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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제주시의 중심부인 삼도2동에 있으며 보물 제322호로 등록되어 있다. 1901년 신축교안 때에 이곳 광장에서 수많은 교우 및 양민들이 목숨을 잃었다. 조선 땅에 복음의 서광이 비치기 시작한 18C이후 100여년에 걸쳐 진행된 혹독한 박해는 수많은 교우들의 목숨을 앗아갔다. 그들의 피와 땀은 이 땅 구석구석에 뿌려져 오늘날의 한국교회를 꽃피우는 밑거름이 된 것이다.
1886년 한·불조약을 계기로 박해 정책은 막을 내린다. 하지만 유학적 전통이나 인습에 젖어 있었던 당시 조선 땅에서는 공식적인 박해가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하루 아침에 이를 현실로 받아들이기는 어려웠다.
지방에서는 소규모 사건들이 지방 관리나 유림들에 의해 빈발하였고 어떤 사건은 그 규모가 공식적인 박해를 능가하는 예를 보이기도 했다. 이는 지방 관리와 교인들 사이의 분쟁이나, 교인들과 민간인 사이의 분쟁이라는 형태로 나타난다. 예컨대 충청도 아산, 전라도의 지도(智島), 황해도의 장연(장연), 강원도의 이천(이천) 등지에서는 계속적인 교난 사건이 발생했다.
부패한 관리와 완고한 유생들, 혹은 무당 등의 인습에 젖은 지방민과 천주교인들과의 충돌이 결국에는 박해라는 양상으로 바뀌었고 지역에 따라서는 대규모의 민란으로 나타났다. 그 중의 하나가 1901년 신축년에 발생한 제주도의 신축교안이다.
지방 관리와 기득권을 주장하는 토호 세력, 그리고 일본인 밀어업자들의 결탁으로 유도된 이 사건은 중앙 정부의 조세정책, 즉 조정에서 파견된 봉세관(封稅官)이 온갖 잡세를 거두어가는 것에 불만을 품은 백성들을 선동하여 수탈정책의 시정을 요구하는 민란으로 출발하였다. 그러나 사건이 진행 과정에서 도정 책임자와 봉세관은 도피해 버리고 난민들은 공격 대상을 천주교로 돌렸다. 이에는 일부 신자들이 봉세관과 결탁하여 비리를 행한 사례도 원인의 하나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프랑스 신부를 타도하려는 일본인의 음모, 축첩과 인습에 젖은 토호 세력, 그리고 생존을 위협받게 된 무당 등의 작용이 결정적인 원인이었음이 틀림없다.
이리하여 제주시에 진입한 민군들은 신자를 포함한 양민 등 700여명을 살해하기에 이르렀다. 이 유서 깊은 관덕정 정자 앞 광장이 사형장으로 변했던 것이다. 사건이 수습되는 과정에서 당시 프랑스 함대장이 촬영한 사진에는 교우들을 죽일 때 사용했던 몽둥이들이 시신 옆에 놓여 있어 당시의 참상을 대변하고 있다. 이 때 희생된 교우들의 시신은 그 후 별도봉 기슭에 가매장되었다가 현재는 황사평에 안장 되었다.
1901년 신축교안 때에, 관덕정 등지에서 교우를 포함한 양민 700여명이 피살되었다. 관덕정 광장에 널려 있던 시신들은 별도봉과 화북천사이에 옮겨져 버려지듯 가매장 된 상태로 있었다. 그 중 연고가 있는 분묘는 이장해 갔고 무연고 시신들만 이곳에 있었다. 1903년, 조정으로부터 이 시신들을 매장할 자리로 황사평을 이양받아 이장하게 되었다.
제주 시내 한가운데 있는 관덕정은 많은 사람들의 만남의 장소가 되고 또는 길을 가르쳐 주는 이정표 역할을 하는 등 제주 사람들에게는 가장 익숙하고 친근한 국가지정 보물 제 322호다. 조선시대 세종 때인 1448년 제주 목사 신숙청은 사졸들을 훈련시키고 상무 정신을 함양 할 목적으로 이 건물을 세웠다. 제주에 현존하는 건물 중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관덕정이란 이름은 '사이관덕'이란 문구에서 나온 것으로 활을 쏘는 것은 평화시에는 심신을 연마하고 유사시에는 나라를 지키는 까닭에, 이를 보는 것이 덕행이라는 의미로 지어진 것이다. 대들보에는 십장생도, 적벽대첩도, 대수렵도 등의 격조높은 벽화가 그려져 있고, 편액은 안평대군의 친필로 전해오고 있다.
