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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품 정보
상세설명
Abtei Waegwan, Benediktinerkongregation von St. Ottilien:O.S.B.[Ott.])
성 베네딕도회 오딜리아 연합회에 속한 하나의 자치 수도원(Abbatia)으로 정식 명칭은 ‘성 베네딕도회 왜관 성 마오로 쁠라치도 수도원’이다. 보통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혹은 그냥 줄여서 ‘왜관 수도원’이라고 칭한다. 성 마오로와 성 쁠라치도는 베네딕도 성인의 두 직제자로서 왜관 수도원은 이 두 분을 주보성인으로 모시고 있다. 왜관 수도원은 한국전쟁으로 인해 흩어졌다가 다시 모인 이북 덕원 수도원과 만주 연길 수도원 수도자들에 의해서 1952년 7월 6일에 현재의 왜관에서 설립되었다.
2007년 현재 총인원 140여명 가운데 약 70명이 왜관 본원에서 생활하고 있으며, 나머지는 각 분원, 본당, 수녀원 지도, 해외 유학, 그리고 선교지에 파견되어 있다.
왜관수도원은 서울, 대구, 부산, 경기도 남양주군, 미국 뉴튼, 전라도 화순 등지에 분원을 두고 있으며, 그 가운데 미국 뉴튼 수도원은 2002년 1월 25일부로 왜관 수도원이 인수한 수도원으로 현재 8명의 한국인 수도자들이 파견되어 생활하고 있다. 뉴튼 수도원은 2004년 1월 15일 원장좌 예속 수도원(Prioratus simplex)으로 승격되었다. 그리고 서울 불암산 자락에 위치한 성 요셉 수도원은 1998년 3월 19일 왜관 수도원의 분원에서 원장좌 예속 수도원으로 승격되어 현재 9명이 배농사를 지으며 생활하고 있다. 또한 2006년11월 1일에 전라도 화순 지역에 새롭게 수도원을 설립하여 현재 6명의 수도자들이 수도원의 기반을 잡고 있다.
왜관 수도원의 역사
왜관 수도원의 역사는 엄밀히 말하면 1952년부터 시작된다고 할 수 있겠지만, 그 기원은 190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왜냐하면 한국전쟁으로 인해 흩어져 남한으로 피신한 한국인 수도자들과 공산당에 의해 본국으로 송환되었다가 전쟁이 끝난 후 다시 한국으로 파견된 독일인 수도자들이 왜관에 모여 수도생활을 재개하였기 때문이다. 이들은 대개 북한의 덕원 수도원과 만주 연길 수도원에서 생활하였던 수도자들이었고, 이 두 수도원은 바로 서울 백동 수도원의 맥을 잇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왜관 수도원의 역사는 1909년부터 시작되는 전체 역사 안에서 보아야 한다.
서울 성 베네딕도 수도원(1909-1927)
사범학교 설립과 운영계획으로 뮈텔 주교가 초청한 베네딕도 수도회는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서울 백동 낙산(駱山) 아래 약 3만평의 땅(현재 서울 혜화동 가톨릭 대신학교와 동성 중고등학교 자리)을 매입하여 수도원 건물을 신축하기 시작하였고, 1911년 3층 벽돌로 된 거대한 수도원을 완공시켰다(수도원 건물 일부는 아직도 신학교 건물로 사용되고 있음). 서울 수도원은 1909년 말에 이미 원장좌 자치 수도원으로 승격되었다. 이와 아울러 1910년에는 내한(來韓) 목적대로 숭공학교(崇工學敎)를 세워 실업교육을 실시하는 한편, 1911년엔 숭신학교(崇信學校: 현 동성 중ㆍ고등학교의 전신)를 세워 사범교육을 실시하였다. 1913년에 수도원은 아빠스좌 수도원으로 승격하였으나 숭신학교는 폐교하게 되었다. 지원자가 없다는 것이 직접적인 원인이었지만,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사범교육을 독점하려는 일제의 탄압 때문이었다. 1914년 제 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몇몇 수사들이 중국으로 동원되는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직업교육을 실시하여 목공, 철공, 원예 등 7개 작업장에서 유능한 기능공들을 배출하였다. 한편 함경남북도와 간도(間島)지방을 관할하는 원산교구(元山敎區)가 설정됨으로써 이 지역의 선교를 위촉받아 원산교구가 설정되던 1920년부터 철수하기 시작하여 숭공학교를 폐교하고, 1927년에 서울 수도원도 함경남도 덕원으로 모두 이전하였다.
