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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속 안동교구
대표전화 010-9944-0145
  담당신부 정도영 베드로 신부 Rev.Petrus Jeung Do-young
홈페이지 https://cafe.daum.net/Mawon.Jinan
  주소 경북 문경시 문경읍 여우목안길 20-1
   경북 문경시 문경읍 중평리 96
   20-1 Yeoumogan-gil, Mungyeong-eup, Mungyeong-si, Gyeongsangbuk-do
  • 상품 정보

    상세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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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우목성지
    여우목 성지는 한국의 103위 순교성인 중 한 명인 이윤일 요한 성인과 서치보 요셉 가정에 의해 이루어진 교우촌이다. 인근의 교우촌인 건학(동로면 명전리)과 부럭이(덕산면 억수리)와는 산길로 불과 20-30리 내에 있다. 그래서 이들 세 교우촌은 처음부터 빈번한 접촉을 갖고 이웃집 드나들 듯이 서로 긴밀히 연락하고 도와가며 신앙생활을 했다.
    여우목 교우촌은 소백산맥의 높고 험준한 대미산(1,115m)을 경계로 하여 충청북도 단양과 경계를 이루는 경상북도 문경 지방의 최동북단에 위치해 있다. 여우목은 대미산 중턱에 자리 잡고 있어서 옛날부터 경상도 동쪽 지방의 사람들이 서울로 가기 위해서는 이 여우목 고개를 넘어 문경읍내와 새재로 넘어갔던 교통의 요충지였다. 이곳에 처음 사람들이 살기 시작한 것은 1600년경으로 현재 이곳에 살고 있는 장원의 10대 조부인 장기풍이 단양에서 이곳으로 이주해 와서 움막을 짓고 다래덤불을 걷으며 산지를 개간해 살았다고 한다.
    천주교 신자들이 이곳에 살기 시작한 것은 1839년 기해박해를 전후해서이다. 충청도 홍주가 고향인 성 이윤일 요한(李尹一, 1816-1867년) 가정이 상주 갈골에서 이곳으로 이사를 왔고, 그 무렵에 경상도 지방의 첫 신자인 서광수(徐光修, 1715-1786년)의 손자인 서치보 요셉(徐致輔, 1791-1840년) 가정도 충청도 청풍에서 살다가 박해를 피해 여러 곳을 전전하던 중 여우목 교우촌으로 피난 옴으로써 신자들이 살기 시작했다.
    서치보 요셉(왼쪽)과 그의 장남인 순교자 서인순 시몬의 묘.또한 1827년 정해박해 때 멍에목에서 체포되어 대구 감영에서 순교한 박경화 바오로(朴~, 1757-1827년)와 부친과 함께 체포되어 대구 감영에서 12년 동안 옥고를 치르다 1839년 기해박해 때 관덕정에서 순교한 박사의 안드레아(朴士儀, 1792-1839년) 가정도 고향을 떠나 단양 가마기에서 살다가 여우목과 건학 교우촌과 인접한 멍에목으로 피신 와서 살았다. 박경화 바오로와 박사의 안드레아는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되었다.
    서치보는 가족들과 함께 여우목 교우촌에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다가 1840년 9월 19일(음력)에 하느님 품으로 돌아갔다. 그 때 그의 나이는 49세였다. 그 후 선산(현 여우목 마을 뒷산)에 묻혀있던 서치보의 유해는 1999년 9월 18일 새로 조성된 현재의 여우목 성지에 묘소를 마련하여 병인박해 때 대구 감영에서 순교한 장남 서인순과 함께 이장하여 모셨다.
    한편 여우목에서 살다가 상주와 경산 등지로 피난 갔던 서치보의 아들인 서인순 시몬(徐隣淳, 1808-1868년)과 서익순 요한(徐翼淳, ?-1868년), 서태순 베드로(徐泰淳, 1823-1867년)는 병인박해 때 모두 순교하였다.