관덕정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
관덕정을 지으려고 할 때 목사는 전국에서 유명한 목수들을 불러들였다. 그러나, 정자(관덕정)는 다 지으면 쓰러지고, 다시 지으면 쓰러지곤 하였다. 일류 목수들이지만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어느 날 어떤 중이 이곳을 지나다가 또 쓰러지겠다고 중얼거리자 목수들이 화가 나서 중을 내쫓았다. 정자가 다시 완공이 되자마자 다시 쓰러지고 말았다. 그제야 전번 중의 이야기가 생각나 수소문 끝에 중을 찾아가 도움을 간청하였다. 중은 상량식을 닭이나 돼지가 아닌 사람으로 인상량식을 해야 한다고 하자 목수들은 난색을 표하였다. 이에 중은 상량식 때 상량이라고 큰소리를 외치면 지나가던 솥장수가 죽을 것이라고 말하니 이치에 닿지 않는 말이지만 중의 말대로 다시 공사를 하고 상량식 준비를 진행하였다. 이 때 솥장수가 큰 솥을 머리에 이고 정자 쪽으로 오고 있어 관덕정 앞 마당까지 이르자 모여있던 군중들은 상량하고 큰소리로 외쳤다. 이에 솥장수는 깜짝 놀라 머리를 들어 쳐다보려고 했으나 솥이 너무 무거워 넘어지면서 솥의 언저리에 목이 깔려 죽고 말았다. 중의 말대로 목수들은 솥장수를 희생으로 상량식을 치르게 되어 관덕정은 다시 쓰러지지 않고 완공이 되었다고 한다.
제주도 역사의 앞마당, 관덕정 광장
관덕정 광장은 제주 역사의 산 증인이다. 조선시대인 1448년 세워진 이래 제주 역사의 굴곡을 말없이 지켜보며 침묵으로 증언해주는 곳이 관덕정이며, 이 광장이다. 관덕정은 제주목관아의 부속 건물로 세종 30년(1448년) 신숙청(辛淑晴) 목사에 의해 창건되었다. 관덕(觀德)이란 ‘사자소이관성덕야(射者所以觀盛德也)’ 즉, ‘활을 쏘는 것은 높고 훌륭한 덕을 보는 것이다’라는 《예기》의 글귀에서 유래했다. 이름 그대로 이곳에선 군사들의 활쏘기 장소로 또는 과거 시험, 각종 진상을 위한 봉진행사 등이 이루어졌으며, 매년 입춘에는 춘경이 치러져 문화 축제의 장이 되기도 했다.
지금은 도시발전으로 제주시가 크게 확장돼 각종 행정, 사법 기관들이 다른 곳으로 옮겨졌지만, 관덕정과 그 주변은 조선시대 때부터 일제강점기를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주요 행정 관청이 모여 있어 제주의 정치, 행정, 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해왔다. 제주에서 큰 행사와 각종 기념식, 집회와 역사적인 사건 모두 이곳, 관덕정 광장에서 일어났다.
제주에서 최초로 5일장이 열린 곳도 이곳이고, 조선 말의 빈번했던 민란의 최종 종착지도 이곳이어서 이재수의 난 당시에는 300여인의 교인 척살이 이루어진 피의 현장이기도 하다. 특히 4.3발발의 도화선이라는 1947년 3.1집회 역시 북국민학교에서 시작되어 이곳에서 사건화된다. 4.3의 와중에서는 무장대사령관 이덕구의 시신이 전시되는 등 격동의 공간이었다. 4·3 이후 제주지역의 시민과 학생들이 끊임없이 전개한 민주화운동과 4·3진상규명 운동도 관덕정 광장에서 시작됐고,단절되었던 춘경의 보구언도 80년 만에 이곳에서 복원되어 탐라입춘굿으로 매년 치러지고 있다. 무슨 큰일이 일어나면 제주민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자연스럽게 관덕정으로 모여들었다.
제주 역사의 중심지, 제주의 심장 같은 공간. 하지만 번영의 역사보다는 오히려 세찬 바닷바람에 상처 입은 섬 사람들의 삶의 역사를 더 많이 보아온 곳.
바로 이 곳, 관덕정 광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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