이 금당지 서쪽에서 1개 출토되어 모양이 잘 갖추어진 계단으로 추정되는데 남면에도 있었음이 확실시되나 발굴 전에 이미 파괴되었던 듯하다.


    금당지의 기단석 밖으로 석렬을 쌓아 기단 형식의 건물구를 만들었는데, 이는 후에 보수한 건물이라기보다는 건물을 초창할 때의 기단유적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금당의 서북편에는 불에 탄 흔적이 남아있고 토층으로 볼 때에도 불을 먹은 층임이 역력히 나타나고 있어 금당은 화재로 인하여 소실되었음이 확실한 것이다.


    강당지


    금당지에서 북쪽으로 14.5m 떨어져 있는 곳에 화강석으로 잘 치석(治石)된 기단석렬(基壇石列)이 5.6m 정도 나타나고 있는데 이 곳이 바로 강당지의 남쪽면에 해당된다.


    강당지는 현재 남쪽 기단석렬과 적심석(積心石) 일부만 남아있어 강당건물의 규모와 구조는 알 수 없고 금당지와 남북으로 일직선상에 건축된 초창 당시의 유적임이 확실하다.


    고려시대에 중창될 때 강당지는 다시 건축되지 않았으며 서편으로는 상당부분의 다른 건물지가 중복되어 나타나고 있어 현재의 강당지유구는 신라시대의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기단석은 석비례층 위에 바로 올려놓았는데 지반이 낮거나 기단석의 두께가 얇은 부분은 쐐기돌을 박아 수평을 유지시켰다. 기단석렬 위에 60x33x10cm의 면석 1개가 남아있어 강당지 역시 금당지와 마찬가지로 지대석, 면석, 갑석을 사용한 가구식기단으로 생토층(生土層) 위에 바로 지대석을 놓은 양식과 함께 신라시대의 통상적인 양식이다.


    적심은 현재 앞 열에 3기와 중간 열에 1기가 남아있다. 북쪽의 뒤 열은 지표면이 후대의 경작 등으로 낮아져서 유실되었다. 강당의 건물구조는 대략 정면 3칸에 측면 2칸이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서회랑지
     

    금당지에서 서쪽으로 1.4m 지점에 서회랑지의 동면기단축대가 나타나있어 서회랑지는 금당지와 매우 인접해 있는 편이다.


    남북의 길이는 45m, 동서폭대(東西幅臺)는 5m인데 회랑지는 직선형으로 길게 이어져 정면 13칸, 측면은 1칸을 이루고 있다. 이 서회랑지는 초석과 기단 및 고막이 등의 상태로 보아 3구역으로 나눌 수 있는데, 금당지 앞뜰의 서편인 회랑의 남쪽부분(Ⅰ구역)과 금당 서편과 인접한 중간부분(Ⅱ구역)과 그 북부지역(Ⅲ구역)에 약간의 차이가 보인다.


    즉, Ⅰ구역의 4칸은 특별한 시설이 없으나 Ⅱ구역의 6칸은 금당과 통하는 문지(門址)와 같은 시설이 보이고 있고 Ⅲ구역의 3칸은 기단 폭이 넓어져 있다. 또한, 고막이의 형태로 보아 회랑지는 각 구역마다 특별한 시설이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토층으로 볼 때 역시 2-3회의 중수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건물지


    강당지 서편에 있는 작은 건물지는 정면과 측면이 모두 2칸씩이며, 바닥에는 전(塼)을 깔았다. 강당지의 서편에 있으면서 강당지와 3중으로 겹쳐져 있는 것으로 보아 후대의 건물임이 분명하며, 이 일대에서 출토된 와당의 문양도 금당지나 회랑지의 유물들과 확연히 구별되어 흥덕사지의 마지막 건물지였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형태의 건물지가 강당지 동편에도 있었는지의 여부는 알 수 없는데, 그것은 택지조성사업에 의한 훼손으로 말미암아 건물지의 성격을 규명해내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다른 건물지와 달리 바닥에 전(塼)을 깔고 있어서 특별한 용도의 작은 건물지임이 분명한 곳이다.


    따라서, 「직지」와 「자비도량참법집해」의 간행에 사용된 금속활자와 인출도구 등의 인쇄관련 공방이었거나 기타의 경판(經版)을 보관했던 경판각(經版閣)이 아니었을까 추정하고 있다.