    묘역 뒤편에 건립된 대형 십자가.서치보가 선종한 후 장남인 서인순은 어머니와 4명의 동생들을 데리고 풍기로 이사를 가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다. 1860년 경신박해 때 모친이 세상을 떠나자 다시 온 가족을 데리고 경산 모개골 교우촌으로 이사를 갔다. 1866년 병인박해 때 모개골 교우촌에서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대구의 경상 감영에서 문초를 받고 옥고를 치르다 1868년 4월 29일(음력) 옥사하였다. 그때 그의 나이는 60세였다. 그 후 그의 유해는 처음에는 경산 모개골에 안장하였다가 후에 부친 서치보의 묘소가 있는 여우목으로 이장해 왔고, 1999년 9월 18일 새로 조성된 현재의 여우목 성지에 부친과 함께 이장하여 모셨다.
    4남인 서익순은 1867년 박해가 잠잠해지자 한티에서 대구의 집으로 돌아가던 중 서울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된 후 절두산에서 백지사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5남인 서태순은 박해를 만나 대구에서 문경 한실 교우촌으로 피난 갔다가 문경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문초를 받고 상주 진영으로 압송되어 다시 혹독한 심문을 받은 후 상주 감옥에서 옥사했다. 한편 베로니카라는 노파는 이곳에서 신자들과 함께 체포되어 가는 도중에 마을 앞 노상에서 순교하였다.
    당시 여우목 교우촌의 공소회장이었던 이윤일은 부친 대(代)부터 신앙을 받아들여 신자의 본분인 수계 생활에 충실하였다. 상주 갈골에서 살다가 부친이 세상을 떠난 후 처갓집 식구들(순교 복자 박사의 안드레아의 후손)이 많이 살고 있는 문경 여우목으로 이주하여 농사를 짓고 살면서 외교인들을 권면하여 30여 명을 입교시켜 큰 교우촌을 만들었다. 이윤일의 아들인 이 시몬은 부친보다 앞서 1866년 1월 27일(음력 1865년 12월 11일) 건학 교우촌에 사는 전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와 함께 체포되어 공주에서 순교하였다.
    성지 전경. 야외제대 맞은편에 묘역과 대형 십자가, 성모상이 있고, 그 둘레에 십자가의 길이 조성되어 있다.병인박해가 한창이던 1866년 11월 18일(음력 10월 12일) 여우목에 신자들이 많이 산다는 것을 알고 문경 포졸들이 들이닥쳤다. 이윤일은 마을의 대표자를 묻는 포졸들에게 선뜻 나서 신분을 밝히고 가족 8명을 포함해 모두 30여 명의 신자들과 함께 문경 관아로 끌려갔다. 문경에서 3일 후 상주 진영으로 압송되어 수차례 문초를 받았다. 여기서 이윤일의 아들 이의서 마티아와 큰 며느리 박 아녜스, 모친과 누이는 풀려났지만 그는 ‘사학의 두목’이라 하여 경상 감영이 있는 대구로 이송되었다.
    이윤일은 대구로 이송되기 전 자손들을 불러 놓고, “나는 이제 치명하러 가니 너희는 가서 열심히 수계하다가 나를 따르라.”고 훈계한 후 치명하는 장소까지 따라오지도 말고 보지도 말라고 하였다. 결국 대구로 끌려온 지 3일째 되는 1867년 1월 21일(음력 1866년 12월 16일) 함께 잡혀온 한실 교우촌의 김예기(金禮己), 김인기(金仁己) 회장 형제와 함께 관덕정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순교 후 그의 유해는 이 토마스에 의해 관덕정 형장 근처에 가매장되었다가 2년 후 아들 이의서와 가족들에 의해 대구 비산동(날뫼) 뒷산으로 이장되었다. 그 후 1912년 경기도 용인군 묵리(먹뱅이)에 살고 있던 동생 이시영에 의해 이동면 묵리 산으로 옮겨 모셨다. 1976년 6월 24일 다시 미리내 무명 순교자 묘역으로 이장되었다가 성인의 유해임을 밝혀져 1987년 1월 21일 대구대교구청 내 성모당에 안치되었고, 이날 대구대교구의 제2 주보성인으로 선포되었다. 그러다가 1991년 1월 20일 관덕정 순교기념관 성당 제대에 성인의 유해를 모시고 봉안식을 가졌다.
    여우목 성지를 관리하는 문경 성당은 서공석 신부의 도움으로 교우촌 터 부근에 1255평 규모의 부지를 마련하여 1999년 서치보와 서인순의 묘를 이장하고 다음해 4월 대형 십자가, 11월 제대 · 성모상 · 십자가의 길 14처를 설치하고 꾸준히 조경 작업을 실시하여 2002년 9월 29일 안동교구 권혁주 주교 주례로 성지 축복식을 가졌다. [출처 : 안동교구 홈페이지, 내용 일부 수정 및 추가(최종수정 2016년 1월 6일)]

