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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속 안동교구
지역/지구 상주지구
대표전화 054-532-9344
   주임신부 054-533-0044, 수녀원 054-534-9376
팩스 054-533-9344
  주임신부 윤여홍 시몬 신부 Yun Yeohong
설립일 1962.04.12
  주소 경북 상주시 화서면 중화로 2196
   경북 상주시 화서면 지산리 516
   2196 Junghwa-ro, Hwaseo-myeon, Sangju-si, Gyeongsangbuk-do
Tag 화령성당, 화령천주교회, 갈골교우촌, 멍에목교우촌, 앵무당교우촌, 잣골교우촌
  • 상품 정보

    상세설명

    천주교 화령 성당 지역의 신앙 전래는 200여년 전 충청도와 1828년경 순교자 신태보(베드로)님을 통하여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특히 하느님의 종으로 명명된 순교자 신태보(베드로)님은 서울에서 박해를 피해 이곳으로 들어와 현 모동 공소 지역인 잣골에 은둔하여 기도문들을 필사하여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다가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전주 감영으로 이송 되어 순교한 분이시다. 충청도를 통해서 이 지역으로 몰려와 숨어 살던 교우들은 옹기를 구워 살면서 신앙 공동체를 이루어 살았다.
    신태보(베드로)님의 순교로 이 지역의 신앙의 열기는 다소 사라졌으나 대원군의 병인년 박해가 끝나고 신앙의 자유가 주어지자 숨어살던 신자들이 서서히 신앙생활을 하고 있을 때, 상주시내에 본당이 생겼으므로 예수 부활 대축일과 예수 성탄 대축일에 상주 본당에 가서 판공성사를 보고 대축일 미사에 참여 하였다.
    그 후 현 화령 초등학교 근처에 있던 기와집 한 채를 마련하여 공소 건물로 사용하다가 왜관 분도회가 이 지역의 사목을 담당하게 되자 문경과 가은 본당을 설립하고 사목을 한 독일 분도회 지인수(Ernst Siebertz)신부님이 초대 본당신부님으로 부임하여 사목하였고(1962-1964년) 본당과 하송, 입석, 화북. 화동, 모서, 모동, 수봉 공소를 지어 열심히 사목하여 214명에게 세례를 주었다.
    그 후 13분의 사제들이 사목을 하여 한 때 2천여명의 신자들이 있었으나 극심한 이농 현상으로 현재 900여명의 신자들이 본당과 5개 공소(화동.모서.모동.하송.화북)에 살고 있다.
    1986년 김욱태(레오) 신부님은 구 성당이 너무 낡았고 화재로 인해 일부가 소실되자 은인들의 도움으로 현 성당을 신축하였고 1994년 9월에는 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코회 수녀님들이 부임하여 본당과 지역 사회에서 일하고 있다.
    제 10대 박윤정(바오로) 신부님(1998.2-2002.4) 재임 중에 수해가 심해 은인들의 도움으로 성당의 외부 담장을 세우고 교육관을 신축하여 본당 신자들과 외부 신자들의 교육용으로 사용하고 잇다.
    제 13대 김종길 신부님(2009.7-2011.8.31)의 노력으로 성당 내부를 수리하여 방음 장치를 설치하고 성심상과 성모상을 성당 외부에 설치하며 재래식 화장실을 수세식으로 개조하여 신자들과 주민들에게 도움을 주고 있다.
    제 14대 전달수 안또니오 신부님이 부임하여 1985년부터 문을 닫은 화북공소를 2011년 9월부터 시작하였다. 2012년 1월에는 기증받은 대지 530평에 성지를 조성할 계획으로 있다.


    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꼬 수녀회
    주보 : 성 베네딕토
    신자수 : 1,057
    공소수 :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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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갈골교우촌
    상주시 화남면 동관리 갈골. 화남면 소재지인 평온리에서 법주사로 향하는 길목에 위치한다. 이곳에서는 곧 이윤일(요한)성인과 멍에목의 순교자 박사의 안드레아의 아들 박소랑(사도요한)과 딸 모정과 모열이 어린 시절을 보내다가 문경 여우목으로 피신하였다. 이곳은 멍에목과 앵무당, 그리고 최양업(토마스) 신부가 편지를 쓰고 여름휴가를 보낸 동관음사가 있던 절골〈화남면 동관1리 동관음사 터〉이 서로 인접해 있다. 1827년 정해박해가 일어나고, 앵무당과 멍에목에서 김사건(안드레아), 박경화(바오로) ․ 박사의(안드레아) 부자, 안군심 리카르도 등이 상주 포졸들에게 체포되자, 멍에목과 앵무당 등지에 살던 교우들이 갈골로 피신하게 되고, 이어서 이윤일 요한 성인 가정과 함께 문경관내 여우목 교우촌으로 이주하였다. 물론 이들은 1866년 병인박해 때 대부분 순교의 월계관을 쓰게 된다.


