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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주임신부 : 안재영 안드레아 신부 Rev. Andrew Ahn Jae Young
수녀회 : 마리아의딸수도회
주보 : 묵주기도의 모후
주일전례:06:30, 09:00, 11:00, 18:00약현(藥峴) 본당 시절
아현동 및 북아현동 골짜기를 중심으로 한 성문 밖 넓은 지역에 흩어져 살고 있는 교우들은 그들의 주거 지역상의 위치로 보아 당연히 약현 본당 소속이었다. 약현 본당의 관할지역 중에서 많은 지역들이 일제시대(日帝時代)와 8·15 해방 후에 속속분리되어 따로 본당을 설립하였으나 북아현동을 중심으로 한 인근 지역은 1950년대 후반에 가서야 겨우 본당을 분립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1892년 약현 본당 창설부터 기산(起算)하면 1957년 본당을 분립할 때까지 60여년 이란 오랜 기간을 약현 본당에 교적을 두고 신앙생활을 영위한 것이 된다.
아현(阿峴)의 유래(由來)
아현(阿峴)이란 지명은 「애오개」에서 유래하였다. 「애오개」란 충정로 3가에서 마포(麻浦)쪽으로 넘어가는 고개의 우리말 이름이었다. 남쪽 만리동과 서쪽 대현동에는 각각 큰 고개가 있고, 이곳 고개가 제일 작으므로 「애오개」라 하던 것이 변하여 한자명으로 아현(阿峴)이라 부르게 되었고, 아현동을 가르켜「애오개」, 혹은 「애오개굴」이라고 불렀다. 한편 아현동의 대명사처럼 된「굴레방다리」는 일명 늑교(勒橋)라고도 하여 북아현동 163번지 남쪽 네거리에 있던 다리를 일컬었다.
약현(藥峴)의 교세(敎勢)
1930년대에 이르러서도 서울에는 아직 종현, 약현, 백동, 이렇게 세 본당 밖에 없었다. 그 중에서도 약현은 서울 문밖의 유일한 본당이어서 해마다 일자리를 찾아 서울로 모여 드는 지방 교우들을 도저히 수용할 수 없었다. 1934년 통계에 의하면 본당 교우가 모두 3,780명이었다. 1901년 송도(松都) 본당의 분할을 효시(嚆矢)로 1932년 영등포 구역의 분할, 해방 후에는 1947년 잠실 본당, 1948년에 신용산(신용산=삼각지) 본당, 1949년후에는 후암동 본당을 차례로 분립시킨 약현 본당은 수용 능력에 비해 아직도 엄청난 수효의 신자를 포용하고있었다. 6·25 전란을 치른 후에도 교세는 날로 증가하여 아현 본당 창설 전 해인 1956년도의 약현 본당 신자 총수는 무려 7천 1백 85명을헤아렸다. 이렇듯 과다한 신자수, 협소한 성당에서 오는 수용 능력의 부족과 관할 지역의 광대함에 기인하는 사목상의 불합리성 등을 고려할 때 새 본당의 분립 문제는 시급한 현실 문제로 대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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