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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명이 밝아오기 전 공소미사에 참례하기 위해 길을 나선다.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찬란한 여명의 하늘빛에 창조주의 위대함을 새삼 느끼며 달리다 보니 어느덧 마을 어귀의 60년 된 정자나무가 방문객을 맞이한다. 故박종술(빈첸시오)형제가 공소 설립을 기념하기 위하여 심은 나무이다.
매월 네 번째 수요일 아침 6시 신기공소(신태인 성당 관할, 주임=장상호 신부)에서는 삼종기도를 시작으로 미사가 봉헌된다. 일부 쉬는 교우를 제외하고는 마을 주민 모두가 모이는 날이기도 하다.
전라북도 정읍시 태인면 거산리에 위치한 신기(새터)마을은 1934년 ‘동구내’에서 살던 천주교인 세 가구가 이곳으로 이주하면서 정착한 것이 시초이다. 이때부터 새로 형성된 마을이라는 뜻에서 ‘신기(새터)’라는 이름으로 마을이 형성되었다. 그 뒤 동구내의 김종현 형제가 이주하면서 친척들과 교우들이 연락되어 1939년 다섯 가구가 이주해 들어왔다. 한국전쟁 당시 정읍, 순창 등지의 산골마을이 북한군에게 점령당하자 이 마을로 많은 이들이 피난을 왔다. 당시 신자 가구 수만 60가구가 되어 인구 300여 명의 큰 마을을 형성하게 된다. 교우들이 많다 보니 공소회장 집에서 드리는 공소예절이 여간 복잡하고 불편한 게 아니었다. “우리 힘으로 성당을 짓자.”라는 의견을 모은 것이 신기공소 건립의 시작이다.
공소 부지는 이 마을에 사는 故박상규 형제가 대지 350평을 희사했다. 60가구가 십시일반 건축비를 모으고 마을 주민들이 10분 거리인 동막골의 산에 올라 나무를 베어 손수레로 끌고 왔다.
그 당시 마을에는 목수가 다섯분 계셨는데 네 분(이철호, 이명렬, 서길수, 윤준열)이 돌아가시고 현재 혼자 남은 한동선(이냐시오)형제는 “생나무 하나 끌고 오려면 얼마나 무겁고 힘이 들겠어요. 하지만 성당을 짓는다는 일념 하나로 힘이 조금이라도 있는 교우들은 모두 한마음으로 움직였어요. 목수들은 잠만 집에서 자고 공사에만 매달렸어요.”라며 오래전 일이라 기억이 나지 않는다면서도 그때의 추억이 떠오르는지 엷은 미소가 입가에 맴돈다.
주민들이 나무를 베어오면 대목수인 故이철호 형제의 지시 하에 2년여의 기간을 걸쳐 1958년 4월 20일 완공하였다. 당시 지붕은 초가였으나 1961년 기와지붕으로 개량하였다.
마을 주민들 즉 공소 교우들이 스스로 온 힘을 합쳐 이루어낸 만큼 그 신실함과 경건함은 크고 웅장한 성당에 뒤처지지 않는다는 자부심과 애정은 남다르다. 설립 당시 봄, 가을 판공성사에는 공소가 비좁아 밖에 서서 미사를 참례할 정도로 교우들이 많았다고 한다. 현재 마을에는 23가구가 거주하고 있으며 2~3가구를 제외하고는 모두 가톨릭 신자로 구성되어 있다. 두 세대가 같이 사는 집은 거의 없고 독거노인이거나 부부간에 살고 있다. 공소 옆 경로당은 특별한 일이 없는 날에 함께 시간을 보내며 반모임 장소로도 활용한다. 신자 수 감소로 두 팀이었던 레지오마리애 모임은 한 팀만 활동하고 있다.
수류에서 6살에 이사와 이 곳 공소에서 38년 전에 혼배를 올린 이재식(베드로, 공소회장)형제는 “젊은 분들이 귀농을 하여 마을이 활성화가 됐으면 좋겠지만, 현재로써는 마을의 젊은 교우 분들이 냉담을 풀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밝혔다.
농촌 고령화로 공소회장직을 서로 맡지 않으려고 하여 언제부터인가 마을 이장과 공소회장을 겸하고 있다고 한다. 또한 전 공소회장들로부터 아무런 공소 기록이나 자료를 받지 못하였기 때문에 신기공소에 관한 기록이나 자료는 전무하다.
공소는 우리나라 천주교회의 첫 모습으로 한국 천주교회 200년 역사에서 반 이상이 공소 시대였다. 한국 천주교회의 모태이자 선조들의 삶이나 신앙과 관련된 많은 이야기가 간직된 곳으로 보존되고 기록돼야 할 가치가 있다. 신앙선조들이 남긴 값진 유산에 대한 기록이나 자료를 잘 간직하여 후대에 물려주는 것이 현재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이다.
김도숙 기자(교구 기자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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