  4. 흥덕사지 발굴
    작성자/작성일
    두레박 24-07-21

    1985년 “서원부 흥덕사(書原府 興悳寺)”라고 새겨진 쇠북(금구)과 “황통 10년 흥덕사(皇統十年 興悳寺)”라고 새겨진 큰 그릇 뚜껑(불발) 을 땅속에서 찾아내어 이곳이 <백운화상초록직지심체요절>권하 말미에 씌어있는 청주목의 흥덕사 절터임이 확인되었다. 청주 흥덕사지는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 발상지로 1986년 5월 7일 사적 제 315호로 지정되었고 청주시에서는 1987년부터 5개년에 걸쳐 절터를 복원 정비하고 청주고인쇄박물관을 세웠다.


    흥덕사지 발굴의 시작


    대한민국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운천동 양병산 기슭에 위치하고 있는 흥덕사는 일찍이 1377(고려 우왕 3)년에 현존하는 세계 최고(最古)의 금속활자본이며 세계기록유산인 「직지」를 비롯하여 「자비도량참법집해」 등을 금속활자로 간행해낸 우리나라 금속활자 인쇄술의 중흥처이다.


    청주시 운천동 일대는 일찍이 신라말기부터 불교문화를 꽃피웠을 것으로 추정되는 많은 유물들이 발견되고 옛 사지(寺址)도 있었으나 문헌에 나타나지 않아 지표조사조차 제대로 실시되지 못했다.


    그러다가 1984년 12월부터 한국토지공사가 운천지구 택지개발사업을 시작하면서 청주대학교 박물관이 운천동사지 발굴조사를 진행, 운천동사지 서남쪽으로 그리 멀지 않은 연당리 가강골 마을 515-1번지의 민묘 주변에 화강암으로 잘 다듬은 원형과 방형의 초석 3기와 고려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치미편(치치 尾片) 및 연화문(蓮花紋) 또는 당초문(唐草紋)이 새겨진 와편(瓦片)을 수습하는 등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새로운 옛 절터를 찾아냈다.


    이후 1985년 10월에 사지의 동쪽에서 <갑인오월일서원부흥덕사금구일좌(甲寅五月日西原府興德寺禁口臺座)>라는 명문이 있는 청동금구(靑銅禁口)와 청동불기(靑銅佛器) 등이 출토되어 이 사지가 바로 고려 우왕 3(1377)년에 현존하는 세계 최고(最古)의 금속활자본이며 세계기록유산인 「직지」와 그 시기를 전후하여 「자비도량참법집해」를 인쇄한 흥덕사지(興德寺址)임이 밝혀지게 되었다.


    이에따라 문화공보부는 흥덕사지 일원에 대한 개발중지 및 보존지시를 내리고 1986년 문화재위원회의 결의를 걸쳐 흥덕사지 10,711평을 사적(史蹟) 제315호로 지정공고 했다.

    흥덕사의 배치는 남향의 단탑(單塔) 가람으로서 중심축 선상에 중문·탑·금당·강당이 있고, 이들 좌우로 동·서회랑이 돌려진 삼국시대 이래의 전통양식을 따랐으며, 각 건물들은 후대에 중수를 거듭하면서 약간씩의 변화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었다.


    그 뒤, 1987년부터 1991년까지 정면 5칸, 측면 3칸 겹처마 팔각지붕의 금당과 3층 석탑을 복원하고 회랑지와 강당지는 주춧돌이 노출되도록 잔디를 심어 정비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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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 직지

    발굴의 동기


    흥덕사지(興德寺址)는 청주시 운천동(雲泉洞) 양병산(養兵山) 동남쪽 기슭에 위치하고 있다.


    청주시 운천동 일대는 일찍이 신라말기부터 불교문화를 꽃피웠을 것으로 추정되는 많은 유물들이 발견되고 옛 사지(寺址)도 있었으나, 문헌에 나타나지 않아 지표조사조차 제대로 실시된 적이 없었다.


    그러다가 1984년 12월부터 한국토지공사(韓國土地公社)가 <운천지구택지개발사업(雲泉地區宅地開發事業)>을 시작하게 되자 충청북도에서는 개발사업에 앞서 불교유물의 출토 등으로 알려져 있던 운천동사지에 관한 발굴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그 해 11월부터 청주대학교박물관에 의뢰하여 <운천동사지발굴조사>를 진행하였다.