    서인순(徐隣淳) 시몬 (1808∼1868)
    경상도 지방의 첫 신자인 서광수(徐光修)의 증손자로서 대대로 온 집안과 대소가가 모두 열심한 천주교 신자들이었다. 그는 1808년 5월 17일(음)에 충청도 청풍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그 후 그는 열심한 천주교 신자인 부친 서치보와 모친 동래 정씨(東萊鄭氏)를 모시고 동생들(명순, 철순, 익순, 태순)과 함께 박해를 피해 여러 곳으로 전전하다가 1839년 기해박해 때는 문경 여우목 교우촌에서 살았다.
    1840년 9월에 부친이 세상을 떠나자 어머니를 모시고 4명의 동생들과 함께 풍기로 이사를 가서 그곳에서도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경신박해 때인 1860년, 모친이 세상을 떠나자 다시 온 가족들을 데리고 경산 모개골 교우촌으로 이사를 갔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관헌에게 잡혀 대구감영의 옥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1868년 4월 29일(음) 옥사하였다. 그때 그의 나이는 60세였다.
    그 후 그의 유해는 처음에는 경산 모개골에 안장되었고 후에 부친의 묘소가 있는 이곳 여우목으로 이장해 왔으며, 1999년 9월 18일 이곳에 새로이 산소를 마련하여 부친 서치보 요셉과 함께 이장하여 모셨다.

    순교자 서인순(시몬)과 부친 서치보(요셉) 묘소
    서인순(徐隣淳) 시몬 (1808∼1868)은 경상도 지방의 첫 신자인 서광수(徐光修)의 증손자로서 그는 1808년 5월 17일(음)에 충청도 청풍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부친 서치보(요셉)과 모친 동래 정씨(東萊鄭氏)를 모시고 동생들(명순, 철순, 익순, 태순)과 함께 박해를 피해 여러 곳으로 전전하다가 1839년 기해박해 때 여우목 교우촌으로와서 살았다. 그러나 1840년 9월에 부친 서치보(요셉)이 돌아가시자 어머니와 4명의 동생들과 함께 풍기에서 지냈다가 1860년 모친이 세상을 떠나자 다시 온 가족들을 데리고 경산 모개골 교우촌으로 이사를 갔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관헌에게 잡혀 대구감영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1868년 4월 29일(음) 옥사하였다. 그 후 그의 유해는 경산 모개골에 안장되었다가 현재 여우목 마을 뒷산에 모셔져있던 부친 서치보(요셉)과 함께 1999년 9월 18일 이곳에 터를 마련하고 이장하였다.

    성 이윤일 요한 (1823∼1867)  