덕원 성 베네딕도 수도원(1927∼1949)
성 베네딕도회 오딜리아 연합회에서는 아프리카 선교지가 붕괴된 뒤 자연스럽게 한국 선교지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1920년 8월 5일 교황청에서도 한국의 원산교구 위임을 허락하자 곧 1921년 5월 1일 신 보니파시오 사우어(Bonifatius Sauer) 신부가 주교로 성성되었다. 1926년부터 공사를 시작하여 1927년 덕원의 새 수도원을 완공하여 그 해 11월부터 수도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고, 1927년부터 1928년에 걸쳐 덕원 신학교를 건립하였다. 이리하여 덕원 수도원은 원산 선교지에 있어서 수도생활과 문화적인 중심이 되어 1940년 1월 12일 덕원 면속구가 될 때까지 수도원 생활뿐만 아니라 원산교구 내에서 본당 사목활동, 신학교 운영 등 많은 일들을 감당해 내야 했다. 1940년 덕원 면속구의 설정과 더불어 원산교구는 함흥교구로 개칭되었다. 이밖에 덕원 수도원에서는 출판시설을 갖추어 교리문답, 성가집, 미사경본, 바울로 서한 등의 책자들을 발간하였다. 1945년 8월 15일에는 소련군이 수도원에 주둔하였고, 1946년에 실시된 토지개혁과 더불어 탄압을 받기 시작하였다. 결국 1949년 5월 9일 수도자들은 체포되어 일부는 처형되고 일부는 포로수용소(옥사독)에서 사망하였다. 생존한수도자들 가운데 독일인 수도자들은 본국으로 송환되었고(이들 대부분은 자원하여 다시 한국으로 파견되었다), 일부 한국인 수도자들은 월남하였다.
연길 성 십자가 수도원(1928∼1946)
1922년 5월 만주 간도지방이 원산교구의 관할 하에 들어감에 따라 한국인 신자들과 중국인 신자들에 대한 적극적인 사목이 요청되었다. 이에 베네딕도회 신부들이 파견되어 용정을 비롯한 3곳의 기존 본당과 함께 연길 등지에 새로운 본당을 건립하였다. 1922년 12월 5일 설립되어 선교본부의 역할을 해오던 연길 수도원은 1934년 8월 1일 아빠스좌 수도원으로 승격되었다. 1934년 9월 5일 백 테오도르 브레어(Theodore Breher) 신부가 초대 아빠스로 축복되었고, 1937년 9월 5일 주교로 축성되었다. 이 수도원은 수도생활의 중심지이자 동시에 사목적인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하였다. 수도자들은 목공과 철공 분야의 일을 하였고, 인쇄소를 설립하여 소년잡지를 비롯하여 교리문답서, 성가집 등 교회서적을 인쇄. 보급하였다. 이곳에서도 본당사목과 함께 초등 교육기관의 설립은 중요한 선교활동의 하나였다. 그러나 2차 대전의 종료와 더불어 공산당 치하에 들어간 연길교구는 즉시 선교활동이 제한되었고, 1946년 5월 선교사들은 체포.투옥되었고 14개의 본당 가운데 몇 개의 본당만 한국인 교구신부에 의해 명맥을 이어갔다. 1949년까지 두만강 근처 남평수용소에서 수용되었던 독일인 선교사들은 본국으로 송환되었고, 앞서 석방되었던 백 테오도로 아빠스 주교는 1949년 12월 12일 본국 수도원으로 귀환한 후 1950년 11월 2일에 세상을 떴다. 베네딕도회 선교사들의 마지막 그룹은 1952년 8월에 만주를 떠났다. 연길 성 십자가 수도원에 속한 2명의 한국인 신부와 수사는 후에 만주에서 도망하여 간신히 월남하였다. 그들은 남한으로 피난하여 수도생활을 계속한 덕원 수도원의 한국인 수도자들과 합류하였다.왜관 성 마오로 쁠라치도 수도원(1952∼현재)
1951년 미국을 방문중이던 성 오틸리엔 수도원의 크리소스또모(Chrysostomus) 총아빠스는 이 디모테오 비테를리 신부에게 월남한 덕원과 연길교구의 신학생들과 수사들을 모아 새로운 수도원을 설립하도록 지시하였다. 디모테오 신부는 1952년 1월 한국에 도착하였다. 이때 남한으로 피신한 20여명의 한국인 베네딕도회원들은 대구 주교관에서 공동생활을 하고 있었다. 디모테오 신부는 대구교구장 최덕홍 주교의 제의를 받아들여 그 해 6월 왜관과 낙산에서 본당사목을 시작하였다. 1953년 이 왜관지역은 감목대리구로 설정되는 동시에 비테를리 신부가 감목대리로 임명되었다. 1955년 왜관에 수도원 건물이 세워졌고, 그간 덕원과 연길교구 소속의 옛 선교사들이 다시 내한함에 따라 수도원 식구가 크게 증가되고, 본당수도 증가되어 나아갔다. 1956년 1월 9일 왜관의 새 수도원은 로마로부터 정식 수도원으로 인가되었고, 같은 해 대구교구장 서정길 주교로부터 이미 1953년에 위임받은 3개의 군(郡) 외에 또다시 3개의 군에서 사목할 권한을 위임받았다.