    멍에목교우촌
    충북 보은군 속리산면 구병리 멍에목. 경북 상주시 화남면 평온리 앵무당과 동관리 갈골과 접경지역이다. 멍에목(‘머미기’혹은 돌미기)로 불리지만, 멍에목 윗마을이 구병리이고, 구병리의 위쪽인 북쪽 골짜기가 돌미기로서 이곳이 옛 신자촌이다. 상주시의 앵무당과 갈골과 돌미기는 속리산(1,057m)의 지맥인 구병산 능선을 경계로 삼각형을 이루고 있으며, 돌미기는 구병산(876m)의 서쪽 기슭 중턱에 자리한다.  인근의 교우 촌으로는 이윤일(요한)성인이 어린 시절을 보냈다는 갈골과 앵무당이 있다. 아울러 최양업(토마스) 신부가 편지를 쓰고 여름휴가를 보낸 동관음사가 있던 절골〈화남면 동관1리 동관음사 터〉이 인접해 있다.
    충북 보은군은 본래 신라 삼년산군(三年山郡)인데 고려 제 8대 현종 6년(1015년)에 경상도 상주에 소속되었다가 조선조 태종 13년(1413)에 경상도로부터 충청도에 편입되었다. 예부터 피난지로 알려진 이곳은 가마기를 거처 이곳에 피신 온 박경화(바오로) ․ 박사의(안드레아) 부자가 1827년 정해박해 때 상주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문초를 받고, 다시 대구의 경상감영으로 이송되어 그곳에서 박경화(바오로)는 옥사하고, 아들 박사의(안드레아)는 12년간 감옥에서 고생을 하다가 함께 옥살이를 해왔던 김사건 · 이재행 등과 함께 1839년 4월 14일〈양력 1839년 5월 26일〉에 대구 관덕정에서 48세 나이로 참수되었다.
    박사의(안드레아)의 아들 소랑(사도 요왕) ․ 딸 모정과 모열은 나이가 어려서 석방되었는데 아들은 문경 여우목〈문경읍 중평리〉에 가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다 병인박해 때 서울에서 순교하였다.


    앵무당교우촌
    상주시 화남면소재지인 평온리 앵무당은 충북 보은군 마로면 ․ 속리산면과의 경계와 가까운 구병산 줄기의 북쪽 골짜기에 산 중턱에 위치한다. 멍에목이라 전해 온 ‘돌목이’와 ‘갈골’ 신자촌과는 능선을 경계로 하여 삼각형을 이루고 있다.
    천주교 신자들이 살기 시작한 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신유박해 이후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구병산 산자락의 첩첩 산중인 이곳 앵무당과 멍에목〈돌미기〉에  이주하여 정착한 것으로 보인다.  1815년 을해박해 때 백부인 김강이 시몬은 원주에서 순교하고, 부친 김 다태오는 귀양을 가고, 나이가 어려 석방된 김사건(안드레아)은 이곳 앵무당으로 와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면서 포교활동을 하여 영남도회장이 되었다.
    선교활동 중인 1827년 정해박해 때 김사건(안드레아)은 그의 가족들과 함께 상주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상주 진영을 거쳐 대구 경상감영으로 이송되어 심한 문초를 받고 사형선고를 받았지만, 13년간을 더 감옥에서 생활을 했다. 기해박해 중인 1839년 4월 14일(음) 박사의(안드레아)는 봉화 곰직이의 이재행(안드레아)과 함께 대구 관덕정 형장에서 순교하였다. 그는 부인 성임과 자녀들과 함께 체포되었지만 부인과 자녀들은 석방되었었다. 현재는 순교자들이 살다가 떠난 집터와 세월을 알 수 없는 노송(老松)과 폭포만이 남아있다.


    잣골교우촌
    상주시 모동면 신흥리 잣골은 산막 터와 동일한 장소인데 단지 골짜기가 갈라져 있어서 이름을 달리할 뿐이다. 이곳에 언제부터 신자들이 살기 시작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교회재건운동과 성직자 영입운동에 앞장섰으며, 교회공동체운동(교우촌 형성)의 선봉자(先鋒者)였고 많은 사람들에게 교리서를 집필하고 필사해주는 등 지도자로서의 사명을 충실히 수행하였던 순교자 신태보(베드로)가 여러 곳으로 다니면서 신앙생활을 하다가 만년에 이곳에 은거하여 조용히 신앙생활을 하다가 1827년 정해박해를 만나 포졸들에게 그 가솔들과 함께 체포된 곳이다. 신태보(베드로)는 전주감영에서 1839년 5월 29일 약 70세를 일기로 치명하였고, 그의 며느리 최조이(발바라)는 1839년 기해박해를 피하기 위하여 홍재영(프로타시오)의 집에 은신해 있다가 체포되어 홍재영ㆍ 이조이 ㆍ오종례 등과 함께 1840년 전주감영에서 순교하였다. 현재 시성시복 청원 명단에 올라 있다.



    잣골교우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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