    ‘제헌’으로도 불렸던 이윤일은 충청도 홍주(洪州) 출신의 태중 교우로, 경상도 문경의 여우목골에 살며 회장으로 활동하였다. 1866년 병인박해의 여파가 경상도에 이르자 그 해 11월 가족, 마을 교우 30여 명과 함께 체포되었다.
    문경 관아에서 사흘 동안 혹형과 고문을 받은 뒤 배교하지 않은 교우들과 함께 상주로 이송되었고, 상주에서 한 달에 세 번씩 석 달 동안 혹형과 고문을 받고 나서 대구 감영으로 이송되었다. 그는 대구 감영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여유롭고 기쁜 마음으로 기도하며 지내다가, 1867년 1월 21일 대구 남문 밖 관덕정에서 참수형을 받아 45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순교사
    1866년 병인박해 직전인 1865년 가을에 이윤일 요한의 아들인 이 시몬과 예천 건학의 전 하비에르가 예천 포졸에게 체포되어 공주 에서 순교하였으며, 이듬해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박 사도 요한 가정 등 일부 신자들은 충북 보은과 산촌으로 피난을 갔다가 1868년 충주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충주를 거쳐 서울에서 순교하였다.
    1866년 10월에 문경 포졸들이 이곳에 들이닥쳐 당시 회장인 이윤일을 비롯 30여 명의 신자들을 체포해 그와 부인, 큰 며느리(공주에서 순교한 이 시몬의 처)와 아들 하나, 그 외 많은 신자들이 압송되어 문경 관아로 끌려갔다. 그는 교회의 두목이라 해서 한실 공소 김 회장과 함께 경상 감영이 있는 대구로 이송되어 1867년 1월 21일(양)에 대구 관덕정 형장에서 참수 치명하였다. 그때 나이 45세였다.
    한편 이곳에 살다가 상주 경산 등지로 피난 갔던 서치보의 아들들인 서인순 시몬과 서익순(徐翼淳, ?~1868, 요한), 서태순(徐泰淳, ?~1868, 요한 또는 베드로)은 병인박해 때 순교하였다. 서인순 시몬은 대구의 경상 감영에서 문초를 받고 감옥에서 옥사했고, 서익순 요한은 대구에서 서울로 이송되어 가서 서울 절두산에서 백지사 치명을 당하였다. 서태순 베드로는 상주 감옥에서 옥사했다. 한편 베로니카라는 노파는 이곳에서 신자들과 함께 체포되어 가는 도중에 마을 앞 노상에서 순교하였다.

    홍베로니카 치명터
    병인박해 때 이윤일 성인 등 30여명의 신자들이 체포되어 갈 때의 일이다. 중평리 여우목 밑의 마을(현재 개신교 교회가 들어서 있는 곳)에 살던 베로니카란 80대 할머니도 함께 포졸들한테 붙잡혀 가게 됐다. 고령의 베로니카 할머니는 다리를 절면서 잘 걷지를 못했다.
    자연히 끌려가는 대열에서 자꾸 처지자 포졸들이 고함을 지르며 나무랐다. “왜 할머니는 천주교를 믿지 않겠다고 한 마디만 하면 놓아줄텐데 절뚝거리며 따라 가느냐?”고. 그렇게 구박을 받으면서도 베로니카 할머니는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포졸들에게 되물었다. “살아계신 천주님을 어떻게 계시지 않는다고 할 수 있느냐?”며 흔들리지 않고 믿음을 증거했다.
    노쇠한 베로니카 할머니와 포승줄을 끌어당기는 포졸들과 실랑이가 세 번째 오가다 우두머리 되는 자가 칼을 빼들었다. “그래, 죽는게 소원이라면 죽여주지” 베로니카 할머니는 끌려가다가 이렇게 어처구니없이 죽임을 당했다. 베로니카 할머니가 돌아가신 그 자리에 ‘여기는 중평리, 여우목 성지 1.5km’라는 표지석(사진)이 세워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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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윤일 요한 성인과 서치보 요셉 가정에 의하여 이루어진 교우촌

    여우목[狐項里]에 교우들이 살기 시작한 것은 1839년 기해박해를 전후로 성 이윤일(요한)과 서치보(요셉) 가정이 상주 갈골과 충북 청풍에서 이곳으로 피난 옴으로써 교우촌이 형성되었다. 그리고 순교자 박경화(바오로 ✝1827)의 아들 박사의(안드레아) 가정이 이곳으로 옮겨와 살았으며 이후 30여 명을 입교시킴으로써 큰 교우촌을 만들었다. 병인박해(1866년)가 시작되자 이곳 교우들도 문경포졸들에게 체포되어 문경관아로 끌려갔으며 이윤일 성인은 교회의 두목이라하여 한실공소 회장님과 함께 대구로 이송되어 1867년1월21일 대구관덕정 형장에서 참수 치명 순교하였다.
    그리고 병인박해를 피해 이곳을 떠났던 일부 신자들은(박 사도 요한 가정) 충북 보은과 산촌으로 피난갔다가 충주를 거쳐 서울에서 순교하였으며 서치보의 아들들인 서인순(시몬-대구 감영 옥사)과 서익순(요한-절두산 백지사형), 서태순(베드로-상주 감옥 옥사)은 상주와 경산 등지로 피난 갔다가 잡혀서 순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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