1955년 4월 1일 왜관의 순심 중.고등학교를 인수하고 성 마오로 기숙사를 운영함으로써 청소년교육에도 진력하였다. 또한 덕원과 연길에서의 출판사업의 사명과 전통을 이어받아 1960년 왜관에서도 분도출판사와 인쇄소를 설립하고 기도서, 전례서 등을 출판, 한국 교회의 문서선교에 적극적으로 관여하였다. 그리고 철공소, 목공소와 같은 작업장을 건설, 특히 현대식 농장을 경영하였는데 이것은 왜관수도원의 자급자족에 큰 도움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농장경영의 현대화를 통해 지역사회에도 크게 이바지하였다. 1964년 왜관에 세워진 피정의 집은 한국에서 처음 시도된 것으로서 한국교회에 큰 자극을 주어 그 후 많은 피정의 집을 탄생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베네딕도회에서는 그 후 1971년 부산과 1979년 서울에서도 각각 피정의 집을 건립하였는데 서울 피정의 집은 동시에 신학원 구실을 하였다. 본당사목에 있어서도 큰 성과를 거두었는데 1956년 6개 군에 8개의 본당에 불과하던 것이 1964년까지 12년간에 또 10개의 본당이 증설되었다. 본당 증설과 더불어 교회건축도 크게 발전하였는데 베네딕도회원들은 종래의 프랑스 선교사들처럼 단순한 벽돌건물이 아니라 콘크리트로 된 성당과 사제관을 현대식으로 건축함으로써 교회건축 발전에도 새로운 길을 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본당과 신자수가 급속히 늘어날 뿐더러 수도원 가족도 크게 늘어나 왜관수도원은 명실 공히 대수도원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고, 그 결과 1964년 2월 17일 아빠스좌 수도원으로 승격되었고, 오도 하스(Odo Haas) 신부가 초대 아빠스로 선출되었다. 이로써 왜관 수도원은 완전한 자립 수도원이 되었고, 한국에서 확고한 기반을 굳히게 되었다.
1971년 4월 이동호 신부가 제 2대 아빠스로 선출됨에 따라 베네딕도회는 한국에서 완전히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1985년 5월 또다시 이덕근 신부가 제 3대 아빠스로 선출되었고, 1987년 3월 19일 서울 근교 불암산 기슭에 단순한 노동으로 기도생활에 전념하며 베네딕도회적 삶을 지향하는 성 요셉 수도원을 설립하였다.
1995년 7월 12일 이덕근 아빠스가 수도원장직을 사임함에 따라 김구인 신부가 1995년 8월 10일부터 2001년 8월 23일까지 ‘관리원장’(Prior Administrator)을 맡아 오다가, 2001년 8월 23일 이형우 시몬 베드로 신부가 제4대 아빠스로 선출됨으로써 왜관수도원은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지금 현재 2009년에 맞게 될 한국 진출 100주년을 준비하면서, 한국 교회의 발전과 공동체의 영적인 쇄신을 위해 다양한 노력과 준비 하고 있다.
선교총무국 054-970-2213
은인 후원 054-970-2203
성소 담당 054-970-2323
금속 공예실 054-970-2015
유리화 공예실 054-970-2490
분도 가구 공예사(전화) 054-970-2300
분도 가구 공예사(팩스) 054-972-6533
공예 초 작업실 054-970-2069
기념품의 집 054-970-2066
성물 제작소 054-970-2387
분도푸드 054-971-2733
분도출판사 왜관영업부 054-970-2848
분도 인쇄소 054-970-2400
봉헌회 사무실 054-970-2193
왜관피정의집 054-971-0722
수도원장 : 박현동 블라시오 아빠스 Rt. Rev. Abbot Blasio Hyun-dong Park O.S.B.
