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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담으로 둘러싸인 하동공소(장수성당 관할, 주임=방의성 신부)의 입구에 세워진 종탑의 종소리가 산기슭에 울려 퍼지면 어느새 공소에는 어른과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낡은 풍금의 반주에 맞춰 성가를 부르는 소리로 가득했던 1954년 그 시간으로 초대된다.
따뜻한 가을 햇살을 받으며 이경준 베네딕도(공소회장)형제의 이야기를 듣는다.
병인박해를 피해 전라도 신자뿐 아니라 서울, 경기도, 경상도 진주, 문산 등 전국 각지에서 피난와 산골짜기에 흩어져 숨어 살다가 박해가 끝나자 자연스레 교우촌이 형성되었다. 첩첩산중이라 화전을 일구고 닥나무를 벗겨 한지를 만들어 장날에 팔아 생계를 유지했다고 한다. 당시는 공소 건물이 없던 시절이라 신자 집에서 남자는 안방, 여자는 건넌방에서 공소 예절을 했었다. 6.25 전쟁 후 옷, 옥수수가루, 우유가루 등 구호물자를 배급받아 힘든 시절을 견디었다. 1954년 김수일 분도 초대회장이 공소터를 희사하여 구호물자를 팔아 기금을 마련하고 전신자가 부역을 하여 산에서 돌을 날라다가 공소를 신축하였는데 박득주 데레사 자매는 시집와서 얼마 후 집에서 일꾼들 밥을 다 해주었다고 한다.
1974년 현재 공소 터로 이전, 신자들이 부뚜막에 항아리를 놓고 식사 때마다 식구 수대로 한 숟가락씩 모은 절미 쌀을 주일에 가져와 공소 기금을 마련하여 건물을 신축하고 공소 물품도 마련하였고, 목재는 주로 삼나무 골에서 가져와 사용하였다.
판공성사를 주시기 위해 신부님께서 오시면 들응이 동네(상·하평 마을의 옛말)까지 가서 신부님을 맞이하고 쌀을 걷어 달떡과 무시떡을 대접하였다. 한 번은 박성팔 안드레아 신부(현 송천동성당 주임)가 공소에서 주무시는데 워낙 추운 산간지역이라 장작을 너무 많이 때 방이 뜨거워 주무시지 못했다고(지옥이 따로 없었다고)하셨단다. 지금도 그때의 아궁이가 남아 있어 불을 때던 모습이 생각나 사제에 대한 공소 신자들의 사랑에 웃음이 지어졌다.
교구 사제들의 공소 사랑도 넘친다.
공소 뜰의 철재 아치에 뻗은 넝쿨장미 사이에 성모자상과 성 요셉상은 1983년에 장수성당에 부임하신 박성팔 안드레아 신부님이 기증하셨고, 경당 문을 열면 제대 옆 공소 신자들을 품에 다 안을 듯이 두 팔을 벌리고 있는 예수성심상은 전종복 사도요한 신부님(현 월명동성당 주임), 고풍스러운 14처 상본이 경당을 거룩하게 둘러싸고 있는데 이는 故이대권 바오로 신부님이 기증한 것이라고 한다.
박병준 필립보 신부(현 요촌성당 주임), 정천봉 베네딕도 신부(현 상관성당 주임), 박기준 라우렌시오 신부(현 솔내성당 주임)도 신학생 때 방학을 하면 하동공소를 찾아와 아이들에게 교리도 가르치고 놀이도 하며 재미있게 생활하고 성탄 때는 트리도 만들고 성극도 하며 축제 분위기를 즐기던 때도 있었다.
하동공소는 활력이 넘쳤던 곳이라 장수성당에서 1976년 낙성 3주년 배구대회와 1984년 성모승천대축일에 열린 배구대회에서 우승하여 받은 대형 거울이 지금도 경당 한쪽에 결려있다.
1985년 5월에는 혼성 레지오 평화의 모후 쁘리시디움을 창단해 매주 수요일 저녁 회합을 하고 성경말씀도 읽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지만 신자들이 마을을 하나 둘 떠나면서 2009년 7월 이후 레지오 모임은 해체되었다.
지금도 매달 둘째 주일 하절기에는 오전 8시, 동절기에는 오후 3시에 미사를 드리고 있는데 다들 연로하셔서 언제까지 지속될지 모르겠다는 이경준 형제는 자신이 마지막 공소 회장이 될지도 모르겠다고 말씀하시며 쓸쓸한 웃음으로 공소를 나서는 기자를 배웅해 주셨다. 이분들에게 주님의 축복과 영육간에 건강이 함께하길 기도해 본다.
취재 | 송병근 기자(교구 기자단), 사진 | 원금식(교구 가톨릭사진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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