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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23위를 기리다
1863년 조선 흥선대원군이 정권을 잡고, 1866년 병인박해 때 공세리의 밀두리, 걸매리, 해암리 신자 28명이 수원, 서울, 공주 등으로 끌려가서 고문, 옥사, 교수형 등으로 순교했다. 박의서, 박익서, 박원서 삼형제 모두 걸매리에서 살다가 병인박해가 일어난 이듬해인 1867년에 체포되어 수원에서 순교하였고 1988년 9월 20일 공세리 본당 앞마당에 삼형제의 순교묘를 써서 안치했다. 이후 봉헌된 납골식 순교자 현양탑에는 세 형제의 유해와 함께 박인서, 이 마리아, 이씨부인, 박홍갑, 박화진 알렉산드르와 조 모니카의 묘 표석, 그리고 순교자 김중백을 포함, 이렇게 23위의 묘석이 모셔져있다. 이렇게 순교자를 기리는 성지성당으로서의 역학도 하고 있는 공세리성당은 오늘이 있기까지 초대 주임을 지냈던 드비즈 신부의 열정적인 사목 활동이 그 바탕을 이루었다. 드비즈 신부는 2대 기낭 신부가 1년 만에 전임하면서 초대에 이어 다시 3대 주임으로 부임해 1930년까지 34년간 공세리 본당의 기반을 굳건히 하고 발전의 터를 닦았다.
건축 당시 멀리서 많은 구경꾼들이 몰려왔을 정도였다.
충남 최초의 서양식 건물이었기 때문이다. 현재의 성당 건물은 드비즈 신부 자신이 직접 설계하고, 중국인 건축 기술자들을 불러 지휘 감독하면서 지은 1922년도의 성당이다. 한국 근대건축의 형성과정에서 초기 건축양식의 도입과 발전 역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보호수로 지정된 330년 수령 팽나무
공세리성당은 보호수로 지정된 330년 수령 팽나무와 함께 성당주변의 수백 년 된 나무들로 둘러싸여 있어 주위 경관이 매우 아름다운 천주교의 성지로 소문나있다. 1680년경에 심겨져 현재수령 330년을 헤아리는 팽나무 고목이 있는 공세리 언덕. 아산만과 평택호. 그리고 그 만과 호 사이를 가로지른 아산만 방조제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자리다. 1897년 현 공세리성당의 구(舊)본당 및 사제관 건물이 들어서게 되고 본당 공사로 인하여 고목은 본래의 자리에서 3m 아래인 지금의 자리로 옮겨져 공세리의 변천을 묵묵히 지켜보고 있다.보좌신부 : 박효식 사도요한 신부 Rev. John Park Hyosick
미리내 성모 성심 수녀회
주보 : 성 베네딕토
신자수 : 1,724미사시간
- 본당 미사
평일 - 화/19, 수/9:30, 목/9:30, 금/9:30
토요일 - 19,
주일 - 6/10/19
- 순례객 미사
월~토 : 11,
주일 : 11:30대중교통
- 고속버스
서울 남부터미널 아산행 고속버스 승차 → 아산복합터미널 하차
- 시외버스
대전 동부터미널 승차 → 아산복합터미널 하차
- 시내버스
복합터미널 시내버스 정류소에서 공세리 행 버스이용
안내 문의전화는 버스이용(온양교통 544-5141, 아산여객 543-3263)), 택시이용은 터미널 택시승강장 이용
자동차
대전-당진고속도로 송악나들목을 지나 38번국도를 이용하여 아산시 인주면 방면으로 직진하면 운정IC교차로에 닿는다. 이곳에서 좌회전하여 삽교방조제를 지나 34번국도를 계속 따라가다 보면 인주교차로 직전 우측 공세리로 들어서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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