    당시 발굴조사단의 조사원으로서 현장의 실무를 맡았던 박상일(朴相佾) 연구원이 주변의 유적지에 관한 관심을 갖고 틈틈이 조사를 하던 중, 운천동사지 서남쪽으로 그리 멀지 않은 연당리(蓮塘里) 가강골 마을 515-1번지의 민묘 주변에 화강암으로 잘 다듬은 원형과 방형의 초석 3기와 고려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치미편 및 연화문(蓮花紋) 또는 당초문(唐草紋)이 새겨진 와편(瓦片)을 수습하는 등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새로운 옛 절터를 찾아냈다.


    그 후 그는 여러 차례의 현지조사와 평판측량을 실시하여 간단한 조사보고서를 작성하여 충청북도에 제출함과 아울러 이 지역이 <운천지구택지개발사업> 구역에 포함되어 있었으므로 적절한 보존조치와 발굴조사의 필요성을 제기하였다.


    1985년 1월 충청북도에서 한국토지공사 충북지사에 이 사지의 보존을 위해 사지 일대의 공사중지를 요청하였으나, 한국토지공사 충북지사는 공사를 계속하여 이 사지의 중심에 해당하는 금당지(金堂址)의 유구(遺構)가 있는 곳까지 흙을 반출하여 택지를 조성함으로써, 사지의 원상을 크게 훼손시켜 유구가 파손되었을 뿐 아니라 유물들이 유실되고 말았다.


    한편, 충청북도 문화재위원회에서는 1985년 3월 이 사지에 대한 긴급발굴을 결의하였고, 그 해 6월에 청주대학교박물관이 이 일명사지(逸名寺址)의 이름을 옛 지명을 따서 '연당리사지'라 명명하고 충청북도에 발굴조사계획서를 제출하였다. 충청북도에서는 7월 문화재관리국으로부터 발굴허가를 받아 7월부터 10월까지 청주대학교박물관에서 훼손되지 않고 잔존한 서반부의 지역을 대상으로 전면 발굴조사를 하도록 하였다.


    발굴조사가 진행되고 있는 동안 사지에서 반출된 흙으로 조성된 택지에서는 청동소종(靑銅小鐘), 청동금강저(靑銅金剛杵), 청동금구(靑銅禁口) 등을 비롯한 불기(佛器) 25점을 수습하게 되었다. 발굴조사는 사지의 유구를 조사하여 사찰의 원상을 밝히는 것은 물론 출토유물을 통하여 잃어버린 사찰의 이름과 역사를 찾는데 목적이 있었으므로 유물조사에 심혈을 기울였다.


    사지의 발굴 결과 이곳에 있었던 사찰은 대략 9세기에 창건되어 14세기말 또는 15세기 초까지 존속하였으며, 화재로 인하여 소실된 후 완전히 폐사(廢寺)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사지의 동반부가 이미 파괴된 상태에서 발굴조사가 실시되었기 때문에 발굴결과 확인된 유구는 동남쪽 일부가 손상된 금당지, 그리고 원상이 비교적 잘 남아있는 서회랑지(西回廊址)와 회랑지 끝에 붙은 박전건물지(薄塼建物址) 등 주로 전체 사역권(寺域圈)의 서북반부 지역이었다. 그러나 사지의 성격상 좌우 대칭으로 건물배치를 하였을 것으로 추정되었다.


    그러다가 발굴조사를 거의 끝내고 주변을 정리하던 1985년 10월에 택지공사로 훼손된 사지의 동쪽에서 <갑인오월일서원부흥덕사금구일좌(甲寅五月日西原府興德寺禁口臺座)>라는 명문이 있는 청동금구(靑銅禁口)와 청동불기(靑銅佛器) 등이 출토되어, 이 사지가 바로 고려 우왕 3(1377)년에 현존하는 세계 최고(最古)의 금속활자본이며 세계기록유산인 「직지」와 그 시기를 전후하여 「자비도량참법집해」를 인쇄한 흥덕사지(興德寺址)임이 밝혀지게 되었다.


    흥덕사지를 확인한 발굴조사단은 곧바로 1985년 10월 10일 관계당국에 흥덕사지 확인에 따른 사지의 보존조치를 요청하는 공문을 발송하자 문화공보부에서는 흥덕사지 일원에 대한 개발중지 및 보존지시를 내리고 문화재위원을 파견하여 사지와 유물을 조사하였다.


    그 결과 10월 30일에는 흥덕사지 주변 4,598평이 사적지로 가지정되는 보호조치가 취해지고, 1986년 4월에 문화재위원회의 결의를 걸쳐 5월 7일에 흥덕사지 10,711평이 사적(史蹟) 제315호로 지정공고 되었다.