본원장 겸 피정 담당 : 박재찬 안셀모 신부 (성 베네딕도 왜관 피정의 집) Rev. Anselmo Jae-chan Park O.S.B.
부원장 : 이규단 니콜라오 수사 Br. Nicolao Gyu-dan Ri O.S.B.
수련장 : 류지응 치프리아노 신부 Rev. Ryu, Ji Eung O.S.B
재정 담당 : 류지영 에프렘 수사 Br. Ephraem Ji-young Ryou O.S.B.
비서 : 강찬규 포에멘 신부 Rev. Poemen Chankyu Kang O.S.B.
성소 담당 : 서광호 베네딕도 신부 Rev. Benedict Kwang-ho Seo O.S.B.
선교담당총무 : 인영균 클레멘스 신부 Rev. Clemens Yongkyun In O.S.B.
거주 :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 Rev. Gregorio Seokjin Ri O.S.B.
거주 : 현익현 바르톨로메오 신부 Rev. Bartholomaeus Henneken O.S.B.
거주 : 김구인 요한 보스코 신부 Rev. John Bosco Ku-in Kim O.S.B.
거주 : 서경윤 알베르토 신부 Rev. Alberto Kyeongyun Seo O.S.B.
거주 : 박근배 알렉시오 신부 Rev. Alexio Keunbae Park O.S.B.
거주 : 최춘배 시몬 신부 Rev. Simon Chun-bae Choi O.S.B.
거주 : 최정규 요엘 신부 Rev. Joel Jeong-Kyu Choi O.S.B.
거주 : 이종원 다니엘 신부 Rev. Lee, Jong Won Daniel
성 바오로 안나의 집 지도 : 이덕근 마르티노 아빠스 Rt. Rev. Abbot. Martin Teok-keun Ri O.S.B.
수녀원 지도 : 박대종 디오니시오 신부 (엄률 시토회(수정의 성모 트라피스트 여자 수도원) Rev. Dionysius Dae-cheong Park O.S.B.
수녀원 지도 : 고건상 멜키오르 신부 (툿찡포교베네딕도수녀회 대구수녀원) Rev. Melchior Gun-sang Ko O.S.B.
수녀원 지도 : 정학근 모세 신부 (툿찡포교베네딕도수녀회 대구수녀원) Rev. Moses Hakkeun Jeong O.S.B.
병원 원목 : 나연수 베다 신부 (대구파티마병원) Rev. Beda Yeon-soo Na O.S.B.
본당 사목 : 이성근 사바 신부 (대구대교구 대명성당) Rev. Saba Song-Gun Ri O.S.B.
본당 사목 : 김수영 바실리오 신부 (대구대교구 왜관 당 주임 신부) Rev. Basilio Soo-young Kim O.S.B.
본당 사목 : 류지현 티토 신부 (대구대교구 석전성당 주임 신부) Rev. Tito Jihyeon Ryu O.S.B.
본당 사목 : 박진형 비오 신부 (대구대교구 가실성당 주임 신부) Rev. Pius Jin-hyung Park O.S.B.
본당 사목 : 이재현 윤일 요한 신부 (대구대교구 왜관성당 보좌 신부) Rev. Yun-il John Jae-hyun Lee O.S.B.
금속 공예실 : 김석주 에제키엘 신부 Rev. Kim, Seok Ju Ezekiel
성소담당 보조 : 주세환 프란치스코 수사 Br. Francisco Se-hwan Joo O.S.B.
해외 선교 :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 (콜롬비아) Rev. Athanasius Jangkyu Yi O.S.B.
해외 선교 : 장경욱 아론 신부 (쿠바) Rev. Aaron Gyeung Uk Jang O.S.B.
해외 선교 : 김태욱 안토니오 마리아 클라렛 신부 (스페인) Rev. Antonio M. Claret Tae-uk Kim O.S.B.
유학 : 고진석 이사악 신부 (이탈리아) Rev. Isaac Jinseok Koh O.S.B.
유학 : 이형주 힐라리오 신부 (이탈리아 로마) Rev. Hilarius Lee Hyeong ju
기타 : 허성석 로무알도 신부 (제주 아라동) Rev. Romualdo Seoungseok Ho O.S.B.
기타 : 황동환 이사악 신부 (봉쇄 밖 생활) Rev. Isaac Donghwan Hwang O.S.B.
기타 : 서강일 아우구스티노 신부 (봉쇄 밖 생활) Rev. Augustino Kang-il Suh O.S.B.
기타 : 강순건 안토니오 신부 (정직) Rev. Sungeon Kang
1928년 건축된 왜관본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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