    흥덕사지가 사적지로 지정되는 동안 일부에서는 <흥덕사>라는 명문이 있는 금구편 하나로 흥덕사지로 단정할 수 있느냐는 문제를 제기하기도 하였고, 한편에서는 주자소의 유구나 금속활자의 실물이 발견되기를 기대하였다.


    이러한 여론에 따라 충청북도는 흥덕사지의 주변지역에 대한 정밀조사를 청주대학교 박물관에 의뢰하여 1986년 5월 2일부터 18일간 사지에서 반출해간 흙으로 조성한 택지지역을 금속탐지기까지 동원하여 정밀조사를 하였다. 금속탐지기를 이용한 정밀조사를 통하여 주자소나 금속활자를 찾는데는 실패하였으나 몇 가지 성과를 얻었는데, 그것은 청동소종(靑銅小鐘)과 '흥덕사'라는 명문이 있는 금구편 등 청동유물이 다량 수습되었던 부근에서 청동보당용두(靑銅寶幢龍頭) 2점을 비롯한 불발(佛鉢) 등 여러 점의 청동유물을 발굴해낸 것이었다.


    특히 그 가운데 청동불발의 구연부(口緣部) 외측면에는 <황통십년경오사월일흥덕사의지중대사령인왕생정토지원불발일합구급운구입중이근이량인(皇統十年庚年四月 日興德寺依 止重大師領仁往生淨土之愿佛鉢一盒具鈒雲口入 重二斤二兩印>라는 40자의 명문이 음각되어 있어서 흥덕사지를 재확인하는데 결정적인 자료가 되었다.


    <황통십년경오(皇統十年庚年)>는 고려 의종 4(1150)년에 해당되어 이 일대에서 함께 출토된 유물들의 연대추정은 물론 흥덕사의 연혁을 밝힐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기도 하다. 흥덕사지를 처음 확인시켜 주었던 <흥덕사>라는 명문이 있는 금구편의 나머지 몸통부분이 1986년 6월에 발견되어 국고에 귀속됨으로써 8개월만에 제 짝을 찾았는데, 그 몸통부분의 측면에 연속된 명문의 전문은 <갑인년월일서원부흥덕사금구일좌개조입중삼십이근인(甲寅年月 日 西原付興德寺禁口臺坐改造入重三拾貳斤印)>이었다.


    흥덕사의 배치는 남향의 단탑(單塔) 가람으로서 중심축 선상에 중문·탑·금당·강당이 있고, 이들 좌우로 동·서회랑이 돌려진 삼국시대 이래의 전통양식을 따랐으며, 각 건물들은 후대에 중수를 거듭하면서 약간씩의 변화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었다.


    그 뒤, 1987년부터 1991년까지 정면 5칸, 측면 3칸 겹처마 팔각지붕의 금당과 3층 석탑을 복원하고 회랑지와 강당지는 주춧돌이 노출되도록 잔디를 심어 정비를 하였다. 현재 흥덕사지의 남쪽에는 청주고인쇄박물관을 건립하여 우리나라 고인쇄출판문화의 발달사를 익히는 과학교육의 장과 21C정보문화산업의 중심메카로 활용하고 있다.


    발굴의 결과


    흥덕사지는 서쪽의 양병산(養兵山)이 남으로 달려내려 오다가 사지의 북쪽과 남쪽의 상·하봉이 동으로 꺾여 있고 청주 시내와 무심천(無心川)이 내려다보이는 동향의 지세이다.


    또 공사 전에 보이던 사지 동쪽 끝의 경사지가 석축(石築)으로 쌓였던 사실 등으로 미루어 볼 때 동향의 사찰지로 추정되기도 했으나 발굴 결과 지형과는 무관하게 남향이라 할 수 있는 27 방향의 가람구조를 확인하게 되었다.


    남쪽의 문지와 탑지는 파괴되어 확인할 수 없고 현존하는 금당지와 강당지, 서회랑지의 관계로 보아 초창 당시에는 남북의 일직선상에 중문, 탑, 금당, 강당이 있고 동서남북에 회랑으로 외곽을 형성한 전통적인 평지일탑병렬형(平地一塔竝列形)이었음이 확실하며, 고려시대에 중수하면서 강당지가 약간 변형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강당지 서편에 있는 박전건물지(薄塼建物址)는 후대의 건물지로 보이는데 강당지 동편에 똑같은 건물이 있었는지는 이미 파괴되어 알 수 없고 건물 용도는 경판각(經版閣)으로 추정되나 더 연구해야할 과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